'큰 머리 제목'에 해당되는 글 1161건

  1. 2007.11.08 예찬2
  2. 2007.11.08 있다
  3. 2007.11.08 둥근 네 바퀴
  4. 2007.11.08 결혼
  5. 2007.11.08 안식을 주소서
  6. 2007.11.08 있는 그대로
  7. 2007.11.08 새로운 시작
  8. 2007.11.08 큰 숨을 들이쉬며
  9. 2007.11.08 신비한 체험들
  10. 2007.11.08 2주년
  11. 2007.11.08 인생 별거 있어?!
  12. 2007.11.08 종의 기도1
  13. 2007.11.08 기도 이야기
  14. 2007.11.08 심판 받은 가나안 문화와 우리
  15. 2007.11.08 노아 이야기
  16. 2007.11.08 가인과 아벨
  17. 2007.11.08 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18. 2007.11.08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
  19. 2007.11.08 사람을 만드시다
  20. 2007.11.08 창조 이야기-(2)
  21. 2007.11.08 창조이야기-(1)

예찬2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7. 11. 8. 10:37 Posted by 바람몰이

참 밉다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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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7. 11. 8. 10:36 Posted by 바람몰이

마음 가는 데 눈도 있고


눈 가는 데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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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네 바퀴

카테고리 없음 2007. 11. 8. 10:36 Posted by 바람몰이

물 위 둥근 네 바퀴

내 손에 잡힌 핸들이 아닌

거대한 물결의 힘에 의지하는 녀석

순간 내 자신의 초라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살아 이 순간을 느낄 수 있음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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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LIFE]이 남자의 인생 2007. 11. 8. 10:35 Posted by 바람몰이

불같이 시작해서, 불같이 이뤄가는 우리의 사랑.


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며 결정을 했다.


난 그동안의 내 기도가 응답 받은 것이라 받아 들인다.


이제 하늘의 은혜를 통해 서로의 삶을 풍성히 일궈나가길 기도하고 있다.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하고 있다.


우리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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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을 주소서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35 Posted by 바람몰이

사람의 살고 죽음은 하늘이 정하는 것


우리는 살고, 죽음을 기뻐하고, 슬퍼하여야 한다


아주 충분히..


그러나 이와 함께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으로 살았음을,


한 부분으로 살아왔음을 느끼며 감사해볼 줄 아는 지혜도 있어야 한다.


나는 오늘 내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며,


충분히 자기의 생을 사시고,


큰 역사의 일부분으로 사셨다고 고인의 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 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어떻게 해야할지 더 잘 아시는 주님을 믿기에,


할아버지의 그 생 자체가, 비록 너무 고되고 한이 쌓였을 것이었지만,


나는 그 죽음 속에서 은혜를 느껴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할아버지를 통해 더 큰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셨다고 믿는다.


주여, 그 영혼이 안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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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7. 11. 8. 10:31 Posted by 바람몰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저 태양은 묵묵히 하나님의 섭리위에 자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내리쬐는 뙤약볕은 늘 그대로가 아닌가


어쩔 때는 이걸 보고 싶어 안달이고,


또 어쩔 때는 이게 싫다 안달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다보면,


뜨거운 것도 좋고, 서늘한 것도 좋고, 추운 것도 좋아진다


나 역시 대 자연과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임이 느껴진다


참 감사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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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7. 11. 8. 10:30 Posted by 바람몰이

새로운 시작은 겁없는 도전


큰 용기가 필요한 길


많은 가시덤불이 있는 길


하지만


희망의 그림을 그리는 길


내 삶에 책임을 져 가는 길


삶을 더 복되게 하는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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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숨을 들이쉬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9 Posted by 바람몰이

실패의 쓴잔은 쓰다

그러니까 쓴잔이다


쓰디쓴 그 맛에

난 가벼운 조소를 날리며

또 한번 나를 보게 된다


나의 한계를 알게 되기에 좀 더 나는 겸손해져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인내를 되새기며

나를 정련해나간다


쓴잔이 쓰지만

가벼운 조소를 날렸지만

내 가슴은 무겁게 짓눌려 있지만

나는 희망을 그리며 큰 숨을 들이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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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체험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8 Posted by 바람몰이

하나. 꿈에 로또 번호를 보았다. 몇 개를 보긴 했는 데 선명히 기억나는 게 단 3개였다.

이튿날 오랜만에 복권을 샀다. 별 생각 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추첨하는 날 밤에 보니 꿈에 본 3개의 번호가 모두 맞았더라.


둘. 반쯤은 꿈인듯..반쯤은 환상인듯..사후세계를 여행하고 왔다.(지금 돌이켜보면 시기를 알 수 없는 미래사회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어떤 이는 걸어서 밝은 빛이 나는 곳을 지났다 하고, 또 다른 이는 배를 타고 건넜다고도 했다. 나 역시 밝은 빛이 나는 곳을 지나기는 했다. 그런데 조금은 다르게 기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도착한 회색빛이 도는 신비한 곳. 갖가지 사연을 안고 죽어온 사람들이 보였다. 몇 몇과는 기억나지 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건물 복도를 지나 사무실 같은 곳을 들어가는 나. 지금 보면 박순경 박사님 같기도 한 그러나 확실치 않은 메마른 노 여교수님(목사님)을 만났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저것 책을 보기도 하였다. 다리 한쪽이 잘려 있는 젊은 친구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이 세상은 이 세상 나름의 체계를 갖고 알아서 잘 돌아가니 너는 아무염려나 기도를 하지 말고 그저 열심히 네 인생을 살아라'

다른 대화는 다 선명치 않은데 이것만은 또렷하다.


셋. 할아버지 백일기도를 하고 있는 도중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왔다. 할아버지는 잘 계시니 더 이상 기도하지 말아라..

그저 잘 맞이하고, 천천히 내게 주어진 메세지를 느끼려 한다. 그 의미를 잘 생각해보려 한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만큼, 필요한 때이니 주신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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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년

[LIFE]이 남자의 인생 2007. 11. 8. 10:26 Posted by 바람몰이

어느 덧 우리의 연을 맺은지 2년이란 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데..


