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낯설게 바라보기'에 해당되는 글 79건

  1. 2011.12.17 성범죄 피해경험이 왜 여성으로서의 치부인가? 3
  2. 2011.12.06 A양 동영상 논란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 11
  3. 2011.12.02 왜 남자 몸이라고 쉽게 만질까? 1
  4. 2011.11.04 왜 목회자의 성폭력이 끊이질 않는걸까? 1
  5. 2011.10.06 경찰과 법조계는 성감수성을 좀 더 키워라
  6. 2011.09.20 성폭력, 철저한 사후관리가 곧 예방대책이다 2
  7. 2011.09.05 여군창설 61주년, 축하만 할 수 없는 이유 11
  8. 2011.08.30 피해자가 이기적이면 성추행을 해도 되나?? 16
  9. 2011.08.25 셋째 아이 임신 했지만 웃지 못하는 이유 12
  10. 2011.07.25 군대에서 성폭력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 5
  11. 2011.07.23 왜 '마초'가 남자다움의 상징인가? 3
  12. 2011.07.07 성매매 거부했다고 '기수열외' 당하다니... 14
  13. 2011.07.01 '성희롱 의원' 제명 무산, 성희롱에 관대한 사회 11
  14. 2011.06.27 개념 없는 중딩들을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11
  15. 2011.06.22 아이가 가해자 성기의 점까지 봤는 데, 무죄라니.... 1
  16. 2011.06.21 딸바보 아빠가 화학적 거세를 반대하는 이유 8
  17. 2011.06.16 성추행 교장 영장기각, 법원은 제 정신인가? 7
  18. 2011.06.10 가슴에 파묻힌 사회, C컵 이하는 여자도 아니다? 12
  19. 2011.03.21 우리는 왜 다이어트를 자꾸 하려는걸까?
  20. 2010.12.28 시크릿가든, 성추행 논란이 왜 쓸데없는 일인가? 5
  21. 2010.12.27 오늘도 '자연산'은 또 다시 불리운다 5
  22. 2010.11.10 친족간 성폭력, 국가는 무엇을 해야하나
  23. 2010.11.10 친족간 성폭력 더 이상 숨길일이 아니다
  24. 2010.11.04 동성애자로 살게 하는 게 왜 인권침해인가? 4
  25. 2010.10.26 10대 여성은 왜 성매매를 할 수 밖에 없었나? 3
  26. 2010.10.18 30대 여교사 사건, 합의와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 6
  27. 2010.10.14 장애 여중생 성폭행 사건, 경찰은 제 정신인가? 14
  28. 2010.10.08 지연 동영상(?) 논란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
  29. 2010.10.06 연예인 혼전임신, 임신의 시점이 문제가 아닙니다. 1
  30. 2010.09.17 굳이 "여자 얼굴"을 강조할 필요 있었나? 2


가수 알리가 노래 '나영이'로 인해 많은 비난
을 받으며 급기야 공개사과 기자회견까지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알리는 본인의 아픈 경험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고, 팬들과 나영이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사실 그간 위 노래로 인한 많은 비난이 알리에게 쏟아졌던터라 왜 자신이 이런 노래를 들고 나왔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했더랬지요.


알리의 뜻밖의 고백은 정말 충격적이면서도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리와 관련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몇 가지 고민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사건을 접하며 불편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거지요.

우선 첫번째는 알리의 고백을 다루는 언론의 자세입니다. 알리는 자신이 경험했던 성범죄 피해사실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여성으로서의 치부', '여자로서 어려운 결정' 등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시선이 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거나 소매치기를 당한다하여 그 피해자에게 치부가 되고, 흠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도둑이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독 성범죄만큼은 피해자가에 더 큰 상처를 주곤 하는 게 우리네 문화입니다. 도대체 왜 성범죄 피해경험이 치부가 되고, 여성에게 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래서는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은 '환향녀'라고 부르며 냉대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일본군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수십년간 혼자 가슴 아프게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우리의 시선이 좀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을 향한 정절 혹은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이제는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두번째는 성범죄 피해는 아동 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큰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성폭력 발생국가입니다. 2-3위권의 수준인데요. 반면 신고율은 세계 최저임을 고려할 때, 실제 발생비율은 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급격히 증가하는 아동 성범죄는 공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분노와 달리 성인 여성에 대한 성범죄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좋아서 같이 해놓고' 혹은 '평소 행실이', '밤 늦게 다니니까' 등의 통념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폭력 가해자에게 쏟아져야할 화살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넘어 갑니다. 그러면 피해자는 또 다시 자신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영원히 침묵하며 살아야만 하지요.

피해자가 어떤 시간에,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성폭력 피해를 입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인 여성의 성범죄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당연한 원칙을 너무도 쉽게 잊고 말지요. 이러한 2차 가해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알리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조두순 사건 이 후 수많은 나영이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영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피해를 숨겨야만 한채 잊혀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만 들끓다 금방 식어버리는 현상 역시 반복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사회적 반응 역시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것들에 대해 분노했다면 이와 관련한 대책을 온전히 수립해야겠지요. 그러나 조두순 사건 이 후 우리가 만든 것들은 무엇인가요. 아마도 cctv 확대설치와 화학적 거세가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허나 cctv가 아무리 많아도, 화학적 거세가 시행된다 겁을 주어도 여전히 성범죄는 활발히 일어납니다. 

성범죄의 심각성만큼이나 우리 사회가 침착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라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 아이들을 안전한 환경에서 살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번 분노만 하다 금방 식어버리는 모습이 아닌 뭔가 일관성 있고, 지속성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알리가 미숙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아픈 경험만큼 나영이와 그 가족을 위한 좀 더 섬세한 배려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하더라도 이 부분까지 무마되는 것은 아닐 겝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 메시지만큼은 우리가 잘 붙잡고 가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가 함께 몇 몇 주제를 고민해보며 성범죄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과 자세가 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유독 여성에게만 특히, 성범죄 피해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정절 혹은 순결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벗어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향한 2차 가해를 줄이고, 보다 근원적인 성범죄 예방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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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양 동영상'이란 것이 공개되며 인터넷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A양으로 지목된 방송인을 검색하면 수많은 웹 페이지가 그녀의 동영상 관련 글로 채워져 있다. 특히, 트위터 등 SNS에서는 이 동영상을 본 사람이 있냐는 질문부터 과연 해당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A양이 맞냐는 것, 제발 이 동영상을 보내달라는 것 등 더욱 활발한 정보공유 요구와 논란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참으로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과거 필자는 이른바 '지연 동영상'에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집단적 관음증을 지적하였는 데, 이번 사건 역시 그 때와 전혀 다를바가 없는 흐름을 보여준다. 즉, 방송인 중에서도 '여성 방송인'의 알몸과 사생활을 훔쳐보며 일종의 쾌락을 느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그녀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가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중적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청춘남녀가 연애를 하며 성관계를 맺는 것은 이제 흔하디 흔한 일이 되어버렸는 데, 이걸 갖고 A양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필자가 여기서 혼전 성경험을 옹호하거나 권장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순결'이데올로기에 젖어 특정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집단 비난을 가하는 행태는 우리가 지양해야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문제는 왜 이같은 비난이 A양에게만 집중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 동영상 유포자는 우리가 그녀의 진실을 알아야한다며 마치 자신이 정의의 투사인 것마냥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동영상 유포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폭행을 당하고, 인격적 모욕을 당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명예훼손과 폭행죄 등 형사고소를 했어야할 사안이다.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면 A양은 벌을 받아야할 것이며 비난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A양의 '알몸'과 성행위 영상을 마음대로 유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동영상 유포자가 겪었던 경험과 이것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하지만 우리는 A양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이며 해당 동영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을 보인다. 지금 당장 검색창에 이를 검색해보라. 어마어마한 양의 동영상 공유요청이 검색되며, 그녀에 대한 비난이 나오거나 동정을 하면서도 평소 옷차림이나 행실 등을 문제삼는 2차 가해가 쉽게 눈에 띄곤 한다. 

사건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이상 A양은 더 이상 방송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미 모 방송에 A양이 출연한 분량이 통편집 되었다고 하니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늘 당사자가 있기 마련임에 비해 우리는 특정 여성 연예인의 동영상이 공개되면 늘 해당 동영상 속 남성에 대한 이야기와 관심보다는 여성에 대한 비난과 그녀의 '알몸'에 대한 관심만 보이기에 더 이상 그녀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맥락이 이번에도 관철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인터넷 알몸 혹은 성행위 동영상 유포를 통한 공격은 멈춰져야 한다. 이번 사건의 A양 뿐 아니라수많은 일반 여성의 동영상이나 사진 유출 역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모든 영상과 사진에서 남성은 제외되어 있고, 해당 여성만이 심각한 충격을 받으며 사회적 매장 혹은 공격에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잣대와 집단적 관음증을 매개로 한 관심(?)은 집단적 폭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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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해피 투게더를 보다보니 참 재미난 장면이 보입니다. 어제 방송에는 장윤주, 정형돈, 정재형 씨가 출연했는데요. 방송 중 장윤주 씨가 정형돈 씨의 가슴에 손을 얹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정형돈 씨는 '저기 죄송한 데 손 위치가 좀....'이라고 말을 했지요. 그러자 장윤주 씨는 바로 사과를 하면서 '죄송하다. 죄송한 데, 눌러 보고 싶고 이 제품은 팔아도 될 것 같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그냥 예능이라 하며 지나가기에 제 눈에는 참 거슬렸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육체적 성희롱에 해당될 수도 있을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저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여성의 가슴에 남성의 손이 올라가며 만져보고 싶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문제가 되겠지요?

저는 이 글을 통해 장윤주 씨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윤주씨는 제가 평소 좋아하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참 바람직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는 흔히 너무나도 쉽게 남성의 몸을 만지거나 평가하곤 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모 방송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 방송에는 고정으로 출연하는 여성 개그맨이 몇 명 있습니다. 그리고 매회마다 남성 또는 여성 아이돌이 출연하지요. 만약 여자 아이돌이 나오면 섹시 댄스를 추라하고, 남자 아이돌이 나오면 몸을 더듬거나 상의 벗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복근을 보여달라 요구를 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해당 남자 아이돌은 큰 소리로 웃거나 고맙다고 하며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만약 이 상황을 불편해하거나 거부하는 의사를 표현하면 야유가 나오면서 결국에는 상의를 들어올리거나 또 다른 여성 개그맨이 나와 몸을 훑어 버리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거나 칭찬 또는 호감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참 불편합니다. 왜 우리는 남성의 몸은 쉽게 만져도 되고, 함부로 벗겨도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요. 성희롱의 피해는 남성이라 하여 예외가 아닙니다. 여성 피해자와 같은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받게 됩니다. 성희롱은 우울증, 불면증 등은 물론 혈압상승으로 인한 심혈관계 질환 가능성의 증가 및 외상 후 스트레스 증가 등으로 인해 자살률을 높이는 결과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남자다움'이란 사회적 통념 때문에 말을 못하게 합니다.
남성 역시 자신의 피해와 아픔에 대하여 문제제기 할 수 있고, 또 이것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성희롱 가해자는 남성입니다만 그렇다고하여 남성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주장마저 못하게 하면 안 되지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함부로 타인의 신체를 만지거나 추행하는 행위는 자제되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호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남성이라 하여 예외여서는 안 되지요. 저는 남성 스스로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는 행위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남성에 대한 과한 요구 역시 자제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과거의 가부장적 성역할에 근거한 통념에서 이제는 좀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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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성폭력에 연루된 사건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목회자만이 아니죠. 기타 다양한 종교계 인사들이 성폭력 문제에 연루되곤 합니다. 실제 지난 2005년 여성부 조사결과를 보면 사회지도층에 있는 전문직에서는 목사, 신부, 승려 등 종교직 비율이 16%로 성폭력 가해자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종합적으로 '성(聖)직'이 아닌 '성(性)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관련글 : 목사야 악마야 여신도를 성노예로

이들이 이렇게 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인지 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학부시절부터 성직 임명이 될 때까지 성윤리에 대한 학습을 거의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신학교에 한정지어 말씀드리자면, 현재 우리 나라에 있는 신학교 정규 커리큘럼에는 성윤리 관련 과목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거지요.

물론 개중에는 상당히 노력을 하고 있는 교단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이라 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는 양성평등 과목을 의무적으로 수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기장은 총회 산하 양성평등위원회를 중심으로 교단의 남성 중심적 성향을 극복하고, 양성평등을 향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장 역시 성폭력에 관한 학습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폭력 문제에 있어 학습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학력이나 개인의 인품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변해감에 따라 성윤리도 변하고 있지요. 과거에는 괜찮던 것이 요즘은 인정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며 그 관심도와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고, 따라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기본적인 교양처럼 꾸준히 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70%이상이 여성인 상황입니다. 반면 담당 목회자의 경우는 99% 남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교단은 여성 목회자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도 신학교에서는 성폭력 예방교육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교나 교단 차원에서 강제해야할 문제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개 교회의 개별성이 워낙 강해서 담임 목회자의 목회철학에 따라 모든 교육이 진행됩니다. 따라서 개 교회별 성폭력 예방교육 역시 담임 목회자가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진행여부가 결정되는 데,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가 이에 대한 학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필요성에 대한 인지 역시 낮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생각해 볼 것은 한국 교회의 경직된 구조입니다. 성폭력은 남성 중심성이 강하며,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에 힘을 발휘하는 영역에서 여성이 배제된 곳 즉, 양성간 불평등이 심한 곳일 수록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종교의 경우 목회자의 권위가 신적 위임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면 목회자의 한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를 교인들이 거부하기 힘들고, 따라서 성폭력이 많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경직된 한국 교회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성폭력은 끊임없이 계속 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저는 목회자의 성폭력 문제에 관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목회자 성폭력 문제를 줄이기 위해서는 신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개 교회나 목회자 개인의 소양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교단이나 신학교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경직된 한국 교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못하면 성폭력 문제가 끊임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좀 더 전향적인 변화가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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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가니를 통해 아동 성범죄 및 가해자의 처벌에 관한 논의가 뜨겁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아동 성폭력 피해아동을 추궁한 변호사에 관련한 기사가 보입니다. 사건은 공부방에 왔던 당시 10세의 여자 아이를 성추행한 현직 목사에 대한 건이었는데요. 재판정에서 변호인은 13세의 피해자를 불러내 (검찰측에 따르면) '오버'를 했고, 피해아동은 2차 피해를 입으며 결국 법정에서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변호인에 따르면 본인은 상처가 될 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고, 피해자의 진술이 엇갈려서 확인을 하려했다 합니다.

