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이 남자의 인생'에 해당되는 글 194건

  1. 2009.07.07 아내의 다이어트. 이렇게 외조하겠다! 10
  2. 2009.07.02 나는 공처가일까 애처가일까? 17
  3. 2009.06.26 아내의 마법은 남편에겐 기회이다! 29
  4. 2009.06.08 나일롱 환자 VS 보험사 그 결과는? 24
  5. 2009.05.28 B.M.W 로 출퇴근하니 참 좋습니다. 18
  6. 2009.05.27 새벽에 아내 아침을 해주고나니.. 11
  7. 2009.05.20 남자의 변신은 무죄다! 그 남자의 몸짱 프로젝트 2
  8. 2009.05.19 남자는 결혼해야 철이 든다? 4
  9. 2009.05.18 사위도 아들이고, 장인 장모님은 내 아버지, 어머니십니다. 11
  10. 2009.05.15 꺽정샘의 수학강사생활 일기 4
  11. 2009.05.06 서로 챙겨주는 맛이 있어야 부부다. 5
  12. 2009.04.28 주말부부 설움, 아프니 느껴진다. 7
  13. 2009.04.24 야~애비야! 그 전화사기범(?)이 붙잡혔단다! 8
  14. 2009.04.22 아내와 딸 그리고 나, 그 기묘한 삼각관계. 10
  15. 2009.04.14 야간에 산에 올라 도심을 보니.. 6
  16. 2009.03.17 마트에서 캐쉬백 적립하는 남자..이상한가요? 73
  17. 2009.03.09 할머니께서 보이스피싱에 당하셨습니다... 276
  18. 2009.01.13 첫 휴가 아내. 감동의 <편지>로 답하다 27
  19. 2009.01.11 결혼 3년. 아내에게 첫 휴가를 주다 10
  20. 2008.12.17 집에 들어오는 "쥐" 어떻게 퇴치해야 할까요? 4
  21. 2008.12.11 주말부부 6개월. 가정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다 107
  22. 2008.11.24 오천원으로 가족 만찬을 즐기다. 4
  23. 2008.11.21 어느 페미니스트의 이중생활 15
  24. 2008.11.18 아내를 더 느끼하게 한 깜짝 이벤트 '고구마 튀김'
  25. 2008.11.17 너무 커져버린 아내의 모습 3
  26. 2008.11.11 매일 밤 연필을 깎아주시던 할아버지
  27. 2008.10.08 반대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취직
  28. 2008.08.15 눈물 젖은 할머니의 수박 8
  29. 2008.04.25 체질량 지수 측정의 굴욕
  30. 2008.04.22 굴레


요즘 아내의 다이어트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벌써 3주차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그 동안 수차례 다이어트 시도를 하다 금방 포기하는 걸 봐온지라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중간에 금방 멈추는 듯 하여 눈물 쏙 빠지게 제가 독한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기왕에 시도하는 거 꼭 성공해서 자신감도 찾고, 건강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유산소 운동을 하고 밤에는 웨이트를 하며 식단 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도 움직여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이어트 외조를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다행인지 아닌지 지난 2년간 하던 일을 그만 두게 되어 이번 주부터 말일까지는 시간도 많습니다. 그 전에는 이미 먼저 몸짱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었지요.


제가 아내를 위해 할 일은 크게 두가지 측면이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첫째는 식단조절에 같이 임하는 거고, 둘째는 아이를 잘 봐주는 것입니다.

일단 장을 봐왔습니다. 닭가슴살과 두유를 주문했고, 샐러드용 양배추와 달걀, 두부, 버섯, 감자, 단호박 등을 구입해왔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에 어떤 음식을 해줄까 생각하여 일주일치 식단을 짜보았습니다. 탄수화물과 고단백의 양을 조절할까 합니다. 섬유질이 부족하지 않도록 오후 간식을 싸주려고도 합니다. 

그 다음 아이를 제가 지금보다 더 봐줄 수 있도록 하는데요. 사실 여자의 입장에선 두번째가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먹다 남긴 밥을 처리하는 것. 이것만해도 벌써 보통 일이 아니지요. 아이가 울어서 운동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마음이 얼마나 쓰입니까. 운동장을 돌다가도 아이가 신경쓰여 금방 들어가게 되지요. 그래서 기왕에 보는 아이 제가 좀 더 신경쓸 수 있도록 할까 하는 것입니다. 저녁도 제가 좀 챙기고, 목욕도 주로 제가 시킬 수 있도록. 우유 등도 제가 좀 더 챙겨주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아내의 다이어트에 외조를 하면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워낙 어린 아이들을 오랫동안 지도해와서 그런지 아니면 성격이 그런지...뭐든 한번 하면 제대로 하라고 잔소리가 너무 심합니다. 물론 아내가 잘 되라 하는 거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참 힘든 일이 될 겁니다. 사실 벌써부터 아내의 불평이 나오는 듯도 합니다. 아..이걸 어째야할지...아마도 아내의 다이어트에 제가 제대로 외조를 하려면 이놈의 입방정(?)부터 잘 다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내를 처음 본건 대학 새내기 시절 강의실이었습니다. 그 때 아내는 수업에 늦어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요. 저희 과의 특성상 굉장히 얌전하거나 남자 같은 여학생이 많은데, 그 때 아내는 너무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제가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ㅋㅋㅋ 주로 심야에 방문하곤 했던 족발보쌈 친구들과 피씨방에서 아내를 달래주던 우동 국물은 또 다른 아내를 만들어냈고, 결정적으로 아이를 낳으며 상당히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변한게 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더 어두워져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자신감도 더욱 잃어가는 듯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아내의 다이어트가 반드시 성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고 싶습니다. 이놈의 잔소리만 어떻게 한다면...으...ㅡ.ㅡ;; 이번 외조의 핵심에는 제 입을 다스리는 게 핵심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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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처가일까 애처가일까?

[LIFE]이 남자의 인생 2009. 7. 2. 13:57 Posted by 바람몰이


얼마 전 아내의 마법기간 중 밥을 챙겨주는 글을 올렸습니다. 조회수가 수백회가 넘어가자 여러 반응이 나오던데요. 문득 그 반응들을 보며 문득 '공처가와 애처가' 의 차이가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사전에서는 아내에게 눌려 지내는 남편을 공처가라 합니다. 애처가는 아내를 각별히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눌려지내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각별한 사랑을 하는 것인가요.

아마 그 동안 제 글을 읽어오시고, 제 모습을 처음 보는 분들은 제가 "애처가" 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제가 써온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저는 대학시절부터 페미니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아내를 사랑하며 가정에 충실하려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주변에서는 저를 애처가를 넘어 공처가라 하기까지도 합니다. 너무 아내의 말을 많이 들어주며 풀어주려 한다는 거지요. 집안 살림도 너무 많이 한다고 합니다. 처가에 너무 많이 신경을 쓰려 한다는 얘기도 들은적이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저는 그냥 제 "소신" 대로 살아오고 있는 데, 주변 반응이 저를 "애처가" 와 "공처가" 로 만들고 있으니 말이지요. 

사실 이런 표현자체가 상당히 우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자한테 눌리고, 잡혀산다는 말 속에는 이미 여자를 휘어잡고, 강하게 리드하며 살아야한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또 애처가란 말자체에도 여성은 그저 남자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말이지요. 이런 용어 속에 이미 남성 중심적 사고 방식이 강하게 박혀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대단한 페미니스트이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또 대단히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란 게 어떤가요. 일방적인 순종이나 수동적인 태도를 요구받으면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또 나 혼자 독불장군으로 주도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큰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조금 앞서 나간 이야기지만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를 돌아봐도 그렇지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이란 꿈에 기초가 있고, 행복한 가정을 꾸림에 삶의 방향성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님들은 결혼 후 삶을 "살림살이"라 하였지요. 예, 서로를 살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바로 결혼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결혼생활에서 아내 또는 남편의 일방적인 순종을 요구한다...하...이럴려면 결혼을 왜 하는 가요? 제 상식으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저는 공처가든 애처가든 다 좋습니다. 제가 열심히 가정에 충실하려는 것은 저와 긴밀하게 엮여진 아내의 인생에 제가 부담되는 존재가 되지 않고, 기왕이면 행복하게 해주려는 데 있습니다. 또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의 행복을 담보하는 일이고, 어린 딸아이 인생의 첫단추를 잘 끼워주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서로의 삶을 살리는 "살림살이"가 될 수 있을테니 말이지요.

흐흐흐..여러분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저는 공처가인가요 애처가인가요?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설픈 페미니스트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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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길고 긴 아내의 마술기간이 끝났습니다. 주기적인 마술을 통해 아내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지만 본인 스스로에게나 옆에 있는 저에게 모두 이 기간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이 기간이 결코 힘든 시간만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남편의 노력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사실 저도 항상 아내의 마법기간을 챙겨주는 건 아닙니다. 연애시절에는 항상 신경쓰며 챙겨주려 했는 데, 결혼 후 이런 저런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하니 잘 되지가 않습니다. 많이 힘들어할 때 한번씩 정도...가 되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점수 좀 만회하려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충분히 영양보충 가능하면서도 함께 좋아하는 걸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먼저 호박을 잘게 썰어줍니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넣어 가볍게 양념 후 볶아주지요. 그 다음은 이 양념 그대로 양파까지 볶아 줍니다. 끝으로 당근을 잘게 썰어줍니다. 그런데 이 때 저는 당근을 볶지 않습니다. 비타민 A 가 열에 약해 금방 파괴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씹는 맛을 고려. 좀 더 얇게 채썰어주어 넣어주곤 합니다.


압력 밥솥에 방금 지은 밥입니다. 비빔밤은 항상 방금 지은 밥에 먹어줘야 합니다. 그것도 양푼에 넣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제 맛이지요.



자, 이걸 이제 합체해줍니다. 그런데 이 때 양념을 넣기 전 들기름을 가볍게 한번 둘러줘야 합니다. 골고루 밥에 그 고소한 향내가 배어 있어야 밥을 비빈 후까지 그 고소함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보기 좋게 준비한 재료를 올려주고, 가운데 고추장을 풀어준 후 달걀 하나를 입혀 주면 완성!!

ㅋㅋㅋ 어떤가요. 좀 먹음직스러워 보이나요?

요즘 아내의 마법기간 동안 제가 저녁을 계속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닙니다. 며칠 전에는 된장찌개, 비빔밥, 양념 볶음밥(추후 포스팅 예정), 호박볶음 등 간단하게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상당하지요. 아내가 고마워하기도 하고 맛 없어도 맛나게 먹어주는 걸 보며 제가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예, 정말 아내의 마법기간은 남편에게는 점수 만회의 좋은 기회입니다~ㅋㅋ

요즘 좀 찔리는 게 많은 남편분들은 이 기회를 잘 잡아보시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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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할머님과 딸아이가 있는 오산집에서 자고, 오늘 아침 모셔다드리며 출근하던 차였습니다.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받아 웅~하면서 가고 있는 데, 길가에 주차하듯 서던 SUV 차량이 갑자기 튀어 나오는 게 아닙니까. 그 유명한 불법유턴을 하던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급히 속도를 줄이며 차량 방향을 조금씩 움직여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갑자기 튀어나온 차량인지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 결국 힘들어하시는 할머님때문에 신속히 차를 몰고 병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가슴 타박상과 목, 허리 염좌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삐끗 했다는 거지요.  교통사고는 날이 지날 수록 더 아픈 지라 이삼일 입원해 있을 겁니다만 예, 이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할머님은 다르지요. 손잡이를 잡고 계시던터라 손가락 통증이 너무 크십니다. 또 무릎을 문에 부딪치시어 아파하십니다. 아무래도 좀 계셔야 할 듯 합니다.

