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월 31일 최홍만과 효도르의 맞대결을 추진중이라 한다.  격투기 입문이 얼마 되지 않은 최홍만이 이정도 레벨까지 올라온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만약 진짜로 대결이 성립하게 된다면 격투기 매니아는 물론 최홍만과 효도르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에게는 매우 흥분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대결이 실제 이뤄지게 된다면 판세는 어떻게 진행될까. 가장 관심사인 최홍만의 승률은 얼마나 될 까. 또한 경기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 판단을 위해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고 본다.

첫째, 준비시간의 충분성
최홍만의 경기 경험은 입식타격이 대부분이다. 바비 올로건과의 종합 1전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종합전이라 볼 수 없었다. 그냥 시작하자마자 끝난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의 그래플링과 타격기술을 갖고 있는 효도르와 붙는다하니 아무리 열심히 준비한다 해도 일단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이 솔직한 고백이라 본다.  

둘째, 그라운드 기술의 숙련도
세미슐츠는
효도르와의 경기에서 그라운드 진입시 힘을 거의 쓰지 못하는 인상이 짖었다. 그가 그라운드를 아무리 준비했다해도 효도르에게 통하게 하는 게 매우 어려움을 그러나 최홍만은 씨름을 통해 몸을 부대끼는 데는 익숙하다. 하지만 역시 이태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완력과 씨름 기술로 테이크 다운까지는 가능하다 해도 그 후 피니쉬 기술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다. 최홍만이 효도르와의 대결에 승부를 걸어보려면 지금부터 암바라도 완벽히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겠금 '피"나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래야 그라운드에서의 무력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최홍만의 체격조건
최홍만의 체격조건은 이종격투기 계에서는 독보적이다. 물론 격투기는 덩치와 힘으로만 하는 건 아니다. 그 외에도 노련한 경기운영, 근성, 당일 컨디션, 작전 등이 고루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효도르의 펀치스타일은 마이티 모가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날아 꽂는 듯한 "원펀치"와는 조금 다르다. 따라서 최홍만이 적어도 입식상태에서만큼은 효도르의 타격에 마이티 모 전처럼 넉다운 당하는 확률은 적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체격조건이 그라운드 기술까지 커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점을 최홍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넷째, 최홍만의 근성
어떤 시합이나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싸움에서도 겁먹지 않고 근성있게 붙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최홍만은 일반적으로 근성이 있는 편이라 평가되고 있지만 그가 효도르 앞에서도 지금까지의 근성을 보여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아무리 근성있는 모습을 보여도 그것이 효도르의 노련한 경기운영과 실력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역시 미지수이다. 하지만 최홍만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려는 근성을 보여주는 건 경기의 재미와 그의 커리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물론 마이티 모나 본야스키와의 경기에서 일부 소극적인 모습도 보였으나 뒤에 그것이 작전이었다 밝힌바 있다 )

다섯째, 제롬느 벤너와의 대결-체력과 부상
최홍만은 제롬 느 밴너와 먼저 대결하게 되어있다. 만약 효도르와 경기를 갖게 된다면 밴너와의 대결 이후 겨우 1개월 조금 더 지난 정도가 된다. 대개 정상급 이종격투기 선수나 K-1측은 1회 경기 후 2-3개월 이상 충분히 휴식할 것을 권하고 있다. 따라서 엄청난 타격가인 밴너와 대결에서 부상이 없고 그 후 충분한 체력회복을 해야만 효도르와 붙어도 붙을 수 있을 것이다.