마치 어제 일만 같은데..


참 묘하고도 묘한 것이 사람의 인연이리라..


그저 감사하다.


이렇게 좋은 연을 맺어주신 하나님께도..


부족한 나를 믿고, 늘 사랑으로 함께 해주는 선향에게도..


곧 태어날 우리의 아기에게도..


이래서 모두 기념일을 챙기나 보다.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행복한 사람! 임! 정! 혁!


우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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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별거 있어?!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7. 11. 8. 10:25 Posted by 바람몰이

때때로 인생 별거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렇기때문에 인생이 참 별거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 냄새 풍기며 사는 것..

생명을 생명으로 아끼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하늘을 섬기며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것..


말은 거창하지만 참 별거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잘 못하기에 거창한 말이 되고

인생은 별거 있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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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도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4 Posted by 바람몰이

매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온 집안을 뒤 엎는 아이를 보며

고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과 아이 그리고 저를 한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보며

평소 용돈 한번 못드려도 함께 살아 행복해 하는 할머님을 뵈며

제가 사는 인생과 삶의 자리가 고됨을 넘는 은혜의 바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무엇을 해달라, 무엇을 들어달라 조르기보다

하루의 삶과 순간 순간에 감사기도를 더 드릴 수 있게 하시며

그저 당신의 뜻을 헤아리고 들을 수 있는 믿음과 넉넉한 여유를 갖게 하신 당신이시이기에

저는 오늘도 가슴을 적시는 눈물에 영혼을 촉촉히 가꾸어 갑니다.


당신의 종으로 바르게 서 가기를

당신이 허락하신 생명을 당신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함께 인생을 살게 하신 아내와 가족들을 사랑하고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생명세상을 가꾸갈 수 있기를


이 한 청춘과 호흡을 바쳐 원하고 또 원합니다.


당신께서 이 가슴에서 솟고 있는 뜨거운 피를 식지 않게 도와주시고

주위를 둘러보고 뒤를 돌아보며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발이 지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이치와 당신의 뜻을 보려하는 번뜩이는 눈이 흐려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어디서나 제소리를 내게 하시고

그러나 그 보다 더 많이 듣게 하시며

날카롭게 잘라낼 때보다 더 많은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은혜를 나뢰어 주시어


당신을 경외할 줄 알고

당신께서 뜻을 하늘에서 이룸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뤄 갈 수 있는 자 되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되 남는 것은 넉넉히 나눌 줄 알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내 자신을 성찰하며

시험에 들었을 때도 낙망치 않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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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2 Posted by 바람몰이

 

기왕에 말이 나온김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도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더욱 성경이 계시해주는 하나님은 물론 내 자신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의 가장 모범이신 예수님을 보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거나 어떤 결정을 하실 때도 항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시되 정확하고 똑바르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의 끝에서 내 뜻을 이루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뤄 달라 기도하며 주의 뜻을 들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일단 말이 많습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 지 침이 튀어 바닥을 적실 정도입니다. 또 쉬지도 않고 몇 시간씩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어 목소리가 쉰 상태로 정서가 순화됨을 느끼고 만족함을 느끼며 기도를 마치고 일어납니다. 도대체 언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만 해대는 게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고 위안을 얻는 것이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내가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언을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방언은 믿음이 좋다 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님들을 합니다. 그래서 은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어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통변”이라고 해서 방언을 해석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이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성경 사도행전까지 말하는 방언은 한마디로 “외국어”입니다. 각 지방과 나라의 언어란 말입니다. 언어가 통하는 게 방언이고 이것은 구약시대 바벨탑 사건에서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모이는 사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속에 인간의 사고가 있고, 인간의 사고는 언어활동과 함께 이뤄진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신 것은 만남과 하나 됨의 인간관계 속에 있는 영혼의 교류를 흩으신 게 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하게 하신 것은 다시금 그 교류의 통로를 열어주신 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고린도 전서 14장은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혼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방언만 해대다 교회가 분열되기 보다는 모두 똑바로 알아듣는 예언이 더 낫다는 후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방언 만마디 보다는 알아듣는 기도 다섯마디가 낫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도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방언을 아무리 해대도 교회가 하나 되거나 우리 사회가 변하는 역사가 없습니다. 심지어 방언을 잘 하는 분일 수록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방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방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4장을 정독해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방언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하더군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 다구요..

  기도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되게 해달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잘되게 해달라 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 합니다. 물질생활에 부족함 없이 축복해 달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문제인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온 몸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치셨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구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됨과 동시에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이가 잘 되게 해달라 해야 하며 셋째로 머리가 되어도 교만치 않도록 도와달라 하거나 남들이 싫어하는 꼬리가 되어 더욱 섬길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합니다. 끝으로 물질생활에 부족함이 없게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을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방법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수많은 위인들은 모두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이 말씀에 의해 깨지고, 쪼개지며 변화했고 눈물로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중요한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일종의 경고 표시인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고운 님이여!!

  지금 이 순간 잠시 책을 덮으시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깨닫고, 주님의 뜻을 발견했다면 이 책을 안보고 버리셔도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주의 뜻을 전할 뿐인 종에 불과하구요.


  만약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찾아와 감동을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 순간 주님 앞에 불려 간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작은 열매를 맺으셨고, 저는 그 사명을 감당한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희망을 갖고 아름다운 씨앗을 또한 뿌리고 키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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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서 저는 가인과 아벨, 노아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그리고 싫어하시고 죄로 여기시어 심판 하셨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이 갖고 있던 바알문화. 즉, 풍요에 모든 걸 “올인”한 물질문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빈부격차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 되었던 것. 종교 간의 혼합을 통해 “성전창녀”와의 성행위로 문화가 난잡해져 갔던 것.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고귀한 가치들.