네, 그럴 수 있지요. 변호사이니 자신에게 사건을 의뢰한 사람을 적극 변호해야 하고, 그래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성인에 관련할 때만 이해를 받을 수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다. 아동은 원래 진술이 오락가락 하는 게 맞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벌써 시간이 3년이나 된 경우입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어른들도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지금 독자님께서는 작년 이 맘때 있었던 일이 기억나십니까? 그렇지 않을 겝니다. 하물며 어린 아이는 어떠할까요..

두번째로 문제가 되는 건, 왜 피해 아동을 가해자와 직접 대면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독자님께서는 혹시 어릴 적 싸움을 하다 나를 이겼던 친구를 시간이 지나 만나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태권도 수련을 하며 싸움도 잘 했지만, 그래도 저 보다 강한 친구가 늘 한두명쯤은 있었지요. 한번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학교 싸움짱이란 애와 싸우다 많이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이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요. 당시 제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 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운동을 오랫동안 한 남성도 이러한 데, 겨우 13세짜리 여자 아이가 아주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진술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알고 있던 것도 잊게 되고, 사실을 얘기하면서도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동 성폭력 피해 아동을 법정에 세우지 않는 건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어린이의 특성상 진술의 일관성이 당연히 없는 게 맞고, 가해자와 대면시 2차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을 비롯 우리 나라는 비디오 중계기나 비디오 진술 등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 법정에서 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 지법별로 성폭력 전담 재판부도 있는 데 말이지요.

사건의 정황을 계속 살펴보니, 이 사건의 경우는 초동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비디오 녹화를 제대로 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은 전국 어디에나 성폭력 상담소나 해바라기 아동센터 같은 곳에 전문가가 있는 데, 왜 이들의 도움을 통해 비디오 녹화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게다가 3년전이라면 2008년 조두순 사건 이 후 아동 성폭력에 대한 분노와 관심 등이 최고조에 이를 때라 경찰이 '비디오 녹화'를 몰랐을리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요. 이것이 문제이지요. 제 견해로는 경찰의 초동수사는 부실했던 것이 맞습니다. 

언젠가 제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설명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모두 맞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과 상처를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며 사건을 처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동 성폭력은 더욱 이러한 '피해자 중심주의'가 관철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떤 피해 아동의 부모가 가해자를 신고하고, 재판을 통해 처벌하고자 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경찰과 법조계가 좀 더 성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동 성범죄는 법조항을 많이 외우고, 범인을 잘 잡는다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경찰이나 법조계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겠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 있어서 피해자가 또 다시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할 수 있는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이런 수준의 성감수성으로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기는 커녕 상처만 더 입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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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이번 달 20일이 논문제출 기한이라 포스팅을 꾸준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20여명의 독자님께 거듭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이번 논문 통과될 때 까지만 이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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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범의 증가, 성폭력 예방대책의 실효성 의심된다.

법무부가 19일 법제사법위원회의 모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 사범의 증가추세가 매우 심각합니다. 지난 해 전국 검찰청에 접수된 성폭력 사범은 2만 1116명으로 지난 07년(1만 5819명)에 비해 무려 33.5%나 증가된 상황이며 거의 매년 8-9%이상의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것이 문제인 것은 지난 09년 조두순 사건 등 여러 사회적 이슈가 제기된 이 후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이 대폭 강화된 상태에서 보인 수치라는 데 있습니다. 즉, 우리가 뭔가 문제의식을 갖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용한 여러 정책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의미라는 이야기 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가?

이같은 문제가 발생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일어난 문제 파악은 했으나 그 원인진단을 잘못했고, 이에 따른 처방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머리가 아픈데 소화제를 처방한 것 또는 배가 아픈데 배에 파스를 붙인 것과 마찬가지란 의미란 것입니다.

성폭력 사범은 재범률이 매우 높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별히 아동 성폭력 사범은 더욱 그렇습니다) 동종전과가 없는 경우보다 있는 경우가 2배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범죄자가 수혈되는 것도 있으나 한번 범행을 저질렀던 자가 다시 범행을 저질러 처벌받게 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거지요. 따라서 성폭력은 한번 범행을 저질렀던 자에 대한 철저한 사후관리로 재범률을 꾸준히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성폭력 예방대책이란 것은 하나 같이 '복수' 또는 '보복'을 위한 분노의 결과물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학적 거세'이지요. 누차 말씀드렸듯 화학적 거세는 그 자체의 효과도 신뢰를 부여하기 힘들 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지금과 같은 인프라로는 제대로 시행될리 만무한 국민들의 정서를 이용한 전형적인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정책입니다. 또 CCTV를 많이 설치하고, 전자발찌를 오랫동안 부착하겠다고 하지요. 하나같이 겁을 주는 정책들입니다.

성폭력 예방대책, 철저한 사후관리부터 시작하라!

외국에서는 강력한 처벌과 동시에 철저한 교육과 치료가 늘 병행되고 있습니다. 실제 캐나다는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인지행동교정치료 등 여러 치료와 교육의 결과 성범죄 재범률이 25%에서 15%대로 감소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 역시 인지행동치료 실시 후 8년간의 재범률 수집 결과 14.9%의 재범감소효과가 있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하였지요. 뉴질랜드에서도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범률이 3.2%에 불과하다는(불참자는 15-20%사이)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폭력은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방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성폭력은 크게 볼 때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변화시키고, 가깝게 볼 때 성범죄자에 대한 철저한 사후관리를 통해 예방해 나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즉, 철저한 사후관리가 곧 예방책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요약정리

지금 우리 사회의 성범죄가 매우 심각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차분한 논의와 근본적인 대책수립 즉, 성차별적 사회구조나 우리 아이들의 돌봄사각지대 등에 대한 시정, 아이들은 물론 성인에 대한 철저한 성교육 실시, 성범죄자에 대한 근본적인 맨 투 맨 진료 및 진단과 교육 및 치료 실시 등은 참으로 미약합니다. 그에 비해 국민의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치인들은 참 활발하지요.

그러나 겁을 준다하여 성범죄자
들이 범행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성범죄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지독한 마초근성 또는 왜곡된 성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재범을 막고자 한다면, 이들이 성범죄자가 되게 된 그 이유를 찾아보고, 철저한 사후관리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재범률이 유난히 높은 성범죄의 특성상 철저한 사후관리가 곧 예방책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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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써 (6일) 여군 창설 61주년이라 합니다. 그동안 우리 여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군은 결혼도 못하고, 아기도 못 낳던 과거와 달리 이젠 어느 덧 장성까지 배출하고, 여군 ROTC가 창설되는 등 군 조직의 리더로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군의 현실이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글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다만, 저는 오늘 이 글에서 여군 복지 일반을 다루려 하지는 않습니다. 제 블로그의 성격에 맞춰 '군대내 성폭력 문제'에만 집중해볼 까 합니다.

비일비재한 여군에 대한 성폭력-피해사실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할 수조차 없어..

제 지인 중 한분의 여동생이 여군이었습니다. 제 지인 역시 여성임에도 남성과 같은 체격과 터프함을 자랑하는데요. 그 분의 여동생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훈련을 나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합니다. 화장실에 갔는 데, 갑자기 화장실 아래서 손 하나가 불쑬 튀어나오더라는 겁니다. 그것도 거울과 함께 말이지요. 다행이 현장에서 범인은 검거되었다 하는 데, 이 분은젊은 장병들 인생을 생각해서 선처해 주었다 합니다.

그러나 군대에서 여군은 이보다 더한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곤 합니다. 한겨레 21의 보도에서는 여군들의 생생한 증언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기사에 따르면 술자리에서 이른바 '술 따르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강제로 입맞춤 하려다 징계받은 간부가 있으면 '이런 일이 또 있네?'라며 무덤덤할 지경인가 봅니다.

문제는 대다수 여군들이 다양한 성폭력을 경험하면서도 군조직의 특성 즉, 수직적이고, 매우 조직적인 모습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한채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
성폭력 피해 여군들은 자신이 이같은 피해를 입고도, 지휘관이 자신에 대한 평정을 쓰는 사람이기에 누가 문제제기를 할 수있겠냐는 하소연이 나오곤 하지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자료(2004)를 봐도 성희롱을 문제삼으면 결국 피해자인 여군만 손해를 볼 뿐이란 문항에 36%가 그렇다고 하였고, 47.5%가 대체로 그렇다는 응답을 하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제가 늘 강조하듯 사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행실 등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군대에서는 이같은 통념이 더욱 성립될 수 없지요. 늘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조직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조직내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늘 조직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경직된 상황이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권력구조의 문제라는 거지요. 피해자가 마음놓고 피해사실을 호소하고, 또 이것이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구조적인 보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여전히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는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도 따로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대면하지 않을 수 있도록도 해주며, 조사과정에서 역시 여경이나 사회전문가가 함께 동석 또는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당연히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도 따로 없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직접 대면하기 쉽상이며, 조사과정에서 역시 군대의 특성상 사회의 전문가가 함께 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사회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이른바 '지휘체계문란'으로 징계사유가 될 수도 있지요.

또한 문제인것은 재판과정입니다. 군대는 심판관이란 제도가 있는데요. 법관이 아닌 일반 군인도 재판에 참여하고, 이들이 판결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심판관의 영향이란게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가해자와 잘 아는 경우도 있고, '동기문화'가 발달한 군대에서 이렇게저렇게 연통을 넣어 주는 것이지요. 상식적으로 재판을 법관에 의해서 진행하지 않고, 일반 군인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게 이해되지 않지요.

군대, 성폭력 추방의 선구자가 되어라

군대에서 성폭력 문제를 없애려면 첫번째로 '양성평등 문화'를 위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여군에게만 교육을 시킬 게 아니라 함께 남여군을 함께 교육해야 하며, 주된 가해자인 장교급 이상에서는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현재 사회에서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1년에 1회 이상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듯 군대에서도 (기왕이면 사회전문가를 초빙해)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성을 '여자'만이 아닌 '동료'로 볼 수 있고, 상대방을 이해 및 배려할 수 있는 '인권 감수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왜곡된 남성성을 그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총은 자기 애인 다루듯 부드럽게 다뤄야 한다' 거나 '남자가 그 정도도 못 참나?' 등 왜곡된 남성성에 기인한 교육이 여전히 팽배한 지금의 군 문화는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부당한 대우나 가혹행위를 당했을 때(특히, 성폭력은) 손쉽게 그 처지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세번째는 다양한 방식의 성교육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군대는 고립된 장소에 매우 많은 이들을 수용하는 가장 경직된 계급구조를 가진 조직 중 하나입니다. 또 우리 나라 국민의 절반이 의무적으로 거쳐가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훈련병 시절부터 제대를 할 때까지 다양한 형태 예를 들어 워크숍이나 역할극 등의 방법론을 통해 기본적인 개념부터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네번째로 성군기 위반 '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바라보며 가해자 관리를 강력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솜방망이 처벌만이 존재하고, 교육과 치료가 없는 부실한 체계 속에서는 가해자가 또 다시 재범을 할 확률이 너무도 높습니다. 따라서 가해자 처벌은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으며 이 후 교육과 치료 등이 꾸준히 병행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처우를 좀 더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는 직장에서 성희롱 피해자가 그 피해사실을 호소하고, 문제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용 및 근무환경상의 불이익을 주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군대에서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의 여성단체 등에 도움을 요청했다하여 처벌되면 피해자들은 더욱 고립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부당한 구조는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며

어제 청와대에서는 여군창설을 기념하고 격려하는 오찬이 있었다 합니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이야기 중 '여군이 늘어나면 군대 문화와 이미지가 개선되고, 군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이란 요지의 발언이 있었다 합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여군을 여전히 '군인'이 아닌 '여자'로서만 보는 관점이 깔려 있는 발언이니 말입니다. 도대체 여군이 늘어나는 것과 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지요. 경직된 군조직의 문화를 개선하고, 군 복지를 향상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여군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런지요.

다시 한번 강조하는바, 군대내 성폭력은 양성평등 문화를 전제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육과 훈련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절대 줄어들 수 없습니다. 특히, 장교급 이상은 남녀군을 구분하지 말고 인권감수성향상 교육이나 성인지력 향상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또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는 일은 최소한 없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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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에 대한 잡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번에는 고대 의대생 중 한명이 피해자에 대해서 악의적인 설문조사를 했다하여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기사참조 :
고대 성추행 의대생 피해자에 2차 피해). 저는 이 기사를 접하며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기본상식이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요즘 우리는 1차 가해에 대한 인식은 점차 확산되고 있으나 여전히 2차 가해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음을 보게 됩니다. 이에 오늘 저는 1차적인 성폭력 가해 이 후 진행되는 2차 가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시에 우리가 갖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의 문제점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1.피해자가 이기적이면 성추행을 해도되나?

성폭력 가해자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피해자에게도 범죄의 책임을 돌린다는 점입니다. 즉, 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피해자도 일정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 본인은 어쩔 수 없이 또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항변을 한다는 것입니다.피해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욕정이 일어 어쩔 수 없이 성폭력을 가했다 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번 고대 의대생 성추행 가해자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지요. 설문내용을 보면 '피해자는 평소 사생활이 문란했다 아니다' '피해자는 평소 이기적이다 아니다' '피해자는 사이코패스다 아니다' 라는 문항이 있었습니다. 문항내용이 피해자의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었고, 따라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측면 또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전형적인 성폭력 가해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가해자들의 생각은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논리로 따져봐도 한 사람의 행실이 이기적이거나 문란하다 판단하는 기준자체가 존재하지 않지요. 게다가 피해자가 이기적이거나 문란하다하여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에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매우 자의적인 아전인수격 해석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피해자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는 데, 이 때 가해자들이 순간적인 욕정이 일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주장하여 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무려 23차례나 카메라 등을 이용해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해자들의 이런 변명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비단 저만의 문제일까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해마다 발행되는 조사에 따르면 실제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아는 사람에 의한 경우가 최소 70%이상이며, 매우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이다.)