효도르와의 대결은 최홍만이 100%의 컨디션과 기술구사를 해도 어려운 시합이다. 객관적 평가 역시 효도르의 압도적 우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을 내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어이 없는 호기나 객기를 부리는 것 또한 불필요하다. 실제 최홍만은 마이티 모의 펀치를 온몸으로 받아주겠다 하다 진짜 온몸으로 받고 넉다운 당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홍만이 입식에서 효도르의 타격을 효과적으로 받아내느냐 여부, 그라운드에서 효도르의 유연한 몸놀림과 귀신 같은 기술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여부 등 에 따라 시합은 진행될 것이다. 또한 최홍만과 효도르의 승세는 대략2:8에서 3:7 쯤에서 왔다 갔다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최홍만이 이기고 지는 것이 경기 관전의 포인트는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역시 매순간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준비성과 성실성, 명성과 실력에 두려워떨지 않고 경기내내 관중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프로의식, 이 기회를 좋은 배움의 시간으로 여기는 겸손성의 확인가능성 여부이다. 그래서 패자에게도 박수를 쳐줄수 있는 프로 격투계의 감동적인 순간을 가질 수 있느냐일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없는 관중까지 모두 하나된 승리의 그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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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자는 한 여인과 결혼을 약속하고, 지금은 신혼의 달콤한 오늘과 내일을 꿈꾸며 지내고 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했고, 살림도 마련해 나가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나갔던 필자는 어느 아파트 한쪽에 버려진 작은 교자상과 책장을 보았다. 또한 동네 형님과 함께 돌다 냉장고와 와 작은 고가구를 발견하였다. 곧 필자는 그것들을 주워다 살림에 합쳤고, 우리 커플은 그것들을 걸레로 닦고, 포장하며 제법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린 서로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좀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이 '왠 청승을 그렇게 떨고 있냐'는 거다. 기왕 새로 시작하는 거 새걸로 좀 사지 뭘 남이 쓰던 걸 쓰고, 버린 걸 주워오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웃으며 가볍게 흘리려 하였다. 보통 그렇게들 얘기하고,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챤"으로서 다시 생각해본 필자는 몇 가지 생각을 짧게 해보게 되었다.

첫째, 과연 우리는 이러한 '소비지향적' 흐름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인가? 이다. 소비는 말 그대로 소비이다. 기존의 것을 쓰기만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그것 역시 또 다시 소비되어 사라지게만 할 뿐이다. 소비란 그 말 자체에서 착취성과 소모성, 파괴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의 성격이 지닌 영향력은 자연에만 그치지 않고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인간내면으로 들어가면 그 영혼이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끊임없는 소비의 유혹에 휩싸이게 하고, 그 사회로 들어가면 생명이 그것 자체로 귀히 여겨지지 못하고 소비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 되고 있다. 헛된 욕망에 사로 잡힌 영혼과 사회가 계속 멍들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엄청난 발전과 함께 찾아온 소비지향이, 전 생태계와 우리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메마르게 하고, 아프게 하는 가 우린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소비지향성은 그것이 반생명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 크리스챤들이 여기에 쉽게 동조해나가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째, 지금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늘 생명중심의 마음을 잘 잡을 줄 알아야 한다. 이 시대가 소비지향적 세태를 보이며 생태계와 인간, 사회를 좀 먹어 간다면 그 반대쪽 자리에 서서 중심을 잡아가기도 해야한다.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며, 그 생명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 나가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인간의 영혼과 그 사회의 건강성을 견실히 잡아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요즘 몇 몇 교회들을 보니 막대한 돈을 들여 건축하는 걸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놓고 전력질주 하고 있다. 몇 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고급 식당에서 한끼에 몇 만원짜리 식사를 즐기고 있다. 이들은 각 은행이 특별관리대상으로 알아서 모시고 있다는 말도 있다.

모두 알다시피, 교회에 들어온 돈은 목회자 고급 승용차 유지와 번쩍이는 교회건축에 쓰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게 아니다. 이 세대의 소비의 중요한 축이 되어 VIP고객으로 모심 받으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사회의 소외되고, 아픔의 그늘이 있는 곳에 써야한다는..파괴되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한다는..뭐 이런 상투적인 말까지 꼭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각 자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일 일이다.

혼수를 장만하다 있었던 에피소드를 통해 두서 없는 이야기를 펼쳤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크리스챤은 늘 생명중심의 방향을 잘 잡아나가야 한다. 반생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생명의 방향으로 돌이킬 수 있겠금 한쪽 날개의 힘을 실어줄 수도 있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며 동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체적인 신앙적 판단을 내리며 책임있는 자신의 삶을 살고, 이 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다시 한번 살펴볼 일이다. 난 지금 도대체 어느 자리에 서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건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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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곧 한 여인을 만났다. 그간 한번의 연애경험이 없던 나에겐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난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인식의 관점과 내 삶의 수많은 패턴들이 바뀌게 되었다. 모든 연애가 그렇듯 우리 역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믿음과 뜻을 품고 잘 이겨내었고, 곧 결혼을 할 예정이다.

결혼 준비를 하며 주변의 많은 사례들을 보았고, 많은 조언을 들었다. 쭉 훑어보니 '이 정도는 해야한다..' 하는 기본선이 있었다. 혼수, 예단, 웨딩촬영, 드레스, 턱시도, 해외신혼여행...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이러한 기본선을 지켜가는 것이-흔히 일생의 단한번이라 말하곤 하는-결혼의 의미를 더욱 뜻깊게 할 것인가..더욱 풍요로이 해줄 것인가..경제적인 부담까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워지켜나가기로 하였다.