즉,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 등이 훼손되고 주님의 백성으로써 갖는 순수성이 사라졌던 것 이었습니다
1). 바로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심판하며 지적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목회자가 벤츠를 모는 시대입니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돈이 최고야’의 가치가 팽배합니다. 시대의 양심과 지성의 전당인 대학조차 돈이 되는 것만 하려 하는 시대입니다.

국가 역시 국민 개개인을 하나의 존엄한 사람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인적 자원으로만 여깁니다. 도박이 판을 치고 밤거리는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지역 공동체는 산산히 부서져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조차 모르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저는 이런 현상은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사 속에서 하나님을 삭제해버리거나 자기 중심적 물질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네 크리스챤의 책임이 매우 큼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와 같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나 맘몬을 숭배하는 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이를 방치한 우리네 크리스챤은 더욱 중한 책임을 갖는 것이니 말입니다.


  세계 경제적인 측면은 더 급박합니다. 먼저 중심부 국가(선진국)의 풍요와 부는 주변부 국가(제3세계)의 착취를 통해 이뤄졌음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한 때 경제학계에서는 궁핍화 이론이라는 게 유행했던 시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쉬운 예로 축구공이나 다이아몬드를 봅시다. 보통 월드컵에서 사용하는 축구공은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어린이들이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합니다.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90%이상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강제노역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거래를 통해 나온다 합니다.


  둘째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나얀 찬다라는 학자는 세계화는 인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매우 오랜 역사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요 세계화 자체는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가며 서로 더 이해하고 협력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심한 빈부격차와 국경을 초월한 서민들의 피해를 양산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참고자료로 올려 놓은 제 글을 읽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끝으로 금융 세계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금융 세계화가 문제인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반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융 세계화란 환율, 이자율, 유가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화를 시작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때,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외환 시장, 유로 통화시장 같은 단기 금융시장을 활용하여 현금 플로우를 관리하고 환투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금융 세계화란 것은 투기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또한 각 국의 중앙은행은 재무부로부터 독립하여 고도금융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구요.


    엘빈 토플러 같은 학자는 장미 빛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나 지오반니 아리기 같은 학자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체계란 헤게모니와 축척체계로 구성된다고 하는 데, 헤게모니란 군사-정치적 힘을 뜻하고, 축척체계란 자본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UN이나 IMF가 되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은 미국의 시대이지요. 실제 UN이나 IMF 역시 모두 미국에서 구상한 것들입니다. 대공황이 끝나고 미국의 작은 브레튼 우즈라는 곳에서 만나 처음에 구상한 것이 바로 GATT-WTO 체제 였고, 군사적 측면이 UN체제 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지금은 WTO-UN-IMF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신자유주의나 FTA 같은 것도 모두 미국의 세계지배 원리와 관련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지금은 경제나 군사나 정치 어느 것 하나 미국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 미국 경제는 G7 국가 GDP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하거나 더 큽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나라도 없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 세계화의 특징은 바로 미국의 위기를 의미하고 군사적 물리력 사용의 증가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협을 받고 그 체제가 와해되어가고 있는 심각한 증거라는 겁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하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본주의 최후의‘체계적 카오스’ 또는‘일반적 위기’의 심화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얼마 전 있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만 해도 전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발 경제위기의 맛을 본 것에 불과하지요. 만약 정말 미국발 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면 그 피해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피해는 세계의 힘없는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말겠지요.

그러니 제가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겁니다. 엄연히 그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으니 저희 같은 사람은 그것마저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판단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전해야하니 말이지요.


   아무튼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를 선진국이라 마냥 부러워하며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우리도 이렇게 잘 살게 해달라 기도하지요.


  성도 여러분. 가난은 미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가난을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해서 풍요로워지는 것 역시 바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사람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살생하는 것과 어느 한 곳만 부가 집중되어 다른 한쪽은 고통 받는 것 역시 원치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은총만을 기도하며 겸허히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1) 다른 신이나 종교에 빠진 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당시는 종교와 삶, 사회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인 사회였습니다. 한편, 그 종교가 갖는 경전은 캐논(canon)이라 하여 삶의 지표이자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와 신에 빠진다는 것은 그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과 문화 자체가 변해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뜻을 따르는 종교인 데 바알 문화에 젖어 종교가 혼합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고귀한 가치들이 배격되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그리고 가만히 계실 수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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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9 Posted by 바람몰이

 

노아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맥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신 하나님의 분노와 의인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홍수를 통한 쓸어버림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는 희망의 약속 무지개가 나오며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렇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세상이 어떤 “죄”를 지었길래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실 정도가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방주에는 정결한 것뿐 아니라 부정한 것까지 들이라 하셨는 데 도대체 왜 그러셨던 걸까요? 만약 그냥 전부 쓸어 버리실거면 기왕에 부정한 것은 모두 없애버리시어 완전히 깨끗한 것만 남기시지 말입니다.

또한 중간에 보면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거인족은 성경을 통틀어 여기서만 딱 한번 나오는 데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생뚱맞게 등장한 것일까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너무 궁금하던데..

   

이야기의 실마리는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존재 즉, ‘네피림’에 있습니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난 거인족이라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연구해보니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된 사람의 딸들이 성적인 결합을 하는 다시 말하자면 “종교 혼합”의 타락에서 비롯된 존재들이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앞서 저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인간의 교만을 의지하며 혼자서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었지요. 기억나시죠?


  결국 창세기의 기자는 막연하게 죄가 가득했다 하기가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네피림
1)을 등장시키며 우리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심판하셨던 구체적인 대상을 가르쳐 주려 하였던 것이지요. 바로 주님을 멀리하고 가나안의 바알주의라는 종교혼합에 빠진 이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고귀한 가치와 문화를 버리고 저급한 물질문명에 젖어 버린 이들의 행동. 끝으로 주님을 떠나버린 그 마음이 싫으셨던 겁니다2).  


   그러면 왜 노아가 의인이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노아는 이런 종교혼합이나 종교의 개종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했던 “흠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 들었던 거지요.