2.1차 가해만큼 무서운 2차 가해

'2차 가해'란 무엇일까요.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여성인권단체에서 ‘성폭력 피해로 발생하는 직접적인 신체적·정신적 후유증 이외에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에 의해 피해 생존자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피해생존자 스스로 심리적인 고통을 겪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이해가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피해자의 행동이나 옷차림을 문제 삼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 성폭력 사건을 신고ㆍ고소했을 때 조사과정에서 성경험 등을 질문함으로써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는 것 등을 대표적인 2차 가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나라 현행법에서는 2차 가해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나 처벌규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이에 대한 인식자체가 전무한 실정이지요. 하지만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는 등 최근 이에 대한 경각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물론 여전히 매우 부족).

이같은 추세는 2차 가해에 의한 피해자의 피해호소가 1차 가해 못지 않다는 데 기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조두순 사건(이른바 나영이 사건)'을 통해 2차 가해의 무서움을 쉽게 확인할 수 있지요. 당시 피해아동은 가해자는 물론 검찰, 심지어 재판정에서조차 끊임없이 사건을 재진술해야하는 등 2차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그 때마다 참혹했던 범죄현장을 되새김질 했어야만 했지요. (직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성희롱의 경우 피해자의 문제제기 후 피해자가 오히려 회사내 왕따가 되거나 대기발령이 나는 등의 2차 피해가 끊이질 않고 있다)

3.가해자가 떵떵대는 이상한 사회

끝으로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해자는 아무말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데 반해 가해자는 매우 떵떵거리며 자기 할말을 다 한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가해자들은 고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피해자의 초상권 침해에 대한 처벌만 받게 다는 등의 글을 게시하였고, 이번에도 피해자를 두번 울리는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피해학생은 숨어지내야만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이지요. 분명 죄를 지은 사람이 있는 데,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더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모습이 말입니다. 물론 성폭력 피해사실을 주변에 알리며 사건순간의 아픈 기억을 되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사회 역시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사실 때문에 고립되거나 불이익을 받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정리하며

저는 오늘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피해자의 행실 등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2차 가해의 문제점, 성폭력 가해자의 일반적 특징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문득 예전에 모 개그맨이 '그건 나를 두번 죽이는 거예요' 라고 얘기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론 이는 개그이기때문에 쉽게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성폭력 2차 가해는 전혀 다릅니다. 정말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 되고, 실제 얼마전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재판도중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성폭력 2차 가해는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한 인지가 증대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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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반가웠습니다. 아내가 전한 뜻밖의 소식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너무 행복한 소식이었습니다. 참 기뻤지요. 큰 아이는 엄마 뱃속에 동생이 왔다면 너무 기뻐했고, 이제 17개월짜리 둘째는 왜 웃는지 이유는 아는지 연방 미소를 띄었습니다. 친척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머님이나 아버님 그 외 많은 친척 어르신들께서 축하를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걱정어린 조언과 시선도 많았습니다. 역시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앞으로 세아이의 양육비 부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이 걱정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나라 출산보조 정책은 문제가 있습니다. '출산 후 양육에 대한 지원'보다 '출산 자체를 위한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돈' 줄 테니 애 낳으라는 출산 보조금 제도이지요. 물론 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낳으나 출산시 드는 비용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로 양육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다 실질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과거 저희 집 차량은 i30였습니다. 저희 네 식구가 타기에는 매우 적절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하나 더 낳오면 카시트를 설치할 공간이 마땅치 않지요. 결국 SUV나 RV로 차량을 바꿔야만 합니다. 최소 7명 이상이 탑승할 수 있는 차량이어야만 합니다. (아시다시피 5인승짜리 SUV는 승용차나 별반 다를 게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차량들의 배기량이 하나 같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차량세금은 배기량에 따른 기준부과방식입니다. 저희는 7인승 쏘렌토(2.5)로 바꿨는데요. 세금이 1년에 50만원 이상 부과됩니다. 이것만이 아니지요. 건강보험료 역시 배기량에 따른 부과가 있어 저희 집 건강보험료 앞자리 수가 갑자기 바뀌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차와 관련해 정부가 자랑하는 또 다른 정책으로 취등록세 면제 제도가 있지만 차라는 것은 처음 구입할 때보다 구입한 이 후가 더 문제란 것입니다.
 
이 밖에도 난감한 마음이 들게 하는 부분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현재 정부는 대출금리 등에 있어서도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희 같은 서민이 갑자기 엄청난 돈을 빌려 집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기적인 회사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라 승진 가산점이란 것도 그림의 떡에 불과하지요. 출산 육아휴직이란 것 역시 직원복지가 잘 갖춰진 일부 기업에서 정규직에게만 적용되는 얘기일 뿐 저희 같은 비정규직 근로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제 아내는 내년 출산 후 직장을 그만 둘 예정입니다).

또 다른 셋째아이 혜택으로는 다자녀 카드 같은 게 있습니다. 각 기업과 연계해 혜택을 주는 카드인데요. 예를 들어 0 마트에서는 포인트가 두배로 적립되는 혜택이 있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년에 한 1만 포인트나 될까요? 이미 두 아이의 양육을 위한 지출 자체가 부담이 되고, 신생아에 대한 부담까지 늘었는 데, 이런 혜택이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런지요.

그나마 좀 괜찮은 것은 저기요금 감면 혜택입니다. 현재 약 20% 정도 할인해 주는데요. 아이가 셋이다보면 에어컨이 필요한게 사실인데, 이런 점에 있어서 상당히 괜찮습니다. 일단 삶에 직접 연관되는 부분이고, 지속성 있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자녀 가구에게 혜택을 주려면 이런 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산 자체를 장려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출산 후 어떻게 양육을 국가가 보조해 줄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볼 것은 우리 나라 지원정책은 지자체별로 천차만별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국가가 기본적으로 잡아놓는 틀이 명확치 않다는 거지요. 이러한 지원과 관련해 제가 제안하는 몇 가지 정책이 있습니다. 만약 이 글을 정책 담당자가 본다면 좀 참고해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우선, 보육료 지원에 대한 부분은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추진하는 셋째 아이 이상 전액 지원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차량 세제혜택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아이 이상부터는 7인승 또는 9인승 차량에 있어(12인승부터는 차가 너무 커서 아내가 운전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발생) 일정부분 할인혜택이 있어야 하며, 건강보험료 역시 할인될 수 있어야 합니다. 차량 세금 수십만원이 올라간 것도 서러운데, 건강보험료까지 올린다는 건 너무한다 싶습니다(건강보험료 지원이 있으나 차량 교환으로 인한 증액에 비해 턱없이 낮음).

세번째로 병원비 지원이 있었으면 합니다. 임신 했을 때야 고운맘 카드가 있으니 아내에 대한 부분은 해결됩니다. 하지만 출산 후 드는 엄청난 병원비는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세 아이가 번갈아가며 아프기 시작하면 어쩔 때는 일주일 내내 병원을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고운맘 카드처럼 일정금액을 지원하는 카드를 제작하면 될 것이라 봅니다). 

끝으로 (부산시처럼) 학교 교육에 있어서 급식, 학비 지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원비야 각 가정에서 해결할 사교육의 영역이라해도(실제로는 이게 가장 부담!!) 적어도 공교육에 있어서는 지원이 있으면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공교육, 생각보다 드는 돈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대학 진학 후를 생각해 보면 정말 답이 안 나옵니다.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문제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출산과 양육 역시 모두 '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저출산이 되어 가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오늘의 경제적 불안정성에 기인한 것이겠지요. 나 혼자도 건사하기 힘든 사회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출산장려정책은 출산 그 자체에 대한 장려가 아닌 출산 이 후의 삶에 보다 초점을 맞춰야만 합니다. 지금처럼 해서는 김주원(시크릿가든) 정도 되는 소득수준이 아닌 이상 모두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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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계속되는 군 관련 문제 속에 성폭력과 관련한 보도가 눈에 띕니다. 이른바 '성군기 위반사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군 인권센터에 따르면 일주일에 1건씩 군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활관과 복도, 체육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발생유형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는 사병간에서 뿐 아니라 간부와 사병, 간부와 간부끼리도 일어나고 있어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군대에서 이런 성폭력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남자들만 모인 곳' 이란 얘기나 '혈기왕성한 청년들을 모아 놨기 때문'이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많은이의 믿음과 달리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저는 그 이유를 밝히며 글을 작성해나가고자 합니다.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성폭력이 일어나는 맥락입니다. 흔히 사람은 이성이 있는 동물이라 합니다. 그렇지요. 배가 고프다하여 길거리에 있는 음식을 훔쳐 먹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합니다. 차를 타고 가며 소변이 마렵다고 차안에 모두 소변을 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성충동이 일어났다하여 성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즉, 성충동이란 것이 성폭력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할 수 있기에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성폭력은 사실 경직되고, 수직적인 권력구조 속에서 자주 일어나곤 합니다. 군대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군에서는 나이나 학벌 등이 필요 없습니다. 고립된 곳에서 수직적인 질서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고, 하급자는 상급자의 행동을 반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급자는 하급자를 손쉽게 지배 및 통제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조가 우선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같은 환경조건은 성군기 위반사고가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성군기 위반사고 중 무려 48%가 불기소 처분되었습니다. 피해자가 무력감을 느끼고 성폭력을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그러나 반대로 가해자는 더욱 마음놓고 성폭력을 가할 수 있는 조건들입니다. 여기서 만약 성폭력 가해자가 직속 상급자 또는 간부일 경우는 더욱 어렵지요. 어디서 하소연할 수가 없게 됩니다.

두번째 문제점은 군대내 성교육 시스템에도 있습니다. 어떤 군 관계자는 우리 나라에서 군대만큼 성교육을 많이 시키는 조직도 없을 것이라 얘기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횟수가 아닌 교육진행방식과 내용입니다. 만약 군대내 성교육이 집단적으로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일방적인 강의를 한정된 시간 속에 일회성으로 진행하게 된다면 이는 사실상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교육은 그 특성상 매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또 흐름에 맞춰 다차원적인 교육접근 방식을 통해 다회 교육으로 진행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교육은 단순히 '성'을 다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을 매개로 '인권''배려''평화''양성평등' 등 다양한 측면이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일방적인 전달로만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군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제시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럴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우리가 군생활을 잘 하기 위해 선택하고 만들어가야할 문화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며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단계별로 수차례에 걸친 소규모 집단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군대내 성폭력 사건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왜곡된 남성성을 그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총은 자기 애인 다루듯 부드럽게 다뤄야 한다' 거나 '남자가 그 정도도 못 참나?' 등 왜곡된 남성성에 기인한 교육이 여전히 팽배한 지금의 군 문화는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부당한 대우나 가혹행위를 당했을 때(특히, 성폭력은) 손쉽게 그 처지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두번째로 다양한 방식의 성교육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군대는 고립된 장소에 매우 많은 이들을 수용하는 가장 경직된 계급구조를 가진 조직 중 하나입니다. 또 우리 나라 국민의 절반이 의무적으로 거쳐가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훈련병 시절부터 제대를 할 때까지 다양한 형태 예를 들어 워크숍이나 역할극 등의 방법론을 통해 기본적인 개념부터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성군기 위반'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바라보며 가해자 관리를 강력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솜방망이 처벌만이 존재하고, 교육과 치료가 없는 부실한 체계 속에서는 가해자가 또 다시 재범을 할 확률이 너무도 높습니다. 따라서 가해자 처벌은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으며 이 후 교육과 치료 등이 꾸준히 병행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처우를 좀 더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이란 이유만으로, 또 부모님 등이 걱정하실까봐 등 다양한 이유로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치료하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관리대책을 좀 더 전문가와 함께 세울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일단 피할 수 없는 곳이 군대이고, 최근에는 여성도 많이 입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게다가 군대는 한번 계획을 세우면 체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조직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군대는 성문제가 가장 많이 생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성문제를 가장 모범적으로 해결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군대가 음침하고, 무서운 곳이 아니라 좀 더 친근하고,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성숙해질 수 있는 (특별히 성문제에 있어서도) 조직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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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남자다운 것인가?

요즘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오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보면 극중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에게 차 안에서 소리치는 장면이 나오지요. 자기랑 같이 살건지 죽을 건지 말하라 소리를 지릅니다. 또 이 장면을 그대로 따와서 무한도전의 모 개그맨은 '죽을래 사귈래'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지요.

어제 해피투게더를 보다보니 또 비슷한 맥락의 모습이 나옵니다. 방송에 출연한 모 개그맨은 함께 출연한 여배우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거침 없이 몸을 만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얼굴을) 쳐주는 게 멋진거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지요.

물론 위 드라마는 극의 흐름에 따라 최대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는 것이였을 겝니다. 또 아래의 예능프로 역시 웃자고 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고민이 됩니다. 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매우 일방적이고, 마초성이 강한 모습을 남자다운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요. 반대로 왜 여성은 이럴 때 가만 있거나 그냥 '가세요' 정도만 해야하는 것일까요.

남성성과 여성성은 늘 변해왔다

소위 말하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이란 것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늘 변화해 왔습니다. 때론 통통한 여성이 미의 기준이 될 때도 있었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나 성적 욕구를 표현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남성 역시 모든 걸 책임지며 꼭 '바깥 일'만 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소리를 잘 지를 필요가 없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것은 사실상 얼마 되지 않은 것이며 이것을 굳이 따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21세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실상 '한물 간' 사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현재 이른바 '선진국' 그룹은 양성평등을 국가 경쟁력 확보와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필수적 과제임을 인식하고, 각 종 정책과 사회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당연히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반성이 있고, 성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소질과 흥미, 적성에 맞는 일과 캐릭터를 개발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지요.

