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하늘바람몰이'에 해당되는 글 87건

  1. 2009.11.07 신앙생활 한다면서 사돈 남말 하지 마세요!
  2. 2009.10.09 사람의 눈이 가리우고, 입만 떠들어 대는 이유는? 10
  3. 2009.07.16 금송아지보다 더 무서운 오늘의 우상들(1) 2
  4. 2009.07.09 장맛비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4
  5. 2009.03.13 기도의 호흡을 고르라 10
  6. 2009.03.06 교회서 회개(悔改)하고, 나와서 또 죄짓고.. 7
  7. 2009.02.26 때를 닦아내는 기도를 아십니까? 2
  8. 2009.02.25 네가 기도 MP3 냐? 8
  9. 2009.02.23 2)기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 12
  10. 2009.02.23 1) 기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
  11. 2008.12.19 왜 천사는 목동에게 아기 예수 탄생을 가장 먼저 알렸던 것일까
  12. 2008.12.19 왜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된 것일까
  13. 2008.12.16 베데스다 연못 속 정글의 법칙 그리고 예수
  14. 2008.12.15 왜 성경에는 예수 탄생일이 없는걸까
  15. 2008.12.12 세상을 섬기는 예수, 세상의 섬김을 받으려는 교회
  16. 2008.12.03 노스트라 다무스와 예수의 예언
  17. 2008.11.25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2)
  18. 2008.11.25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1)
  19. 2008.11.25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1) 2
  20. 2008.10.13 직접 땀흘려 일하는 예수 2
  21. 2008.09.24 바람둥이 예수 4
  22. 2008.09.23 사람 중심 사고방식을 가진 예수 4
  23. 2007.11.29 기도문(8)-신학대학 대표기도
  24. 2007.11.29 모교회에 띄우는 편지
  25. 2007.11.29 부쩍 삵아 보이네
  26. 2007.11.29 늦잠
  27. 2007.11.29 은혜
  28. 2007.11.29 사순절
  29. 2007.11.29 분노와 은혜
  30. 2007.11.29 사랑


우리는 흔히 '교회다니는 것'과 '종교생활' 잘 하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을 보면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제자"와 "무리"로 번역된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흔히 제자는 '마데테스' 라고 하고, 무리는 '오클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를 의미하는 마데테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떤 것에 쏟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승과의 관계 속에서 배움에 종사하고 있는 자란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스승과의 내적 교류에 힘쓰는 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클로스는 다릅니다. 이들은 웅성거리며 주변을 떠돌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무리를 보시며 아파하시고, 먹여주셨지만 이들은 선뜻 제자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상처입고, 아파하는 민중이었지만 주님께 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여 구원의 길에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인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게 무엇인가' 로 돌아오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생활이나 교회다니기와는 다릅니다. 그저 출석만 하고, 종교프로그램을 열심히 참여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출석과 프로그램에 "참여"만 하게 되면 "내적성장" 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교류" 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사전적 정의 즉, 신앙을 가지고 종교에 귀의하여 영적 생활을 한다는 것처럼 구체적인 내 "삶" 과 연관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변함으로 내 삶이 변하는 "거듭남" 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주님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가치에 마음을 쏟고, 그 내적교류에 힘쓰며 변화된 삶을 살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남의 일만 쳐다보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주님과의 교류는 커녕 내 자신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늘 돌아보며 날마다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눅 6:41-45 의 말씀을 보며 다시 한번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춰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로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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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살짝 한기를 느끼며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30분을 가리킵니다. 다시 잠자리에 들까 하기도 했지만 그 동안 밀렸던 블로깅도 하고, 무엇보다 성경책을 읽어야 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을 펴고 요즘 읽고 있던 요한복음을 펼쳤습니다. 아~오늘은 나면서부터 눈먼자를 치유한 예수님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눈먼자를 고치시다

일단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걷는데 선천적으로 시각장애가 있던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이걸 본 제자들이 묻는 겁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

그러자 예수는 이것이 "죄" 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대답합니다. 그리고 잠시 설명을 더 해준 후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익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서 씻으라 하지요. 그 후 이 사람은 눈을 뜨게 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질문.

이 대목을 읽고 우선 저는 아마도 예수께선 마음이 많이 아팠겠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 건 아니지만 제가 믿고, 따르는 예수시라면 분명 그랬을 것 같습니다.

혹시 독자님께선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된 중국 장애인 예술단을 보셨습니까? 저는 이 다큐를 보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주인공으로 나온 11세 소녀가 "엄마, 왜 나는 다른 애과 달리 보청기를 껴야해? " 라고 묻자 "넌 듣지 못하기에 이걸 끼는 거라 말하기엔 너무 가혹했다" 하던 엄마의 얘기 부분에선 더욱 그랬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눈까지 멀어야 하는걸까요. 그것도 태어나면서부터 말입니다. 평생을 고통 받고, 또 무엇보다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을 견뎌야만 하며 무엇보다 내 자신을 비하하고, 부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그 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 예수의 제자들은 한 사람의 인생과 그 힘든 내면을 보지 못하고 죄가 누구의 것인지 지적 호기심이나 충족시키며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지나친 공명심으로 스스로 눈을 가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회복시키는 예수

자, 예수는 '누구의 죄 때문' 이란 질문에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 때문' 이란 대답을 합니다. 하하, 정말 어이없지요.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게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보이기 위함이라면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하지요. 그러면 이 하나님은 너무나도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떤 좋은 말도 그 상황에 따른 적절성이 있는 법. 우리는 이 대답 역시 그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가 하는 이 대답은 모든 병의 근원이 "죄" 때문이라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파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죄 때문에 이 사람이 눈 먼 것이라면 이 장애인이나 그 부모는 천하에 몹쓸 죽일 놈이 되고 말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지금 이 문제를 이 사람에게 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돌림으로 한 사람의 인권을 돌려주고, 하나님의 크신 일을 얘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는 그 후 바로 이 사람을 치료해 주게 됩니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입만 떠들게 한다

사람이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무엇이 삶을 '삶답게' 만드는 걸까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은 삶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않은 살아있는 삶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을 뜨고 있어도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헛되고 지나친 욕심과 공명심은 우리의 눈을 가리웁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진심을 왜곡시키게 됩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예수의 제자들처럼 한 사람과 그 영혼을 보며 공감하고, 이해해주지 못한채 논쟁이나 벌리며 하는 우리의 못난 모습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닐까요.

오늘 하루 스스로 눈을 어둡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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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까운 블로그 이웃이신 따뜻한 카리스마님께 자극도 받았고, 그간 너무 공부에 소홀한 듯 해서 말이죠. 지금 보는 건 책보다는 주로 논문인데요. 국제학술 세미나 후 나온 논문을 묶어놓은 신학연구 40호를 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박근원), 미혹하는 우상들(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기독교와 문화들(김경재),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제로서 종교혼합주의(마갈랴잉스), 그리스도교와 문화들 : 혼합주의의 문제(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목회활동과 주술 : 복음, 문화 그리고 혼합주의(J.R.Farris), 한국의 경제위기와 선교신학적 과제(채수일), 세계화된 세계에서 복음 선포와 민족문화(성정모)

이렇게 목록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의깊게 읽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혹하는 우상들> 입니다. 캄프하우젠은 예수가 받은 대표적인 시험사화 즉,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던 세가지 시험을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캄프하우젠의 통찰과 더불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시험 : 소비주의의 미혹

당시는 소위 능력있다 하는 마술사들과 기적행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고, 먹을 것을 보여주며 자신을 메시아인양 치켜 세웠습니다. 어느 시대든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고, 이것을 해결해주는 자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영웅이 되고 맙니다. 지금 악마는 민중의 먹고 사는 문제를 걸고 너의 마술력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 는 민중의 "생존" 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엘리사의 시험은 예언자의 철저한 절망과 공궁한 삶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내려진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생명이나, 절망 등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마술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허나 이것은 예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능력이 그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강하게 논박하며 자신의 가치와 사람의 인생이 무엇에 근거해야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루이제 쇼트로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굶주림과 굶주림의 공포가 지배하지 못한다 ; 왜냐하면 굶주림은 비록 현실이지만. 만유의 지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한 이를 몸으로 준행함에 있다 하였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물질에 종속되며 내 영혼을 내어놓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은 어렵더라도 서로 더불어 사는 삶만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섬기면서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야함을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소비의 사회입니다. 경제도 소비가 되지 않으면 성장이 불가능 합니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소비하고 넘기며 순환을 시켜줘야 합니다. 예, 변하는 거 좋지요. 성장도 좋습니다. 제가 뭔가 변화하는 걸 나쁘다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의 희생이 정당화 되고,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만 들끓게 하는 것은 잘 못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이 파괴되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건 잘 못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이를 앞장서 조장하고, 여러 이적이나 말씀의 왜곡으로 목회자를 높이는 것. 민중의 삶을 외면하며 침묵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소비주의의 미혹.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휩쓰는 이 분위기!! 이거 정말 무섭습니다. 특히, 교회 내부마저 이 흐름에 편승하고, 오히려 앞장서는 듯한 모습. 이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올린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때론 참 저도 헷갈립니다. 제가 성경에서 읽고, 보았던..제 심중 깊은 곳을 울리며 제 온 영혼을 휘어잡아 삶이 변하게 하신 예수가 어디계신건지..제가 교회를 정말 다니고 있는 게 맞는 건지...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는 건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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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봅니다. 어둠과 함께 울려대는 크나큰 천둥소리를 듣고 천지를 번뜩이는 벼락을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무서움과 거대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작은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낀다는 건 내게도 생명이 있음이고,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그 분의 생명호흡 안에 있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인간에게 뭇 생명을 맡기고, 역사를 만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한없이 나약하지만 한없이 큰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사람이고, 이 생명을 없애는 것도 사람입니다. 세상의 희망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도 사람입니다.