보험사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최초방문확인서" 라는 걸 작성하러 온 것이지요. 제가 2년 전 지금처럼 불법유턴 차량과의 사고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공부를 좀 해놨더니 의외로 말이 쉽게 통하더군요. 저는 보상금을 더 뜯어낼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쉽게 합의해줄 생각도 없다 얘기하였습니다. 일단 치료하고 보자 하였습니다. 직원도 충분히 수긍하더군요.

사실 이 부분은 우리 모두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떻게든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 나일롱 환자 연기를 하지요. 또 보험사는 꼭 해줘야하는 부분까지 숨겨가며 보상을 안 해줄때가 있습니다.

왜 서로 이러는걸까요..이런 문제일 수록 원칙대로 하면 참 간단하고, 서로 피해없이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지요. 나일롱 환자 연기를 안하며 조금이라도 못 받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보험사에서는 법대로 보상해주면 사람은 능력 없는 직원이 되고...

이런 뒤죽박죽 모습덕에 우리는 결국 매년 올라가는 보험료를 보게 되고, 내가 받을 수 있는 부분까지 못 받는..또 회사는 욕은 욕대로 먹고..개인이나 회사 모두 손해보는 일을 반복하고 있지요. 결국 서로 싸우긴 열심히 싸우는 데, 승자는 없이 패자만 있는 모양새가 아니냐 하는 겁니다. 


앞으로 보험사 직원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딱 법에 정해진 항목만큼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또 저 역시 나일롱 환자 연기는 안 할 겁니다. 저희는 충분히 치료와 보상을 받고, 보험사 직원분 역시 잘 일 처리가 되어 서로 좋게 사고가 마무리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P.S : 주식투자종목분석은 예전처럼 장을 틈틈이 계속 관찰하며 볼 수 없어 자세한 분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기본적인 기술적 분석은 챠트를 보며 가능하니 할 수 있는만큼은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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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저는 주말부부로 지내왔었는데요. 지난 5월 초 아이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일단 살림을 합치고 보자 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주말부부가 다시 한 가정 살림을 하니 참 좋았습니다. 아이 역시 아빠와 함께 하니 너무 좋아합니다. 저 역시 홀아비 냄새도 안나고 말이지요. ^.^;;

그러나 모든 게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겠지요. 당장 출퇴근 문제가 가장 크게 닥쳐왔습니다.
현재 저희 집은 경기도 오산시 양산동에 있고, 제가 다니는 곳은 부천시에 있는데요. 자가용을 이용해 고속도로를 타면 왕복 120km 이상이 나옵니다. 휴~기름값 부담이 상당하지요. 톨게이트 비용도 그렇구요.

그래서 결국 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마음 먹게 되었는데요. 사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꽤나 부담이 되었습니다. 일단 버스를 타고 나와 전철을 타고 왔다가 다시 한번 갈아타고, 전철에서 내리면 버스 또는 택시를 타거나 30분 이상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항상 차를 갖고 다니기에는 너무 부담이 되니 이용할 수 밖에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니 많이 좋아졌더군요. 특히, <환승할인> 이게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1호선 병점역에서 중동역까지 전철과 버스를 타고 보니 요금이 2천원 안팎 밖에 안들었습니다. 왕복이라 해봤자 5천원이 안 되더군요. 리터당 14-15km 를 가는 제 차로 계산해도 그 금액이 절반밖에 안 됩니다. 와~용돈 벌었지요! 아싸~

두번째는 지상파 DMB를 이용해 좋은 정보 프로도 볼 수 있고, 편히 잠을 잘 수도 있어 좋았습니다. 책을 볼 수도 있지요. 항상 저는 운전만 해서 늘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했었습니다. 대개 아빠들이 다 그렇지요. 모두 자고 있어도 혼자 계속 운전을 해야하고 말이죠. 그런데 피곤하다고 잠도 자고, 책도 보니 이거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세번째는 걷기를 통해 건강증진이 되어 더욱 좋았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은 전철역에서 차로 10분, 걸어서 30여분 거리에 있는데요. 저는 일부러 아침에 일찍 나와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오전에 길을 걸으니 얼마나 좋던지요. 입맛도 살고, 살도 쭉~쭉~빠져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출퇴근 시간에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다보니 많은 사람에 치여 약간 피곤한 감도 있습니다. 또 차로 다니는 것보다 30분이상 시간을 더 써야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는 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데 그 맛이 있습니다. 또 30분정도 여유를 갖는다 해도 막상 보면 못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만 사는 세상을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며 내 자신을 더욱 추스릴 수가 있지요.


자, 이쯤되면 제가 제목에 넣은 B.M.W 가 자동차 회사 BMW 가 아님을 아시겠지요? 예, BUS, METRO, WALK 의 약자로 만든 B.M.W 였습니다. 기왕이면 좀 재밌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으니 말이죠. 그래서 얼마전 방송에서 들었던 이 용어를 생각해낸 것이었습니다. (제목이 좀 낚시성이였나요? ^.^;;)

음, 요즘도 10분만 걸어도 될 곳을 굳이 차를 갖고 다니는 분들도 꽤 되신다는 보도를 보게 되는데요. 제가 한달동안 B.M.W 를 이용해보니 참 좋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가 없을 때는 차를 타면 훨씬 편할 줄 알았는 데, 막상 차를 몰고다녀보니 대중교통이 정말 최고더군요. 

기왕에 차를 타실거면 최고급 B.M.W 를 한번 이용해 보시는 건 어떻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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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6시 10분이더군요.

잠깐 눈을 비비며 사진을 찍으니 그새 2분이 지나 6시 12분이 되었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고양이 발을 하며 조심조심 다녀왔지요.
그리고 오늘의 요리 재료를 꺼내왔습니다. 왼쪽부터 장인 어른께서 직접 농사지으신 딸기로
만든 딸기쨈, 식빵, 치즈, 머스타드 소스, 달걀, 닭가슴살입니다.
한번에 꺼내려고 두손이 고생을 했네요.



가스렌지의 "딱" 소리가 왜 이리도 크게 느껴지던지요.

한방에 점화시키고, 후라이팬 위에 빵을 올렸습니다.

노릇노릇 맛나게 구우려고 집중에 또 집중을!! ^.^



달걀도 부치고, 닭가슴살도 전자렌지에 데웠습니다.

달걀은 빵에 잘 맞을 수 있도록 최대한 모양을 내보았습니다.

닭가슴살은 마치 회를 뜨듯 심혈을 기울여 얇게 잘라내었구요.



저와 오늘 요리의 주인공 아내를 위한 두유입니다.

인터넷을 이용해 24팩 한박스에 6천냥 주고 구입했습니다.

요즘은 저, 아내, 딸아이, 할머님까지 모두 열심히 두유를 마시고 있답니다.




제 요리의 맛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장모님께서 만들어주신 딸기쨈 하나만 있어도 이미 훌륭한 맛을 내기 때문이었지요. 
 




자, 딸기쨈을 잘 펴서 발라주고 그 위에 달걀과 치즈, 얇게 썬 닭가슴살을 올려주었습니다.




짜잔~아내를 위한 아침 요리가 끝났습니다!

어떤가요..먹을 만해 보이는가요? ^.^;;



요리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6시 30분 조금 넘었더라구요.
대략 30여분 정도 요리했던 것 같습니다.



'요리를 마친 후 아내와 함께 즐거운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ㅠ.ㅠ;;

오늘은 요즘 마법에 걸려 피곤해하는 아내를 위해 준비한 아침이기에
아내가 더 잘 수 있도록 일부러 깨우지 않았습니다.



출근길 아내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샌드위치를 보고 맛을 보았나 봅니다.


샌드위치 진짜 맛있다~

땡큐 자기~



라는 문자가 왔네요.

고맙긴요..겨우 이런 걸 가지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내를 위한 아침을 준비하고나니

아내의 고마움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아내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네요.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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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우리" 에 보냈던 6월호 원고가 나왔습니다. 얼마전까지 진행되었던 제 몸짱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번에 실린 걸 보니 본문 내용에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지난 달에는 거의 100% 그대로 실렸는데 말이지요. 아무튼 웹진에 실린 글을 링크걸어 둡니다.(사진은 링크된 글에 올려져 있습니다)

클릭---> <그 남자의 몸짱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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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결혼해야 철이 든다?

[LIFE]이 남자의 인생 2009. 5. 19. 16:15 Posted by 바람몰이

경기여성정보웹진 "우리" 에 처음으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원제는 "야야~이번에는 제발 운동화 한켤레 사자" 였는데요. "남자는 결혼해야 철이 든다?" 수정되었더라구요. 

제가 이번에 맡은 새로운 코너는 <남자 이야기> 라는 코너입니다. 이곳이 본래 여성정보웹진이었던 곳이기에 이번에는 남자의 시각으로 본 세상과 인생을 통해 함께 공부하자는 취지가 있다하였습니다.

직접 원고를 올릴까 했는 데, 문제가 있어 그렇게는 안 되겠더군요. 그래서 화면을 띄우고, 링크를 걸어둡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클릭하셔서 읽어보시구요. 댓글도 달아주신다면..^.^;;

글제목 클릭--->  
<남자는 결혼해야 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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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지 않았던 처가 가는 길

빗줄기를 가르며 내려가는 길입니다.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 였지만 뒷 좌석에 있는 아내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더욱 굵어지는 빗줄기가 아내의 눈물처럼만 보였습니다. 지금은 장모님께서 다리를 다치신 소식을 듣고 시골에 내려가는 길입니다.

012



좀 뜬금없긴 합니다만, 혹시 "농부병" 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손으로 해결하던 시절 오랜 시간 쪼그려 앉아 농사를 지어 무릎과 허리에 병이 생기는 농부들의 질환을 나타내는 말인데요. 

예, 지난 주말 저희는 오랜 시간 농사를 지으시고, 연세가 드심에 따라 퇴행성 관절염이 오신. 그리고 지난 주 차량에서 내리다 무릎에 충격이 와서 거동이 힘드신 장모님을 뵈러 갔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했던 장모님의 부상과 제안

처가에 도착해보니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워낙 긍정적이신 장모님은 웃고 계셨지만 걷기가 아예 불가능하여 바닥을 기어다니셔야 할 정도였습니다. 제 마음이 많이 불편해지고, 아파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러니 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막내딸 아내는 오죽했을까요. 표현은 안 했지만 눈빛 하나하나에서 그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이제 세살된 딸아이가 우리 모두에게 웃음을 줍니다. "할머니~" 하면서 장모님 품에 안기니 장모님의 미소가 더욱 활짝 핌을 보게 됩니다. 곰 세마리를 부르고, 바닥을 콩콩 뛰는 모습을 보며 온 가족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자칫 조금은 무거울 수 있었던 시간을 잘 넘기며 아내가 장모님의 치료에 대해 얘기를 꺼내었습니다.

우선 저희는 올 여름에 저희 집에서 쉬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번 8월에 2년 계약으로 국민임대주택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올라오셔서 운동도 하고, 손녀 재롱도 보시면서 요양하시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저희와 함께 병원을 방문해보심이 어떻겠냐 말씀드렸습니다. 몇 가지 검사도 해보고, 만약 인공관절 수술을 하는 게 장모님의 노후를 위해 더욱 좋은 선택이라면 비용부담을 갖지 마시고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없으시던 장모님 

하지만 저희의 제안을 들으신 장모님께서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시골에 혼자 계실 장인 어른도 걸리고, 혹시나 저희 부부에게 부담이 될까 싶으신 듯 합니다. 예, 역시나 제 생각이 맞는지 장모님은 일단 침도 좀 맞고, 쉬다 보면 괜찮아 질 것이라 예전에도 그랬다 말씀하십니다. 
 