허나 우리는 여전히 여자 아이는 핑크, 남자 아이는 블루를 가르칩니다. 여자 아이는 늘 치마를 입으며 '선머슴아' 처럼 뛰어다니지 말라 집안의 어른들이 훈계를 하십니다. 저는 무려 20년을 넘게 공직생활에 있던 7급 공무원이 자기 팀장에게 커피를 타다 바치는 모습 역시 많이 보았더랬지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야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관념은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전세계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각 국의 문화와 사상이 교류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성역할'에 대한 부분은 우리 모습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성의 경계를 허물고, '양성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병대 사건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해병대의 여러 사건 속에 저는 왜곡된 남성성 역시 굉장히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합니다. 가령 성매매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수열외를 당해버린 병사의 사례는 그 극명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사관은 구타를 금지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사병들에게 왕따를 당해 상담을 하기도 했지요.

모두 전형적인 '남자다움'에 대한 오해 속에 나온 것들입니다. 여성을 많이 거느리거나 성경험이 많은 남성, 구타를 참아낼 줄 알아야 남자다운 것이라는 왜곡된 인식이지요. 미군을 보면 구타를 없애고, 수직적인 질서가 아닌 프로의식과 자율적인 팀웍 형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강군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군문화 즉, 왜곡된 남성성에 기반한 문화로 21세기를 끌고가려 하니 끝없이 문제가 나오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양성성을 개발한다는 것은

제가 양성성이 잘 갖춰졌다 생각하는 분 중 한분이 '차인표'씨입니다. 차인표 씨는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선이 굵은 연기를 많이 하시지요. 그 분의 외모부터가 남성미가 물씬 넘치기도 하구요. 각진 턱선과 엄청난 근육.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차인표 씨가 가정에서 생활하는 모습이나 어린 아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게 되지요.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연출이 아님을 '입양'을 통해 직접 보여주고도 있구요. 

또 다른 예로 저는 채시라 씨를 들기도 합니다. 채시라 씨를 보면 우선 참 훤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요. 특히, 이 분의 젊은 시절 미모는 우리 나라를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채시라 씨가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 의 모습이 물씬 풍겨납니다. 매우 철저한 자기 관리와 개발의 모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양성성을 개발한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남성도 여성성을 개발하며 여성성의 측면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여성도 남성성을 개발하며 남성성의 측면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남성과 여성이 화성과 금성에서 온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닌 서로 하나될 수 있고, 어울려 더불어 사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리하며

저는 위 방송에서 나온 모습을 이해합니다. 드라마이고, 예능이니 그랬겠지요. 그러나 이것을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곤 합니다. 또 이러한 고정된 성역할을 주장하는 분들과도 자주 논쟁을 벌이곤 합니다. 이러한 관념이 우리의 정신사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이나 문화의 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마초 같은 남자나 현모양처 같은 여자라는 캐릭터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것을 감지해야 하고, 이에 따라 우리 아이들의 교육부터 군대 문화에 이르기까지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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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열외, 왜곡된 남성주의


한겨레 신문을 보다보니 성매매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수열외' 당한 해병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사회의 왜곡된 남성주의를 개탄하게 됩니다. 너무도 광범위하고, 우리 아이들이 매우 어릴 적부터 이렇게 교육받고 있다는 것은 더욱 문제입니다.

가령, 우리는 흔히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라' '사내자식이 그것도 못 참아' '총은 자기 애인 다루듯 하여라' 등의 이야기는 왜곡된 남성주의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문구들입니다. 사실 남자만이 아닌 누구나 뭐든지 한번 일을 시작하면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겠지요. 남자도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괜찮고, 총기관리를 신중히 하는 것은 굳이 자기 여자 애인 얘기를 하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해병대 기수열외 사건의 이면에는 '남자는 이래야해'라는 가부장주의에 기초한 왜곡된 남성주의의 한계가 남성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해병대에서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군대도 양성성 또는 양성평등 의식을 함양해야...
 
저는 우리 사회가 한단계 성숙하기 위해서는 양성평등 의식을 함양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게 됩니다. 남성이지만 여성성을 동시에 고루 갖춰야 하고, 여성이지만 동시에 남성성을 고루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여자 같은 남자를 만들거나 남자 같은 여자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양성이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그 감수성을 기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무엇을 하든 양성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 줄 아는 그래서 서로 차별하지 않고, 동등할 수 있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학습을 하고, 능력을 배양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만 강한 조직력이 나오고, 갈등이 생겼을 때 원활히 해결해갈 수 있으며, 동시에 강한 추진력도 얻을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더 느리고, 덜 효율적인 것 같지만 이렇게 조직문화를 행복하게 바꿔가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우정을 쌓아가는 게 종국에는 더 효율적이며 강한 응집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군대는 '남성성'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터프해도 좋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되지 않지요. 예를 들어, 군기를 폭력으로 잡는다는 생각 같은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타나 폭언은 일시적으로는 순종하게 만들 수 있어도 근본적인 동기부여나 자발적 복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소위 말하는 대표적인 '남성성' 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또 다른 예로는 여군간부 비율도 들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자 ROTC는 이제야 시작되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합니다. 사관학교의 경우 예전부터 여자 후보생을 선발하였으나 전체적인 우리 나라 여군 간부비율은 3.5%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는 여군 자체가 적은 것도 있겠으나 여군으로 입대하여 진급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수많은 기업이 여성 간부비율을 할당해 집중 육성하는 것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문화를 선도하는 조직이 되기를

저는 이참에 군대가 한국 사회의 양성평등 문화를 선도하는 조직이 되면 어떤가하는 바람을 가져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 군대는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각 종 기술교육부터 전투력 강화를 위한 정신안보교육까지 종류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효'나 '가족사랑'에 대한 것이 있지요. 아마도 군생활에 동기부여를 위해 도입한 것일 겝니다.

그렇다면 군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양성성 개발교육도 할만 합니다. 소위 '여성성' 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참고 : 저는 '남성성' '여성성'으로 규정된 것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갈등을 인식하고, 대화로 해결할 수 있으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서로 힘이 되어주는 교육. 조직력 강화를 위한 부드러우면서도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리더쉽. 남군과 여군이 동반성장할 수 있는 제도개발과 의식함양 등 교육 할 수 있는 분야와 방법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군대가 '마초'를 기르는 집단이 아닌 이 사회의 참된 일꾼을 양성하는 집단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최소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기수열외 시켜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지요.
 
정리하며

인생에 있어 가장 예민한 시절이 바로 20대 초반입니다. 많은 고민을 하고, 이 때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진로가 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 때 어떤 교육을 받고, 경험했느냐는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남성은 모두 군대를 가게 되고, 이곳에서 공통된 경험 즉, 남성성을 극대화시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군 조직력이나 전투력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지금이야말로 양성성 또는 양성평등 교육을 도입할 시기가 아닐런지요. 그래서 최소한 여성을 성적 노리개나 대상으로 보지 아니하고,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가며, 리더쉽이 단순히 '나를 따르라'만 있는 게 아님을 알기만해도 우리 군대나 사회는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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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던 강00 의원. 강 의원의 성희롱 발언이 알려지자 당시 국민여론은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상식이하라는 거였지요. 그러자 정치권의 움직임도 빨라졌었습니다. 야당 특히,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강의원을 강하게 비판하며 나섰습니다. 한나라당 역시 예외는 아니여서 즉각 강의원을 제명시키겠다 했었지요.

하지만 이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국회 윤리심사특별위원회를 통과한 제명안은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어제(30일)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야 원내수석부대표가 제명안을 상정하지 말자는 의견을 모으면서 무산되고 만 것입니다.

성희롱에 관대한 사회

성희롱은 생각보다 피해자의 아픔이 매우 큰 행위입니다. 여야는 이게 별거 아니라 생각했겠지만, 정작 피해자들의 심적 고통은 말로 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성희롱 때문에 대인 기피증을 앓거나 (주로 가해자가 남성이기에) 남성 혐오증을 앓는 피해자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희롱 때문에 자살에 이르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지요. 그만큼 성희롱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가해자'의 편에서 생각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걔 옷차림을 보면 당할만도하지' '뭐 그렇게까지 문제를 만들 필요야...' '가벼운 성희롱' 이란 식의 사고가 팽배한 거지요. 옷차림이 어떻다한들 그것이 성희롱을 당해도 되는 존재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희롱을 가벼운 농담이라 생각하고, 이게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 자체가 가해자식 사고로서 2차 가해가 나타나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희롱에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성희롱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피해를 호소하면 오히려 그 피해자를 문제시 합니다. 반면, 가해자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사람이 아닌 데' 라며 옹호하지요. 하지만 성희롱은 '그럴 수도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며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성희롱을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관대함이 강의원 제명안 무산의 배후에 작용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성희롱 관련 법률의 한계

이런 관대함은 법률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현행법은 성희롱을 통해 형사처벌까지 시키지는 않습니다. 일단 성희롱 관련 규정 자체가 구체적으로 명시된 곳이 '남녀고용평등법'입니다. 이 법에서 성희롱을 인정하는 범주는 직장과 업무와의 연관성이 있을 때로 국한 됩니다.

하지만 성희롱은 '성'을 매개로 한 '폭력' 행위이므로 명백한 '성폭력'입니다. 강제추행이나 성폭행은 물리적 폭력이나 위협이 동반되는 데 비해 성희롱은 권력이나 지위라는 무형의 폭력과 위협이 동반되는 것 뿐입니다. 말하자면 분명히 '성폭력'의 범주에 속하는 범죄행위라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이나 독일의 경우는 성희롱을 성폭력의 범주로 인정하며 폭넓은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성희롱이 '남녀차별' 이란 점만 우선적으로 부각되며, 성희롱의 범죄적 측면은 쉽게 생각하는 합니다. 그래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이같은 데는 성희롱 문제가 제기되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 포스팅 할 수 있도록 하지요)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성희롱 예방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최소 65%이상의 기업이 실시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자료마다 다르나 최소 65%이상). 노동부 역시 이를 관리, 감독해야하지만 인력의 한계를 들어 제대로 실태조사조차 하지 않고, 과태료 부과도 하지 않고 있지요.

또 성희롱 예방교육을 간단한 자료를 돌려보거나 동영상을 트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늘 보던 자료를 또 다시 보는 경우가 많아, 상당히 지루해하게 됩니다. 또 실질적인 사례를 보고 들으며 생생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한계도 있지요. 만약 회사 사정이 있어 이렇게 자체교육을 해야한다면, 기왕에 하는 거 다양한 사례 조사도 해보고, 각 상황에 따른 대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기업에서는 이 시간을 낭비라 여기기보다 분위기 좋은 직장문화를 만드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거지요.

끝으로 좋은 외부강사를 초빙하려면 우선 이 분이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인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성희롱 예방교육의 전문가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나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등과 같은 기관에 전문강사로 위촉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한번은 여성 강사, 한번은 남성강사 이런 식으로 초청하는 것도 좋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선생님들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눈을 번갈아 보며 균형잡힌 시각을 찾아가는 것도 좋지요.

정리하며

성희롱은 피해자에게 매우 큰 상처를 주는 범죄행위입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내실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또한 성희롱을 '가볍게' 보는 인식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성희롱 피해자들의 상처는 생각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저는 관련법률의 적용이나 해석이 좀 더 폭넓어 질 필요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성희롱에 대한 형법적 규정이 따로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성희롱은 분명한 남녀차별이고, 이를 개선해 나가는 운동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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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이슈가 되었던 '개념 없는 중딩들'이 또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이 학생들은 처음 부임한 여선생님을 상대로 '성희롱'을 한 혐의를 받으며 공분을 샀던 사건인데요. 어찌된 연유인지 갑자기 인터넷에 해당 동영상이 불길처럼 번지며 각 종 포털 사이트마다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창시절 좋아하는 선생님 또는 순한 선생님을 놀려본 적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겠습니다만 이 경우는(이번에도) 수치심을 느낀 선생님의 제재 마저도 너무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 도가 지나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또 우리는 이 문제의 처리와 함께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저는 작년에 썼던 글을 수정보완하며 이 사건을 다시금 논해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성희롱 사건으로 처리될 수 있을까?


우선, 이 사건이 많은 분들의 생각처럼 성희롱으로 처리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성희롱 특히, 이번처럼 직장내에서 일어난 성희롱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피해자가 어떻게 느꼈느냐'만 보는 건 아니란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어난 성희롱이 성립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피해자가 어떻게 느꼈느냐는 피해자의 판단(관련글 : 피해자 중심주의란 무엇일까?), 두번째는 가해자의 존재, 세번째는 매개체 즉, 지위나 직장내라는 조건. 마지막으로 그에 따른 결과물 즉, 고용이나 승진 등에 지장이 생기거나 고용환경이 악화되는 것 등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따라서 이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학생이란 점이 상당히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직장내 성희롱 사건으로 처리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하지요. 또한 문제제기 할 수 있는 기한을 넘어섰다는 한계 역시 존재합니다.