  또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멸절시켜 버리신 대상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라는 불특정 다수나 생명체가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고 낳으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냥 아무런 감정도 없이 쓸어버린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멸하시는 것은 바로 가나안의 바알주의와 맘몬주의-구약성경이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것-인 것이지요.


  실제 6-7장에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생명체를 보면 더욱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지적해드렸듯이 창세기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이나 공중의 새는 수컷과 암컷으로 각 일곱 쌍 씩 들이되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들이라 하였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나 생명체를 멸절시키는 무자비함을 보이시려면 애초에 방주를 만들라고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더욱이 부정한 짐승(!)은 아예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모두 함께 하겠금 하신다는 것이지요.


  또한 9장에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몸을 드러냈고 이를 본 함이 셈과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가나안 문화에 빠져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함이 아버지의 치부를 감싸주지 않았기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이해인거지요. 실제 성경을 잘 살펴보면 주님은 함에게 저주를 내리시지 않고(!)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셈이나 야벳을 축복하는 것이라 알아왔던 이야기는 문맥을 다시 잘 짚어볼 때 이들에 대한 축복보다 오히려 가나안이 이들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대상이 분명히 가나안의 바알주의나 맘몬주의 같은 것이고 이들과의 성적결합을 통해 종교혼합을 하거나 개종을 하는 이들임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고, 이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구체적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당시 중동 지방에는 노아 이야기와 비슷한 홍수 이야기가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기자는 이런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되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의 관점에서 그 분의 뜻을 극적으로 증언하였던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였던 것이구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더욱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며 주님을 저버리거나 멀리하며 동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노아 이야기를 통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저는 이러한 주님의 뜻이 여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곁에 있는 현대판 바알주의를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가나안 문화를 말입니다. 혹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면을 쓴 바알이라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1) 네피림에 대한 성경의 보도는 창세기 6장과 민수기 13장 딱 두 번만 나옵니다. 


2) 그래서 쉬운 성경은 5절의 죄악을 “악한 행동”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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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7 Posted by 바람몰이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아이를 얻습니다. 첫째가 가인이고 둘째 녀석이 아벨입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고 아벨을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세월이 지난 뒤 각 기 얻은 소출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반기셨는 데 가인의 것은 반기지를 않으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화를 내고 얼굴빛이 달라졌냐 물으십니다. 또한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기에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하니 그 죄를 잘 다스리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결국 동생을 불러다 들판에 가서 쳐 죽이고 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있는지 물으십니다. 가인은 모른다고 하며 자기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 따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 하시며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이 형벌이 너무 무겁고, 자신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는다 하시며 표를 주십니다. 그 유명한 가인의 표이지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마지막 결론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무튼 저는 그렇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질러 극형에 처해도 시원치 않을 가인에게 오히려 표를 주시어 보호해 주시니 말입니다. 

   

먼저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잡아 봅니다. 4장 1절에 있는 하와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와는 자신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것을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라고 번역합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두 번째로 7절에서 언급한 죄를 포인트로 잡아봅니다.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인간 스스로의 힘만을 의지하는 교만의 상태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주님께서 죄가 가인의 문 앞에 도사리고,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가인이 곧 하나님을 떠나 그 말씀과 가치를 버리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교만한 자기행동을 하려 한다는 것을 경고하시며 그걸 잘 다스리라 당부하시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9절에서 가인이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며 하나님께 질문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저는 세상과 인간은 서로 하나 되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이치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강제로 분리하여 분열된 “남남의 삶”을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인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핑계를 대며 각 기 다른 삶인 것처럼 분열을 꾀하며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벨과 자신을 구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도 자신이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분리된 삶을 사는 죄의 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죄 그 자체는 나쁜 것이기에 용납하지 않지만 그 죄 이전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히 여기신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아무리 당부를 해도 죄에 빠져 허우적 대는 인간마저도(!) 당신께서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 낳으신 자신의 자식들이라는 그 사랑을 보이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 바로 하나님의 끝없는 모성애적 사랑의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표현한 것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인 것이지요
1).


   이러한 맥락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세계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는지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끝까지 인간을 버릴 수 없고,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인적 삶과 이 생명세상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바로 그 이유를 말이지요.


  아울러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살펴봅시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이유를 그가 첫 소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해는 매우 편협한 것이기에 별로 신뢰할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큰 성경의 고백과 이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서 창세기 1장이 2장보다 4세기정도 늦게 쓰여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창세기를 쓴 기자가 여럿이라는 말이 됩니다. 실제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록하며 하나님을 증언한 기자는 B.C8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사회가 갖게 된 혼란을 충분히 경험했을 시기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의 기자는 이러한 가나안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지요
2). 정착 이전에 갖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문화. 즉, 유목생활과 떠돌이 생활의 고됨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동행하던 삶이었기에 당연히 이것이 옳은 신앙의 길임을 선포하였구요.


  여기서 우린 왜 하필 아벨의 제물만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생각해보면 농사를 지어 곡식을 드리는 것은 추수 감사절의 모양새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지어서 바치는 데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결국 성경이 말하는 가인의 농사는 가나안의 농경문화를 의미하고 이것은 바알이나 맘몬 같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문제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바로 이러한 우상숭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받지 않으셨던 겁니다
3).

  우리의 고백은 풍요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이자 그 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신이 되어 우리 인간의 정신을 지배해서는 당연히 아니 됩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고귀한 하늘의 삶과 가치만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게 크리스챤의 삶의 방식이자 성경의 증언인 것입니다.
 


1) 아담과 하와에게도 나뭇잎이 아닌 가죽옷을 입혀 내보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이지요.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죽옷을 입혀 보내신 것입니다.


2) 모두 아시다시피 이 때 가나안은 농경문화와 이에 따른 풍요의 문화 즉, 바알이나 맘몬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3) 첫 제물을 안 바쳤기에 그렇다는 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문제와 어려움, 하나님 유일신 신앙, 창세기의 저작시기 등을 아무것도 모르고 매우 단순히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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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5 Posted by 바람몰이

 

여기서 잠깐 창세기 자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비물질적 세계와 인간의 생사화복 및 희노애락을 비롯한 감정, 풍요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생활 및 그 밖의 모든 이치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창조신앙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1).