하하, 옆에서 이 얘기를 듣는 데 제가 괜히 뭔가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동안 "어머니~어머니~" 하면서 나름 최선을 다해왔던 저였지만 사위는 언제나 가장 어려운 손님이란 말도 있듯 제가 부담되어 선뜻 '그러자' 못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서 입니다. 당연히 여쭤보면 아니라 하시겠지만 제가 좀 켕기는 게 있는 건지 계속 마음이 걸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위도 아들이고, 장인 어른 장모님은 내 아버지, 어머니

어제 아내와 얘기해보니 다행이 장모님의 병세는 조금 나아지셨다 합니다. 진단 결과를 보니 퇴행성 관절염에 일시적인 충격이 가해져 신경이 놀란 것이라는 데요. 이대로 며칠 휴식을 취하며 계속 치료 받으시면 괜찮을 것이라 합니다. 제 마음도 좀 안심이 되었고, 다시 한번 장모님의 쾌유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또 하나의 바람이 남았습니다. 장모님께서 저를 처남처럼 농사지을 때 막 부려먹기도 하시고, 편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었습니다. "사위" 도 "아들" 이고, 장인 장모님은 제게 있어 또 하나의 "부모님" 이시니 말입니다.
 
하하, 이거 제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맞는 거겠지요? 다음에는 좀 더 애교있게 장모님을 뵈어야 할까 봅니다. 

음..

이거 혹시 산적 같은 외모 때문에 역효과가 나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요 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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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정샘의 수학강사생활 일기

[LIFE]이 남자의 인생 2009. 5. 15. 15:33 Posted by 바람몰이


저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20살부터 계속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학업을 진행해 왔었지요.

처음 시작했던 건 직장이라기보다 단순 아르바이트 였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전까지 짧게 초등학교 6학년 학생과 중 3 형제 과외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입학 후 호프집에서 시간당 2천냥씩 받으면서 열심히 땀흘리던 생각이 납니다. 이것도 대략 석달정도(한 학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태권도 사범을 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모시던 관장님은 문대성 선수를 기르셨던 국가대표 코치출신 여관장님이셨는데요. 저도 상당히 고생하며 지도했던 생각이 납니다. 이것도 약 석달정도 아르바이트로 했던 것 같네요. 그리고 그 다음에 들어간 곳이 바로 학원이였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나이 스물하나에 처음으로 분필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종의 보조강사처럼 원감님 밑에서 시작했더랬습니다. 당시 80만원을 받았는데요.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쉬지 않고 계속 수업을 하는 강도 높은 시간이 계속 되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원감님께서 제가 마음에 들어 키워주고 싶어 그랬다 하더군요. 그래서 기초부터 확실하게 쌓으라는 의미로 고된 강의 스케쥴을 짰었다 합니다.

이 때는 제가 전공하는 학문에 회의를 느껴 약 2년간 휴학을 했던 시기였는데요. 아무튼 이런 훈련과 원감님의 맨투맨 전수 생활을 약 1년 정도 하고 나니 나름 수업진행과 학원 운영에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원감님이 학원을 떠나신 후 저는 정식으로 제 교실을 갖고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학원에서 제 별명은 "꺽정이 선생님" 이였습니다. 제 외모 즉, 상당한 수염과 엄청난 털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좀 독특한 외모를 갖고 있고, 나름 웃기는 면이 있다보니 아이들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학부모님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제 이름을 듣거나 소문을 듣고 오는 아이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또 1년의 시간이 흘렀지요.


그런데 이 때 저와 함께 근무하던 영어 선생님께서 학원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연스레 승진을 하였고, 나이 스물셋에 수학과 주임이 되었습니다. 오호, 제게는 정말 둘도 없는 기회였지요. 바로 중등부를 신설해 졸업생을 그대로 흡수했고, 저와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 지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근무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우리 나라에서 출판되는 모든 문제집을 풀어보며 공부했고, 각 종 교육기법과 노하우 습득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상담도 열심히 하고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근무했었지요. 그 결과 아이들의 성적도 괜찮았고, 학원도 두산동아에서 2년 연속 우수학원에 선정되게도 하였으며 저 개인적으로는 표창장도 받는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되고, 넘치면 흐르는 법. 너무나 무리한 강의와 과외 탓에 저는 어린 나이에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추간판 탈출증 수술을 받게 되었지요. 또한 피로에 쪄든 몸과 메마른 정신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강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순간 이었습니다. 


이 때, 저를 잡아준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습니다. 학원에 가니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강의를 다시 시작하며 활력을 찾았고, 아이들의 웃음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녀석들을 보며 제 자신을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용기를 내게 되었지요. 새로운 도전을 하려 마음 먹었습니다.

복학을 하였던 것이지요. 이 때 학원은 제가 꾸려놓은 중등부가 운영되고 있었기에 저는 학교에서 신학을 전공으로, 교육학과 국제경제학을 부전공하며 모든 수업을 오후 세시 또는 세시 반 이전으로 맞추고,  바로 출근하여 초등 고학년과 중등부 학생을 지도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발전하더군요. 현장에서의 노하우에 이론이 더해지니 더욱 탄탄해지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벌어놓은 돈을 모두 학비에 투자하여 제 손에는 한푼도 남은 게 없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제게는 아이들이 있었고, 학문함의 기쁨이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렇게 약 2년을 보냈습니다. 휴~정말 힘든 시간이었지요. 3분 카레에 밥을 비벼 먹다 입에 음식을 넣은채로 잠이 들어 온 몸에 카레를 묻혀 보지 않은 사람. 길을 걷다 졸아서 전신주에 헤딩하여 다쳐 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보며 잘 이겨낼 수 있었지요. 제 자신의 의지로 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이들의 계속되는 지지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가장 큰 힘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생활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늦깍이 군복무를 하며 7년간 근무하던 학원을 자연스레 그만 두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지요. (대신 지금은 다음 신지식 자녀교육 카테고리 엑스퍼트 활동을 하고, 블로그에 자녀교육에 관한 글을 쓰고 있지요) 

그래서 요즘은 예전에 지도했던 학생들이 저를 찾아오거나 연락하는 보람으로 삽니다. 초등학생 코흘리개들이 벌써 고교생이 되었고, 처음 과외하던 학생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참 시간이 빠름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강사를 시작하던 시절 적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원 제목이 <선생님이 되고 싶은 선생님> 이었고, 나중에 수정한게 <얘들아, 선생님은 이런 '선생님' 이 되고자 한단다> 였습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열정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스승의 날인데요.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 지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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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저는 수첩이란 게 없었습니다. 노트 역시 거의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고 듣고, 그 자리에서 암기하고 뭐 그런 나름 "똑똑한" 편에 속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생활도 잠시. 나이 스물셋에 전신마취 후 허리 수술을 한번 했더니 사람이 요상하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의학적 지식을 근거로 댈 순 없으나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 이 후부터 자꾸 '깜빡~깜빡~' 하는 습성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때 부터 제 핸드폰과 노트는 항상 꽉~꽉~메모로 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경이나 자동차 키 등 사소한 물품을 던져놓고 깜빡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 다 씻고 난 후 안경을 찾는 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 짰더니..세상에 제가 안경을 쓰고 있던게 아닙니까..ㅠ.ㅜ;;;(실화)


이런 저에게도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제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연애시절부터 제 작은 소지품을 잘 챙겨주었습니다. 제가 한참 운전을 하다 '아~맞다! 그거 놓고 왔다!' 라고 하면 항상 아내의 가방 안에 그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던 아내가 얼마 전부터 이상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고 난 후 부터 조금씩 변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 역시 자꾸 '깜빡~깜빡~'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출산은 꽤 고단한 편이었습니다. 대학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골반이 벌어지지 않았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자연분만을 하기 위해 많은 운동과 준비를 했었습니다. 출산 당일 역시 계속 운동을 하며 준비를 했었고, 하루종일 계속된 진통을 이겨냈더랬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결국 담당 의사에게 제왕절개 수술을 이야기 했고, 의사 역시 산모의 안위마저 걱정되던 상황이라 수술을 하고 말았을 정도 였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아내는 확실히 몸이 약해진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개 여성들은 아이를 낳으며 이른바 '진기'를 소진하게 되지요. 그리고 많은 영양분이 빠져나가고, 그 동안 약해져 있던 몸에 본격적인 반응이 오기 시작합니다. 이 때 이걸 제대로 관리 못해주면 평생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요. 산후조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수 있는 대목인데요. 저희 역시 아예 시골로 내려가 산후 조리도 하고, 나름 좋은 것도 많이 먹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산 후 여성이 출산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요즘은 저희 부부 서로가 서로의 물품을 챙겨줍니다. 차에 타면 서로 묻곤 하지요.

"자기 핸드폰 가져왔어?"
"어~내가 챙겼어"
"지갑은 내가 가방에 넣어 놨어"
"어~그럼 이제 출발할까?"
 "어~"
"건희야, 아빠 이제 간다 자~출발~"
"추발~"


어디선가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글을 읽었는데요. 요즘 많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 둘이 하나인 것만 못할때도 많겠지요. 허나 이같이 좋고, 나쁨을 만드는 것은 결국 그 구성원이 특히, 내가 하기 나름이고, 이를 어떻게 느끼느냐는 내가 받아들이기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부부끼리 행복하게 사는 거 별게 아닌 것 같습니다. 서로 먼저 챙겨주기 시작하다보면 어느 샌가 서로를 더 믿고, 서로에게 더 감사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지요.

하하, 오늘 저녁에는 무얼 챙겨줄 수 있을려나요~

퇴근 후가 기다려지는 수요일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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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때야말로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 일요일 밤부터 앓기 시작한 몸살에 저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습니다.

예전에
<주말부부 6개월 가족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다>를 포스팅 한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주말부부의 장단점을 적고, 나름의 각오를 다져보았는데요. 벌써 5개월이 거의 다 지난 지금도 저희는 여전히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각오를 최대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도 있습니다.
 
지금은 이 생활도 상당히 익숙해져서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허나 그 중 변화를 하나 꼽아보자면 그것은 딸아이가 점점 성장하고, 말하는 어휘 구사력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간단한 단어정도 구사하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벌써 문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밤마다 아내와 딸아이를 바꿔가며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아내와는 이런 저런 일상도 나누고, 여러 가정일을 상의하기도 합니다. 딸아이와는 아무튼 뭔가 말을 하긴 하는 데, 이게 거의 외계어 수준이다보니 서로 자기 얘기만하다 끝이 나곤 합니다. ㅋ 그래도 이게 어딘가요. 이 녀석 정말 많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밤은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너무 아파 통화를 길게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아내와도 짧게 안부만 나눌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딸아이를 잠깐 바꿔 '엄마 말씀 잘 들으라' 한마디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갑자기 그러는 겁니다.

"아빠, 안녀히 주무해효~사랑해효~"

 뒤에서 아내가 "건희야, 아빠 아야~하데. 아빠 힘내세요 해드려~" 라고 하니 녀석이

"아빠, 힘내애요~아빠 사랑해효~"

라고 합니다.

아, 이거..

이 한마디를 듣는 데 갑자기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겁니까..그 다음 월요일에도, 어제 화요일에도..그저 딸아이의 한마디를 들을 뿐인데 왜 이리 눈물이 나던지요..


"그래, 건희야~아빠 힘낼게~건희도 잘자! "

저는 20살부터 결혼 전까지 계속 혼자 살았습니다. 사실 당시 제 가족이라곤 제 여동생 정도뿐이어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혼자 아프고, 혼자 이겨내는 데는 상당히 내공이 쌓여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린 딸아이와 통화를 하고 나니 어깨를 들썩이며 나도 모르게 훌쩍이게 되더군요. 또 며칠을 앓으면서도 딸아이를 생각하며 물도 더 마시고, 스스로 땀도 닦고, 몸도 깨끗하게 씻으려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밤에는 최대한 잠을 푹~자려 노력해보고 말이지요.