물론 형사처벌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특히, 동영상을 유포했던 사람의 경우 특정 영상을 유포하여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기만 한다면 이는 공소시효 5년 이내이므로 처벌이 가능합니다. 기타 다른 학생의 경우 모욕죄의 공소시효가 1년 이내이므로 처벌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성희롱인가 아닌가를 묻기 전에


그런데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학생들의 처벌을 논하기 전에 그 이면에 깔린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것은 성희롱이 맞다 아니다'에 빠져버리거나 '이 학생들이 어떻게 처벌될까?'라는 호기심으로 접근하면 사건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사건을 처리 또는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지점을 함께 생각해 볼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가해 학생들의 성의식의 수준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성교육을 진행하면서보면 학년이 올라갈 수록 자신들은 모든 걸 안다 생각하는 학생들이 증가합니다. 하지만 막상 테스트를 해보면 점수가 형편 없는 걸 보게 됩니다. 즉, 우리 학생들의 성지식이 매우 부정확하고, 나도 모르게 성폭력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성지식이 부족하다보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정확치 않지요. 상대를 배려하고, 내 자신을 다스리는 의식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관련글 : 아동 성폭력 예방교육은 인성교육이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의식이 보다 함양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수준이 올라간다는 건 어느 한순간 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평소 꾸준히 교육을 받아 내면화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학교 등 공공교육기관에서는 보다 철저하고 꾸준한 성교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이미 수차례 말씀드렸듯 1년에 한번 1시간짜리 교육으로는 그것도 한번에 두세주제(예 : 양성평등+성폭력 예방)를 강당에 수백명씩 모아놓고 진행하는 것으로는 역부족입니다.(관련글 : 아동 성폭력, 1년에 40분짜리 교육으로 부족하다

둘째는 '엄함'이 없는 우리네 교육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체벌을 반대합니다. 또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강제로 밀어버리는 것, 억지로 교복을 착용하게 하는 것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 교육에 있어서 선생님의 '엄함'을 무시하는 것 역시 반대합니다. 말하자면 교육은 훈육의 차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딸아이 어린이집을 가보거나 교회를 가봐도 자기 자식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부모님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아이에게 너무 끌려다니기에 아이들이 부모님 무서운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행동에 제약이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다 청소년이 되어 덩치가 커지면 아무도 이 학생들에게 뭐라 하지를 못합니다. 인성교육은 학교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개념없는 중딩들을 욕하기 전에 내 가정은 어떤지 한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관련글 : 교권확립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끝으로 세번째는 '사람에 대한 예의'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실종된 것이 아닌가 매우 걱정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과 관련해서는, 자신보다 조금만 약하게 보이거나 낮은 위치에 있으면 너무도 쉽게 성희롱을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10대 청소년 연예인과 닮은 음란 동영상을 너무 쉽게 공유하며 즐기며 해당 동영상의 학생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관련글 : 당신의 관음증, 집단 폭력입니다). 말단 여직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성차별을 자행하면서도 '이게 왜 문제인가?'라는 반문을 합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사회적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겠지요. 특히, 성과 관련된 문제는 반드시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기본적인 전제는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권리는 '나'에 대한 권리 보장 뿐 아니라 '너'에 대한 권리보장이 될 때 즉, 사람에 대한 예의를 바탕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을 보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는 그 본질을 잊은채 배가 산으로 가는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리하며


'개념 없는 중딩들'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분명 다시금 훈육 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된 것에는 우리 사회의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고,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함께 보며 나아가야 상황이 개선되는 것이지 이를 놓친채 '이 아이들을 어떻게 벌줄 수 있을까' 만 얘기하는 건 흥미위주의 접근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의식의 함양을 통해서 그리고 가정교육의 재확립을 통해 사람에 대한 예의를 먼저 갖출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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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오는 법원의 성범죄에 관련한 판결에 대해 고개를 젓게 됩니다. 오늘 포스팅할 주제는 어제 보도된 70대 남성의 9세 여아를 성폭행 사건 무죄 판결입니다.

<사건개요>
이 가해자는 지난 5년여에 걸쳐 4차례 상습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 남성은 피해 여아의 장애인 부모가 일하는 과수원 주인이었는데요.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의 인상착의 등 성폭행 상황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어 강한 유죄 의심이 들지만 법원이 직권으로 병원에 의료감정촉탁을 한 결과, 피고인이 발기부전치료제를 복용하고도 발기가 전혀 되지 않는 점, 고령인 점 등을 볼 때 성폭행을 했을지 의심이 간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들었습니다.


물론 언뜻 보면 이해도 됩니다. 가해자가 일단 할아버지라는 거지요. 그리고 오랫동안 당뇨를 알아 발기부전 치료제를 먹고 나서도 발기가 안 되었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속에는 여러 함정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왜 발기가 안 되면 성폭행을 할 수 없다 생각하는가?

피해 여아가 노인의 성기에 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모종의 행위와 노출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일 겝니다. 또 피해 여아의 처녀막이 이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피해 여아의 성기에도 모종의 압박이나 액션이 취해졌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실제 피해 여아는 약 5-10여분간 성관계(정확히 말하자면 피스톤 운동) 이뤄졌다 진술했지요.

현행법상 강간은 피해여성의 성기에 가해 남성의 성기가 강제로 삽입되어야만 성립됩니다. 그런데 피해 아동은 피스톤 운동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진술하고, 처녀막이 이완되는 결과물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것으로도 증거가 불충분하다 여깁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구체적인 증거가 나와야만 하는 것일까요.

발기가 되지 않는다하여 성기 삽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피스톤 운동이 원활하지 않다해도 '성'을 매개로 '폭행'을 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2.고령자는 성폭행을 하지 않는가?

우선 이 사건은 가해 남성과 피해 여아의 권력구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피해 아동은 일단 겨우 9살짜리 아동입니다. 두번째로 피해 아동의 부모는 가해 남성 소유 과수원에서 일하고 있는 장애인 부부입니다. 말하자면 가해 남성에게는 절대적 약자이고, 가장 손쉽게 범죄 대상으로 선택될 수 있으며, 피해를 입어도 쉽사리 문제기를 할 수 없는 위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생각해볼점은 가해남성이 70대의 고령인 점이 성폭행을 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노인 강력범죄 발생비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성폭행 역시 예외는 아닌데요. 작년에 보도된 기사를 보니 성폭행범은 지난 2000년 94명에서 작년 2010년 기준 423명으로 4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즉, 고령이란 이유가 성폭행범의 무죄 판결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피해 아동의 진술에는 왜 신뢰를 부여하지 않는가?

아동 성폭행의 특징 중 하나는 피해 아동의 진술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동의 정신적 충격이 큰 것은 물론 법정에서 수차례 상황을 기억하고, 평상시에라도 '반복 진술'하는 것 자체가 아동에게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외국은 굳이 피해 아동이 법정에서 진술하지 않아도 비디오 진술의 효력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피해 아동이 상황을 꽤 구체적으로 잘 진술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인상착의를 성기의 점까지 기억하고 있고, 성폭행 상황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9세 여아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작은 실수로 아이를 다그쳐도 이 자체가 공포가 되어 아이의 말이 오락가락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의 위치나 자신의 상처를 넘어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과연 피해 아동의 단순한 진술이 아닌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에 신뢰성을 더 부여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가해남성의 진술에 더 신뢰성을 부여해야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는 앞서 고려한 증거를 참작할 때, 피해 아동의 진술에 신뢰성을 부여하는 게 더 옳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4.이해 안 되는 검찰의 일처리

끝으로 한가지 덧붙여, 저는 검찰도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가해 남성을 '성폭행' 만으로 기소했냐는 것입니다. 사건의 정황을 살펴볼 때 이 사건은 일단 '미성년자 강제추행'이 100%성립합니다. 그런데 이걸 빠뜨려서 결국 가해자에게 면죄부만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가해남성을 다시 강제추행으로 기소하려면 또 다시 피해 아동이 재진술을 해야하고, 법정을 오고가야 하겠지요(절대로 봐주는 건 안 된다). 그 오랜 시간을 지나며 이 아동은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될까요....이 아이가 살아갈 내일을 생각해 볼 때 눈물이 올라오는 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정리하며

여기까지 제 판단으로는 가해 남성이 성폭행범이라는 근거가 불충분 한 것보다는 성폭행범이 아니라는 근거가 더욱 불충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재판부의 판결을 쉽사리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검찰의 일처리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한번에 똑 부러지게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검찰이나 법원은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피해 아동과 가족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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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 거세 시행이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성범죄자들은 화학적 거세를 통해 성욕이나 성충동을 억제하는 시술을 받게 되고, 아마 정부나 정치권에서는 이를 통해 성범죄 특히, 아동 성범죄가 줄어들 것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두 딸을 둔 딸바보 아빠로서 성범죄 예방을 위해 뭔가 액션을 취하고 싶고, 정부의 분발을 촉구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화학적 거세 시행 한달을 앞두고 제 마음이 여전히 불편한 것은 왜 일까요.


1.성범죄는 '고환의 문제'가 아니다.

제가 가장 불만인 것은 성범죄를 고환의 문제로 보는 자세입니다. 화학적 거세의 요지는 결국 호르몬 조절을 통해 성욕 또는 성충동을 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범죄자들의 성호르몬 수치가 보통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또 7-10% 내외의 성범죄자에게만 확학적 거세의 효과가 있다는 연구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범죄라는 것 자체가 고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굉장히 심리적이면서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내면의 상처, 성인 여성 또는 동성간 친구들과의 사회성 문제, 사회적 고립, 변태 성욕 등이 모두 혼재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 징벌을 목적으로 화학적 거세를 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이를 두고 연세대 손 모 교수는 성범죄는 '뇌와 인격의 문제'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령 조두순 사건의 예를 한번 들어보지요. 우리가 만약 조두순이란 사람의 성기를 물리적으로 거세했다 가정해 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안심하고, 우리 아이들을 맘 놓고 뛰어 놀으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두순은 단순히 성기삽입만 한 것이 아니라 각 종 이물질을 피해 아동의 성기에 삽입하고, 각 종 변태적 행위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지요. 

2.화학적 거세, 제대로 시행할 자신은 있나?

화학적 거세 시행에 대해 제가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될 수 있냐는 현실적 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히) 이 제도가 성범죄자들에게 주사를 놓을 줄 아는 사람이 한달에 한두번 주사만 놓고 가는 방식으로 시행될 공산이 매우 크다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를 전문적으로 처리할 전문인력도 부족하고, 주무부서 자체가 법무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화학적 거세는 정신과적 치료가 병행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끊임 없이 가해자 자신을 돌아보고, 성감수성을 키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준비가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언론보도를 보니 의료계에서 하도 불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니까 이제야 선 치료 후 화학적 약물치료 라는 방식의 개정안이 나올 것이라 합니다.

게다가 더 웃긴 건 이 제도를 시행한 몇 나라가 모두 서양이기때문에 우리 나라와 같은 아시아의 현실에서 과연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요. 치료효과는 있을 것이며, 그 후에 부작용은 어떨까에 대한 데이터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이란 겝니다. 의료계의 지적을 들어보면 이런 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최소 5년은 필요하다던데, 우리는 사회적 분노와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결합해 졸속으로 제도를 시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왕에 할거면 좀 체계적으로 잘 준비해서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3.왜 피해자의 복지 얘기는 꺼내지 않는가?

가해자의 처벌도 좋습니다. 그런데 왜 피해자의 인권과 복지 얘기는 나오지 않는 걸까요. 얼마전 29세의 조선족 성폭행 피해여성이 재판도중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재판 과정을 통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꼭 풀어달라는 유서와 함께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법체계나 성폭행 처리절차가 얼마나 후진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전히 피해자가 왜 그 때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냐거나 평소 행실이 어떻다는 등의 피해자를 오히려 문책하는 방식 즉, 피해자 유발론에 근거한 사례가 많습니다.

또 다른 예로 치료와 관련한 것을 들수도 있습니다. 대개 성폭행 피해자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입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성폭행 피해를 입고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참으로 막막해 합니다. 다행이 원스톱 지원센터가 생기고, 해바라기 아동센터 등이 있지만 접근하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현재 원스톱 지원센터의 경우 각 도별로 1개씩 밖에 없습니다(서울 경기 2곳). 또 해바라기 아동센터를 비슷한 처지지요(전국에 10곳). 그러니 지방의 경우 한번 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하려면 부모님 중 하나는 사회생활을 아예 포기하고 하루종일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니 불만이란 것입니다. 왜 국민적 분노와 정치권의 포퓰리즘 때문에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가해자에게 약물을 주입하며 징벌만 하려하고, 정작 우리가 신경써야할 피해자의 인권과 치료에는 이렇게 부실하냐는 거지요.

종합정리

저는 화학적 거세 한달을 앞두고 여전히 불만이 많습니다. 두 딸을 가진 딸바보 아빠이기에 성범죄 없는 세상을 꿈꾸고, 정부의 노력을 촉구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닙니다. 좀 더 치밀하고, 체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의 치료와 인권을 위한 배려가 좀 더 많이 보강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도 수고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지금처럼 한번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은 피해자를 두번 상처주는 일일 것입니다.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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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여성계는 화학적 거세를 환영하지 않을까 
: 양깡님의 '조두순 사건, 화학적 거세가 정답일까'
:               '의사들, 화학적 거세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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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결과를 볼 때마다) 우리 법조계의 성의식이 어느 정도 수준인가 의심스러워 집니다. 여고생 제자를 성추행한 교장의 영장이 기각된 사건 말입니다. 경찰이 cctv화면과 교장의 정액이 묻은 여고생의 옷까지 법원에 제출했는 데, 영장이 기각되다니 말이죠.

법원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결국 둘 사이의 합의가 있었으면 별문제 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성추행을 강제로 했는지 여부가 애매하고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의사에 반해서 처벌할 수 없는 죄)' 라는 이유를 들어 영장을 기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기사를 한번 참조해보시지요.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48&articleid=20110616092314261j3&newssetid=1270

1.학교장과 여고생과는 '합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가 누누히 강조하듯 학교장과 학생 사이의 관계는 '합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는 명백한 성폭력입니다. 피해 학생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성년자라는 것은 사회적 보호와 관심, 성장이 필요한 '무조건적 약자'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아이가 충분한 정보 속에서 충분히 성장한 후 자신의 순수한 의사에 따라 합의한 것으로 적용하는 데 무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이 아무리 성인 남성 또는 여성과 '합의'를 했다하더라도 '합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건은 사건의 가해자가 학교장이란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학교장 앞에서는 일반 교사도(심지어 남성도!) 작아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학교장은 학교의 최고 결정권자이며 동시에 가장 많은 권력을 소유한 자 즉, 말 그대로 학교의 '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겨우 17세짜리 여고생이 이 상황을 뒤엎고, 당당히 '하지 마세요'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이걸 피해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학교장과 여고생의 '합의'하에 이뤄진 '성관계' 또는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성폭력 행위' 로 보고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이 사건은 유사 성행위 후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성매매 특별법에 의한 처벌도 가능한 사안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3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19금 영화는 안되면서 성관계는 괜찮다? 현행법 정말 문제많다!