첫째, 모두 하는 대로 하는 대로 꼭 할 필요는 없다. 우리 결혼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 세상의 관념들이 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고, 후배들과 또래의 젊은 커플들에게 모범 사례로 기억되거나 참고가 될 수 있는 예식을 준비해 보자.

셋째, 20대 중후반이 되어서까지 부모님의 손을 빌려 시작하지는 말자. 힘들더라도 우리의 힘으로 가보자.

이정도의 큰 틀을 잡아보며 우린 좀 더 세밀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하였다. 먼저 기존의 웨딩홀을 빌려 하는 흔히 말하는 결혼식을 지양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이 속에는 서로의 사랑과 인격, 신념을 존중하는 고백이 충분히 담보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의 종교와 신념을 존중하여 대학 채플실을 빌려(약 5만원 상당)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받아오는 식의 남성중심적 예식이 아닌 양성평등적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서로의 은사님이신 여성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것을 통해 양성이 서로를 존중하는 양성 평등적 의미를 담아내고 싶었던것이다.

또한 결혼식 때 흔히 입곤 하는 턱시도와 드레스를 과감히 벗고, 우리의 전통 한복을 입기로 하였다. 꼭 서양사람들의 몸에 맞춘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우리의 결혼에 우리의 의식을 담아내는 것 또한 뜻깊은 것이라 여겨졌다.

혼수, 예단 등은 모두 생략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 동안 차근차근 준비하기도 하였거니와 대부분 새로운 살림을 시작한다 하여 꾸준히 사용가능한 물품을 버리거나 처분하고, 새것을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갖고 있던TV, 오디오 세트, 책장, 그녀가 갖고 있던 식기류, 컴퓨터, 전기밥솥 등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냉장고는 누군가 몰래 버리고간 350리터짜리를 구해다 깨끗이 닦아 사용하였다. 자본주의 적 소비의 시대 속에 산다고 하여 우리까지 편승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소비중심의 생활양식이 지구별에 끼칠 영향은 눈에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신혼여행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일단 해외여행은 지양하기로 하였다. 아직 우리네 땅도 제대로 모를 뿐더러, 굳이 해외로 나가야만 할 이유가 없었다. 또 나간다고 하여 딱히 더 좋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필자의 소형차를 이용하여 전국일주를 하기로 하였다. 같은 값일지 몰라도, 이것을 통해 더 오래 함께 있고, 전국의 수많은 명승고적을 탐방해보고, 우리네 인심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사람 사는 맛을 느껴보기로 하였던 마음이다.(200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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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사회-(5)

[문화]방송,영화,격투기 2007. 11. 12. 17:45 Posted by 바람몰이
 ▣결 론▣

 누드는 예술의 중요한 한 장르이다. 초기의 누드는 남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 많았으나, 르네상스 이 후 여성을 다룬 것이 많아진다. 이것은 누드에 새겨졌던 예술적 혼 이외에 에로티시즘이 접합된 것이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일부 연예인을 중심으로 누드사진을 찍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디지털 산업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러 저러한 말이 많지만, 이것은 한 개인 내면 문제로 국한 지으며 단순한 문화코드나 노출 불감증 정도로 여기는 분석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기초와 경제적 물질 기초가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성 혁명은 이러한 현상의 직접적인 뿌리가 되는 것이다. 특히, 두 차례의 성 혁명과 함께 급격히 발달한 성산업은 ‘virtue'나 ’intercourse' 같은 개념을 성애화 하는 동시에, 성적 매력을 가리키는 ‘sexy'라는 신조어를 대중화 시켰다. 또한 성 산업이 대항문화의 ‘해방적 수사’를 원용하고, 그 쇠퇴를 틈타 그것을 독점하면서, 역설적으로 포르노 산업이 창궐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내기도 하였다. 결국  성해방의 가장 강력하고 가시적인 모델을 제공한 것은 광고업자와 미디어였던 것이다. 남한 사회의 누드 열풍에는 위의 개인적 문제 외에도 성 혁명 이후 자리 잡은 이데올로기적 기초와 광고업자와 미디어에 의한 선동 역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자본주의 경제의 주기적 순환은 문화산업의 발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경제에 있어서는 혼란기인 이른바 'Belle epoque'는 문화산업에 있어서는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기간이었으며 남한 사회 역시 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인 자본이 그 원인에서 빠지게 된다면 이 역시 반쪽짜리 분석이 되고 말 것이다.