아마 저희는 6월경 다시 살림을 합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떻게든 그렇게 되게 하려 합니다. 이 때는 주말부부 시작한지 1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지만 점점 성장할 수록 아빠를 찾는 딸아이 때문에도 안 되겠고, 제가 너무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 요즘 며칠 앓고 나니 더욱 그런 마음이 확고해 집니다. 정말 사람은 좀 아파봐야 일상과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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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걸려온 할머님의 전화

어제 오후 갑자기 할머니께 전화가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지요. 할머님 목소리가 너무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님께 무슨 일인가 여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바로 저 제목입니다.


"야~애비야! 그 전화사기범이 잡혔단다!"

엥? 무슨 내용인지는 단번에 눈치챘으나, 또 다시 무슨 말씀인가 여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지난 달 저희 할머니께서 보이스피싱에 걸려 한 겨울 내내 힘들게 버셨던 돈을 사기당한 적이 있으신데요. 지금 이 범인이 잡힌건가 의아했던 겁니다.

할머님 말씀으로는 조금 전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고, 돈을 얼마를 찾을지는 모르겠으나 범인을 잡았으니 내일 저와 함께 경찰서로 오시라 했다 합니다. 

아하! 아무튼 다행이긴 합니다만 '세상에 보이스피싱 사기꾼이 검거되다니..' 쉽게 믿기 힘들었습니다.

<관련글 : 할머니께서 보이스피싱에 당하셨습니다>


경찰서에서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니

오늘 오전 할머님을 모시고 경찰서에 다녀왔습니다. 담당 형사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사기꾼'이 검거된 건 아니었고, 할머님 돈을 송금했던 '통장주'를 찾았고, 돈이 살아있는 걸 확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니 사연인 즉슨 이렇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먼저, 할머님 돈이 송금되기 1시간 전에 또 다른 한 여성이 약 1천 3백여만원을 송금했었다 합니다. 그 후 이 분 또는 경찰서에서 바로 통장주에 대한 지급정지를 했고, 따라서 약 한시간 후 돈을 송금했던 할머님 돈은 인출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그 통장주는 서울 동대문서에서 찾았고 말이지요. (담당 형사님께 확인해보니 이 통장주는 통장명의를 빌려주며 업자들에게 낚였던 직장인이었다 하더군요. 어쩌면 이 분도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천중부경찰서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은 중국 조직망 체계부터 검거과정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던 경찰관님의 메모 흔적이다. 너무 자세한 설명이 감사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자세한 수사기록을 보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현재 중앙 본 조직은 중국 또는 대만에 있다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돈 인출책을 보내는 데, 이들은 모두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라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통장은 노숙자 명의를 이용하거나 형편이 어려워 신용등급조절을 원하거나 고수익을 준다는 광고에 속은 분들의 것이었습니다(저희는 두번째 케이스). 

자, 이제 이런 준비가 되면 중국에서 무작위로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걸리면 이런 저런 각 종 레퍼토리를 동원해 순식간에 돈을 송금하게 하고, 이 돈을 약 5분안에 모조리 찾아버린다는 것이지요. 정말 대단한 기동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ㅡ.ㅡ^


피해금을 전액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아마 할머님은 피해금 전액을 찾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현행법으로 보면 남은 금액은 나만의 돈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와 함께 법원의 처분에 따라 나눠야 한다 합니다. 하긴 사실 앞 피해자께서 지급정지를 빨리 하지 않으셨으면 어차피 모두 사라질 돈이었으니까요.

할머님께서도 이 점을 수긍하시었습니다. 이미 돈 문제는 부차적인게 되어 있던 거지요. 그 동안 마음 고생하셨던 걸 생각하면 아예 포기하고 있던 문제가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게 되자 그것 자체가 힘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참으로 오랜만에 웃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벌써 한달이 훌쩍 넘었으니 말이지요. 덩달아 제 기분도 좋습니다. 저도 오늘 이 아침 환하게 웃게 됩니다. 비가 내린다하여 날은 흐리지만 마음만은 너무 밝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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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집으로 비유하자면 부부는 집을 지탱하는 커다란 대들보와 같다 생각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집도 대들보가 부실하거나 무너지면 유지가 안되듯 가정 역시 부부 관계가 온전히 정립되어야만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강하고, 튼실한 접착제나 이음제를 첨가했다 할 수도 있겠지요. 왠만한 일들은 아이를 보며 참기도 하고, 또 아이때문에 웃으며 해결해 나가기도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정을 유지해주는 원천은 아닐 것입니다. 역시 가정은 부부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 위에서 저는 평소 갖고 있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제게 있어 딸아이는 늘 두번째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이가 예쁘고,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바쳐도 제 중심의 첫번째는 반드시 아내가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훗날 아이가 자랄수록 저는 이 원칙을 더 강조하며 아빠에게는 늘 엄마가 첫째이자 최고의 여자임을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때론 이런 제 마음과 달리 보이는 경우도 있는가 봅니다. 특히, 아내의 눈에는 더욱 그런가 봅니다. 요즘들어 가끔 '자기 나 사랑해?' 라거나 '자기는 건희만 있으면 되지?' 라는 아내의 질문을 받곤 합니다. 


예, 사실 많은 다른 아버지들처럼 저는 제 딸을 너무 사랑합니다. 이 녀석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습니다. 또 이 녀석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 이 후- 물론 조부모님의 사랑을 풍족히 받아왔지만- 부모 없이 사는 설움과 상처..충분히..너무나도 충분히..느껴왔기 때문에 적어도 내 자식에게만큼은 이런 아픔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요즘 제 핸드폰에는 아내의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상당수가 딸아이의 사진입니다. 전화를 해도 아내와 제 얘기보다는 딸아이 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말 요즘 제 삶은 딸아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고 있는 게 맞나 봅니다.


하, 요즘 우리는 기묘한 삼각관계에 빠져버렸나 봅니다. 이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런지요.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일까나요. 아니면 제가 뭔가 일을 하나 꾸며(?)서 아내의 마음을 녹여 봐야 할지요. 혹시 이거 저만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하하..

이거 참..
 
정말 머리가 찌끈거리게 고민되는 세찬 바람 부는 날의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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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난 번 운동하다 삐끗한 허리 재활 훈련을 위해 이틀에 한번꼴로 등산을 갑니다. 물론 등산이라 해야 그리 거창한 건 아니구요. 저희 집에서 조금 가면 나오는 성주산(하우고개) 약수터를 중심으로 한바퀴 돌고 오는 것입니다.

시간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기는 너무 힘이 들고 해서 주로 퇴근 후에 가곤 하는데요. 야간 산행이라 비록 언덕 정도 규모의 산이지만 조심할 게 참 많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지요. 몸도 충분히 풀고 갑니다.
 

산에 오르니 참 좋았습니다. 밤에 TV를 보며 혼자 앉아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몸도 가벼워지고, 아픈 허리도 나아지고 말이지요. 날마다 약수를 떠가니 집에서 물을 끓일 필요도 없습니다~ㅋ


또 무엇보다 너무나도 고요한 그 적막함이 좋았습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 복잡하고, 빠르며 시끄럽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숨소리까지 들리는 고요함 속에 있으니 마음을 다잡는 데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산에 올라 잠시 도심을 내려다 보면 더 다가오곤 하였습니다. 어두운 산에서 보는 도심은 역시 참 시끄럽고, 바빠 보입니다. 자동차의 공명음이 하늘위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고, 시끄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환하기도 합니다.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사람의 눈은 어둠속에서 눈을 감고 쉬게 해주기도 해야하는 데, 하루종일 밝은 빛에서 부릅뜨고 살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고문할 때도 보면 밝은 빛에서 잠 못자고 계속 눈뜨게 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 하지 않습니까.


때론 우리 삶의 호흡을 조금은 길게 가져가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한 때 유행했던 것처럼 조금 더 느리게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조금 더 조용히 살아도 괜찮을 겁니다. 시력에 문제를 주지 않는한 조명을 좀 더 끄고 살아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를 통해 우리 삶에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이지요.  


산중턱에서 찍은 시내의 모습이다. 이 때 시간이 대략 8시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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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00 캐쉬백 포인트 적립을 해놓겠다 했으면서 안했기 때문입니다. 총각시절에는 그렇게 열심히 했는 데 말입니다. 그래서 빠른 시일안에 다녀와야겠다 맘 먹고 때를 보고 있었습니다. 

오호~그런데 엊그제 사무실에서 커피를 대량 구입하는 게 아닙니까. 바로 지금이다 싶었습니다. 문구용 칼을 들고 커피박스에 있는 캐쉬백 쿠폰을 모조리 오려왔지요. 운좋게 이번에는 보너스 포인트까지 있더군요. 모두 합해보니 약 3천포인트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유후~!! 당당하게 쿠폰을 모두 수거한 저는 드디어 어제 대형마트를 방문해 캐쉬백 적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왠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가 이걸 하는 게 낯선 광경이었나 봅니다. 사실 쿠폰을 붙이고, 바코드를 출력해 붙이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리는 데요. 바로 그 때 주변에서 힐끗힐끗 저를 쳐다보는 게 아닙니까. 뭐 대학시절부터 익숙하게 느끼던 시선이었지만 정말이지 쉽게 적응 안되는 시선이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요. 다양한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 글에서 그 원인까지 분석할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쉬움'은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각 각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나는 안 그렇다' 얘기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상당하니 말입니다.

물론 결혼 후 애를 낳고 기르다보니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게 "차이" 겠지요. 서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고, 이것은 서로 존중할 필요가 있을테지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양성간의 대화나 배려의 삶은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굳이 각 각의 성역할을 고정 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게 모두에게 더 편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보면 꼭 어딘가 한쪽은 더 희생을 강요당하게 되니 말이지요. 

영국드라마 <닥터후>를 보니 주인공 닥터는 꼭 여성 여행 동행자가 있더군요. 900살이나 된 시간의 제왕 닥터이지만 어떤 문제든 혼자서는 안되고, 반드시 여성 동행자와 함께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이들에게 마구 혼나기도 하고, 목숨을 빚지기도 하더군요. 또한 동시에 이 여성 동행자들도 혼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닥터와 함께 힘을 모을 때 그 잠재력이 발휘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결국 우리네 삶도 이와 비슷하단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나도 남성 혼자만-여성혼자만은 살수도 없고, 해결 못하는 문제도 참 많지요. 예, 우리는 좋은 가사 담당자나 바깥일 담당자를 "고용" 또는 "찾아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 겁니다. 

서로를 더욱 사랑하기 위해..

서로에게 인생과 삶을 더 배우기 위해.. 

서로를 통해 인생과 이 사회의 참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

바로 이 때문에 양성이 존재하고, 서로를 그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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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만원이란 돈. 어떻게 보면 그리 큰 돈이 아닐 수 있습니다. 허나 1만원도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은 이 속에 할머니의 땀과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기 위해 피땀 흘려 지난 겨울 내내 번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드시고 싶다던 함흥냉면 한 그릇도 참아가며 모으시던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화한통에 모조리 잃고 말았습니다..


전화는 오후 세시쯤 왔다 합니다. 처음에는 전화국이라 하였답니다. 누군가 할머니 이름으로 전화를 개설해 수십여만원이 연체되었다는 거지요. 할머니께서 우린 그런 일 없다 부인하시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경찰에 신고하여 할머니께 손해가 전혀 없도록 해드린다 했다 합니다.

잠시 후 경찰청이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을 서울지방경찰청 강일구 형사라 소개했다 합니다. 그리고 아까 걸려왔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그럼 이 일은 누군가 할머니 명의를 도용한 것이니 전혀 피해가 없도록 다 알아서 처리해주겠다 했다 합니다.