물론 법원의 말이 나온 맥락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닙니다. 현재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도 추행의 경우 반의사불벌죄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 자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동, 청소년에 있어서는 제가 위에서 밝힌 것처럼 '합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에 이 조항은 사라져야만 합니다. 
현행법상 만 13세 미만인 부녀에 대해 성행위를 하면 대가성이나 피해자의 동의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처벌합니다. 그런데 왜 이 기준이 청소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게, 왜 '부녀'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이 기준으로는 남자 어린이는 '성폭행'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외국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상당수의 유럽 국가는 만 16세 미만인 청소년과 성관계를 가지면 대가성이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처벌합니다.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소년에게는 19금 영화는 못 보게 하면서 성인과의 성관계는 '합의'만 하면 해도 된다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법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기준으로 '합의'했다는 것인가요. 독자님 같으면 내 자식이 '합의'했다고 말을 할 때 '그래 나는 네 의사를 존중해줄거야'라며 사건을 그냥 넘길 분이 계신가요? 저는 절대 못 그러겠습니다.)

3.피해 학생의 번복, 참 미스테리하다.

피해 학생은 갑자기 자신이 교장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니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게 미스테리합니다. 피해 학생의 보호자가 막 '합의'를 한 후에 나온 주장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의 정황을 보면 피해 학생이 누명을 씌웠다는 게 더 이해가 안되지요.

현재 학교장은 자신이 자위를 막 마쳤는 데, 그 때 학생이 들어왔고, 굳이 자신의 정액이 묻은 옷을 만지다 여고생의 옷에 정액이 묻은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황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것인지요. 그것도 1회성이 아니라 1년여에 걸쳐 수차례 반복된 행위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또한 문제가 되는 건 '합의' 자체가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사건은 앞서 잠시 언급했듯, 명백히 '청소년 성매매'가 성립하는 사건입니다. 청소년의 성보호에관한 법률은 ‘청소년의 성을 사는 행위’를 “청소년 등에게 금품 기타 재산상 이익이나 편의제공 등 대가를 제공하거나 이를 약속하고 성교행위 또는 유사성교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앞서 언급했듯 유사 성교행위 후 5만원이란 돈이 지급되었지요. 따라서 명백한 청소년 성매매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며

저는 법원의 이번 결정을 보며 이 참에 아예 법률 자체를 바꾸는 여론이 형성되면 좋겠습니다. 19금 영화는 못 보게 하면서 성관계는 허용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법체계입니다. 또한 이 여고생의 경우 피해 여고생의 부모가 합의를 했고, 자신이 교장에게 누명의 씌운 것이라 하는 데, 제가 볼 때 이 사건은 '성추행'은 물론 '청소년 성매매'까지 걸립니다. 끝으로 아동-청소년에게 있어 성인과의 성관계에서는 '합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점을 놓쳐버리면 우리의 아동-청소년의 성이 보호받을 수 있는 길(최소한 성인에게서)은 요원하고 말 것 입니다.

관련글 : 30대 여교사 사건, 합의와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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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여배우의 '가슴'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단 섹시 스타의 기본 조건으로 가슴을 먼저 꼽게 되었고 몸매 역시 가슴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지요. "착한 가슴" "베이글녀" 니 뭐니 하는 문구와 내용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연기자나 가수 데뷔 역시 가슴 마케팅을 먼저 시도하는 경우도 흔한 것 같고 말입니다.

가슴이 일종의 상품이자 자기 과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의미라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지 싶습니다. 수많은 남성팬의 관심을 받아야 먹고 사는 걸그룹 또는 여자 연예인은 가슴이 곧 돈이 되고 섹시스타로서의 기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가치부여가 '가슴'으로 상징되는 '외모'에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여자 연예인 뿐 아니라 일반 여성들도 '외모'에 집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가슴 사이즈나 몸매에 대한 남성의 열망은 상상 이상이니 말이지요. 늘씬하고 하얀 다리를 잘 드러내고, 큰 가슴을 보여주면 이제는 아예 새로운 개념의 '덕德' 이 생겼다며 '육덕'이 있다 하면서 취직도 잘 되고, 보다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날 수도 있다 하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여성비하 또는 차별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여성의 몸에 대한 규격화 되고 정형화된 이미지 덕에 이른바 "쭉쭉빵빵"한 일부 소수의 젊은 여성만이 아름다워졌고, 수많은 대다수의 여성은 섹시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여성이 되었으며,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여성은 자신의 몸이 볼품 없어졌다 여긴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배후에는 우리 사회의 여성의 지위가 숨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는 언듯 보기에는 '여성상위시대'로 보이지요. 가정에서도 엄마의 힘이 더 세고, 사회에서도 엄마의 입김이 장난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즉, 경제권이나 정치적 권력, 출산 후 사회진출, 기업내 임원비율 등을 보면 여전히 우리 나라는 매우 후진적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이 후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여성의 몸과 성을 매우 치밀하고, 교묘하게 상품화 시킵니다. 결국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뚱뚱해도 안되고, 쌍커풀이 없어도 안 됩니다. 키가 작을 수는 있으나 그러면 어떤 연예인처럼 오밀조밀하게 비율 좋은 몸매와 귀여운 외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성의 두세배가 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물론 남성도 참 많이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은 남성에 대한 폭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쉽사리 "착한 가슴"을 갖고 있는 여배우를 보며 환상에 젖어 판타지에 빠지게 되지요. 이는 여성의 몸을 대상화 또는 물화 시키며 여성의 몸에 대한 소유와 통제의 욕구를 강화시킵니다. 결국 여성을 상대로 배려나 존중보다는 일방성을 담보할 확률이 증대되구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을 증대시키고, 남성 스스로를 이중적인 모습에 빠지게 합니다.  

또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면 남자 취급을 못 받습니다. 키가 작으면 남자 축에도 못끼고, 야외에 나가면 힘도 잘 쓰면서 용감한 척도 해야 합니다. 숯불 한번 제대로 못 피우면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직장에서는 매일같이 야근에 술자리를 가져야만 하구요. 여직원 컴퓨터 본체나 포맷도 일일히 다해줘야 합니다. 또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무슨 남자가 쪼잔하게 그러냐'며 핀잔을 듣습니다. 이것 역시 정말 피곤하지요. 결국 양성간 성적차별과 격차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남자만 행복한 것도 아닌 매우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겝니다.

러니 참 어려운 얘기지요. 저도 딸만 둘인데, 이녀석들이 살아갈 인생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견하게 됩니다. 또 아들만 있는 분들도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지요. 우리 사회가 '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가부장적 개념에 빠져있는 이상은 그 누구도 쉽게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없을 겝니다. 이제 더이상 성평등의 문제는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트래픽이 너무 늘어 무슨일인가 했습니다. 다음 메인에 글이 실렸군요. 오랜만에 실린 거라 참 반갑고, 이곳에 방문하신 독자님을 환영합니다. 오늘 하루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앞으로 더 좋은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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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몸’에 대한 고민은 사실 저자의 집필 동기이기도 하다. "팔, 가슴, 어깨, 허리, 엉덩이, 허벅지, 다리, 손과 발,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얼굴의 부분 부분들.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자신이 그것들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심지어 혐오와 인정의 상태를 넘어서기까지 할 수 있을까." - 1996년 1월 26일 일기는 이러한 저자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란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유롭지 못함을 반성하며 저자는 ‘몸’의 역사와 이해의 역학관계를 역사적으로 성찰하고, 우리 삶의 영역에 적용하는 도식을 따라 책의 내용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책의 흐름은 굳이 여성학에 대한 전이해가 없어도 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런 구조는 자칫 내용이 장황하고, 거창해져 지루해지거나 부담스러워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현실의 구체적인 논쟁의 지점을 제시하고, 생생한 증언을 제시하며 우리의 주의를 끌고 간다. 예를 들어, 외모 가꾸기가 굳이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용되지만 이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 무게감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귀결되는지 밝히는 대목은 굳이 냉철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외모에 대한 저항이 봉쇄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 이것을 실제적인 증언들로 채우고 있어 이 책이 아카데믹하다는 느낌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받게 해준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상당히 진지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아쉬워진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저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마지막 줄에 ‘저항 없는 치유는 불가능하다’ 는 드라마틱한 명언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물론 10여년 전 출판되기도 했지만-‘몸’에 관한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국한하여 그 해결책으로 여전히 ‘저항’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책의 중간중간 남성의 문제를 함께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현실의 문제가 여성에게 직접적이고 보다 비중 있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양성평등 또는 성평등의 문제로 함께 남녀가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오늘에 있어 상호주체적 인식과 의식의 공유 없이 풀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전략적으로나 세계적 여성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도 약간은 미진한 대안이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독서를 마친 후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재미나다’라는 것이다. 분량도 적어서 넉넉히 세 시간이면 이 책의 독서를 마칠 수 있다. 더욱 좋은 것은 가격도 착한 데, 내용도 알차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고, 고민할 수 있는 문제를 해박하고, 전문적인 식견으로 풀어가는 책의 흐름은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한신의 후배들에게 꼭 한번 권하고 싶은 맘이 들게 한다.

부제 :「다이어트 성정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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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되는 인기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성희롱-성추행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는 드라마의 시청률이 30%를 넘나드는 인기와 더불어 한 언론에 의해 제기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수많은 네티즌이 반박 댓글을 쓰며 논란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논란을 보면서 '과연 저게 성추행이 맞냐?'라는 질문이 문제의 핵심인지 의문이 듭니다. 뭔가 우리가 함께 봐야할 부분이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이에 저는 오늘 이 글에서 세가지 지점을 제시하며 우리의 사유를 넓혀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는 언론의 역할입니다. 최근 시크릿 가든의 인기가 높아질 수록 드라마의 내용을 단순 요약하거나 '폭풍키스' 등의 이름을 붙여 흥미를 자극하는 기사를 자주 보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수많은 시청자들에 대한 일종의 '부담'과 '기대'가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비판 기사를 쓰면 된통 당할지도 모른다는 부담이 있는데 반해 기사제목을 잘 잡으면 엄청난 트래픽을 유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저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견제 또는 비판기사는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언론이 드라마에 대한 아무런 비판이나 견제 없이 그저 앵무새처럼 내용을 반복하고, 홍보하는 모습이 언론의 역할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한 두 언론쯤은 다른 언론이 보지 못하거나 문제제기 하지 못한 것을 두고 비판을 가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래서 이런 논의를 진행해보고, 한번 더 성폭력이나 언론, 미디어의 영향력 등을 생각해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굳이 이런 논란 자체를 쓸데 없거나 무의미하다 치부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영상매체가 끼치는 영향력입니다. 드라마 속 길라임은 늘 김주원이 키스하거나 포옹하려 할 때 처음에는 거부하다 결국 그대로 몸을 맡기는(?) 모습을 보이곤 하지요. 이는 성폭력 범죄자들이 주로 갖고 있는 통념입니다. 또 이른바 '야동'에서 자주 나오는 모습이기도 하지요. '안 되요 되요 되요 되요...' 라고 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30%를 육박하는 시청률을 보이며 젊은이들에게 폭풍적인 인기를 몰고 있는 드라마에서 여과없이 방영되는 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드라마일 뿐 인것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라해도 성희롱 또는 성추행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라는 명제가 언제나 참이 되려면 '드라마가 대중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과 '대중은 늘 이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왜곡하거나 가학적인 장면 등이 나왔을 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지요.

영상매체가 끼치는 영향력 특히, 대중에게 매우 인기 있는 스타가 아름다운 장면과 함께 연출한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따라서 쉽게 무시할 내용은 아니지요. 좀 더 세밀한 주의는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세번째는 고정화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부분입니다. 드라마 속 길라임은 첫 회에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차를 타고 도주하는 소매치기범들을 자전거를 타고 뒤쫓아 격투 끝에 대여섯명을 모조리 제압하여 버렸지요. 반면 김주원은 길라임이 모는 차를 타고 매우 겁을 먹는 기존의 남성상을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유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길라임은 그냥 '여자'가 되어 갑니다. 범죄자들을 가볍게 때려 눕힌 그녀가 김주원 한사람을 당하지 못하고, 손짓과 표정 하나까지 사랑을 갈구하는 '천상 여자'의 모습으로만 그려집니다. 오스카를 위해서는 다소곳하게 밥도 잘 해주지요. 반면 김주원은 '남자' 아니 '마초'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쫓아다니고, 끌어안곤 하지요. 목표로 정한 대상을 열번 찍어 기어코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왕 시크릿가든이 남-여의 영혼이 바뀌는 그리고 스턴트우먼과 트라우마가 있는 상위 1% 남성을 다루는 드라마인만큼 이런 성역할을 바꾸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길라임이 더욱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대쉬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김주원이 수줍어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습니다.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도전을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통념상 이는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드라마는 인기를 끌지 못했겠지요. 대장금도 그렇고, 동이도 그렇고 이산의 송연이까지도 모든 인기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터프하고, 씩씩하지만 늘 남자 앞에서는 다소곳하고, 부끄럼을 타는 존재여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요즘처럼 성범죄로 인한 사회적 피로가 더해진 시기에는 잘못된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줄 수 있는 장면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도 나쁘진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특별히 언론의 경우는 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또 해야할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우리의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의 모습이 진일보하긴 했으나 여전히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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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왜곡된 회식 및 접대 문화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요즘 룸살롱에 가면 자연산을 찾는다고 하더라'라는 얘기를 하여 대국민 사과까지 하게 되었다. 룸살롱에서 '여성 접대부'를 찾는 게 일상화 된 우리 사회의 단면이 보여진다. 사실 우리는 회사 단체 회식을 하면 1차로 마무리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2, 3차에 이어지는 회식자리는 결국 룸살롱 등을 찾으며 '여성 접대부'를 찾고, 자연스레 성매매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거래처 직원과의 '접대'도 비슷하다. 우리의 접대문화 역시 1차를 넘어 2, 3차에 이르며 잘 접대한다는 것에는 '성접대'가 포함되고 있다. 얼마전 있었던 '성접대 검사' 사건을 보면 성매매와 회식, 접대 문화가 이른바 '사회지도층'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일반화 된 일부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곡된 회식 및 접대 문화는 성폭력과 속성을 공유한다

이렇게 잘못된 회식-접대문화는 여성의 몸 또는 성을 왜곡하게 한다. 이 때, 여성의 몸은 그녀의 인격과 분리된 하나의 '객체' 또는 '대상'이 되며 여성은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하고 반대로 남성은 그녀를 '소유'하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만다. 이렇게 왜곡된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인식은 가부장적 사회의식과 맞물려 여성 일반에 대한 범위로 확장되고, 우리 사회의 성차별은 반복-재생산 된다.  