선택은 사람의 몫입니다. 무엇보다 "나" 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있게 감당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내가 어렵고, 소외된 이들과 얼마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생명의 싹이 트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때로 저는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사는 삶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네 소시민의 삶이란 대부분 이럴 듯 합니다. 이런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이란 생각도 들지는 않습니다. 한번쯤 쉬어가듯 인생의 큰 물결에 나를 맡길수는 있으나 내 온전한 정신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알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였고,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미쳤다 소리를 듣는 병자를 치유하며 너의 인생을 살라 했을 것입니다.

어제 창세기를 읽으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위해 늙은 종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앞에 나와있는 대목 즉, 아브라함에 이어 그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자신의 인생을 정체시키지 않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은..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 사람은...아브라함에 이어 이삭, 야곱, 다윗, 예수에게까지 이어지는 축복이 임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대지를 울리고 적시는 이 천둥과 벼락, 굵은 빗줄기 속에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다듬어 봅니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언제나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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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호흡을 고르라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9. 3. 13. 14:41 Posted by 바람몰이

호흡의 중요성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볼 때 어디를 보십니까? 흔히 듣는 대답은 제 경우 "눈"이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은 몸매를 보기도 하고, 어떤 분은 손끝을 보신다는 등 참 다양한 사람처럼 대답도 다양합니다.

저는 그 사람의 "호흡"을 봅니다. 그 사람의 기질과 생명력이 바로 "호흡"에 있다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잘 보시면 유난히 성격이 급하고,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가 호흡이 짧고, 거친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너무 여유로운 분들의 경우는 호흡이 가늘고, 여릴 때가 많지요. 호흡이 가늘다보니 힘이 약하거나 부드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네 조상님들도 이걸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숨졌다'라고 하고, 무술수련을 하면 '운기조식'이라 하여 호흡과 몸의 흐름을 조절하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호흡(생명의 바람)

그런데요 참 재밌는 것이 유대인들도 이 호흡을 참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우선 아래 성경 구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5-6)


유명한 에스겔의 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포로기의 암흑과 무덤에 갇혀 있던 유다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은 바로 '생기' 즉, 하나님의 영이자 바람인 "루아흐"가 들어가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하는 호흡과 성경이 말하는 호흡의 다른 점은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 유지에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생명이 결부된 문제라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내 인간적인 호흡에서가 아닌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던가 기억해봅시다. 성경이 뭐라 합니까? 예, 생기를 불어 넣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생기가 바로 하나님의 바람, 생명의 영인 '루아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바로 호흡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얘기입니다.


내 호흡을 쏘아대기만 하는 우리의 기도

여기서 우린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너무 뜨겁게만 하려 합니다. 정신 없이 쏘아대기 바쁘다는 얘기입니다. 호흡을 내뱉는 것에만 너무 익숙합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생명의 바람, 영을 들이마시고 음미하며 내 안에서 고를 시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주님 음성이 들릴리도 없고, 그 뜻을 헤아려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게 아니지요. 예수님도 기도의 정수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대로 하시라 함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영도 내 이기적인 욕심의 영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 화해와 사랑의 영. 정의와 바름, 낮음과 섬김, 헌신이라는 주님의 영과 주님의 호흡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내 호흡이 내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분노와 원초적인 기쁨에 좌지우지되는 어설픈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중심있고, 나를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비우는 호흡처럼 될 수 있도록 즉, 내 영이 주님께서 보내주신 그 거룩한 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그래야 성령님도 임하실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이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어 내 영이 부흥하고, 마른 뼈나 죽은 것 같은 내 영이 다시 사는 데는 주님의 바람, 호흡, 영이 오실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호흡으로 내 이기적 영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약한 자들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과 호흡으로 안아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패와 폭력, 불의와 어둠 앞에서는 성전 가판을 뒤엎는 불길 같은 호흡과 거룩한 분노로 임하셨습니다. 모진 고통을 이겨내는 끝없는 비움과 사랑의 호흡으로 골고다 언덕을 인내하며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 내 호흡을 차분히 고르며 가야 합니다. 너무 바쁜 세상이라고 나도 이에 편승하여 주님의 뜻과 은혜를 다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요. 심지어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이것도 저것도 열심히 한다 자기만족에 취해 있으면서 정작 그 시간은 주님께 내 호흡을 쏘아대기만 바쁘기도 합니다.

이건 좀 아니지요. 신앙생활.. 내 만족을 위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거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 삶이 그 분의 형상대로 달라져야 하고, 내 자신이 먼저 서야 합니다. 바로 그 핵심에 주님의 영, 바람, 생명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서 고르는 호흡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생명호흡이라 하는 거지요.

자, 오늘은 한번 침묵으로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며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생명을 느끼는 기도를 해보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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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회개 그러나 우리는

회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그렇지요. 내 안의 죄성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꿇으며 시작하는 겁니다. 또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수없이 죄에 빠지기에 우리는 회개를 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쉬운 것이 교회에서는 그렇게 울면서 회개한 사람이 밖에 나오면 다시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합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며 변하지 않는 내 자신을 합리화 시켜서는 곤란하겠지요.

성경에는 회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오는데요. 저는 오늘 그 중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다

사도행전 2:37을 보니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탄식과 2:41에 잘못과 회심을 인증하는 세례에의 참여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전에 "말씀" 을 듣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리는 일종의 '가책'을 느꼈던 것이지요.


저는 믿음이 성장하는 데는 여러 요인과 과정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내가 해석을 하려 하지 않고 그냥 말씀을 쭉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맘속에 감동과 변화의 싹이 틀 수 있을 거라 저는 믿습니다. 말씀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은 내가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과 같지요. 또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어 주지요. 저는 우리가 그냥 내 마음속에 찔리는 것을 위안받고자 회개를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이건 회개라기 보다는 내 도덕적, 심정적 위안에 불과하지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써 회개를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改 의 사건이 일어나다!

두번째는 이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는 대목입니다. 생활양식의 변화가 온 것이지요. 말하자면 첫번째 경우는 "회" 사건이 있었던 것이고, 이제는 "개"의 사건이 지속된 것입니다. 


그 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눔의 삶을 사는 데 있었습니다. 즉, 나 혼자만의 삶, 자폐적인 삶, 이기적인 삶에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 삶으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회"와 "개"가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찔리는 행위에 용서를 구했다 알리바이를 삼고, 내 자신을 위안하며 나아가지요. 심하면 이것이 습관 또는 체질화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을 겁니다. 애절한 '뉘우침'과 여기에 근본적인 '삶의 방향'이 전환되고, 생활의 '구조적인 변혁' 을 포함하는 "개"의 요소가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회개를 의미하는 원어 메타노이아 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냥 마음만을 돌린다는 게아닙니다. 내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 바꿔 반대 방향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죄에 대한 단상(짧게 봅니다)

끝으로 제가 앞서 죄 얘기를 잠깐 했는데요. 잠깐 죄에 대해 살펴볼까요(말 그대로 잠깐). 죄악을 의미하는 원어 '오페일레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이걸 좀 알아보니까요. 이건 도덕적, 심정적 죄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회경제적 삶의 구조 안에서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각 종 채무의 관계를 의미하였습니다.


왜 성경에 보면 빚을 탕감해주는 농장 주인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걸 생각하면 쉽지요. 이건 결국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회와 사회에서 뒤틀린 관계를 서로 용서하고, 감싸안는 삶의로의 변화 즉, 구체적인 삶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요한이 얘기하는 것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의 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시어요. 그는 세리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는 변했지요.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정하게 거둔 것을 네배로 갚는다 하였습니다. 바로 이거지요. 회개는 말씀을 통해 깨닫고, 애절한 '뉘우침'을 하며, 내 삶의 방향과 구조가 완전히 변해야 합니다.

 
개인만이 아닌 연대의 회개가 필요

개인적으로 요즘처럼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없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끼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모습을 일부의 얘기라 치부하고, 우리는 괜찮다 하는 모습입니다.

왜 함께 연대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 걸까요. 저는 그들의 죄를 그들만의 죄로 여기면 안된다 생각합니다. 함께 아파하며 기도해야 하지요.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 역시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悔와 改의 균형을 이루며 "소" 처럼 걸어가봅시다!