그러면서 물었답니다. 지금 현재 은행을 어디 어디 거래하느냐는 겁니다. 할머니께서 주로 거래하시는 새마을 금고에 잔액이 얼마 있는지 확인한 그 사기범은 전화를 끊지 말고 인출기까지 가라 했답니다. 인출기에서 그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경찰일은 비밀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끊었다 다시 전화를 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덧1-다른 통장에 있는 돈과 지금 남아 있는 잔액까지 명의도용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 했다 하는구요. 계좌보호조치를 해야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인출기까지 유인했다합니다.


그리고는 또 혹시 지금 아들이나 주변 지인에게 삼백만원 정도 더 얻을 수 없겠냐 했다 합니다. 자신들이 수사를 하기 위해 필요하니 잠시 뺐다 다시 넣어주겠다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할머니께서 우린 월세방에서 살아서 그런 돈이 없다 하자 그럼 일단 그거라도 보내라 했다는 겁니다.


할머니께서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누가 할머니 이름으로 사고를 쳤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그 때 저는 퇴근 후 병상에 있는 여동생에게 가 있었는데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용을 여쭤보았습니다. 위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아뿔싸.........가슴이 철렁합니다............

혹시나 하는 맘에 서울지방경찰청에 전화를 해봤습니다. 예, 당연히 강일구 형사란 사람은 없지요. 전화받으신 경찰께서 경찰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십니다.

다시 할머니께 전화를 했습니다. 당장 통장 잔액을 확인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말입니다. 잠시 후 제가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두번세번을 다시 해도 받지 않으십니다.....

역시나.......

전형적인 보이스 피싱이었습니다............


집에 가보니 할머님께서는 울고 계셨습니다. 억울해서 어떻게 사냐...하십니다...지난 겨울 내내 힘들게 그렇지만 기쁘게 한푼 한푼 모으셨던 돈인데.....별거 안되는 돈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걸 보면 참 든든했었다 하시며 또 우십니다....작은 아버지와 통화를 하시며 또 우십니다.....그 옆에서 저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기는 왜 사기일까 생각해봅니다. 사기는 내가 사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기에 사기이겠고, 걸리면 빠져나오지 못하기에 사기인가 봅니다. 할머니께서도 그러셨다 생각합니다. 평생 장사를 하시어 분별력도 좋으시고, 핸드폰을 해드린 3년전부터 모르는 번호는 받지 마시라,,놓친 전화도 다시 하지 마시라,,말씀드렸지만 이렇게 걸리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쪽에서는 돈이 입금된 계좌 등 상대방과 관련된 정보를 은행에서 찾아서 방문신고해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예, 이제 경찰서로 갈 예정입니다. 부천의 경우는 보이스피싱 전담팀이 있더군요.

덧2-경찰서에서 얘기를 해보니 요즘은 돈을 인출할 때 범인을 많이 잡기도하고, 통장명의자 추적 등을 통한 검거사례와 축적 노하우가 많다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 본세력은 중국 등 해외에 있기에 완전 검거는 어렵다하더군요. 당연히 보상도 어렵구요. 다만 통장명의자에게 소송을 걸어 보상 받을 수 있는 데, 요즘은 소장만 넣어도 거의 승소한다 합니다. 실제 이런 사례도 좀 있구요. 허나 이 역시 대포통장이거나 명의자도 속았던 경우가 많아 그리 현실적이지 않더군요.

하지만 그간 보았던 언론보도를 통해 생각컨대 이 돈은 수업료 냈다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다양한 방법으로 전화가 올지 모르니 말입니다. 

보이스피싱...일명 전화사기..

이거 남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내 부모님과 내게 걸려올지도 모릅니다.



P.S : 모두 경각심을 갖고 참고하시라 하여 여러 사례를 정리했습니다. 내 자녀나 등록금, 공과금 환불 등은 젊은 사람도 쉽게 낚일 수 있는 것이기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기관문서까지 위조하는 데는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참고> 다양한 보이스피싱의 예

1)통신사라고 하면서 잠시 통화품질 테스트를 할 것이니 약 30분에서 1시간정도 핸드폰을 끄라 한다. 그리고 부모님께 전화하여 자식이 납치 또는 긴급 수술을 해야하니 돈을 보내라 한다.

2)전화국 등 공기관에서 전화하여 명의도용을 당해 경찰에 연락해주겠다 한다. 경찰이라며 전화하여 계좌보호조치를 해야한다며 인출기 앞으로 유인한다.

3)고객님 앞으로 등기나 소포가 왔는데 여러 차례 방문해도 만나지 못했으니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몇 번을 눌르라 한다. 그리고 카드가 왔다 하면서 이런 저런 주문을 한다.

4)팩스로 국가기관 문서를 위조하여 보낸다. 이 문서에 장관 직인까지 찍혀있는 등 치밀함을 보여 대개 넘어가게 된다. 반드시 먼저 확인해야 함(문서에 있는 번호가 아닌 기관에 직접 전화하여)

5)국제소포나 우편물이 왔는데, 본인 확인이 필요하다 하며 전화번호나 주민번호를 요구한다.

6)학교를 위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등록금이 두번 납부 되어 계좌번호와 이름, 주민번호를 얘기하면 환급해주겠다 하는 것. 보험회사, 전화국, 인터넷 회사 등을 사칭해 중복인출이 된 요금을 환급해 주겠다 하기도 한다.

7)금감원이나 자산관리공사 등을 사칭하여 누군가 명의도용을 하거나 불법대출을 받았다며 이를 해결해드릴 테니 은행에 있는 돈을 잠시 다른 곳에 이체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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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는 30년 같이 길게만 느껴지던 너무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결혼 3년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휴가를 주었다 (☜클릭)하였지요. 제가 딸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찾아 집에 가서 보니 식탁위에 왠 편지가 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보낸 것이더군요.

편지 겉봉투를 보니 "건희 아빠 보시오~오늘의 미션봉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진이 좀 흐려서 그런데 분홍빛 바탕에 예쁜 집 그림이 있는 봉투였습니다.



봉투의 뒷면을 보니 예쁜 그러나 메세지가 있는 스티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마지막 "행복해" 에 새까만 "ㅇ"과 하트 표시가 있지요. 자세히 보니 원래 문구는 "너 때문에 올 한해 너무 행복했어"인데, 아내가 자신의 뜻을 전하려고 "행복행 " 로 바꾼 것이더군요.



내용을 열어보니 아내 특유의 둥글둥글한 귀여운 글씨로 두장이나 되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솔직한 마음과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첫 휴가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휴가 준 것에 대한 보람이 팍팍 들더군요.



편지를 읽으며 아내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쓴 글을 보고, 그에 대한 표현도 짧게 해주었더군요. 또 한켠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다음 문구때문에 그랬는 데요.

우선 불고기와 찌개가 있으니 데워서 먹고. 냉장고 윗칸에 반찬이 있어 꺼내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사놨어....(중략)...건희와 즐거운 식사시간 갖고. 설거지는 내가 아침에 해도충분하니깐 그냥 놔두고~건희 어제 목욕했으니 오늘은 그냥 손, 발, 세수만 하고 자도 될꺼야.  우유는 왼쪽 맨 끝 아래 싱크대 윗칸에 있어~1분만 살짝 돌려줘~

저에 대한 마음과 딸아이에 대한 걱정때문에 이렇게 자세하게 쓴 것이겠지만 어느 덧 그 순수하고, 맑던 막내 딸 아가씨를 소위 말하는 "아줌마"로 바꿔놓은 것 같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냥 어제 하루쯤은 모든 걸 잊고 쉬었다 오기를 바랬는 데 말이지요..

아무튼 아내는 장문의 편지를 마치며 이런 표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나도 근사한 휴가를 줄게. 기대해줘~사랑해요~정혁씨~감사해요~당신의 큰 사랑~

자, 이런 표현을 본 후 제 반응이 어땠을 것 같으십니까. 당연히 기분 짱~이었지요! 세상에 어느 남편이 이런 최고의 표현을 보면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편지봉투에 있는 집 그림입니다. (핸드폰 카메라에 상처가 많아 좀 지저분하게 나오긴 했습니다만..실제로는 참 예쁘고, 따뜻해 보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 가정을 더욱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게 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보았습니다. 언덕위의 예쁜 집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부부의 마음 속에는 늘 이런 분홍빛 사랑이 살아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정과 애 때문에 웬수'와 함께 사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인격을 알아가며, 더욱 설레는 사랑을 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행복이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고,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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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결혼 생활이 주는 가르침>

대학 동기인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서로 사는 방식이 너무도 달랐던 터였다. 그러나 연애를 시작한 우리는 서로 불같이 뜨겁게 사랑을 했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나며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었다.

우리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부터 정치, 경제, 사회에 이르는 토론을 하기도 했고, 우리의 비젼과 결혼생활 즉, 자녀교육부터 처가와 시댁 식구에 대한 이야기, 진로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준비와 공부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모든 상황을 가정하고,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나를 길러주신 할머님을 모시면서부터 이런 저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가정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부딪히지 않는 일이 없었다


문제의 원인과 진행

할머니께서는 나를 막내 아들처럼 여기시어 잔소리가 유독 많으신 편이었다. 아내가 맡아야 할 고유 영역이 구분되지 않고, 어린 아들 키우듯 계속되는 간섭과 잔소리가 있었다.

이 때, 아내는 사실상 소외되는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당연히 신혼의 단꿈을 꿔보지도 못한 아내는 이런 할머니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었다. 우리가 결혼했을 때 나이가 내가 26세, 아내가 25세였다. 솔직히 할머니와 마찰이 생길 때마다 모든 걸 이해하고, 맞춰드리기에는 너무 어렸었다. 사실 같이 사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역시 문제가 많았다. 이 때 나는 공익요원으로 늦은 군복무를 막 시작했었다. 할머니는 물론 어린 딸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면서 동시에 군복무까지 수행해야 하는 터라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는 이래저래 도움의 손길도 있고, 과외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먹고 살 만큼은 되었지만 아내와 할머니를 중재하기까지 여유도 없고,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지쳐 있었다. 

문제의 누적과 극단에 이르게 된 싸움

당연히 계속해서 문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연로하신 할머니와 다툴 수도 없고, 속상한 일을 내가 아니면 풀 수 없는 아내는 밤 늦게 돌아온 나를 붙잡고 할머니와 있었던 일을 말하곤 하였다. 

피곤하고, 지친 터에 여유도 없는 나는 이럴 때마다 아내가 할머니 욕을 한다 발끈하며 당신도 문제가 있다 양비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해답 없는 매우 소모적인 그러나 서로의 감정에 아물수 없는 상처를 내며 무서운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누군가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 했던가. 미안하지만 이 말은 당시 우리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서로에 대한 비아냥과 비난이 계속 되었다. 급기야 내가 집을 뛰쳐 나가거나 아내가 나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흥분하여 할머니께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심지어 종국에는 서로 헤어지자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에 이르게도 되었다.

 이런 생활이 일년 넘게 계속되니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말이지 하루가 1년 같은 나날이 반복되었고, 지금보면 지난 3년이 마치 30년쯤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다시 찾은 비결

지금 우리는 다시 신혼초와 같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 할머니 역시 모시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가 서로 헤어짐까지 결심했던 극단적인 상황을 타개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서로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 있었다. 약 6개월간 주말부부로 지내며 우린 왜 그 때 서로가 그런 말을 했는 지 각 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특히, 아내는 자신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 후 정신영역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고, 시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매우 깊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아내와 할머니 같은 외부에서 찾던 것에서 그것이 내게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마음수련을 시작하였다. "화"를 다스리는 훈련을 하고, 좀 더 친절하게 대하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시작하였다.  서로 이런 노력을 약 6개월을 넘도록 계속하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에게 준 첫 휴가와 결혼생활의 의미

오늘 나는 결혼 3년만에 드디어 아내에게 첫 휴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뭐 그리 대단한 휴가를 주는 건 아니다. P블로그 사이트에서 리뷰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내가 시사회에 당첨되었기에 아이와 가정살림은 내가 책임질테니 대학시절 단짝과 재밌게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늦게 와도 된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지난 시간동안 매일 같이 아내를 울리고, 힘들게 했던 날에 대한 반성이자, 변화된 우리 부부의 상징적인 첫 열매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제 이 첫열매를 시작으로 우린 더욱 풍성한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갖고 있다. 지금 행복한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하고, 지금 이 힘든 시간을 잘 풀어내며 온 것처럼 앞으로도 여러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있다. 