이는 성폭력과 그 기본적 속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성폭력시 주된 피해자인 여성은 상대의 힘 앞에 자신의 권리와 몸 또는 성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만다(그 도구가 무형의 권력이든 유형의 폭력이든 상관없다). 이 때 주된 가해자인 남성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남성성'에 대한 기대와 무의식적인 학습을 통해 여성을 통제 및 소유해야한다는 합리화 근거를 갖고 접근하게 된다. 결국 주된 피해자인 여성은 그 자신의 인격이 사라진 채 주된 가해자인 남성에 의해 소유 및 통제되면서 폭력과 권력 앞에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절대적 약자의 지위에 처하게 되며 또 다시 우리 사회의 '성차별'이 전제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이 반복-재생산 되고마는 것이다.

(참고 : 취업포탈 사람인의 08년 조사에 따르면 여성 직장인의 52%가 회식자리에서 성흐롱이나 성추행을 경험했고, 회식자리가 아닌 평상시 직장생활에서도 경험했다는 대답이 39.1%에 이르렀다. 또한 우리 나라의 성폭력 발생비율은 세계 2-3위를 기록하는 실정이다.)

회식-접대문화 개선은 기업과 기관이 먼저 나서야...

왜 우리는 꼭 회식 때 술을 마시며 취해야만 하는걸까. 왜 접대는 고급 룸살롱에서 해야하고, '물 좋은 곳'으로 안내해야만 하는 걸까. 남성만이 공유한다는 이런 문화를 언제까지 수용해야만 하는걸까. 사실 성차별을 극복하고, 회식-접대 문화를 개선하는 건 개인 뿐 아니라 기업이나 기관에서 먼저 나서야할 문제이다.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업무실적 등 일정부분 강요되는 측면있다는 것이다.

실제 회식-접대문화를 개선하고, 가족친화 경영을 하는 건 기업이나 기관에도 매우 유용하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작년 12월 조사결과를 보면 가족친화 경영을 실시한 기업 172곳 중 66%가 경영성과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을 하였다. 직원들의 사기진작(80.1%)과 이미지 제고(49.8%), 이직률 감소(48.5%)에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제 워킹맘 탄력근무제를 실시하는 교보생명은 2003년 1억3000만원이던 1인당 생산성이 지난해 1억7000만원으로 30.7% 높아졌다. kt 역시 출산 후 직장 복귀율이 무려 99%에 달한다.

정리하며

사실 성차별이나 성희롱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람은 흔히 보게 된다. 그렇지만 왜 현실은 이 문제가 끊임없이 반복-재생산 되는 것일까. 이는 한 개인이 노력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기업이나 기관이 나서야만 하는 부분도 있는 즉,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회식문화나 접대 문화 개선을 시작으로 하는 성차별 없는 가족친화적인 기업 및 기관 운영은 이제 세계적 대세이자 우리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당면과제이고, 이는 성폭력과 그 기본 속성을 공유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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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간 성폭력 문제에 있어 국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구조 전반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이상론에 가깝지요.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도 약 30분에 1명 꼴로 성폭력 피해자가 나오고 있다는 게 현실이란 점입니다. 장기정책을 한편으로 당장 시급한 정책이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이 글은 세가지 사항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정부의 분발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1.성희롱 예방교육을 정말 알차고, 확실하게 진행하라 

친족간 성폭력 문제의 가장 큰 가해자는 계부 또는 친부, 양부입니다. 작년 성폭력 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무려 70.3%를 이들 아버지가 차지했습니다. 충격적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 문제를 충격과 달리 반성하고, 예방책을 학습해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물론 모든 부모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상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의 성폭력에 대한 인지수준과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성인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가끔 제가 이런 주장을 하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반문하는 분도 계시지만 이미 우리는 충분히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가령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만 제대로 시행해도 우리의 성감수성이나 인지력은 훨씬 향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교육은 형식적이거나 아예 진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전문강사를 통해 '알찬 교육'을 진행할 수만 있다면 건강한 직장문화를 만들고, 젠더감수성을 더욱 키울 수 있는 매우 좋은 제도를 그냥 묵히는 꼴입니다.

2.친족간 성폭력 문제 처리는 더욱 엄격해야 한다.

올해 7월 친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성폭행 당한 아이의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다행이 신고가 이뤄졌고, 아이의 치료도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검찰의 사건지휘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성매수' 혐의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법리적으로는 이런 적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성매수란 돈을 주고 성구매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성폭행 피해자인 이 소녀는 단돈 2만원에 자신의 성을 아버지에게 팔아버린 어처구니 없는 논리가 성립되고 맙니다. 

친족간 성폭력 문제는 피해자녀에게 끼치는 충격을 고려할 때 엄격하고 분명한 처리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부모 자식이란 관계 이전에 명백한 성폭행 범죄자입니다. 특히, 친족간 성폭력 가해자들은 이 관계성을 이용해 끊임없이 재접근 해오는 특징을 보이므로 반드시 피해자와 물리적으로 떨어뜨리고, 친권을 상실시키는 등의 사후 대책까지 적용하는 분명함이 필요합니다.

3.피해자녀의 생활지원과 학습권 보장이 절실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자녀의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된 가족이라도 수많은 경우 가해자의 선처를 호소한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가 없으면 그 가족이 더 이상 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지난 04년 친부에 의해 임신과 출산, 낙태를 반복했던 여고생이 아버지를 도저히 신고할 수가 없었으나 여동생이 또 다시 임신한 것을 보고 신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이 여고생은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마저 감옥에 가면 미성년자인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했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국가의 지원체계 구축이 시급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부에 의한 성폭행을 확인하고 이혼을 결심한 여성과 자녀가 있다면 이들의 삶이 안정(예 : 취직)될 때까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나 경제적 지원, 일자리 알선 등이 절실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지옥과 같은 삶을 반복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미성년자 자녀의 경우 학업을 해결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성폭행 중에서도 아버지에 의한 범죄는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으로 일단 학교 다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교육 수혜의 권리가 있고, 사건의 피해자인 이들에게 국가는 이를 보장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사건의 피해자인 것도 억울한데 교육에서조차 소외된다면 이들의 삶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줄수 있을런지요.

정리하며

지금까지 저는 친족간 성폭력 예방과 처리를 위해 국가가 해야할 일을 제시하였습니다. 국가는 성인 대상 성교육 체계를 잡아야 합니다. 또한 가해자 처리를 보다 엄격하고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끝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해주고, 미성년 자녀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친족간 성폭력 문제는 더 이상 가정 문제나 일부 몰지각한 변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병리학적 현상으로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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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또 다시 보도된 친부에 의한 성폭력 문제를 접하면서 이에 대한 원인 분석과 대안 제시를 위해 총 2회에 걸쳐 기획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인면수심이란 말도 부족하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친족 성폭력 특히, 친부에 의한 성폭력은 어떤 수사를 붙여도 설명하기 힘든 당혹감과 충격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이번에 보도된 내용은 큰 아버지와 친부에 의해 성폭행 당한 한 소녀에 관한 기사였다. 이 소녀는 지나 2007년 12살 때부터 큰 아버지에 의해 반복적으로 성폭행 당하고, 2009년 친아버지에 의해서도 또 다시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관련기사 : 잔혹한 가족....)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걸까.
이수정은(경기대 범죄심리학) 잘못된 성의식을 갖고 성장한 사람이 부모가 되는 "어른 아이"의 등장도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 지적한다. 정정희는(친족 성폭력 상담소 열림터 원장) 사소한 스킨쉽부터 시작되는 성폭행의 경로를 설명하기도 한다. 스킨쉽이 습관화 되다보니 과도하게 지나치고 이것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성폭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면 일리가 있으나 여기에는 가해자와 사회와의 관계성을 밝히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는 가해자의 심리상태와 사회적 문제가 겹쳐진 현상으로 다음의 두가지를 반드시 언급해야만 이해가능하다.

1)우선 필자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 "성폭력"이란 성욕 따위의 문제라기보다 "성"을 매개로 한 "폭력" 현상이란 것이다. 즉, 이는 자신의 분노와 통제, 지배의 욕구가 성욕이란 가면을 쓰고 표출된 것으로 가해자들은 폭력의 행사와 지배에서 오는 흥분을 성적 쾌락과 혼동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가해자들은 대개 성인 여성 또는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이 때 자신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비밀을 유지가 가능한 그리고 지속적인 가해를 할 수 있는 딸을 선택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2)여기서 좀 더 들어가면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가정의 축소, 해체의 가속화를 지적할 수 있다. 과거 대가족 아니 4인 가족만해도 가정내에서 성폭력을 감시하는 기능이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가정의 역할이 축소되고, 해체되면서 이 기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개인의 고립의 가속화는 심리적인 편집증상을 일으키게 되고(성균관대 박승희 교수), 정상적인 판단이 서지 않게 되는 데, 이런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특징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나오는 병리적 현상이 바로 친족 성폭력이란 얘기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는 정답이긴 하나 현실성이 없다. 이는 당장 가정에서 시작해야할 일과 국가가 나서야 할일로 나뉘게 된다. 오늘은 우선 가정에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안을 살펴보기로 하자.

1.부모님도 성교육을 받으셔야 한다.

아이들은 어린이집부터 시작해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은 전혀 교육 받지 않고 있다. 그나마 법제화 되어 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성폭력과 관련된 문제는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 삶의 양태가 달라져야 할 문제이기에 하루 이틀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관련글 : 아동 성폭력 부모부터...)

2.야동과 성매매는 무조건 끊어야 한다.

사실 야동이 성폭력의 직접적인 원인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야동 중독에 빠지게 되면 약간 얘기가 달라진다. 야동 중독은 여성의 몸을 객체화 시키고, 그들의 인격을 배제시키게 한다. 또한 현실에 대한 곡해가 일어나고 현실에서 실천해보고 싶은 충동을 만든다. 성매매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따라서 이 둘은 일단 무조건 정리해야 한다. (관련글 : 밤마다 야동보는 남편 아내의 반응은? ,10대 여성은 왜 성매매를 할 수 밖에 없었나)

3.아이의 의사 존중은 성폭력 예방의 첫 걸음이다.

내가 억지로 아이를 통제하거나 윽박지르려들면 오히려 아이는 거세게 저항하게 되고, 대화는 단절되며, 자녀에 대한 분노는 더욱 쌓여만 가게 된다. 동시에 아이는 상처가 생기게 되고, 현실에 대한 원망과 자존감의 추락이 생기게 된다. 존중 받는 아이가 자존감이 생김을 기억해야 한다. 자존감은 기타 여러 성폭력 유형에 있어서도 예방의 첫 걸음이 된다. 가정에서부터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정리하며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필자 역시 성교육 전문가로서 다양한 교육활동과 관련 포스팅을 하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며 한계를 토로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내가 하는 작은 날개짓이 태풍과 같은 위력을 내게 될 것이고, 누군지 피해를 입을지 모를 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1편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내일 2편에서는 친족간 성폭력 예방을 위해 국가가 해야할 일을 기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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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동성애자를 살게 하는 게 왜 인권침해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이들을 치유의 대상이라 규정하는 건 누구의 기준이고, 요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자신의 기준으로 함부로 '규정'하는 이런 관점과 행태가 너무도 당당하게 이뤄지는 모습에 당혹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왜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나

최근 이 광고를 낸 이 아무개 목사 역시 본인이 동성애자였다는 경험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치유되었다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동성애자들도 치유를 받아야만 한다고 얘기합니다.(관련글 보기 클릭)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얘기인 것일 뿐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애를 권장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호감을 주는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 역시 차별 받으면 안 되는 시민사회의 일원이란 점입니다. 만약 숫적 다수인 우리가 숫적 소수인 그들을 '병에 걸린 상태'로 규정하고, 그들의 사회적 권리마저 박탈한다면 이는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폭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정 차별 없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원한다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문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문제이자 헌법에 명시된 당연한 사안입니다. 따라서 최근 논란이 되는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보다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법 통과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신중'이 아니라 정말 아무도 차별 받지 않는 좋은 법을 제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소수민족이거나 후진국에서 왔다해도 차별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늘 소외되어온 장애인들 역시 차별받지 않아야 합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 역시 차별 받으면 안 됩니다. 미혼모 청소년 역시 교육의 기회를 박탈 받으면 안 됩니다. 바람 같아선 이번 기회를 통해 인권의 사각지대가 하나도 없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리하며

볼테르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는 끝까지 투쟁하겠다' 하였습니다. 저는 이 견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깁니다. 내 신념이나 성향과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범죄인 또는 병에 걸린 환자, 비정상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나와 다른 그와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 병리적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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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대 소녀가 에이즈에 걸린채 성매매를 했다는 보도가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필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건자체가 주는 충격은 물론 조금 자세히 10대 소녀, 청소년 성매매, 에이즈, 언론보도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게 없었다. 뭔가 잘 못 되도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이런 느낌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

1.10대 소녀는 왜 성매매를 할 수 밖에 없었나?