  물론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걸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과 이에 따라서 어떤 과정과 순서로 세상을 만드셨는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매우 간단한 사실이나 실제로 진정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도 몰랐는가 그리고 안 따먹게 말리면 되지 않았느냐는 단순한 논리적 모순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 밖에 1장 26절에 기록된“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복수로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낳게 하고, 심지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동물은 6장과 7장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 님. 그동안 성경을 문자 그대로 무조건 믿어만 왔던 우리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성도 여러분.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일점일획도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과 심지어 죽음의 세상마저도 관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사고와 당대 사회의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 역시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라고 하였지요. 어찌 한낱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고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저 주님께서 계시해주시는 것과 성령님의 영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보며 한치 앞도 못 보는 인생사 속에서 그 뜻을 쫓아갈 뿐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완성해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뿐이지요. 신앙인으로써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찾아가려 노력할 뿐인 겁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몇 몇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고대 근동 지방의 이야기를 참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네 성경이 완성되기까지는  수 천 년의 세월이 걸렸던 겁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분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기록된 성스러운 책이라 바로 이런 이야기인 겁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인 것이구요.

어찌 인간의 작업을 완전 무오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 무오하신 분은 오직 우리 주님뿐이시지요!!


   그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수 천 년의 신앙고백과 전승을 수 백 여년에 걸쳐 완성하려던 신앙의 선배들의 그 모습이 얼마나 숭고하기까지 합니까. 문자 그대로만 성경을 외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성경 기자들 즉, 주의 종들의 고백과 가르침을 겸허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종 역사시대적 오류와 본문상의 차이를 통해 갈 지(之)를 그리면서도 성경 안에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맥락이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함이 좀 더 합당한 신앙인의 자세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 이러한 연구 결과는 세계 신학계에 나온 지 1백여년 이상입니다. 그리고 카톨릭에서는 평신도들도 이런 내용을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하며 말씀에 더욱 집중하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카톨릭을 개혁하며 나온 우리 개신교가 오히려 더욱 보수화되어 뒤쳐지는 모양새인 것입니다.
이제는 좀 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성경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고운 님!! 우리 하나님 말씀을 거저 받아먹으려 하지 맙시다. 이것이야말로 도둑심보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노력하여 얻는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받는 대도 부단한 공부와 노력, 기도 그리고 성도 상호간의 교류와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돕고 돕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거지요.

 

  여러분은 지금 노력하고 계십니까? 성도간의 교제도 하고 계신가요?


1)  물론 세상에서는 빅뱅이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가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설명 방식들이 옳다 한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심오하고 세밀한 과정마저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1+1 보다도 쉬운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노아의 홍수 이야기 같은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홍수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있습니다.


2)  온실속의 예쁜 화초는 자신에게 내재된 생명력을 다 펼치지 못합니다. 미운 자식은 떡을 주고, 예쁜 자식은 회초리를 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어머니이고, 아버지시라면 우리를 결코 에덴에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된 노동의 가치와 해산의 고통, 인생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더욱 펼치기를 원하셔야 하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치를 우리네 신앙의 선배들은‘어찌하여 우리 인간사가 이리도 고되고 힘든가’그리고 ‘인간은 어찌하여 이리도 교만한가’라는 물음과‘인간의 교만함속에서 좌절 될 수 있는 이 모든 어려움과 고통 역시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원죄의 아래 있음에 의한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과 하나 되어 가며 자신의 구원을 일궈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감으로써 극복 가능하다’라는 것을 창세기의 거룩한 이야기를 통해 위대한 신앙의 선언을 한 것이지요.


 
실제 창세기에 있는 창조이야기 자체 역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유행하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3). 이것을 창세기를 기록한 기자들이 신앙의 눈으로 각 기 다르게 신학적 각색을 통하여 정리해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만해도 2장에 비해 4세기정도 후 즉, 바빌론 포로기의 고통을 겪으며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을 2장 앞에 위치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고백하는 것 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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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4 Posted by 바람몰이
 

창세기에서 천지창조 이야기를 지나 에덴동산 이야기에 도착하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선악과’ 이야기지요.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속에는 인간에게 내재한 “원죄”에 대한 설명이 있기에 더욱 인상 깊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고 모든 걸 허락하셨는 데, 단, 하나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이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냥 그렇게 저렇게 잘 살고 있었는 데 갑자기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유혹합니다. 그래서 하와가 냉큼 먹고서 아담에게까지 건내 줍니다. 순간 이들은 눈이 번쩍 뜨이면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걸 알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후 숨게 됩니다. 그 후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고 결국 에덴동산 추방령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좀 더 주의 깊게 볼 대목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흔히 여자의 산고와 남자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주신 형벌과 저주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혹시 성도 여러분께서도 아이를 낳고 내가 벌을 받았다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던데요.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가족들이 함께 생활해가며 내가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 여겨오셨습니까? 저는 제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우리 가족이 정직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너무 좋던데 말이지요.