  세 번째로 남한 사회 성문화의 독특성이다. 우리의 성 문화는 육체적 거래가 없는 성의 상품화 현상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성의 상품화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기준이 부재하고, 연령에 관계없이 청소년기의 성적 모험에 가까운 성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일고 있는 누드 열풍에 상당한 정도 기여 하며, 그 시장을 급속하게 팽창시켜 나가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끝으로 우리는 한 미술 교사의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의 자유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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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며▣

  지금까지 필자는 누드에 대한 예술사적 흐름 변화와 최근의 누드 열풍을 중심으로 본 보고서를 전개해 왔다. 지면의 한계 상 더 다루고 싶지만 그렇지 못 한 것이 많아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또한 본 보고서가 담당 교수님께서 내주신 과제의 의도와 얼마나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동안 평소 관심 있어 하던 분야였고, 이 참에 한번 여러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과감히 써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누드는 예술가의 혼을 담아 오늘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의 중요한 한 장르이다. 이것은 그림이 되었든, 조각이 되었든, 사진이 되었든 모두 공히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늘의 누드는 이러한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남성의 욕구와 자본의 욕구, 그리고 여성의 나르시시즘적 욕구를 반영하는 일종의 ‘짬뽕 같은 기형아’와 같은 꼴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폭력성과 함께 공명하며, 이제는 순수한 한 예술을 쥐 잡듯이 잡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도 중요하고, 경제 발전도 중요하며, 인권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교양 수준의 함양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누드라는 한 예를 통해서 본 일련의 과정은 결국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에 대한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냉소와 비관만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의 개혁을 위해 뛰어갈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제 자리에 주저 앉아 한량처럼 떠들어 대는 것은 내 젊음에 대한 배신이요, 사회적 인력낭비이다. 청년학도들이 취업에만 목을 메이지 말고, 사회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며, 전반적인 자기 개발에 더욱 힘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윤소영 지음,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워싱턴 콘센서스’-마르크스적 비판의 쟁점들>. 과천연구실 1999

윤소영 지음,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과천연구실 2001

이미경 지음, <신자유주의적 ‘반격’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페미니즘적 비판의 쟁점들>,과천연구실 1999

이주헌 지음, <신화 그림으로 읽기> 학고재 2000

김영애 지음, <페로티시즘-여성의 눈으로 본, 미술속의 에로티시즘> 개마고원 2004

한겨레 신문 2005. 8. 7

주간한국 2005. 3. 23

기업나라 2005.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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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사회-(4)

[문화]방송,영화,격투기 2007. 11. 12. 17:43 Posted by 바람몰이
 

3.음란과 폭력1)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은 “프리섹스는 오케이, 성매매는 노”라는 말로, 성매매 반대의 정치학을 요약했다고 한다.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대개 포르노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정치적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희진은 반대해야 할 것은, ‘음란물’이 아니라 폭력물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남한 사회는 폭력물은 무제한 허용하면서도, ‘음란물’, 특히, ‘성찰적 음란물’에 대해서는 낡은 칼날을 휘두른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지난 번 대법원은 미술교사 부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나체 사진에 대해 1심과 2심에서의 무죄 판결을 뒤엎고, ‘음란물’이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시민사회와 여론은 “ ‘음란’ 여부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보다 중요한가”라며, 법원의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러기에 정희진은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창조성, 다양성에 기여하지만,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폭력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2). 이번 판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재판부의 ‘음란’의 정치학에 대한 무지와 그들의 획일화된 신체관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미술교사의 작품은 외모가 계급이 되어버린 ‘몸짱’ 지배의 한국사회의 억압적인 몸 이미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인데, 재판부의 수준은 이를 ‘음란’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희진은 지금 대한민국을 도배하고 있는 ‘쭉쭉 빵빵’한 젊은 여성의 누드는 ‘아름답고’, 배 나오고 처진(대부분 사람들의 몸) 벗은 몸은 ‘음란’한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며, 이런 종류의 ‘음란물’ 제작은 더욱 격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성 연예인의 누드 모바일 서비스 같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 되는 규격화된 몸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것이다.



참고)링크 프라이스에 소개된 건강,미용 사이트~!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추가되어야 할 폭력이 있는 데, 그것은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몰고가는 언론의 선동과 네티즌의 마녀 사냥식 폭력을 말한다. 특히, 언론의 한 개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은 이미 그 한도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미디어 몽매주의에 따른 네티즌의 무차별적인 폭력은 두 말 하면 잔소리같이 여겨질 정도인 것이다.