이것은 "회" 와 "개" 가 함께 있는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회"에만 빠져 있습니다.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지요.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애절한 뉘우침과 지속적인 고쳐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주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맺어가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는 힘들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내 옆에는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함께 손잡고, 조금은 더디더라도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 보아요. 우보천리란 말처럼 우직하게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천리를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가져보자구요. 주님께서 손을 내밀고 계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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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번 글을 통해 기도우리의 정신과 삶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 중 첫 번째로 우리의 "정신"이 확장되어, "적대자상"을 해체하는 것에 대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먼저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학창시절 저는 모든 이를 용서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전직 대통령도 있었구요. 외국인도 있었는데요. 그 핵심에는 바로 저희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희 오누이를 제 나이 다섯, 여동생 나이 셋에 버렸습니다. 제가 버렸다 표현한 것은 그 후 15년간 전화한통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때 저희 오누이를 키우시던 조부모님은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오백원짜리 삯바느질을 하며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또 이러더군요. 당신께서 신용불량자이다보니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핸드폰을 해서 국제전화요금을 수백만원씩 물린 적도 있고, 대출을 받아 쓰기도 하였지요. 당연히 저는 제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이 모든 걸 갚아야만 했구요.

아버지를 보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그 분에 대한 정은 당연히 없고, 끌림 같은 건 저 세상 이야기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제 주먹이 날라가지 않은게 다행이었죠. (정말 신학하기 잘했다 싶을 때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분은 "주적"이었고,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2.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형제와 다투고 예배드릴 생각도 말라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지요. 예수께서 또 그런 삶을 사셨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한없이 찔리고, 힘이 든 겁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랑과 화해를 얘기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묵상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였는데요. 물론 환청처럼 들린 것은 아니나 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처럼 도전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도 분노하고 있느냐?' '정말 그렇게 네 아버지가 죽일 놈이 것이냐?' '그럼 너는?'

예수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고, 제가 지은 모든 죄와 다른 이들에게 상처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건 그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성화되어 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가 무얼 잘 하고 잘 못 했다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내 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직은 조금 미흡한 것이고, 그만큼 교만함이 마음 속에 들어와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도 용서를 강조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으며, 강도를 용서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셨던 것일 겝니다.


3.이제 아버님을 뵙는 제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원수였고, 제 인생의 가장 피곤한 암적존재이자, 심지어 "쓰레기 인생" 이라 생각했던 그 분의 인생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 분의 영혼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분 역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나 처럼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인생이 소위 "실패한 인생"이 된 것에 대해 매우 아파하고 있는 이제는 자포자기마저 해버린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차마 자식 앞에 전화한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거지요.

이제 저는 그 분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분을 적으로 여기고, 원망하던 제 자신을 먼저 보고, 그 분을 "쓰레기 인생"이라 하던 "교만한" 제 자신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란 그리스어로 방향을 돌이키다라는 뜻인데요(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한번 더 글을 쓰겠습니다). 제 삶과 마음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4.저는 성령님께서 제 영에 임하시고, 예수께서 저를 보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 소중한 체험을 통해 제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제 마음의 그릇이 한단계 더 넘어선 것이고, 정신의 깊이 역시 한 영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저 혼자 발버둥친다하여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제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 분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말이 쉬워 그렇지 약 20여년 동안 저희 오누이가 겪었을 그 아픔과 고통을 생각해보면.......이건 정말.....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얘기입니다.......

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적대자상이란 그렇다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대자상이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원망의 대상이나 증오, 분노의 대상을 의미하는 데요. 저는 이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여야만 가능하다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해체 가능하다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생은 다 그런거야..' '부질 없는 짓..'이라며 냉소하거나 관조하는 게 아니라 이와 다시 하나되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까지 얻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삶이기 때문입니다.


5.오늘 저는 이 글을 읽는 다시 한번 제 자신과 크리스챤 독자님들께 도전을 드리며 글을 맺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넘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건 내가 그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용서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먼저 내 자신을 보고, 그를 내려보는 내 교만함과 그 속에 있는 원망과 증오  검은 때를 닦아내는 "기도"입니다. 지금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님께서는 나를 먼저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군자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원망과 증오, 분노를 닦아가는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때일 수록 더 오랜 시간 닦아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함께 하고 계시기에 끊임 없이 닦아감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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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도 MP3 냐?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9. 2. 25. 10:49 Posted by 바람몰이


오늘은 지난번 총론에 이어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는 첫 시간입니다. 먼저 저는 지난 번 언급했던 이사야의 말을 다시 들어보며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이사야서는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수집되고 정리되었습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눠 보는 데요. 이것은 제 1이사야서 부분입니다. 이 글이 작성되던 시기는 대략 바빌론 포로기 직전이나 초반쯤으로 보는 게 정설입니다. 

즉, 나라가 패망의 기로에 있는 매우 급박하고, 힘든 상황이었다는 얘기인데요.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심지어 직접 찾아오시겠다는 말씀까지 하신다는 점입니다. 아래 구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만군의 주님께서 너를 찾아오시되,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를 일으키시며,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태워 버리는 불길로 찾아오실 것이다.(사29:6) 

상당히 충격적이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오실만큼 당시 이스라엘이 타락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했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이들의 야훼 신앙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을 노예와 나그네 생활하던 것에서 이끌어주시고, 그 어리석고 연약한 이스라엘 민중이 자기초월을 통해 출애굽 후 나라를 세우기까지 이끌어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이 어느 덧 풍요를 쫓고, 허례허식이 가득찬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자기들의 어려운 시절을 잊고 교만에 빠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세상에 이런 모양새가 얼마나 심했으면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 올까요.


마치 굶주린 자가 꿈에 먹기는 하나, 깨어나면 더욱 허기를 느끼듯이, 목마른 자가 꿈에 마시기는 하나, 깨어나면 더욱 지쳐서 갈증을 느끼듯이, 시온 산을 치는 모든 나라의 무리가 그러할 것이다.(사29:8)


자,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기도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담긴 곳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부분을 첫 글부터 강조하는 것은 바로 "진정성"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저 때 당시 이스라엘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요. 끊임없이 더 큰 파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그러나 아무리 파이를 먹어대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갈급하고, 굶주리는 모습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업 잘 되려면 교회다니라는 분이나 교회를 인맥 넓히는 사교장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참 많지 않나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 역시 교회 출석과 새벽기도 참석같은 행위나 눈에 보이는 것에 상당히 신경이 가있지는 않나요? 내가 며칠기도까지는 해봤다..뭐 이러면서..나는 방언기도를 한다..뭐 이러면서 말이지요. 들리는 얘기로는 요즘은 무슨 방언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있다지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들은 말을 흉내낼 뿐이다" 라고 개탄해 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속에 진정성이 있어야 하지요. 기도도 그럴 것입니다. 
 
중언부언 하듯 그저 양만 많이 늘려가는 게 아니라 한마디 기도를 내 뱉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골방에서 주님과 1대1로 만나며 옷이 아니라 마음을, 재가 아니라 눈물을 뿌리는 기도야말로 진정성이 담보된 기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내 곁에 계시던 주님을 만나 그 은혜에 휩싸이게 되면 우리는 이기적인 내 자아를 넘어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며,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또한 내가 가진 것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고 들에 핀 백합화처럼 솔로몬보다 더 영화로움에 감사할 줄 아는.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닦는 "수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분명한 것은 주님을 만난 이들은 그 삶이 변화하였고, 그 핵심에는 바로 늘 진정성이 가득한 기도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 오늘 이 엄청난 교회와 신도수를 자랑하는 이 한국 교회가. 매일 같이 새벽기도를 하고 주님만 따르겠다 하던 우리가. 한번쯤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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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삶의 진실한 기도를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동참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끊임없이 세상과 생명을 위해 간구하고 계심을 고백하는데요. 대표적인 로마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4)

 
즉, 내 삶을 통해 드려지는 기도는 나 혼자만 살자 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진실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동참하여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이르게 합니다(렘33:3, 왕하 20:5, 약 4:8).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해제하기도 하고약5:13-17),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세상 변혁에 참여하게 됩니다(출32:7-14, 고전3:9). 마태복음의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6:9)"의 고백은 성경적 기도는 사회적 행동이 수반됨을 의미합니다. 


4.사회적 행동이 수반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단순히 교회의 수를 늘리는 것을 말하는걸까요. 기독교로 개종해가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예, 그런 측면도 있겠지요. 저는 이걸 무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외형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살아있는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평화와 화해, 사랑의 섬김이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만유 안에서, 만유 위에서, 만유를 통해 역사하는. 그의 의지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잠깐 로마서의 이야기를 또 한번 살펴볼까요.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롬8:26)

이것은 내 이기적 자아와 욕심만을 위해서 하던 어린 우리의 기도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확대 심화 증진 됨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 말씀처럼 원수를 위해서까지 기도하는 이해관계, 인종, 국결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정의구현을 위해서 기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5.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줍니다.