  여러분 모두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걸 들으신 하나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씀하셨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뱀과 땅에게 저주를 내리신다 합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준다 하셨고, 남자에게는 수고하여 땅에서 나는 것을 먹겠금 한다 하셨을 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를 죄라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정녕 죽으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진정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었던 죄는 본래 하나였던 에덴동산과 동물, 인간이 내가 아닌 남으로 서로를 가르고 부정하며 하나가 아닌 갈라지고 깨어진 삶을 이야기한 것. 바로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죄인 것입니다.
1)

또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과 저주 즉. 산고와 수고하는 노동은 오히려 너무나도 당신이 만드신 자녀들을 사랑하시어 그 죄에 대한 저주를 뱀과 땅에 내려 버리시며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창조 과정과 노동의 신성함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삶의 기회를 주신 축복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과 수고하며 노동하고 사는 게 힘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의 욕심과 교만함으로 없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 속에 절규하며 살게 하려 하셨던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인생을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르며 깨닫게 되는 주님의 뜻과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순수하게 자신이 흘린 땀방울을 통해 얻은 소출을 보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더욱 나 자신이 소박해지며 순결해지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선악과 이야기는 창세기 기자가 ‘어찌하여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고, 남자는 끊임 없이 땅의 소출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며 이 땅에는 물질 중심적 가치만이 제일로 여겨지는가. 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높이며 교만한 자리에 서는가’ 등의 인간의 본질적 물음을 선악과라는 “신앙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신의 판단을 절대시하고 욕망에 사로 잡힌 존재이며 우리네 인생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삶인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본래 아담이란 본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하와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란 인물은 우리네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일종의 아이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지닌 정신마저 땅으로 대변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되어 버린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삽니다. 성경은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되며 그럴 능력도 없음을 이미 바벨탑 사건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러한 교만에 빠져 있고, 그나마 신앙생활을 한다 하여도 본래 성경이 증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이 글을 읽는 고운님. 우리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멀리하는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던 문둥병자와 함께 웃으시던 분이며 모두 돌팔매질 하던 여인을 막아 주시던 분이었습니다. 모두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가장 낮은 자리에 계셨으며 모두 많은 재물을 찾으려 할 때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셨던 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맺기 원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 맺게 되는 그 열매는 분명 당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보람 있게 해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세상이 따르는 가치와 정반대의 것이라 때로 고통받기도 하고 곤궁한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1)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원죄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와 하나 되는 삶을 사는 본래적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비본래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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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드시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2 Posted by 바람몰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의 중심에 세우심은 이 생명세상을 아끼시고,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아주 잘 나타난 대목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을 땅에서 취해 만든다 할 때 “땅”이란 말 자체가 원래는 “먼지”라는 뜻입니다. 아담이란 말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것 이구요. 하와라는 말은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잠깐 아는 목사님께 들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후 여자를 만드셨잖아요. 그래서 이 구절은 남자가 여자에 비해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에 자주 동원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식의 그런 얘기 말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남자는 한낱 먼지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여자는 그 속의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갈빗대를 통해 만들어진 걸 생각해보라는 거지요. 결국 여자는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시고 난 후 나오는 많은 오류와 문제를 다 보완하여 먼지가 아닌 갈빗대를 취해 만드신 업 그레이드 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보다는 여자가 한수 위이고, 남자는 여자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해야 세상살이가 좀 더 현명해진다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그럴 싸 하지 않나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 되어 행복을 누리는 걸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뒤에 가인과 아벨 얘기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로 엮어주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함부로 나눠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열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될 뿐 아니라 사람은 서로 하나 될 때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내 남편에게 대하는 것, 내가 내 아내에게 대하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긴장이 풀려갈 수록 더욱 함부로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아내나 남편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그런 행동들 말입니다. 그리고는 혼자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에 차마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기 힘이 듭니다. 그저 서로 눈빛만 보고 확인할 뿐이지요. 그래서 ‘에구..이 웬수야..’하면서도 “정”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자식들도 있고 하니 말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 이 모든 걸 씻기도 하고 말이지요.


   다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는 의식적인 내가 일종의 가면을 쓰고(페르조나) 이뤄 집니다. 그러나 배우자에게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솔직한 부분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의식적인 내가 아닌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있는 내 모습으로써 나조차 몰랐던 솔직한 내 모습이 발현된 것이지요.


  또 한편 내가 모르는 세계와 사고방식을 아내와 남편에게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보며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배움을 얻게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내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구나..’ 이러면서 말이지요.


  결국 아내나 남편은 내 자신을 더 솔직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가장 가까운 거울이라 이런 이치인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더 알아가며 인격을 더욱 성숙히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쉬운 일상의 예만 보아도 우리는 사람이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세계는 반쪽짜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함께 할 때 더욱 온전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태초부터 인간은 평등할 수밖에 없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WCC1)에서는 이미 오래 전 이런 내용을 신앙고백하며 문서화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벌써 몇 십년전 얘기이군요. 하지만 한국 교회는 아직도 이런 흐름을 잡지 못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성도님께서도 WCC라는 얘기나 아래 각주에 달아 놓은 얘기는 아마 처음 보실 겁니다. 교회에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내용이니 말이지요.


  아무튼 이것이 최신 경향이자 고백입니다. 물론 성경 속 세계를 보면 남녀관계가 완전히 평등했다 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운동 진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바울 사도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지요. ‘여자는 잠잠하라’등의 내용이 주된 그 타켓이구요.


  예, 그분들 말씀이 맞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남성 신학자나 목회자 위주의 신학계나 교계에서 경청해야할 부분도 많습니다. 저는 또 그래야만 우리가 더욱 온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은 당시대에서는 보기 힘든 보다 평등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방향을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렴 최첨단 과학과 고도의 교육수준을 보이는 요즘도 온전한 남녀간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데 몇 천년 몇 백년 전 세계에서 어찌 완전함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경향과 중심을 보고 이야기를 함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여러분께서 보기 쉽게 남녀평등이라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이 말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녀평등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남자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네 습성이 배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양성평등”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양성평등이란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교육의 확장과 민주의식의 내면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성의 경제적 안정의 기회확보는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켰습니다
2).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첨가하는 분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정부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축을 차지하기까지는 아니라고 보는 편입니다. 그만큼 보수적인 가르침이 지속되어 온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역사적 흐름에 따라 여성의 권익을 찾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 많았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페미니즘”이라 하곤 합니다. 이 페미니즘도 다양한 흐름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다 다루기 힘든 측면이 있군요.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에 관한 좋은 책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는 꼭 남성분들께서 보시기를 권합니다-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가서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네 사람을 만드신 첫 모습과 성경이 꾸준히 증언하는 남성과 여성-여성과 남성의 관계입니다.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양성평등의 개념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챤은 더욱 그렇습니다. 특별히 가사와 육아 문제 등은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남성들이 더욱 아내를 위해 열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명절에도 그렇구요. 반대로 여성들 역시 남편의 작은 변화와 노력에 많은 칭찬과 격려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2-30년간 살아오던 방식을 바꿔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최근에는 여성의 권익이 많이 신장된 나머지 남자들이 오히려 더 위축되어 있다는 말까지도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서로 싸움닭처럼 고개를 쳐들 필요도 없고 서로 내가 희생당하고 있다고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거지요. 이렇게 서로 돕고 협력해가며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런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협력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 꼭 뭘 완전히 잘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멘?