이렇게 서로를 통해서 사람을 배우고혼자만의 삶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는 것이 바로 결혼생활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인생의 가르침일 것이니 말이다.


대학 연애시절 찍었던 사진. 상당히 겉늙어 보이는 나와 달리 아내는 여전히 매우 어려보인다.

작년 여름 가족휴가 때 찍은 사진. 세식구 모두 초췌한 모습이다 ^.^;;

결혼 초 가족이 쇼핑나갔던 모습

결혼 초 갓난 딸아이를 봐주시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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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며칠 이상한 냄새와 소리가 난다 했습니다. 엊그제 늦은 시간까지 영화를 보고 양치를 하러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지 뭡니까. 손바닥만한 쥐 한마리가 싱크대와 가스렌지 배관을 타고 천장에 기어 올라가는 겁니다.

헉..어린 시절 생쥐를 친구 삼아 잠이 들곤 했던 저였지만 여전히 징그러운 건 어쩔 수 없더군요.
다음은 싱크대 바닥에서 발견한 쥐의 배설물입니다.


싱크대 구석으로 쌓여있는 쥐의 배설물이다. 집안에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


얼마전 주말부부로 살며 느꼈던 글을 올리기도 했었지요. 사실 그 전까지는 아내가 아기때문에 집안 위생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었지요. 저도 그랬구요.

그런데 제가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자연스레 양쪽 집 모두 예전에 신경 쓰던 것의 반도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고, 결국 지어진 지 약 24년된 할머님 집에서 쥐가 나오고 말았던 겁니다. (
사실 저희 할머님도 나름 신세대 감각을 지닌 분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연세가 드셔서 그런지 예전만큼 집안 위생이 관리되지 않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아..이래서 제가 할머님 혼자 두고 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또 나름 양쪽 집 모두 잘 한다 했지만 부족한 제 모습을 또 다시 보게 되었구요 ㅠ.ㅜ;;


어제 퇴근하고 집에 갔더니 또 다시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알고 보니 할머님께서 쥐를 유인하는 먹이와 끈끈이 몇 개를 놓으셨더군요. 다음은 그 사진입니다.

할머니께서 쥐를 유인하는 먹이를 종이에 깔아두신 모습



쥐 끈끈이 몇 개가 펼쳐진 모습. 탈출하려 할 수록 몸이 조여드는 이것은 내가 볼 때는 가장 무서운 덫이다.



일단 할머님께서 두신 것이니 상황을 하루 이틀 두고 볼까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현재 자주 방문하는 쥐 선생을 잡는 다 해도 결국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또 다시 다른 녀석이 들어올 것이기에 약간 회의적입니다. 


만약 정말 별 효과가 없다면 앞으로 장단기로 나눠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도 오기에 사실 마음이 좀 급한 편입니다.

먼저, 청결문제입니다. 쥐가 들어오는 건 따뜻함과 먹을 게 있기 때문이기에 좀 더 청결을 유지해야 겠다 싶습니다. 제가 더 해야죠 뭐. 일단 저 끈끈이들을 빼낸 후 락스 청소를 싹~할까 합니다.

두번째는 구멍 문제입니다. 사실 지금은 쥐가 어디서 들어오는 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입니다. 일단 의심되는 곳은 싱크대 및 하수구와 보일러실 배관 벽틈인데요. 청소 후 이 두 곳을 가볍게 "봉인" 해야겠습니다.

끝으로 마지막은 주인집과의 상의입니다. 좀 오래되긴 했어도 지난 1년 6개월 동안 잘 지낸 집이었기에 좋게 얘기해서 쥐가 들어오는 곳을 시멘트 처리 하든지 해야하겠습니다.


저는 쥐를 바퀴벌레, 파리 모기와 함께 '인류의 3대 공공의 적' 이라 여기는 데요. 요즘은 집안에 먹을 게 워낙 풍부해 "아파트"에서도 쥐가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가끔 있지요.

물론 쥐선생 퇴치에는 고양이가 최고이긴 합니다만 저희는 워낙 어린 딸아이 때문에 고양이를 키울 수도 없고, 또 키울 자신도 없네요.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쥐를 반쯤 잡아먹고 버리던 장면 ^.^;;을 딸 아이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지도 않구요. 

혹시 여러분은 쥐 선생 퇴치에 좋은 아이디어 있으신가요? 

있으시면 지혜 좀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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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취직과 함께 주말부부로 지낸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유독 빨리 지나간 듯 느껴진 올 한 해였지만 아내와 아이가 없는 집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흐른다. 텅빈 방에 혼자 누워 외로움과 벗하며 청하는 잠은 그리 반가운 녀석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새벽 두시나 되야 잠이 들게 되었다.


물론 주중에 한번, 주말에 한번 가며 최대한 자주 만나려 노력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자주 듣게 되는 소리도 몇 가지 생겼다.

먼저, 방에서 홀아비 냄새가 난다
는 것이다. 언젠가 여동생이 했던 말이다. 그나마 내 몸에서는 안난다 하니 다행이었다.(그 후 향기00을 사서 뿌려주고 있음)

두번째는 얼굴이 굳어 있는 경우가 많다
는 것이다. 물론 잠을 늦게 자서 피곤한 탓도 있겠지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세번째는 일은 잘 한다
는 것이다. 혼자서 무얼 하겠는 가.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일을 하게 된다. 이미 해봤던 것도 여유 있게 생각하다보니 이래저래 더 좋은 아이디어도 나오고, 치밀한 준비가 가능했다. 


물론 주말 부부로 지내다 보니 좋은 점도 있긴 하였다. 무엇보다 아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더 애틋한 마음이 들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확실히 사람은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게 되는 것 같다. 아내와 떨어져 살고 나니 그 동안 몰랐던 아내의 소중함이 많이 느껴진다. 밤 마다 피곤해 잠 못드는 나를 위해 안마를 해주고, 아침마다 잘 다녀오라 인사해주는 일상이 이젠 너무 특별해졌다.

또한 그 전에 우리가 다퉜던 일을 생각하며 '아..그래서 그 때 그랬나 보구나'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 는 식의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한마디를 해도 좀 더 친절하고, 상냥하게 해줘야 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아내가 있는 곳까지는 한참을 운전해야 하는 터라 차에서 혼자 웃는 걸 연습해보기도 한다.

또한 딸아이와 많이 친하졌다는 것이다
. 주중에 가면 대개 8시나 되야 하는 데, 녀석은 그 때부터 나와 정신없이 놀려 한다. 주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잠을 자도 내 품에 안겨 자고, 밥도 내가 먹여 주는 걸 좋아한다. 기저귀도 굳이 아빠와 갈겠다고 한다. 나 역시 더욱 녀석이 사랑스럽고, 소중히 느껴진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이가 커갈수록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더 느끼는 것이라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부녀가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해 가는 건 굳이 나쁘게만 볼 문제가 아니리라. 


아마도 우리 부부는 6개월 이상 더 주말 부부로 지내야 할 것 같다. 그 때까지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아내와 딸이 있는 곳으로 가야할 것 같다.(필자는 부천, 아내와 딸은 오산에 거주) 내 몸도 피곤하고, 아이도 힘들고, 아내도 그립지만 누구나처럼 어쩔 수 없는 삶의 형편이란 것이 있다. 따라서 이 시간을 더욱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게 잘 활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선택일 것이다.

나는 남은 6개월 동안 지금보다 아내를 더 이해하고, 공감해주려 노력하고 싶다. 또한 아이를 더욱 사랑하고 싶다. 끝으로 내 자신을 더욱 깊이 닦고 싶다. 그러면 힘든 시기일 수 있는 지금이 우리 가정의 더 행복한 내일을 위한 소중한 배움과 준비의 시간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처럼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가정의 사람들과 이 사회를 더 깊이 파고들 것이다. 내가 내 가족 사랑으로만 멈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역시 우리의 이 힘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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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원으로 가족 만찬을 즐기다.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11. 24. 10:50 Posted by 바람몰이

어려운 시기라 가족과 함께 외식한번 마음 놓고 못하는 가장의 마음은 생각보다 무게가 있다. 때론 허리를 계속해서 졸라매는 아내를 보며 괜시리 화를 내게 되고, 뒤돌아 미안해 가슴아파 하는 못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할머니,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 모두 뭔가 먹고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냥 집에 들어간다. 할머니께서 모두의 마음을 안고 대표로 말씀하신다.

"내가 살테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문해~"

이 못난 사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걸 할머니 말씀에 굳이 토를 단다.

"그냥 있는 걸로 먹죠 뭐 돈을 쓰고 그래요"

바로 여기서부터 아내의 활약은 시작되었다. 아내의 복안은 짜장밥을 통해 분위기 전환도 하고, 외식 기분도 내본다는 것이다. 퉁탕 퉁탕 거린다. 예전에 사두었던 짜장 분말을 찾아 거기 넣을 야채를 써는 것이다. 가만보니 야채 역시 재료 사용 후 조금씩 남아있던 녀석들이었다. 

오호라~짜장을 잘 안해먹는 우리지만 제법 냄새가 그럴싸하다. 한참을 저으며 만들던 아내가 드디어 맛을 봐달라 하였다.

어라, 그런데 이거 뭔가 2% 부족하다. ㅋ


아내는 '아 이거 뭐가 문제지~뭐를 더 넣어야 하지'라며 연신 방법을 차증려 애를 쓴다. 그 때 내 머리를 스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내를 잠시 뒤로 보내며 가만 있어 보라 한다. 

내 아이디어는 남은 찬밥을 이용 짜장에 알맞은 맞춤식 볶음밥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집의 볶음밥이 떠올랐던 것이다. 문제는 부족한 그 2%를 과연 이것이 채워줄 수 있느냐 였는 데, 나는 볶음밥의 씹는 느낌과 센스 있게 뿌리는 소금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다음은 프라이팬 위 볶음밥의 완성된 모습이다. 약간 노란색을 보이는 건 달걀을 풀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각 자 그릇에 옮겨 담았다.


다음은 아내가 만든 짜장의 모습이다. 건더기가 가라 앉아 그렇지 남은 야채로 만든 그 속은 매우 풍성한 상황이다.


이제 아내가 만든 짜장을 내가 만든 볶음밥 위에 얹어 놓는 차례이다. 일단 보기는 괜찮아 보였다.



다들 맛이 어떤가 물어보았다. 반응이 매우 좋다. 짜장에서 느껴졌던 2% 부족한 느낌이 잘 채워져 좋다 한다. 진짜 중국집 볶음밥 같단다.

아싸~작전 대성공!!ㅋ

이제 20개월 된 딸아이도 잘 먹는다. 좋아하는 눈치이다. 밥 먹는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어 줬더니 나름 자세도 잡아본다 ㅋ




오늘 우리 가족의 만찬은 재료비 5천원 내외쯤에서 해결된 것이었다. 물론 아내의 98%에 내가 단 2%를 보탠 것에 불과했지만 이 작은 노력으로 온 가족이 행복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사실 가만보면 남자는 특별히 잘 해주진 못해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스스로를 힘들게 할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꼭 밖에 나가 특별한 걸 해주거나 사주지 않아도, 온 가족이 함께 내 작은 노력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역시 참으로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갈수록 경제가 어려워질 거란 비관적인 얘기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어려움으로만 느낀다면 그 삶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부부가 맘을 모으고, 내가 작은 노력을 더해 어려움 속에서도 일상의 기쁨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은 작은 행복이 피어나는. 어려워도 희망이 있는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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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이중생활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11. 21. 14:36 Posted by 바람몰이

장안의 화제였던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다보니 중간에 '제 아무리 날고 뛰는 여자도 애 낳으면 다 똑같아진다..저도 별 수 없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지만 우리 나라 여성의 현실이 한마디로 집약된 듯 하여 씁쓸한 마음이 들었었다.