융은 그의 연구를 통해서 성령은 개성화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즉, 죄의식, 분노, 갈등, 상처, 실패, 좌절감을 치유하거나 수용하게 하여 승화시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며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갖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날 때, 하나님과 만날 때 진정 내 자신이 더욱 나 다워진 '사람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 얘기 하지요? 예, 기도는 쌍방통행의 성격을 띕니다. 바로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날 수 있습니다. 하워드 트루만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통신의 형태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지금 너무 초월적 신관에만 입각하여 통성기도를 통한 일방통행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고는 감정에 취해 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을 비우며, 그의 뜻대로 행하게 해달라 기도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킬켈갈(Kierkegaard)는  청원기도는 청취기도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린은 기도란 언어와 비언어, 지성과 감성, 의지와 기억, 정신과 몸을 총괄하는 전인적 존재가 절대 초월자인 하나님과의 만남이자 나눔이고, 청원이자 경청이며, 침묵이자 현시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좀 더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지요. 진정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내 삶이 변화하고, 전인적 삶이 그에게 사로잡히는 그래서 성령님의 간구를 통해 이기적 자아와 욕심에서 자기초월(안병무)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리하며

베네딕트는 "노동은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처럼 우리의 삶 전반을 통해 끊임없이 수도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14:3-5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도는 내가 아닌 '너와 나'를 위해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성령님의 탄식과 기도처럼 내 이기적 자아와 욕심을 넘어선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나는 삶. 또 다른 삶. 다시 태어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 쉽게 쓰러지고, 약해지지만 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하나 하나 천천히 그 분께서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을 믿고, 내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자, 지금까지 짧게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는 데요. 앞으로 저는 몇 회에 걸쳐 이 1,2회 내용을 바탕으로 기도에 대해 적어나가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부족한 성찰이 이 글을 읽는 크리스찬 독자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총론은 총 2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편을 읽으시려면 이 문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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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한국 교회처럼 기도의 역사를 체험하며 성장한 곳도 없습니다. 김경재 교수 등의 성찰처럼 기도는 교회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또한 세상에 시달리며 지친 민중들에게는 힘의 원천이었고, 교회갱신의 추동력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졸라대기만 하는 자기독백적 간구나 저승을 지향하는 듯한 타계주의적 기원, 물량적이고 주술적 청원, 행동이 결여된 역사이탈의 기도, 광신적이며 의타적 간구 등은 역기능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하여 저는 오늘 이 시간부터 성경이 말하는 기도에 관한 성찰을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글은 제가 앞으로 연재하게 될 기도에 관한 글의 총론이자 결론에 해당하기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 길어 2회에 걸쳐 나눠 싣고자 함과 이것은 한 크리스천 독자의 부탁을 통해 기획되었기에 구독의 대상 역시 크리스챤으로 한정하고자 함을 참고해주시기 바라며 글을 시작합니다.



1.먼저, 이사야의 말을 들어보며 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입술로만 자신을 공경하는 모습을 개탄하고 계십니다. 실제 그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후반부인데요. 원문에 좀 더 가까운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를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앞에 두고 크나큰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속에 제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고, 한국 교회가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쩜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산다 하면서도 실제 그 속에는 추악함이 가득차 "들은 말을 흉내내고 있는 것일 뿐" 일지 모릅니다.



2.이사야의 이런 통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삶 속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입으로만 행해지는 기도에 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평생을 '도'를 닦는 생활을 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란 당연히 '십자가의 도' 이겠지요. 이것을 동양에서는 '수도'라 하였는 데요. 말 그대로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평생 수도하는 삶을 살아가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던가요. 매우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이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보고, 잘 듣는 분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그는 그의 전 생애를 내 뜻대로 구하지 않고 주의 뜻대로 하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2)

이는 내 삶 자체가 기도하는 수도의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됨을 의미합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던 예수처럼 내 안의 내 이기적 욕심과 자아를 버리고, 십자가의 도를 걷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 참으로 기도는 입으로도 해야하지만 삶으로 드려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총론은 총 2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편을 읽으시려면 이 문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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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런 저런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졌습니다. 빛나는 별과 같은 자연을 통한 것, 천사가 직접 전하여 준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 중 천사가 직접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게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전해준 것이 저는 참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왜 천사가 하필 그 많은 사람 중 목동에게 가장 먼저 아기 예수 탄생을 알렸던 것일까에 대해 글을 써보려 합니다.



그 동안의 전통적 해석은 양 떼인 우리와 목자인 예수의 상징적 비유를 위해서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들에서 잠을 자지 않고 양을 지키는 목동이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 일하시는 예수와 비교되면서 말이지요.

예, 저는 이런 해석도 좋다고 봅니다. 썩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예수에게만 집중된 나머지 천사가 주목 즉, 하나님이 주목하여 천사를 보낸 목동이 너무 가벼이 여겨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기 예수 탄생을 알리는 내용입니다만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 직접 아기 예수 탄생을 듣는 당사자는 목동이지요. 천사가 굳이 목동에게 먼저 간 이유가 있을 거란 얘기입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동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천사가 나타나자 목동들이 두려워 하였다 기록하는 데요. 사실 요즘도 천사를 보면 두려워할 수 있겠지만 당시 목동이 두려워했던 건 어떤 신비한 존재를 보았기 때문의 차원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목동은 한마디로
인생의 막장에 도달한 자
들이었는 데요.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고, 어떻게 삶의 환경을 바꿔볼 수도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였다는 얘기입니다. 이들이 이런 처지가 되는 데는 당시 율법이 큰 몫을 차지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교는 안식일에는 손도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는데요.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이 중요히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보면 목동일의 특성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단 하루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목동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죄인이 되버리는 거지요.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즉, 이들은 단순히 신비한 존재를 보았기 때문에 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성격이 더 강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반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는 데요. 목동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 일도 구할 수 없거나 배척받은 이들 곧 '가장 천한 이들이다' 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특권(?)을 가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지요. 즉, 여기 저기 속된 말로 '구를 만큼 구른 이'가 목동으로 오는 것이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왜 천사는 가장 먼저 목동을 찾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렸던 것인가 대충 정리가 되지요. 그것은 예수가  세상에서 버림 받은 가장 낮고, 천한 이와 함께 하는 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던 어이 없는 세상에 대한 무서운 고발이 담겨있는 것이라 이런 얘기입니다.   


저는 목동을 주목했던 성경의 관점과 실제 가장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과 함께 했던 예수를 생각하며 한국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 합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 크리스챤들은 지금의 이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거나 잘 모른다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세계에서 가장 신실하다는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일까. 저는 종교 생활은 잘 할지 몰라도 예수 제자 생활에는 약하다데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이게 약하니 교회에서는 그렇게 좋은 분도 밖에 나가면 똑같거나 더 심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지요. 교회의 도덕성이 일개 시민단체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은 당연히 될 수 없는 거겠지요. 또한 항상 얘기하 듯 개독교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바로 나 자신부터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비춰 내 삶을 변화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저 종교적 감정에 취해 예수 이름만 부르다 말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성경과 하나님이 목동에게 집중하여 천사를 보낸 것을 보며 우리도 목동을 찾는 삶을  살고, 또한 이들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세상을 향해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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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허름한 곳이지요. 예수가 태어난 곳 말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한다 해도 지금도 마굿간은 냄새가 나고 지저분 한것이 사실이지요. 게다가 누가 동물 먹이통을 씻어주고 한단 말입니까. 바로 이런 곳에서 아기 예수는 태어난 거지요. 지금 같이 깨끗하고, 좋은 산부인과를 이용하는 우리로써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먼저 이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천년 전 유대 사회의 구조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한 마디로 "공의"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착취는 두말 할 것 없이-물론 유대인을 통한 것이었지만- 종교마저 타락하여 소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수탈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에는
패배 의식과 상처만이
찰 수 밖에 없지요. 평안이 없었습니다영혼이 메말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정신줄을 놓아 버리는 경우마저 있었지요.

자,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나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가 투숙할 객실이 없었음을 얘기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데요.

과거 유대 전통은 나그네나 고아, 과부를 정성으로 섬기라는 게 있는 데요. 그 만큼 약자를 배려하라는 가르침과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태어날 당시
유대 사회는
만삭이 되어 출산을 앞둔 임산부를 보고도 전혀 도움의 손길이나 양보를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전혀 이런 배려가 이뤄지지도 않고, 이룰 수 있는 여유조차 없는 사회 구조적으로나 인간의 영혼으로나 모두 최악의 성격을 지닌 바로 그러한 곳이 유대사회였다는 거지요. 

즉, 성경은 예수의 이 어이없는 탄생을 자세히 기록함을 통해 당시 유대 사회와 사람의 영혼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고, 폭로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기 예수가 왜 이 땅에 오게 되었나 그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 삶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아기 예수가 마굿간 위에서 태어난 걸 보며 또한 성탄을 한주 앞둔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며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아니 어쩌면 더 심한 양극화의 사회를 살고 있지요. 하루에 수십명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이웃끼리도 살인이 일어나는 세상을 삽니다.

그 만큼 문제가 있는 사회이지요. 사람의 영혼에 평안과 여유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아기 예수를 또 다시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겠지요.


유독 더욱 길고, 춥게 느껴질 이번 2009년의 성탄과 겨울. 아무쪼록 이 하루는 "우리끼리"만 선물을 주고 받고 행복하거나 술에 쩌들어 있는 날이 아닌나 자신을 돌아보며 가난한 이웃을 더 배려하고, 아껴주는 이 사회에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성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쯤은 내가 살아가는 모양새나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고민해 보고, 기도해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러면 조금은 더 살만한 세상이 되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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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내에 양을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을 파는 곳 근처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참으로 특별한 곳이었는 데요. 그것은 천사가 한번씩 내려 오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천사가 오는 것도 신기하고 특별한 데 이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되고 물을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병도 상관없이 다 낫게 되는 겁니다. 정말 신묘하고 특별한 연못인 거지요.