1)  이 모임은 교단과 카톨릭, 개신교 등을 총 망라한 초단위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모이는 곳이지요. 그래서 세계의 여러 문제에 대한 신앙고백과 선언을 하며 책임있는 사회의 일원이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는 곳입니다.


2) 과거 남성에게만 국한되어왔던 기초 교육 및 고급 교육이 여성에게 확대되며 여성계 내부에서 스스로의 권리와 위치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의 선거권 확보 등의 기본적 권리찾기 운동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산업화와 함께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여성이 더 이상 남성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어 졌습니다. 이른바 ‘화려한 싱글“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성과학의 발달은 여성이 임신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지요. (이것의 좋고 나쁨은 둘째로 하고요) 이런 역사적 흐름은 최근의 양성평등 개념과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며 상당히 보수적인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 법무부 장관이나 총리가 나오는 지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니다. 물론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 얘기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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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1 Posted by 바람몰이

  앞 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와 그 이치에 대해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과 하늘의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삶의 방향성을 찾고 구원 받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인간답고, 땅은 더욱 땅 다우며, 하늘은 더욱 하늘답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제 눈에는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심지어 크리스챤마저도 물질적인 생활에 종속되어 이것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기도할 때 물질의 축복을 더해 달라 하지요.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물질적으로 비대해져 이제는 각 은행이 대형교회를 알아서 VIP로 모신다 하지요. 목사님들은 고급 대형 승용차를 몰고 다니시구요. 마치 말로는 주님을 섬긴다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더 섬기는 것 같아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시장의 논리에 휩쓸려 살고 있으면 이제는 “시장이 하나님이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교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이제 세상은 아무도 교회를 신성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세계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수탈하며 부를 누리는 일종의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요.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여전히 불균형한 상태이구요
1). 우리네 정신세계는 전 세계에 몰아닥친 왜곡된 해체주의적 물결에 휩쓸려 이제는 허무주의만이 가득하고 오히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눈에 확실한 것을 보여주며 대중을 선도하는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것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2차 대전이나 황우석 사건 같은 것은 그런 대표적인 예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인간답게 사는 법을 공부하던 철학을 비롯한 각 종 인문학이 사라질 지경입니다. 그리고 실용성만을 추구하며 오로지 먹고 사는 데만 유용한 것을 학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2).

문화는 어떻습니까. 문화란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며 그 사회의 수준을 끊임없이 살아있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란 것은 돈의 논리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일반인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동원해 많이 팔리거나 전문가라는 사람이 방송에 나와 소개해주면 고급문화가 되고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을 지불해야만 누릴 수 있는 그런 형국입니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통해 인간의 말초적인 신경만을 자극하는 포르노 산업만이 꾸준히 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류의 문화가 얼마나 추락하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3).


1)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홀로 짝이 없이 있는 것을 보고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잠들게 하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대목은 가부장제나 남존여비 사상 정당화에 많이 동원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자나 남자는 한몸에서 나와 만들어졌고, 하나가 되어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우리 속담처럼-“일심동체”의 신앙적 증언인 것입니다.


2) 어째서 이런 것만이 쓸모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모르는 돼지에게 진주를 안겨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매우 비싼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면서도 저질스런 운전매너를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이치 아닌가요?


3) 심지어 인간의 영혼과 사랑의 교류가 없는 무분별한 성행위마저도 인간의 본능이라 가르치는 포르노 산업과 이에 이용되는 각 종 미디어는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본래 섹스란 것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동물적 본능. 즉, 생득적 능력입니다. 여기에 정신적 동물인 인간은 그 속에서 고차원적인 사랑과 영혼의 교류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창조과정과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그 어떤 동물이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는 말입니까. 오로지 인간만이 합니다. 이것이 각 종 포르노를 중심으로 한 성산업의 발달과 맞닿으며 아무런 감정교류가 없는 특히, 남성의 판타지 충족만을 위한 성행위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인생을 사는 게 고달픈 겝니다. 주님의 뜻이라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곳이니까요. 에덴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양새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교회에 가 평안을 찾으며 본향을 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또 여러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족과 재산, 인간관계까지 모두 잃어 갑니다. 그저 죽어서 천국가는 게 구원이라 여기는 거지요.


  사실 구원이란 그렇게 단순한 얘기는 아닙니다. 세계의 신학이 설명하는 구원만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모두 지적하는 분명한 것 하나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구원받은 기쁨의 삶이 되지 못하고 죽은 후에야 구원받는 것은 진정한 구원이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지요. 죽었던 나사로의 삶을 바꾸셨고, 우물가의 여인의 삶을 바꾸셨으며 모두에게 돌팔매질 당하던 여인의 삶 또한 구원받은 삶으로 바꾸셨던 겁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그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로 충만하여 자기가 거짓되게 거둔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까지 하였지요.