요즘 주변을 보면 흔히 말하는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아졌다 한다. 가정내 아내의 발언권도 상당하여 요즘은 오히려 고개 숙인 남자가 많아졌다고도 한다. 가만보면 상당히 맞는 말인 것도 같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서도 가사와 육아는 여전히 아내의 몫이고, 좀 좋은 남편은 자주 도와준다는 표현이 적절한 수준의 참여를 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직장여성의 경우 가사분담 시간이 남성의 두배에 달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역시 비슷하다. 어느 잡지를 보니 한국의 남녀불평등지수가 악화되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세계경제포험의 세계 성격차 보고서를 보니 한국은 작년보다 11계단 하락하여 총 130개국에서 108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최하위권에는 아랍권 국가가 포진해 있으니 사실상 꼴등이나 다름없다.

(세계경제포럼은 교육과 보건, 고용, 정치 등 4개 부문에서 불평등 상황을 계량화 하여 완전 평등을 0으로 가정한 후 평가하게 되는 데, 올해 우리는 작년 0.6409에서 0.6154로 떨어졌다.) 

특히, 최근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물결에 따른 여성 근로자의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핵심가치 중 하나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들고 있다. 이는 결국 고용과 해고가 자유롭고, 적은 임금지출이 가능한 비정규직의 확산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물론 남성 근로자 역시 특별히 나은 건 아니지만- 정리해고의 1순위도 여성 근로자이고, 현재 여성근로자의 70%가 비정규직임을 보면 상대적으로 여성 근로자에게 더 많은 부분 영향이 끼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만약 그 여성 근로자가 그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라면 그 영향은 더 크게 작용하고 만다.
  

얼마 전 신차 구입 후 열심히 운전 중인 여동생의 푸념을 들을 수 있었다. 운전을 하다보면 도대체 사람들이 비켜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양보가 줄어든 요즘 모습일 수 있으나 유독 여자 운전자에게 더 심한 것 같다 한다.

나는 여동생의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예전에 어떤 이가 우리 나라 여자는 자신들이 얼마나 존중받는 지 모르고 부당한 대우 받은 것만 기억하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을 느끼게 하는 현실이 존재하여 느끼는 건데 어쩌란 말인가. 

아하..그런데 이거 참 웃긴다.

이런 글을 쓰는 나이지만 글을 쓰며 새벽 출근 전 함께 막 잠에서 깨어난 아내를 보고 "나 아침밥 안해줄거야?"라 따지던 게 생각난다. 신혼 초 인터넷으로 구입한 의자를 남자인 내가 조립해야한다 바득바득 우기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아내에게 윽박질러 울게 만든 것이 떠오른다. 새벽에 마구 울던 아이에게 똑같이 일하고 퇴근 한 아내를 깨워 우유를 주고, 달래라 하던 게 떠오른다. 

허허..잠시 거울을 피해다녀야 할까보다.

나의 이중생활에 코가 얼마나 길어져 있을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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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가 약간 안 된 즈음. 아내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모님이셨다. 장모님께서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하셨다. 그 때 나는 출근 준비를 하려 샤워를 하던 참이었는 데, 밖이 순간 적막해지고 어색한 기운이 도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밖에 나가보니 역시나 아내의 표정은 굳어 있고, 욕실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애통함이 느껴졌다.

나는 급히 사무실에 전화하여 사정을 알렸다. 직장과 가까운 아내는(걸어서 3분) 사무실에 직접 가서 급한 서류 정리를 한 후 내려오기로 하였다. 처가에 가기 까지 약 두시간의 여유가 생긴 순간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집안 청소와 내려가는 차에서 먹을 간식만들기였다. 이제 20개월 된 딸아이때문에 어지러진 방을 정리하니 휴~한참이 지난다. 다행이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재빨리 간식 만들기에 들어갔다.

집안을 둘러보니 커다란 고구마 두개가 보였다. 맛탕을 할 까 했는 데, 그러기엔 시간이 좀 부족한 듯 싶었다. 허나 고구마 튀김을 하기에는 적당한 여유였다.

"옳커니!! 고구마 튀김을 해보자!!"


<고구마 튀김 만들기>

1.고구마 껍질 손질.
대개 고구마 튀김은 껍질을 안 벗기고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내 손에 있던 녀석은 상한 곳이 좀 있어 손질하게 되었다.

2.적절한 크기로 자르기.
아이도 있기에 너무 크게 자를 수는 없었다. 딸아이도 손에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손질하였다.

3.튀김가루 입히기.
반죽을 하여 튀김 옷을 입혀 하는 게 정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좀 부족하고, 식용유가 많이 입힌 것은 아이를 생각해 꺼리는 편이다. 그래서 튀김 가루를 입히게 되었다.

나는 평소 요리를 할 때 재료를 남기지 않는 편이다. 심지어 가루조차 남기는 걸 꺼려한다. 본래 진정한 고수는 재료하나도 남기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자주 이용하는 방법이 요리 재료를 통에 넣고 그 위에 적절한 양의 가루를 붓는 방식이다.



모든 고구마에 가루를 묻힌 후 남은 통의 모습이다. 가루가 거의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 계산은 정확했고, 나는 알뜰한 살림을 하였다. 후후후..^.^;;



4.달걀 옷 입힌 후 후라이팬에 튀기기.
달걀 두개를 그릇에 풀었다. 이 때, 나는 특제 소스를 첨가하곤 한다. 특제소스라 하여 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다. 튀김을 좀 더 부드럽게 해주기 위해 약간의 우유나 두유를 첨가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딸 아이가 먹다 남긴 검은 콩 두유를 살짝 넣었다. 달걀 자체는 약간 색이 어두워지나 실제 튀기게 되면 전혀 차이가 없다.


5.완성 된 모습.
위에 잠깐 언급했듯 우리 집은 식용유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다. 그래서 후라이팬에는 최소한의 식용유만을 부었다. 또한 접시에 키친 타올을 올려 놓고 한참 동안 기름을 빼는 과정을 거쳤다. 아래 사진은 고구마 튀김의 완성본이다. 그리 대단한 장식을 하거나 뛰어나게 예쁜 건 아니지만 제법 그럴 싸한 모습이다. 이것은 아내와 딸아이가 먹게 된 양이다.


아래 사진은 고구마 끝 부분과 약간 오래 튀겨진 부분이다. 이건 내가 먹을 부분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양이 제대로 된 것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이런..ㅡ.ㅡ;;



요리를 마칠 때쯤 하여 아내가 돌아왔다. 나에게 뭘 하냐 묻는다. 그래서 "당신이 울적해하길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어 깜짝 이벤트를 했다" 하였다.

그런데 이런..아뿔싸..

아내는 내가 샤워하는 동안 어제 먹다 남긴 파전을 혼자 먹었다 한다. 사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전날은 우리 결혼 기념일이라 저녁에 조촐한 파티를 했었고,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남은 음식이 상할 까봐 혼자 먹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었으니 고구마 튀김이 제대로 먹힐리 없다.

결국 내 고구마 튀김은 오히려 아내의 속을 느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

'흑흑..이거 완전 낭패로다..ㅠ.ㅜ'


처가에 내려가는 길. 아내는 그래도 신랑이 해준 음식이 고맙다고 고구마 튀김을 꾸역꾸역 먹는다.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그 정성을 봐주고, 고맙다 하며 먹어주는 게 사랑스럽다.

하지만 결국
처가 도착 후 이 고구마 튀김은 조카들의 손에 넘어갔고, 조카들은 맛있다며 한두개 집어 먹더니 어느 순간 한통을 다 비워놓았다. 하하하, 이런..^.^;;

우린 삼일장을 잘 치뤄냈다. 예배를 드리며 마음을 잘 다스리며 할머니를 보내드렸고, 염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상여를 들고 길을 걸으며 마지막 가는 길 까지 잘 배웅해드렸다. 수백명이 넘는 손님 역시 잘 대접하여 보내드렸다.


비록 깜짝 이벤트는 절반의 성공으로 그쳤지만 마지막 날에는 한결 평안해진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깜짝 이벤트의 성공보다 더 보람있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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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커져버린 아내의 모습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11. 17. 15:05 Posted by 바람몰이
시어머니도 아닌 시할머니와 함께 사는 건 그리 쉬운 얘기가 아니다. 벌써 나이차이만 50년 이상이 난다. 시간에 따른 문화적 차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 게 없다. 게다가 그 시할머니께서 평생 장사를 하시며 뛰어난 언변과 강한 고집을 가진 분이고, 신랑의 수입이 넉넉치 않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시할머니를 
3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기쁜 일도 많았지만 상당히 힘든 시간이었다. 때론 눈물을 훔치며 내게 따지는 아내를 보기도 해야했다. 한 없이 순수하고, 착하기만 하던 아내가 점점 성격이 날카로워지는 걸 보기도 해야했다.


물론 나나 할머니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나와 아내가 다투는 날이거나 내가 할머니께 이것저것 따지는 날에는 모두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겨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려움이 좀 풀리고 나아질까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벽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린 결국 분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 생선장사로 날 길러주신 할머니시다. 할머니는 나를 막내 아들쯤으로 여기시고, 나 역시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있다. 따라서 분가 결정은 나로써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우리 부부마저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또한 계속 나만의 주장을 하는 건 아내에 대한 배려가 없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 어린 나이에 그만하면 아내로써는  자기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 아니 보통이상으로 훌륭한 아내였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아내가 이런 말을 꺼냈다. 오늘 할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그냥 분가하지 말고 계속 같이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말씀드렸다 한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였다. 사연인 즉슨 이러했다. 

지난 주 수요일 아내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었다. 향년 87세 이셨다. 그런데 삼일간 장례를 치르며 아내는 여러 생각과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은 며느리로써 여러 상황과 시할머니를 보았는 데, 자신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이젠 시할머니를 며느리로써 뿐 아니라 자식의 눈으로 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자식의 눈으로 시할머니를 보게 되니 그 동안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어찌해야할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더라 한다. 그러니 할머니와 막혀 있던 대화의 통로가 조금씩 열림이 느껴지고, 또 막혀 있던 부분도 어떻게 열어야 할지도 알 것 같다 하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듣고 있어야만 했다. 혹시 '한 순간의 감정에 취해 한 얘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아내가 너무나도 진지하고, 그 말 속에 진실성이 잔뜩 스며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다시 이런 말을 해준 아내가 그저 고맙기만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냥 분가하도록 하자" 고 얘기하였다. 아내에게 일종의 "휴가"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다. 할머니께는 내가 좀 더 수고하며 왔다 갔다 하면 되는 일이었다.

또한 가만 살펴보니 아내에 비해 내 준비가 너무도 되어 있지 않았다. 신학 공부를 하며 나름 수도를 해왔다 생각했지만 나는 아내에 비해 한참 부족한 존재였다. 그러고 보면 그냥 분가하자 하는 말은 아내를 핑계로 내 부족함을 감추려 하는 어색한 도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정말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인데..