자연스레 수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이 연못에 모여듭니다. 성경을 보니 예루살렘에 예수가 올라갔을 때도 그렇게 많이 있었다 합니다. 
물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은 병자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곁에 갑니다. 딱 보니 매우 오랫 동안 고생한 게 보입니다. 예수가 말을 꺼냅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그랬더니 이 병자가 얼른 대답하지요. 그런데 대답이 좀 이상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지요.
우리는 병자의 대답에서 중요한 점 하나를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병자는 물음에 답하기보다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데스다 연못이 갖고 있는 냉정한 정글의 법칙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약자의 마음이 표현 된 거지요.

가만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요. 1등만이 기억되지요. 오로지 최고만을 원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난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과목당 수십만원짜리 과외를 받는 아이들을 넘어설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자연스레 뒤쳐진 사람들의 마음에는 회의감, 패배의식, 불만 등이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될 수록 사회가 더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아니요. 이러면 안되는 거지요. 이 세상은 1등만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져도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정직하게 땀흘려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곳입니다. 지금처럼 이래서는 안됩니다.


자, 아무튼 그  다음을 보지요. 성경은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선언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곧 나았습니다. 자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거지요. 

예수는 바로 이러한 냉혹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철저하게 "치유해야할 대상" 으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곳, 생명에 관한 문제는 정글의 법칙으로 매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저는 오늘날 이런 세태를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앞장서고, 답습하는 교회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연말이면 전도 1등을 뽑아 어마어마한 경품을 주는 대형교회. 또한 교회끼리도 서로 교인수를 늘려 1등 교회가 되려하지요. 기도를 하면서도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만 합니다. 목회자는 축복에 축복을 더해 십일조 많이 하게 해달라 기도하기도 합니다.

전도 해야죠. 그러나 이런 큰 상품을 걸어 동기부여를 하고, 격려한다는 건 문제가 있지요. 교회 성장하면 좋지요. 허나 더 중요한 건 교회의 건강성이 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머리가 되면 좋지요. 그러나 머리가 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해달라 기도해야지요. 십일조도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더 많이 구제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거구요.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우리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은 1등하고, 물질 명예적 성공만을 하려 할 게 아니라 섬김의 1등, 정의와 평화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생명을 가꾸는 일에만 힘을 써야 하고, 오직 사랑만을 빚지며 살아야할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을 거슬러 분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 이제 다음 주면 성탄입니다. 저는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유례없는 경제위기로 그 어느 때보다 추워질 이번 겨울은 어려운 이를 더욱 어렵고, 춥게 만들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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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참 빠르네요. 올해가 시작된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다음 주에 성탄절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탄절은 예수 탄생일로 지켜지고 있지만 정확한 날은 아닙니다. 사실 지금의 12월 15일은 로마에서 태양신의 축일을 선교 및 정치적 목적으로 정한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예수가 언제쯤 태어났을 것이란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을 보면 당연히 눈 내리는 겨울이 아니란 걸 알 수 있겠죠. 두번째로 천문학자는 설왕설래 하기는 합니다만 동방박사의 별을 통해 대략 6월의 어디쯤이 아니겠냐 하기도 합니다. 끝으로 헤롯이 주전 4년 유월절 즈음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예수는 그 이전에 태어났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의 탄생일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데요. 그렇다면 왜 성경은 예수 탄생일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복음서 기자들도 확실한 예수의 생일을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저마다 나온 날이 있지요. 중요한 건 세상에 나온 날 자체보다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이나 의미일 겁니다. 저는 성경도 이런 이유를 갖고 있다 생각합니다. 즉, 성경은  예수의 육신이 태어난 날 자체보다! 는 예수 자체가 세상에 나온 목적과 의미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게 된 목적과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고, 헐벗는 공의가 없는 이 땅에 정의를 세우고, 전쟁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이 곳에 평화와 화해를 전하며,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이 곳에 사랑을 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질과 명예라는 헛된 신기루를 쫓으며 고통 받는 영혼에 참된 은혜와 인생의 길을 보여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비우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모든 생명을 다시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올 성탄을 보며 저는 예수의 탄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가만보면 요즘처럼 예수 이름이 욕먹는 시대가 없지요. 교회가 "개독교"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건 순전히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교회가 장사소굴이 되니 이런 소리를 들을 수 밖에요.. 

저는 이번 성탄을 통해 모든 크리스챤들이 다시 한번 자신과 교회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기도를 해보게 됩니다.

교회는 정의 곧, 가난하고 헐벗은 소외된 자를 섬기고 이들도 함께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일하고 있는가.

평화 곧 전쟁을 반대하고, 이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오히려 지역감정이나 진보, 보수 등의 이념 대립에 앞장 서지는 않고 있는가.

새로운 삶 곧 물질의 노예가 되듯 얽매이는 게 아니라 인생의 참의미와 행복을 전파하며 살고 있었는가. 혹여 오히려 교회가 더 물질에 얽매여 교회 건물을 세우고, 고급 승용차를 타며, 은행의 VIP 자리에 있지는 않았는가.

사랑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심지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 섬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의미와 목적을 잘 기억하며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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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가 이 세상을 섬기려 왔다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죽기까지 사랑하며 섬기었다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를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처럼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이러한 예수의 섬김을 함께 나누고, 따를 수 있도록 크게 세 가지 정도 정리해 나가볼까 합니다.


먼저, 예수는 직접 낮아지는 '발바닥 섬김' 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온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직접 걸어 다니며 '발바닥' 으로 섬긴 분입니다. 가만히 앉아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지적하는 게 아니었지요. 또한 '발바닥' 까지 내려 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몸소 낮아졌고, 누구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하늘에서 높아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 누구에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을 "능력" 이라 합니다. 요즘은 교회도 그러지요. 낮고, 어려운 곳에 찾아가기 보다 은행 VIP 자리에 오르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 줄 압니다.

물론 이렇게 외형적 발전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허나 그 속에 예수처럼 발바닥까지 내려가고,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섬기려는 정신이 있는지는 각 자 돌아봐야 한다는 거지요. 만약 교회진정 예수처럼 낮아져 세상과 이웃을 섬겨왔다면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두 번째로 가림 즉, 차별 없는 섬김이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가난한 서민을 섬겼습니다. 세상이 모두 욕하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여자도 섬겼고, 이방인도 섬겼습니다. 그냥 다 똑같은 생명이자, 존귀한 존재라는 마음에 하나 같이 섬기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랑과 조언, 비판을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와는 정 반대이지요. 요즘 세상은 멋진 옷과 좋은 차, 집을 가진 부자와 권력자는 정성으로 섬깁니다. 무슨 의원이나 상급 기관 관계자가 온다하면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그냥 쉽게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힘이 잔뜩 들어가고, 발언권도 셉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 교인과 허름한 교인의 대우가 말은 안그런다 하지만 본인이 위화감을 느끼게 합니다. 헌금을 많이 내야 직분을 받으니 말이죠.

우리 스스로 좀 더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우리 안에 이런 어리석은 "가림"이 계속 존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은총을 스스로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의 섬김은 이름도, 빛도 없는 "조용한 섬김" 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지요. 실제 예수 자체가 그랬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게 원래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당연한 일이라는 거지요.

요즘 보면 뭐 그리 자신을 내보이려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조용히 섬기는 게 당연한 일인 거지요. 그냥 말없이 하면 됩니다. 물질이 있으면 물질로 돕고, 요리 재주가 있으면 요리로 돕고,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청소면 청소로 그냥 섬기면 되지요.

그런데 요즘은 뭘 하나만 해도 사진을 꼭 찍고, 현수막을 걸며 자랑 합니다. '기부를 얼마 했다..누구를 어떻게 도왔다' 난리 법석을 떱니다. 특히, 교회와 공직에 있는 분들이 유독 자주 보이지요.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랑을 해대는 건지.


물론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만 과연 자신의 맘 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무엇을 위하고 있는 건지 잘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입니다.



사실 세상을 섬긴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섬김 즉, 자신을 먼저 닦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닦아 간다는 것..어렵지요. 그러나 동시에 섬김의 삶을 통해 인생의 더 깊은 배움하늘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도 있음에 우리는 용기를 얻고, 다시금 어려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 이름이 욕보이지 않게 하는 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영혼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데도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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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제게 충격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최후의 대예언"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연구하는 무슨 단체에선가 발행한 것이었는 데요. 요지는 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모두 맞춰왔었고, 이제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으며, 이건 틀림이 없을 거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허나 이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지금 돌아보면 이들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팔아 이슈를 만들어 먹고 사는 뭐 그런 부류에 불과했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좀 다릅니다. 예언으로 먹고 살기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은 한문으로 미리 예자를 씁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 즉, 맡을 예자도 있습니다. 뭔가를 맡아서 얘기하는 거지요.
성경의 예언자는 그렇습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데,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받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어느 날 갑자기 영험하다 하는 산에 올라가 도를 닦다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1)일상에서 생활하며 당시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내면의 영혼을 복합적으로 볼 줄 아는 고도의 학식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2)동시에 하나님께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 있는 매우 예민한 영성을 갖춘 자였고, 오직 3)말씀에 따른 정도가 아니면 죽음도 불사하는 곧은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는 당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 내면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뜻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곧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언은 먼저 주제 선포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흔히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심령의 회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라는 얘기인 거지요.