  결국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이 땅에서의 내 삶 또한 구원받은 에덴의 삶이 되게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말입니다. 세상을 두개로 구분하여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등으로 단정 지어 보지 말고 말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세상은 땅과 하늘, 영혼과 육체, 이상과 현실 등으로 구분(이원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의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속에 있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전일적 세계체계”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것은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어떻게 육체 없는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영혼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약해지는 것이고, 반대로 강한 정신을 갖고 있으면 약한 육체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요. 바울 역시 부활은 영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육체의 부활이 있다하였고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첫 열매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제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읽는 고운님이여. 우리는 죽어서만(!) 본향1)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 역시(!) 본향처럼 살아 갈 수 있어야 하지요. 더욱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추종하는 물질적 가치는 멀리하고 아둔해지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둘로 보지 말고 하나로 온전히 통전시켜 나갈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히브리 사람들은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고, 신성화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떨어져버린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냥 잠자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것도 지하세계. 즉, 스올에 내려가서 말이지요. 스올이란 하나님의 영이 비취지 않는 곳 이구요. 하지만 주님의 사람들은 훗날 부활할 때 신령한 몸으로 모두 일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증언이구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옥에 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 거지요. 사실 지옥이란 말 자체가 불교 용어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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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야기-(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09 Posted by 바람몰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에서 흙을 취해 만들었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온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다스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노동력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사고 파는 “경제생활”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우리네 삶의 모습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님들은 땅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하였지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절은 처음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합니다. 아무런 질서가 없는 “카오스”상태인겁니다. 이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계셨다 하는 데, 구약학자들이 보다 원어 자체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자면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이 그 물을 감싸 안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의 혼돈을 하나님의 영이 감싸 안으며 생명과 질서를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거라는 말이지요.


인간을 만드신 후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루아흐”인데, 이것은 숨, 바람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하늘에서 부는 것이지요. 이 하늘이란 것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땅과는 또 다른 곳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둡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공을 만드시고 나서 땅과 바다가 구분되었다 합니다. 즉, 질서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하시고 하늘에서는 인간이 살아갈 방향이자 그 근본 질서를 부여해 주신 것이라는 게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안에 계시며 그 영으로 품으시며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신 것이구요. 


여기서 잠깐 사람을 만들 때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을 두셨으니 말이지요. 먼저 앞 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땅을 취해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말입니다. 여기서 “땅”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땅”이란 말의 의미가 “먼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먼지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며 생명체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지요. 아무리 먼지가 많이 싸여도 거기서 씨앗의 새싹이 트지는 않구요. 즉,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게 바로 먼지란 얘기입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신앙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도 그렇다는 거지요. 우리네 사람이 아무리 잘난 것 같아 보여도 그 속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인간이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는 나약한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라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 즉, 숨을 거두게 되면 인간은 죽게 되는 것이고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거지요.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이란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릴 살게 하시고 모든 것을 먹을 거리로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더해주신 겁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통해 혼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영으로 함께 하시며 말입니다.
  

 

그런데요 성도여러분. 여기서 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위의 구절들은 과거 서구 사회에서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정당화 하는 데 자주 동원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정복이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양 여겨 왔지요.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그 후손인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당연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도로 악화된 생태계의 현실 속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환경 친화적 개발이니 지속 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움직임도 사회 전체적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아직까지 매우 미미한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지금의 현실
1)인 것이지요.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래 주님께서 의미하신 바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지요.


잠깐 생각해봅시다. 자연에 있는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하루의 먹거리만 먹는 다 합니다. 일단 먹이를 먹으면 자신의 눈앞에 먹이가 지나가도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만 취하는 원리입니다. 한편, 생육이란 말은 낳고 기른다는 것으로서 그 종족이 번식해 나간다는 거지요.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다스리는 자의 뜻이 땅에 펼쳐지는 것으로 이것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겁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와봅시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겠습니까. 왜 땅의 먼지 같은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는 죄 많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라는 명령이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은 작은 미물 하나마저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뜻으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어우러져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들을 먹거리로 주심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서로를 살리는 생명나눔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과소비하지도 많은 재물만을 탐하지도 말고 일용할 만큼 취하며 내가 죽으면 내 자신을 자연에 돌려 다시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는 바로 그 이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안고 살아가며 널리 번성하여 더욱 이 세상이 주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라는 정의와 사랑, 평화, 생명의 그 이치.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무분별한 살생을 하지 않는 바로 그 이치 말입니다. 

   

이제 첫 번째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인간이란 땅에서 흙을 취해 그것을 통해 만들어졌고 땅 위라는 구체적 터전위에서 물질생활을 통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기운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땅에 속해 땅에서 살며 땅을 가꿔가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인생이지만 여기에만 종속되지 않고 땅이 주는 물질적 가치들을 넘어 하늘의 삶과 하나님의 가치를 보고 그 방향성을 견지하며 하나로 통전시켜 살아가는 기본적인 인생사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네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은혜받기 합당한 공의, 평화, 사랑, 생명 등의 소중한 가치들로 충만케 하여 땅이 더욱 땅이 되고, 하늘이 더욱 하늘 될 수 있게 하여야합니다. 바로 이런 귀한 직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살 수 있는 근거이고, 우리가 사는 방향이며 모두가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며 살 수 있는 에덴. 즉, 구원 받은 하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유대땅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에 가장 낮고 더러운 자리라는 터전을 택해 오시었습니다. 인간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는 땅의 물질적 가치 속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시험당하셨고 이를 위대하게 이겨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라져버린 하늘의 가치 즉, 인간의 고귀함과 생명의 존엄성, 정의와 평화, 사랑을 되살리며 죽음의 거대한 물길을 십자가라는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 물꼬를 하나님의 방향으로 돌려 세우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고 우리에게는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이라는 그 물꼬를 끝까지 잘 지키고 깨끗하게 보전하라며 이를 세상끝까지 전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이 그 최후에서 어찌할 수 없어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닌 “죽음” 마저도 부활로써 이겨내시며 진정한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끝까지 희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모든 걸 완성하여 상을 차려주는 슈퍼맨이나 물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떠먹여주는 어리석은 주인이 아닌 진정한 메시아이신 우리 예수님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실제 영국의 가디언지는 미국의 극비보고문서를 소개하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갈 수록 계속되는 이상기후 현상이 2007년 이 후 더욱 가속화되며 증가할 것이라 본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식량”이 거대한 무기가 될 것이라 본다는 거지요. 이런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이들이 왜 자꾸 전 세계의 식량 시장을 개방하라 압력을 가하는 지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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