이런 나를 보면 시어머니도 아닌 시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아내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50년이란 시간을 넘어서는..시할머니를 모시는 손주 며느리가 아닌 자식의 눈으로 보게 되는 참으로 놀라운 인식의 확장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나는 장인, 장모님도 우리가 모시고 살자 했었다. 그러나 나는 내 할머니도 이해하고, 모시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연 장인 장모님께는 그럴 수 있을것인지..적어도 아내가 내 할머니께 해드렸던 것만큼은 해야할텐데 그럴 수 있을런지..

아하..이거 걱정이 엄습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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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짬을 내어 책을 펼쳤다. 논문을 엮음 모음집이었는 데, 이런 저런 어렵고 중요한 내용이 많아 밑줄을 그어야 했다. 필기도구가 필요했다. 평소 연필을 자주 쓰던 터라 연필을 찾았다.


그런데 허걱..연필심이 부러져 있다..ㅡ.ㅡ;;


흔히 "샤파"라고 하는 연필깎이를 찾았다.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ㅜ.ㅠ;;

연필꽂이를 보니 커터가 있다. 무심결에 집어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연필이 너무 작아 깎는 게 쉽지가 않다. 순간 어린 시절 기억이 오버랩 되며 스쳐 지나갔다.


나는 생선장사와 삯바느질을 하시던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께서는 월남에서 허리를 다치셔 거동이 불편하셨기에 할머님께서 돈벌이를 하셨었다. 그래서 나와 여동생의 교육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고교 졸업을 할 때까지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하셨었다.

다섯살에 시골에 내려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할머님은 시장에서 3000원짜리 가방과 800원짜리 철제필통, 1200원짜리 연필 한다스(지우개 달린 것)을 사오셨었다. 학교에 처음 가던 날 할아버지께서는 연필을 손수 깎아 주셨었다. 정확히 다섯개를 깎아 주셨었다. 한시간에 하나씩 쓰고, 혹시 모르니 한두개는 여유분으로 두라는 거였다.

이 후로도 할아버지는 매일 밤마다 연필을 깎아 주셨다. 자기 전에 미리 미리 책가방과 준비물을 챙기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주셨었고, 내가 모든 준비를 끝내면 최종적으로 할아버지께서 깎아 주신 연필을 필통에 넣어 확인을 해주셨다. 

하루는 내가 직접 연필을 깎아 보겠다 한적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위험해서 안된다 하셨다. 허나 나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검정색 학생용 칼을 들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고사리 같던 손에 무슨 힘이 있어 연필을 제대로 깎겠나..당연히 삐뚤빼뚤했고, 할아버지께서 마무리를 해주셨다.(지금 생각해보면 손가락을 베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실 당시 친구들은 모두 "샤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끝이 뾰족한 연필을 사용했었다. 저학년 시절은 샤프의 사용이 금지되었었기에 뾰족한 연필심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샤파가 필요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샤파를 살 여유까지는 되지 않았었다. 내가 아직도 당시 책가방과 필통, 연필 가격을 기억하는 건 우리 집의 수입에 비해 너무도 큰 지출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런 것마저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 했다. (또 사실 감사했다. 두분이 얼마나 힘들게 우리 남매를 기르셨는 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할아버지는 돌아가셔 곁에 계시지 않는다. 살아생전 너무 고생만 하셔 내가 반드시 호강시켜드리리라 다짐했건만 내가 결혼하던 그 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매일 밤 연필을 깎아 주시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가슴의 한으로 남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나는 작년 초까지 안산의 한 작은 교회에서 독거노인을 섬기는 일을 해왔다. 지금 잠시 사정이 있어 떠나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갈 곳이다. 그러나 몸뚱아리만 움직여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그렇다. 다시 책을 잡는 일이다.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체계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또한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여의도를 감시하는 일이다. 저 양반들이 함부로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팔아먹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너무 먼 얘기이겠다. 당장 모시고 있는 할머님부터 챙겨야겠다. 장인, 장모님께 전화라도 드려야 겠다. 아내와 좀 더 행복한 가정을 이뤄야겠다.

아하..오늘 저녁은 내가 해야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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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일을 시작하는 게 내심 설레이셨던 것 같다. 사실 연락은 아내에게 왔었다. 이걸 할머니께 연결해드렸고, 할머니는 해보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밝히셨다. 일을 맡기신 분과 어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더니 오늘 아침부터 시작하게 되셨다.

벌써 증손녀까지 보셨지만 건강하신 제법 멋쟁이 할머니다. 나를 길러주신 할머니지만 손주 형편이 넉넉치 못해 제대로 용돈한번 못드려 늘 죄송할 뿐이다.



할머니께서 시작하는 일은 장애인 활동보조이다.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의 통학을 돕는 일이다. 사실 나는 이 일이 그리 탐탁치 않았었다. 곧 날이 더 추워지게 되거나 비라도 오면 할머니 건강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집과 거리가 좀 되다보니 상당시간 걸으셔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더 반대할 수는 없었다. 죄송하고, 씁쓸한 마음을 품은 채 잘 하실 수 있도록 격려해드리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할머니께서 곧 분가하게 될 내부사정을 고려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하셨고, 무엇보다 일을 한다는 기쁨이 너무 커 보이셨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 처음으로 나가신 오늘 아침.


집안이 썰렁하게 느껴진다. 매일 아침 식사를 챙겨주시며 나를 깨우시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왠지 이상하다. 오랜만에 혼자 일어나다 보니 준비가 늦어 아침을 굶고 나와 허전함이 더하다. 아내가 취직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내심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할머니께서는 이제-얼마가 될지 모르긴 하나- 일을 통해 당신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으실 것이다. 또한 그것도 장애우를 섬기는 의미있는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금 느끼며 당신의 노후를 아름답게 수놓게 되실 것이다. 끝으로 얼마 되진 않지만 고정수입이 생김으로 당신 손주 과자라도 하나 사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실 것이다.
아내가 오는 주말에는 할머니의 취직을 축하하는 조촐한 파티라도 한번 해야할까 보다. 걷기 편하신 운동화 한켤레 장만해드리기도 해야 할 듯 싶다. 찜질도 좀 하시면 좋을 테니 온열팩도 있으면 좋겠다.

허걱..

나도 아르바이트 해야하려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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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할머니의 수박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8. 15. 10:30 Posted by 바람몰이
나는 이른바 조손가정에서 자랐다. 내 나이 다섯에 부모님께서 헤어지시고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께 맡겨졌던 것이다.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던 내 할머님. 월남에서 허리를 다쳐 500원짜리 삯바느질을 하시던 내 할아버님. 나는 15년간 그렇게 성장했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 덕에 국가 지원도 못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 형편은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장차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두분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사랑을 먹으며 그렇게 자라났다. 할아버님, 할머님은 내겐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분이셨다.

성인이 된 후 결혼을 하였다.  아쉽게도 할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나는 할머님만을 모시고 살고 있다. 하지만 월세방에 살며 지은지 20여년이 다 되는 집에 살며 변변히 용돈 한번 못 챙겨드리고 있다. 그래도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할머님의 말씀은 내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래도 할머님 보시기에 나는 아직까지 어린 아이 같은가 보다. 퇴근 후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시며 밥을 챙겨주신다(아내보다 내가 먼저 퇴근). 또한 식사 후 꼭 챙겨주시는 게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수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이기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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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퇴근해보니 할머님 얼굴이 매우 피곤해 보이신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봤더니 복도 한쪽 켠에 있는 수박이 보인다. 얼핏보니 크기가 꽤 커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게를 재어보니 8.8kg이나 되었다. 이 뜨거운 여름에 힘든 몸을 이끌고 사오셨으니 안 지칠래야 안 지칠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고맙고, 뭉클한 마음과 달리 할머님께 신경질을 내곤한다. 이렇게 뜨거울 땐 좀 집에 가만히 앉아 쉬시라는 거다.

그러나 나는 올해 여름 단 하루도 수박이 끊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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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들고 쪼개보니 제법 잘 익었다. 칼을 넣자마자 쫙~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쪼개지고 나니 향긋한 냄새가 난다. 할머님께서도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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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내가 수박 물 흘리는 걸 싫어해 주로 화채를 담아 먹곤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 잘라 담아보니 한참을 먹었는 데도 두통이나 나왔다. 양이 상당하다. 또 다시 엄청난 땀을 흘리며 손자에게 수박 한쪽 먹이겠단 마음으로 뙤약볕을 다니셨을 할머니 생각이 난다.

또 다시 뭉클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삼킨다..


할머님께서는 기초노령연금 수혜자이시다. 가끔 작은 아버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받으신다. 그 외에 수입은 전혀 없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늘 돈이 딱 맞아 떨어지기는 하는 데, 정작 할머니 자신에게 쓰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집 반찬거리와 손자와 증손녀 먹일 간식 거리로 다 나가는 게다.

나는 또 다시 신경질을 낸다.
 
왜 그러시냐고..제발 그러지 마시라고..이제는 그만큼 고생하셨으면 되었으니 할머니 자신을 위해 쓰시라고..놀러도 다니고, 친구도 사귀며, 맛있는 것도 사서 드시라고..

하지만 벌써 2년이 넘게 이런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자식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부모님께 은혜를 갚으려 해도 늘 부족하다. 바다 같은 부모님의 사랑에 시냇물 수준의 자식의 효도가 비교 될수는 없다.

허나 그래도 늘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맛난 걸 먹이고자..죽을 때까지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사랑을 내 자식과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자 마음 먹게 된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이 되고자 다짐해본다.

이것이야말로 늘 부족한 이 철딱서니 없는 자식이..

그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자, 최선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첨부설문 : 내가 부모님께 하는 효도는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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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량 지수 측정의 굴욕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4. 25. 17:24 Posted by 바람몰이
오늘 근무하는 곳에 보건소 직원들이 나와 BMI측정을 하였습니다. BMI란 body mass index의 약자로 체질량 지수를 의미합니다. 체중(kg)을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을 통해 지방의 양을 추정하는 비만측정법이지요.

측정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먼저 쪽지에 나이와 체중, 음주 습관 등을 적습니다. 그리고 양말을 벗은 후 정육점 저울 같이 생긴 기계 위에 발을 맞춰 섭니다. 끝으로 두손에 측정기구를 가볍게 잡고 양팔을 좌우 45도 정도 벌린 후 섭니다. 그러면 직원께서 여러 가지 조건 입력 후 측정 하는 거지요. 대략 10초 내외가 걸립니다.


검사 후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의 BMi 지수는 표준치 18-23에 무려 30.4 였지요. 체지방률은 39.4 %에 근육량은 겨우 47.7kg에 불과했습니다..당연히 비만이구요..ㅠ.ㅜ

제가 이렇게 놀란 것은 그래도 한 때 운동 좀 했다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시절 태권도 사범생활도 짧게 하고 이종격투기 대회 준비도 했었지요. 물론 이러다 허리를 다쳐 수술하게 되었지만요 ㅠ.ㅜ 허리 수술 후 운동을 못해 무려 15킬로 이상 쪘지만 그래도 꾸준히 관리한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ㅠ.ㅜ 같이 근무 하는 동생 중에 마른 멸치처럼 뼈밖에 없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무려 근육량이 51킬로가 넘었지요. 저보다도 많게 나왔습니다. ㅠ.ㅜ

같이 근무하는 동생들에게 항상 건강과 운동 등을 강조하던 저는 결국..

놀림감이 되고 말았습니다..ㅠ.ㅜ

끝으로 친절하게 운동에 대한 조언까지 쪽지에 나오더군요.
<일일운동을 조깅 30분으로 했을 경우 약 85주 정도 꾸준하게 운동해야 합니다>

흑흑..

저 이제 몸 다시 풀고 만들어볼랍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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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4. 22. 02:11 Posted by 바람몰이
나는 내 자신을 얽어매는 굴레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좀 더 솔직히

현실적인 내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민중의 본 모습일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내가 지닌 굴레들은

약한 나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가면일지도 모르겠다

내 목을 조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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