즉, 예수는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사람을 신분과 성별 부유함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고, 권력으로 약자를 억누르며, 강자 즉, 기득권 층이 약자 즉,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이로 인해 타락한 영혼과 상처 받고 절망한 심지어 귀신마저 들려버리는 영혼을 보면서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로 천국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 하나님 나라이지요.

왜 우리 나라는 항상 죽은 다음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땅의 삶을 살면서는 천국의 삶을 살려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어야 하고,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럴 수 있도록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친절하고, 사랑해서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됩니다. 추락할 만큼 추락한 도덕성을 갖고 서는 하나님의 "하"자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언자였던 예수는 크리스챤에게 참으로 힘든 요구 즉, 예언자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냥 편히 교회 출석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맘에 늘 깨어있으라 명을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뭔가 다른 거룩한 삶을 살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곧은 의지를 전하며, 생명의 삶을 살 것을, 평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뒷일을 책임져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은 지금처럼 너무 교인늘리기나 분점 내기에 열중하기보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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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3:50 Posted by 바람몰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런데 예수가 만드는 평화는 흔히 말하는 현실의 삶을 무시한 내면이나 내세의 평화라기 보다 좀 더 적극적 의미를 품은 분명한 현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온 몸을 투신해서 평화를 선포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적극적 개념의 평화를 갖고 있던 예수
먼저 예수는 구약 성경의 샬롬 신앙을 갖고 있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샬롬" 이란 직역하면 평화를 말하는 것인 데,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쟁반대' 구호로 대변되는 전쟁부재, 개인 내면의 평화 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의 개념입니다. 즉, 전쟁부재 상황을 유지하는 보존 활동과 질적으로 다른 '평화 부재의 상황에서 작업을 통해 비로소 평화를 이룩해내는 창조 활동'을 말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평화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
예수의 이러한 평화는 예언자 이사야가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야기 하고, 시편 기자가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이야기 했듯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정의를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렘22:3). 또한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생명을 구원하고, 도움이 없는 자를 건지고,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라 합니다. (시72:4)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고, 제왕들을 왕자에서 끌어 내리며, 낮은 사람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 정의가 없고, 착취와 부정, 거짓, 파괴, 양극화 만이 계속되는 예루살렘을 보며
평화가 없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강팍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이 보여 너무 가슴이 아프니 말입니다. 또한 이런 맥락 위에서 예루살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도 선포하고 하는 거지요.


정리 하는 글 : 우리 사회를 보면서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지금 이 사회를 본다면 또 다시 두번째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서민을 위한다 말은 하지만 정작 서민 눈에는 부자를 위한 정책 밖에 보이지 않고. 경제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양극화는 계속 심화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보다 냉혹한 입시의 경쟁에 빠져야만 하지요. 대북 관계는 지금 죽어가는 수만의 어린이와 동포를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갈 수록 더 늘어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루살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어려운 세상에 대형 교회 목회자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 타 있고, 교회는 세습의 대상이 되며, 낮은 자세로 섬기지는 못할 망정 은행 VIP나 되고 말이죠. 사회적으로는 일개 시민단체보다 도덕성이 낮다 평가 받고 있습니다. 종교간 화해와 사회 통합에 기여는 못할 망정 오히려 대립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행위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전하려 했던 그 복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향하던 가치와 노력을 받아 올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발걸음을 쫓아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참된 공동체가 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섬기며 화해의 사도가 되는 십자가를 충분히 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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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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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2:07 Posted by 바람몰이


전통적인 해석의 한계

예수가 두번째로 눈물 흘린 것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이 부분을 예루살렘이 망할 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가 비통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가 그 뒤에 말하는 평화에 대한 이해, 당시 예루살렘과 예수의 관계 등이 적절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 한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수가 의도하는 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선명하게 대조하고, 실제 예수는 그 첫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해 예루살렘을 최종 종착지로 삼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게 된 핵심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갖고 있던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말이 성전이지 사실상 성전이라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 했고, 이런 차별을 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각 종 세금을 비롯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토지 수입 등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오늘날의 은행같은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당연히 성전의 주요 관리자인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성전 경비대장, 성전 창고 관리인 등)은 정규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고, 많은 토지, 금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통로로 변질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예수의 눈에는 갈릴리나 베다니 같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곳과 이들을 끊임 없이 죄인이라 규정하고, 수탈하는 예루살렘이 강도의 소굴로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대립관계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것만 해도 벌써 통탄을 금할 수 없을 예수였던 거지요.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리게 된 근본적 이유
그런데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이미 위의 이유도 충분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평화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활동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 에 있다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라는 건 죽은 후 떠나가는 "저 세계" 라기 보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이미 도래한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사역지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언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이는 로마의 군사력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수많은 서민들의 피와 땀, 한과 눈물이 맺힌 로마의 거짓 평화에 대한 분명한 파산 선고였습니다. 마치 새벽 닭 울음소리로 어둠이 아닌 새벽이 선포되듯 말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과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뜨임을, 눌린 사람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라 기술합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냈다 이야기 합니다.

즉,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바로 "평화"의 선포이자 도래였다는 겁니다. 
2-2 편에 계속 됩니다(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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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01:26 Posted by 바람몰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

1.전통적 해석의 한계

그 동안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가 자신과 그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모든 걸 절망하고, 포기한 이들을 보며 민망히 여기고, 통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보았습니다. 또한 나사로가 살아남을 통해 이들의 믿음이 온전케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믿음의 측면에만 국한 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좀 더 솔직히 교회의 입맛에 끼워 맞췄다는 느낌도 듭니다. 저는 이 부분을 좀 더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까지 함께 볼 때 예수가 눈물을 흘린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인간적인 공감을 먼저 하는 예수
예수는 수많은 경비병이 있는 성전을 뒤 엎을 정도로 상당히 터프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보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는 마르다, 마리아를 보며 눈물을 함께 흘리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는 나사로가 그의 한마디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알고 있던 그였다면 사실 '걱정마라'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거나, 웃으며 그냥 나사로를 살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예수는 비통하여 괴로워하면서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의 눈에는 그들의 아파하는 마음이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겉보이는 모습과 달리 예수는 따뜻함과 이해심이 가득한 마음을 소유한 이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온 몸이 메마른 듯 지쳐버린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공감" 하였던 이였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를 보고도 그랬고, 돌팔매질을 당하던 부정하게 취급 받는 여인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마르다와 마리아, 주변인의 아픔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어떻게 그 마음을 이렇게 따뜻한 이가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인간적인 공감을 먼저 했던 거지요.  

3.사회의 부조리에 일침을 놓는 예수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게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시 온전히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여자였다는 겁니다. 또한 두번째는 이들이 사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살던 곳이라는 거지요. 바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을 예수는 당시 사회를 거슬러 사랑하였고, 함께 눈물 흘렸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집중 주목을 받던 그의 행보는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쳐 지는 게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 사회의 기득권 층과 지배계층에게 찍혀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가 베다니로 가고, 심지어 여기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죽어 있던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 그냥 조용히 지나쳐질리 없습니다. 사회지배층은 대다수 서민(민중)이 동요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이 싫으니 말입니다.

실제 저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의 행위 때문에 많은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예수를 죽일 모의를 시작하지요.

결국 이것은 그의 눈물을(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역시 믿음의 차원으로만, 그가 사람들을 보고 답답하고, 안타까워서만 흘린 것으로 머무를 수 없게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버린 차별 받는 이들, 마음 아파 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은총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부조리는 단호히 거부하며 분명한 일침을 놓겠다는 그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정리하는 글
저는 예수가 오늘의 우리를 보면 또 다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먼저 너무 힘들고, 지쳐 버린 우리를 보며 안아주고 싶어하고,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겠지요. 또한 동시에 이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게 만든 이 세상과 이런 탐욕을 키워가는 우리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겁니다. 끝으로 갈 수록 심해지는 이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도 그러겠지요. 여전히 우리는 돈 없고, 빽 없는 서민의 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엄격한 법적용을 받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나아가자면 끊임 없이 파괴되는 생명세상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 정의, 평화가 부재한 그런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고,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안의 기름띠를 이겨 냈고, 백혈병에 걸린 한 사람을 위해 줄을 서 골수를 기증하며, 국가의 중요 문제를 위해 작은 촛불을 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갈 수록 경제가 어려워지고, 각박해지는 세상이라 하지만 우리가 이런 희망을 보고, 함께 마음을 모아 갈 때 어려움도 극복 되고, 세상도 더욱 따뜻해지는 거겠지요.

기독교는 예수를 완전한 인격과 신격의 결정체라 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지요. 그는 눈물을 흘리던 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언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요.  

성경에는 예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두번 나오고, 한번 증언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죽어 있는 나사로 때문에 아파하던 가족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 되어 흘렸던 눈물을 들수 있겠습니다(요11:35). 두번째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흘렸던 눈물을 들 수 있습니다(눅19:41). 끝으로 세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흘렸던 눈물이었습니다(히5:7). 