언론보도를 보니 그냥 10대 여성이 아니다. 지적장애 2급의 소녀이다. 이 소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만난 20대 남자와의 성관계에서 에이즈에 감염 되었다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온 뒤 찜질방과 여인숙 등을 전전하며 생활을 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점이 중요하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작년 보고에 따르면 청소년 성매매 동기 1위가 바로 생활비 마련(40%)이었다. 그 다음이 유흥비 마련(37%)이었는데, 이 역시 가출청소년 등 위기 청소년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은 즉, 청소년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개인의 문제 이전에 이들이 이렇게 나서게 된 복지와 인권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 역시 이점을 보아야 한다. 이 소녀에게 모든 도덕적 비난을 쏟아붓기 전 우리는 왜 이 소녀가 성매매에 나설 수 밖에 없었나를 보고,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합의와 변화를 이끌어내야만 제2 제3의 경우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청소년 성매매를 시도했던 20여명은 도대체 무언가?

성매매는 성폭력을 감소시키거나 성욕의 해소를 통해 감정을 완화시키는 기능은 커녕 오히려 상품화 된 여성의 몸과 성에 쉽게 접근하고, 이런 경험을 통해 여성을 대상화 또는 물화시킨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때, 대상이 된 여성은 상황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없고, 자발적으로 그만 둘수조차 없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되기에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폭력적 속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역시 성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고, 성매매를 시도했던 이들은 돈과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의 가해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청소년 성매매에 나서는 자들의 특징은 일단 성매매 자체에 관대하고, 연령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성매매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경험이 이들의 사고와 판단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열등감이나 일반 여성과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훗날 성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예 : 김수철). 그러므로 이들은 반드시 강한 처벌과 동시에 꾸준하고도 집중적인 교육과 치료가 병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3.언론보도의 선정성과 관점은 무엇인가?

수많은 언론이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필자는 언론보도를 보며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언론의 제목이 "10대 여성, 무차별...."이란 용어를 포함 또는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구 속에는 절대 성매매를 하면 안될 10대와 여성이란 점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 10대는 당연히 성매매를 하면 안된다. 그런데 꼭 굳이 '여성'을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여성의 성에 대한 도덕적 또는 사회적 잣대를 적용한 게 아닌가 싶다. 또 '무차별'이란 말까지 고려해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어린 것이 그것도 여자가 함부로 몸을 굴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얘기다.

선정적인 문구를 사용하며 특종화 시키고, 또 다시 가족까지 찾아내며 인터뷰하는 잔인함.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자신의 꿈을 키워가야할 소녀가 이렇게까지 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보지 못한채 비난의 화살을 던져대는 모습. 필자가 언론의 이런 시선을 더 저질처럼 느끼는 것이 조금은 격한 감정이라 할 수 있을까.

정리하며

작년 기준으로 우리 나라 10대 에이즈 감염자는 약 125명 수준이라 한다. 상당한 수치다. 이 아이들의 감염경로는 100% 성접촉에 의한 것이라 하니 도대체 어쩌다가 이 아이들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자신의 감염사실을 알게된 아이들이 겪었을 충격은 어땠고, 그 가족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겁고, 아려 온다.

물론 이 아이들의 행동을 모두 용인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잘못은 잘못이니 분명히 지적해야하겠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 아이들은 미성년자이고, 이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으며, 우리는 이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충분한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어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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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교사 사건은 우리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합니다. 사건의 당사자가 주는 충격도 그렇고, 사건처리를 담당한 사법기관의 이해나 우리의 시선도 그러하며, 현행법의 한계를 다시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이 글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처리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현행법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간략하게 밝혀보고자 합니다.

1.합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라는 게 말이되나?


합의하에 이뤄졌다? 어불성설입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겠지만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녀가 사랑의 대상이었다 주장하는 제자는 이제 겨우 만 15세짜리 중학생이었지요. 미성년자입니다. 미성년자라 함은 성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아이들의 性은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들과의 성행위는 '폭력'의 범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성년자 제자와의 "합의"하에 이뤄진 일이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2.문제의 본질은 성매매냐 여부가 아니다.

미성년자가 동의했다손 치더라도 미성숙한 판단 즉, 불법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선택을 했을 때 이를 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에 동의하고 함께 행동했다는 것은 미성년자의 미성숙한 판단을 방치한 책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오고가지 않았으면 성매매까지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문제의 본질은 성매매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요.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것은 이 제자가 성인이 된 후에나 적용해야지 지금 적용할 명제는 아닙니다.

3.교사의 처벌은 당연. 그런데 또 봐야할 것은....

따라서 교사의 처벌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 언론이 이 사건을 "탈선"정도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탈선이란 말속에는 '도덕적' 냄새가 진하게 담겨있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속에서 작용하는 '권력'관계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사는 청소년의 넘쳐흐르는 에너지와 호기심을 자신의 성적만족을 위해 "교사"라는 권위를 매력있는 기제로 작동하여 이뤄낸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사건은 '사랑'이나 '성매매'라기 보다는 성인이 미성년자에게 가한 "성폭행"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행법상 성인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가한 성폭행(?)은 성폭행으로 성립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현행법에서는 남성의 성기가 부녀자의 성기에 강제로 삽입되어야만 강간죄가 성립됩니다. 기준자체가 너무도 과거의 남성중심적 관점으로 정해진 법률의 한계입니다. 하루 속히 이 점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며

나날이 증가하는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범죄'로 보지 못하고, 사랑이나 탈선 혹은 그럴 수도 있다는 식의 이해는 참으로 문제입니다. 이번처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인이 가한 성행위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자체가 이미 '범죄'입니다. 또한 미성년자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여전히 '미성년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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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도된 대전 장애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접하며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범죄 자체가 지닌 충격의 크기도 그렇지만 사건 처리 과정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입니다. 오늘 저는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를 중심으로 이 글을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1.미성년자는 무조건 봐줘야하나?

미성년자임을 고려하면 무조건 처벌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저는 가해 학생 16명을 구속시키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잘못 또는 죄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처우는 있어야 합니다. 미성년자란 점이 이런 의도적이고, 고약한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교육의 측면에서도 좋은 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잘못에 대한 용서나 이해 같은 처우는 그 전에 반성과 회개가 있을 때 나오는 것이지요. 가해자들은 아무 반응이 없는 데, 왜 먼저 용서하고 봐줘야 하나요. 저는 이 학생들이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학교를 나갔다는 기사를 보며 피해 여중생과 가족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더욱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2.강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인가?

집에 도둑이 들었다 칩시다.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도둑이 우리 집 물건을 다 가져가도 된다는 뜻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아무말이 없었다하여 "동의'라 여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학생 여러 명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어 겁을 먹게 되면 있던 힘도 없게 되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피해자는 지적 장애가 있는 여중생입니다. 이들의 '장애'란 것을 인정하는 까닭은 상황 판단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학생이 거센 저항을 하지 않았다하여 마치 이 가해 학생들에게 동의 또는 합의했었다는 듯 판단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경찰의 성의식이 정말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3.폭력이 없었으면 강압적인 게 아니란 말인가?

위에서 얘기했던 도둑 얘기 한번 더 하겠습니다. 집에 침입한 그 도둑을 보면 일단 어떤 느낌이 들까요? 굳이 칼을 들이대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분위기 자체 또는 그 상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도 비슷한 것이지요. 이 피해 여중생은 그 상황과 분위기 자체가 이미 강압적이고, 두렵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폭력의 수반여부는 가해학생들의 의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죄질이 너무도 고약하기 때문이지요. 한달여에 걸쳐 이 여학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했다는 것은 매우 의도적이고, 질이 나쁨을 의미합니다.

정리하며

경찰의 사건처리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가해학생들을 불구속 처리한 근거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가해자의 저항여부나 가해학생들의 폭력수반 여부는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가해학생들의 경우 구속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잘못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교육은 있어야 합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은 하루하루가 너무도 힘들 것인 데, 가해자들은 아무일 없다는 듯 학교에 다니게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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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의 인기멤버인 지연이 등장했다는 동영상으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 내용인 즉슨, 한 여학생이 음란 화상채팅(은어로 '몸캠'이라 합니다)을 했는 데, 그것이 티아라의 지연이란 얘기입니다. 이에 논란의 당사자인 지연양은 물론 소속사에서 해명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본인이 아니란 것이고, 최초 유포자를 찾아 강력대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이 논란을 보면서 마음이 참 불편해왔습니다. 지금 논란의 방향이 사건의 본질과 무관하게 엉뚱한 얘기가 오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 동영상의 주인공이 지연 양일 수도 있고, 아니고보다 중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문제의 핵심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미성년자가 음란물의 주인공으로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

언론보도와 사진을 보니 그 여학생은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밖에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 참 어려보이더군요. 그런데 그 여학생이 이런 영상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그렇게 되었겠지요. 또 혼자 있다보니 별다른 제재 없이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그 여학생이 방치되어있던 상황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먼저란 것입니다. 또한 그 여학생을 유도한 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아무 거부감 없이 그 여학생이 영상을 찍게 된 계기 즉, 올바른 성가치관의 부재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우리 사회는 아무런 제재와 반성없이 이 영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아이들만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 역시 심각함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성가치관이 어디까지 추락한 것인지요. 저는 그 영상의 주인공이 지연이든 아니든 미성년자의 알몸이 드러난 영상이 아무런 제재 없이 공유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역겨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 영상만이 아닙니다. 청소년 또는 어린이가 등장하는 이른바 '야동'은 너무나도 흔합니다. 애들이든 어른이든 우리는 단돈 2-300원만 지불하면 단 2-3분만에 한 시간짜리 야동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런 제재도 없이 말이지요. 

3.연예인의 알몸과 같다 생각하며 쾌감을 느끼고 있다.

관음증이지요. 본인이 직접 성적 위해를 가하거나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평소 낯이 익은 인물 또는 공인의 알몸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가 관음증을 갖고 있다 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를 공유하며 이제 겨우 10대 후반인 여학생을 지목하는 건 집단적 폭력이 됩니다. 동영상의 주인공이 지연 양이든 아니든 이미 이 소녀 또는 소녀들으는 사회적 집단적 관음증의 희생양이 되어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정리하며

IT강국의 면모가 야동의 공유와 미성년자 주인공을 들여다보는 데 쾌감을 느끼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 참 안타깝지요. 물론 좋은 데도 많이 쓰이고, 선한 사람도 참 많지만 인터넷 정보의 대부분이 음란물이란 통계들을 보면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몸과 성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과 이 사회의 성문화가 보다 오픈되면서도 건강해지기를 다시 한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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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전에 임신을 하냐 혼후에 임신을 하느냐로 논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임신의 시점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임신에 관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가 핵심일 것 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과의 문제이냐와 양육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1.저는 지난 10여년간 교육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수많은 학부모님과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동안 제 경험을 돌아보면 '애어른'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나이는 많이 드셨지만 부모님으로서 자녀교육을 위한 준비가 잘 안 되어 있는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다는 거지요.

자녀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으니 교육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본인은 안 하면서 아이들에게 무언가에 대한 강요를 하고, 학원으로 아이를 돌리게 됩니다. 아이들은 스트레스에 너무도 힘들어 하는 데 자신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할 지라도 부모님의 의지와 철학이 아이를 다른 인생으로 만들어 갑니다. 반대로 아무리 경제적 풍요가 있어도 부모님의 의지와 철학이 없으면 아이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혼전에 임신을 하든지 혼후에 임신을 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부모가 될 준비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10여년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다면 임신에 주의를 기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무턱대고 아이를 낳으면 끝나는 게 아니지요. 아이만 있다고 좋은 부모가 되는 건 아닙니다.

2.예전에는 혼전에 임신을 하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지요. 요즘은 아이가 혼수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요즘도 그런 성향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혼전이냐 혼후냐가 임신의 본질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임신의 시점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냐는 데 있겠지요.

연예인의 혼전 임신 문제도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아이인지 한순간 실수라고 생각하는 지에 따라 아이의 삶과 부부의 결혼생활이 달라집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임신이 되어야 그 아이가 사랑 속에 태어나게 되지요. 결혼식은 하나의 의식으로서 할 수도 있고, 안 할수도 있는 것일 겝니다.

물론 공인으로서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도 관점을 달리해서 볼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가' 아이와 상대방에 대한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통해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와 성관계와 결혼, 아이에 대한 여러 대화를 나누고, 성가치관을 다잡아 갈 수도 있겠지요. 

혼전에 임신을 할 수도 있고, 혼후에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임신을 위해 서로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고, 한순간 실수가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결실이냐입니다. 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혼후에 임신을 해도 매우 힘든 결혼생활이 되고, 아이의 삶도 힘들어 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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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여러 언론은 김주희 선수의 사진을 제시하며 "여자 얼굴이.."라고 말을 흐린 적이 있었다. "여자 얼굴"이 이렇게 될 때까지 경기를 진행시키는 데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경기 진행과 선수보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려면 다른 방식이 얼마든지 있다. 김주희 선수의 땀과 눈물을 보면서까지 굳이 "여자 얼굴"을 들먹였어야 했던 것일까.


비단 이 경우만이 아니다. 한번은 이런 사례가 있었다. 모 대학의 조교로 근무했던 A씨가 있었다. 그런데 A씨가 상당히 예뻤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수업 전 출석을 부르는 등 조교활동을 하다가 남학생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이 후 과게시판에는 누구누구 누나 예뻐요 너무 좋아요 등의 글이 올라왔다.

그러자 A조교는 게시판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그만 해달라고 하였다. 자신은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입장이므로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해야지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잘 정리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 다음 반응이다. 도대체 이쁘다고 하는 데 뭐가 불만이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칭찬을 해줘도 뭐라 하니 어이 없다는 것이고, 배가 불렀다는 말이 나왔다. 역시 얼굴이 예쁘면 000가 없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늘 외모로 평가받아야 한다. 구인광고에는 늘 "용모단정"이란 애매한 기준이 존재한다. 도대체 어떤 게 용모단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키가 안되면 귀엽기라도 해야한다고 한다. 만약 미모가 안 되면 몸매라도 좋아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시선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인지 모르겠다. 언제쯤 여성의 몸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걸까.

조금은 낯설게 바라보면 좋겠다. 그 동안 당연시 해왔던 '남성-여성'의 성역할과 기대치를 낯설게 바라보는 질문을 해보자. 기존의 관념을 '역발상'을 통해 '낯설게 바라보기'만해도 우리의 젠더 감수성은 좀 더 향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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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몰이
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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