이 글은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흘렸던 눈물에 대해 살펴보려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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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2-2) 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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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땀흘려 일하는 예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0. 13. 17:23 Posted by 바람몰이


1.저는 로또를 사지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로또 살 돈도 아깝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첨되도 기분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왠 로또 얘기냐구요. 요즘 보면 가만 앉아서 돈 버는 사람이 자주 보여 그렇습니다. 부모 잘 만나 유산 상속 받는 것까지는 좋으나 세금을 안 내도 처벌 받지 않는 모습이나 부동산이나 그림 잘 사서 돈 벌어대는 모습..뭐 좋게 말하면 투자겠지만 저 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허탈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땀흘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먼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노동을 통해 천지를 창조했다 성경은 고백합니다. 그냥 거저 생긴 게 아니라는 거지요. 

또한 예수 자신이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부모가 하던 일을 자연스레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으니 예수 자신도 아버지 요셉처럼 목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자신이 만든 멍에는 가볍다는 비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2.예수가 일하며 먹고 사는 데는 분명한 범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용할 수 있는 만큼의 양식을 버는 데 까지 였습니다.

그가 일용할 양식을 강조한 것은 사람이 그 이상을 원할 때 오게 되는 유혹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 끝없는 욕망은 사람의 삶을 항상 불행하게 느끼게 합니다. 또한 사람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인생의 여유를 놓쳐 버리게 됩니다. 끝으로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모른 채 이기적인 삶만을 살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맙니다.

구약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 이상의 양식을 모을 때 그것이 썩어 진동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욕심을 버리고, 공동체의 삶을 살며, 인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은 수십년간 매일 같이 양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이러한 성경의 맥 정점에 서서 분명히 선포를 하고 있는 겁니다.


3.예수가 직접 땀흘려 하던 노동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넓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노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좁게는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지탄 받던 당시 세리장이. 그 중 한명은 예수를 만나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 나라가 가득차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둔 재물 중 부당하게 거둔 것은 네배로 돌려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새롭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은총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훗날 쓰여진 성경 본문에는 마음이 가난하다 표현되어 있으나 원문은 그냥 가난한 자이다.) 이미 이 세상이 버리고, 지금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고, 위로해주신다 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 대한 분명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를 만나 세상의 가치에 묶인 자신이 해방되고, 눈이 뜨이며, 억눌림에서 자유를 얻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가 함께 상생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은총의 해가 되었습니다. 그 사회나 개인 모두의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4.오늘날 우리의 삶은 아무리 잠 안자고, 발버둥치며 일해도 반지하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내가 땀흘리지 않아도 돈이 돈을 벌게 하고, 이 돈은 곧 힘이 되어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정당하게 재물을 모은 자마저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하고, 죄인처럼 살아가게 합니다. 결국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구조가 됩니다. (사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가 그렇기도 합니다만) 

사람들은 소외감, 박탈감, 허무함 등에 빠져 점점 영혼이 곤고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 모두 똑같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직접 땀흘려 일하고, 일용할 양식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 모두에게 해방감과 자유를 주고자 합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행복하고, 참된 인생을 살 수 있게 인도하고자 합니다. 실제 자신이 직접 나무를 다룬 목수로써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노동을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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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예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9. 24. 15:31 Posted by 바람몰이


1.저는 예수를 바람둥이라 생각합니다. 이성이나 홀려대는 카사노바처럼 그를 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둥이란 어떠한 성질은 지닌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인데요. 말 그대로 바람의 성질을 갖고 있는 예수이기에 바람둥이라 여기는 겁니다.

인간은 사유재산이 생기고, 권력분화가 일어난 후 단 한번도 재물, 권력, 명예 따위의 노예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여기며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의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경제는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합니다. 옛 선현들은 명예는 한 줌의 재와 같다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비록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이것들을 배제하고 살 수는 없지만, 이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살아야만 비로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일 겝니다. 

예수는 이런 세속적 가치를 버리라 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떠날 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보내신 분이지요.

그러나 이것에 얽매이기만 해서도 안됨을 설파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는 것. 즉, 자유롭게 성령에 따라 살라합니다. 성령이란 성스러운 영.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하는 바람인데요. 성령에 따라 산다는 건 결국 바람과 같이 사는 그런 겁니다.


2.본래 바람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요. 무질서하게 부는 것 같지만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거대한 흐름을 갖고 흐르고 있습니다. 때론 사람을 시원하게도 하지만 때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무섭지요.

예수가 지닌 이러한 바람의 영성은 철저하게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났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늘의 뜻이란 고기압에서 인간의 삶이란 저기압을 향해 흐르는 삶이었지요. 이것은 자유분방 한 듯 여행하며  섬김과 십자가를 향한 흐름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런 세속적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고, 붙잡히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이 땅위의 인간의 삶을 사는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려 절망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되었고, 정의가 없고 인권이 유린되는 곳에서는 강한 기둥이 되어 정의와 인권을 되찾게 하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서는 서로를 향해 기도하게 하였고, 내면의 상처와 고민으로 고통받는 자에게는 자신의 영혼이 해방되는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세상의 어떠한 가치나 제도, 이데올로기에도 붙잡히거나 정체하지 않으며 참으로 바람 같이 사신 그런 분인 거지요. 그리고는 민중을 선동했다며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란 정치범 죄목을 뒤집어 쓴 채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3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3.이 세상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심리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흐름 자체가 심리적 침체에 빠져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질과 명예 같은 가치를 잡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불안한 심리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것을 잘 잡고 삐까뻔쩍한 외제차를 몰고 와야만 능력있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침체"의 개념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는 바보 중의 상 바보입니다. 그의 바람과 같은 영혼은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가 2천년 전이 아닌 지금 와 있었다면 어느 역 앞 노숙자 신세가 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불안하고, 침체된 심리 상태가 아닌 살아있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삶을 살고 있었을 겝니다. 그의 곁에는 배고파도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소크라테스가 모여 있었을 겝니다.


4.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목회자들은 그의 바람과 같은 영성을 철저하게 본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교회 건물과 신도의 숫자, 각 종 종교행사 출석률, 사회적 명예와 지위 등에 얽매여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자식의 명문대 입학과 물질적 성공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억눌리고 힘들어 하는 자를 위한 섬김과 나눔 등의 사회적 책임 역시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룩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하면서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는 참된 하늘 바람으로 샤워하지를 못합니다. 교회 용어를 빌리자면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될거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라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기독교인들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뤄지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관용으로 용서하듯 우리가 생명세상에 지은 죄에 대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시기를 구하며 모든 것의 권위와 영광은 우리 인간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것이라 고백하게 하였지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의 두번째 글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바람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고운 님께 영혼까지 맑게 하는 시원한 예수의 하늘 바람이 지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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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창 인기를 끌었던 '그 놈 목소리'라는 영화가 있지요. 자식 가진 부모 입장이 되니 예전과는 달리 이런 내용의 영화는 쉽게 손이 가지 않더군요. 하지만 새삼 유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며 '어쩌다 인정 많고, 사람 순하기로 소문난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가만보면 요즘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취급되는. 인간성이 유린 되는 이런 일이 여전히 반복될 뿐 아니라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런 일이 반복 및 증가하게 하는 사회 구조 역시 여전히 존재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두말 하면 잔소리지요. 모두 사람의 가치보다 재물 같은 물질이나 이데올로기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잘못된 사회제도와 분위기, 사고방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아 버린 거지요.


2.성경은 이것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전통은 이런 가치관이 매우 강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못하고 우상을 섬긴다는 거지요. 물론 이런 전통은 신약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 아닌 세상적인 것에 몰두한다는 겁니다. 그 핵심 원인이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이란 겁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넣어주셨던. 공동체를 지향하고, 서로를 아끼던 우리의 인간성을 부끄러울 정도로 타락하게 만들어 죄악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는 거지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인정이 메마르고, 무시무시한 문제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겁니다. 공기에 젖어 사니 공기가 있는 줄 모르듯, 죄악에 물든 세상에 사니 이게 당연한 건줄 알고 있는. 얼마나 우리가 죄에 무감각해져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3.성경의 핵심인 예수 역시 돈이나 명예를 쫓고, 이기심이 가득하여 선한 본성을 죄에 빠지게 하는 이 어이 없는 사회 분위기를 보며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영혼이 귀하게 여겨지지 못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지 못하는 세상을 보며 "정신 차리라" 정확히 꾸짖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가 바리새인과 안식일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39가지나 되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안식일 금지조항, 정결규정으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백성들을 죄인이라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재물과 권력 즉,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유다의 지배권력세력과 체제>를 통렬히 꾸짖습니다. 안식일 마저도 자신들의 도구로 삼아 사람을 소외시켜버리는 이들을 향해 말입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이 꾸짖음은 사람, 인간성, 영혼이 사라진 종교, 사회로 대표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에게 가해진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10:14는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것 모두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것이라 분명히 선언합니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하나님 중심주의>가 의도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고 불의한 제도, 권력, 체제, 사회분위기에 맞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즉,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사람 중심에 그 가치가 있다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 사회를 보며 정신 차리라 아주 통렬하게 꾸짖을 수 밖에요..자기 스스로 사람을 소외시켜 가고, 굴레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정신차리라 할 수 밖에요..

사람이 중심이 되고, 그 영혼을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4.
우리는 흔히 신의 아들 예수.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가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었는지는 소홀히 여기곤 하지요.

그래서 한국 교회 교인들하나님 중심주의내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아주 열심이면서 이웃 사랑이나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낮은 자리에 서는 데는 약합니다. 대형교회가 넘쳐나고, 대형고급차가 넘쳐나는 데 이웃을 섬기는 손길을 점점 줄어듭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는 사람 중심주의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라는 거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소외된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보며 한없이 눈물흘리며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살게 됩니다. 좀 더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 잘 사는 자나 못 사는 자나 서로 존중할 수 있게 하려 애를 쓰게 됩니다.


5.물질 만능주의와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이 시대. 사람마저 상품이 되는 이 시대.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나, 존경받는 잘 사는 부족한 이 시대. 평화보다 전쟁이 더 많은 이 시대.

저는 <예수 알아가기> 라는 주제로 약 10회 정도의 글을 연재해 보려 하는 데요.

오늘 그 첫번째 시간.
김준태라는 시인이 ‘아무나 보듬고 싶다’라는 시기 참 다가와서요. 이 시를 통해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제 글이<예수님은 누구신가?!> 묻고,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아무나 보듬고 싶다

무식하게 정말 일자무식하게

사람이여 환장하게 좋은 사람이여


아무나 보듬고 설레이고 싶다


그리하여 더욱 아무나 보듬고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놀라움을


강물에 입술 적시듯 노래하고 싶다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것들이여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사람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우리가 너무 깊이 보듬어


마음에 행여 가시가 박힌다손


육신에 행여 손톱자국이 머무른다손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눈동자여


사람의 뼈는 하늘의 하늘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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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9 Posted by 바람몰이



1.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저희가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하기 위해 이곳 한신에 들어왔습니다. 부푼 꿈을 품고, 오직 당신을 향한 믿음 하나로 들어왔습니다. 당신의 모든 양떼를 먹이고, 인도하라는 그 명령에 순종하고자 왔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신학 순례를 하며 많이 힘이 듭니다.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뭅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해야할지,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 건지, 보이지 않는 내 앞을 볼 때는 마냥 답답하기도 합니다.


주님, 당신은 십자가를 통해 죽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곁에 있는 동지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저희가 아픈 현실과 힘든 상황만을 보게 하지 마시고, 더 큰 은혜로 이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질고를 지고 오르셨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소서. 오늘 이 순간 나를 부르신, 태초부터 예비하셨던 당신의 계획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당신을 더욱 굳세게 붙잡도록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어 당신께서 맡기신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2.주님,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오늘도 저희는 기도합니다. 저희가 그 일에 나서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길 원합니다. 당신의 나라를 향한 귀한 발걸음을 내딛길 원합니다. 주여 저희를 당신의 종으로 써주소서.

세상은 저희의 지혜를 넘어서고, 저희의 힘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은 분명한데, 그 실체가 보이지 않고, 뭔가 바꿔보긴 해야겠는 데, 그 벽이 너무나도 크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벽앞에 설 때마다 너무나도 약하고, 부족한 내 모습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공부해야할 것은 너무나도 많고, 나 자신의 힘은 미약하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 데 제 자신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주님, 당신은 이렇게 부족한 저희를 모두 아시면서도 부르셨습니다. 내 잔이 차고 넘치게 해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주여, 저희가 당신의 이약속을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께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흘리셨던 그 눈물의 기도를 하게 하소서. 내 자신을 온전히 가꿔 나가게 하소서. 이 땅에 사랑만이 꽃 피우도록 저희를 이끄소서.


3.오늘날 이 땅에 주신 일용할 양식을 온전히 나누는 데 저희가 앞장서게 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과 서로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끼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크신 은혜를 기도합니다.

다만 바라옵기는 우리를 혼미케 하는 세상의 모든 영광과 안락의 유혹을 이기게 하시어 당신앞에 늘 겸손하고, 매일 매일을 새롭게 태어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이 세상의 모든 악의 길에 서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그것을 온전히 분별해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눈을 주시고, 귀를 주시옵소서.


4.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당신의 것입니다. 모든 영광도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그렇게 믿고 고백합니다. 저희들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게 하소서. 모든 인간의 영광을 타파하시어 저희가 오직 당신의 나라만을 찾고, 당신이 주신 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모든 부정적인 가능성들과 긍정적인 가능성들을 당신의 뜻 속에서 하나 하나 주어진 은혜만큼 일궈가는 자들 되게 도와주소서.


5.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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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6 Posted by 바람몰이


샬롬!!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건강이 상치는 않을런지 걱정입니다.
늘 건강히 주님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건강히 잘 지내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곳 양산동의 바람은 제게 좀 더 열심있는 삶을 재촉하며, 기도와 공부를 쉬지 않게만 하는 군요. 특별히 이번 학기는 성적도 잘 나와 좀 더 겸손한 삶을 살며 하나님과 교회에 모든 영광 돌리게 하였습니다.

지난 학기 저는 한국 철학공부를 하며 동양인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사유양식을 학습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여러 흔적들을 발견하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학속에서도 제게 은혜와 깨달음을 허락하시었기에 전 또다시 영광 돌릴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평화신학에 대한 여러 서적과 학자들의 견해를 탐독하며, 갈수록 험난해지는 전쟁과 아픔의 역사위에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갈 길을 고민하며 찾아보았습니다. 21세기는 종교의 위기가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가 할일은 더 많아질 것이며, 더 많은 준비를 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지요. 아울러 그동안 상대적으로 적게 읽어왔던 구약성경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요즘은 구약 성경 공부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수많은 사조들중 기독교가 어떤 길을 걷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할지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종교 다원시대에서의 기독교, 유전자 복제 시대속에서의 기독교, 포스트 모던 이후의 세계에서 자리하는 기독교, 이땅의 역사속에서의 기독교 등등..최근 신학계에서나 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되는 테마를 공부하였던 것입니다. 주변의 어떤 학도중에서는 시험에 들어 힘들어 하던 모습도 보았지만 저는 이곳에서도 하나님 은혜가 느껴져 수업 중 눈시울을 붉히던 게 한두번이 아니었네요.

아마도 이런 은혜속에서 나온 좋은 성적은 저의 무지함과 더 많은 노력을 채찍질 하는 것일 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의 바탕에 모교회의 기도가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제가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설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해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건강 주의하시기를 간곡히 기도하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늘 평안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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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삵아 보이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4 Posted by 바람몰이
부쩍 삵아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그렇게 삵았나요?
어느 새 이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걸까요..

하긴..
세월의 흐름과 그간의 삶을 돌이켜보니
내가 부쩍 삵아보인다는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동안 참 힘들 긴 힘들었죠.
여러 모로 말이예요.

음..

아직 힘들 날이 많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도 여러 모로 말이예요.

그래요..난 어쩌면 더 삵아질지도 모르겠네요.

음..

그래요...

정말 순간순간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도 너무 힘들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아요.

그렇지만..그렇지만..!!!

난 눈물과 내 아픔보다 더 진한 감동을 고백하고 싶어요.

우리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는 내 가슴을 꿰뚫어 내 영혼을
당신께서 허락하신 성령과 통전시키시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참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걷게 하시며, 내가 인생에 좀 더 겸손할 수 있는 지혜와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힘,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용기, 늘 삶에 활력이 넘치는 기쁨, 좀 더 아파할 수 있는 민감한 마음,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하고, 또 아름답게 바꿔나갈 수 있는 꿈을, 조그만한 밀알로 썩을 수 있는 큰 특권을 주셨거든요.

감사할 제목이 너무 많은 것 같거든요..ㅠ.ㅜ

이렇게 살아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위에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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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3 Posted by 바람몰이
어이가 없었다.


교회봉사 4년만에 처음 있는 일..


그동안 많이 나태했었나 보다.


또 다시 늦잠을 자는 날이 생긴다면, 내 스스로 종아리를 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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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1 Posted by 바람몰이
주님!!


힘이 듭니다..


아픕니다..


숨이 막힐 듯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로 잰듯 계획하신 은혜입니다.


주님, 제가 걷고 있는 이길은


당신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 앞에서


녹아지는 은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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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1 Posted by 바람몰이

사순절

눈물, 기쁨, 은혜로 지낼 수 밖에 없는..

모든 인연을 위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이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그러나 분노하는..

아파하는..

애달파 미칠 듯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나의 2005년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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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10 Posted by 바람몰이
분노는 은혜로 바뀌어 가고 있다.


꼭 같은 3년의 시간들..


십자가 위 예수님의 마음이 내게 온다.


나의 일상은 은혜를 위한 시간들.


분노와 은혜는 한끝 차이도 안되는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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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29. 11:08 Posted by 바람몰이
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또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난 체험을 통해 그분을 만났습니다

난 인생의 고단함 속에 그분을 만났습니다

난 내 마음의 가장 심중한 지성소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그분의 인도하심임을 깨달아가며
나는 그분을 만났습니다.

또한 학문의 상아탑 속에서 만났습니다

이 땅의 역사속에서 만났습니다

인류의 운명앞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은 내 삶의 지표를 완전히 다시 세워버렸습니다

그분의 그 한없는 사랑은 내 삶의 모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난 우리 예수님을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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