1) 한겨레 신문 2005년 8월 7일자 정희진의 칼럼 제목을 인용


2)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할 말은 하는’ 신문들처럼, (지배 세력의)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라며 조소섞인 말을 하기도 하였다. 앞의 일자 칼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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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사회-(3)

[문화]방송,영화,격투기 2007. 11. 12. 17:42 Posted by 바람몰이

 

2.누드열풍의 원인은 무엇인가?

   2-1.과시본능이 만든 문화코드1)

  진옥현은 인터넷의 등장, 디지털 카메라, 휴대폰의 대중화 등으로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더니 이제는 누구나 쉽게 카메라 앞에서 옷 벗는 세상이 되었다며, 얼짱, 몸짱 열풍에서 누드짱으로 이어진 요즘은 자기만족을 넘어서 때로는 익명성마저 무시한 채 많은 사람이 자기 몸을 봐 주기를 기대한다고 보고 있다. 이들에게 관음증과 노출증은 정신병 증상이 아닌 성적 취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얼마 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등장한 셀프누드는 공개되자마자 2만여 명이나 다녀갔고 1촌을 신청하는 네티즌도 폭주했다고 한다. 자기의 미니 홈피에 세미누드를 올린 주인공은  누드를 예술 장르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도 가리지 않았다고 하니, 아무리 셀프누드 열풍이 거세다고 해도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이 누드를 공개할 때는 얼굴을 가리는 것이 상식인데 비하면 엄청난 파격이긴 하다.

 사실 인터넷의 성인 커뮤니티에서는 셀프누드가 활발하다. 성인 포털 사이트나 관련 인터넷 카페, 사진 갤러리에는 일반인 누드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장씩 올라온다. 물론 아직은 대부분 익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2~3년 전만 해도 몰래 카메라 중심이던 일반인 누드가 방문객을 늘리고 눈길을 잡기 위해 섹시 컨셉트에서 누드까지 확장된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여성들이 셀프누드를 찍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 반직업적 형태로 성 취향과 관계없이 자기 몸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알바형, 자기만족이나 화상 채팅에 중독된 여성으로 대표되는 과시형, 누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동경을 갖고 있는 신세대 젊은 여성의 욕망을 대변하는 모델형, 그리고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단지 남자 친구나 남편 등의 권유로 찍는 희생형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셀프 누드의 대중화는 화상 카메라의 보급과 더불어 사회 문제를 일으킨 음란 화상 채팅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일반인들의 호기심은 모바일에 공개된 연예인 누드 열풍으로 누드에 대한 인식마저 바꿔버렸다. 때로는 셀프누드 마니아가 음란 화상 채팅 등으로 수입을 올리는 반 직업이 되기도 한다. 또 애로 배우 매니지먼트사에는 연예인 누드 붐 이후로 누드를 찍겠다며 스스로 찾아오는 대학생, 직장인 등 평범한 여성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진옥현은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나르시시즘적인 취향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파악하며, 과시본능이 만들어낸 문화코드라고 보는 것이다.


 2-2.노출 불감증 "내 알몸을 봐"3)

  주간한국은 잠자는 부인·애인의 누드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처음엔 남자 친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막상 인터넷에서 내 누드사진을 확인하고, 흥분된 리플들이 줄줄이 달려 있는 것을 보니까 묘한 쾌감이 느껴지더라고요.” 하는 한 여성의 증언을 인용한다4).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남자 친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알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카메라에 담아 내고 공개하는 셀프 누드 마니아로 변모해 갔다고 말했다.

또한 주간한국은 화상채팅은 라이브 포르노라고 하면서 텍스트기반으로 이뤄지던 음란 채팅은 웹캠과 함께 1인 라이브 포르노 시대를 열었다. 누드는 물론이고 자위 행위 등을 서슴없이 공개한 소수의 여성, 일명 ‘쇼 걸’들은 누드 불감증을 확산키는 데 1등 공신이라고 하고 있다.>주간한국은 통계도 인용하는 데, 2003년 한 스포츠신문의 온 라인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46%가 셀프 누드를 찍고 싶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호기심은 모바일을 중심으로 공개된 연예인 누드 열풍으로 인해 누드에 대한 거부감을 없앴다. 연예인도 누드를 찍는데 나라고 못 찍을 것이 뭐 있느냐는 식의 안도감은 물론 용기까지 준 것이다.

  또한 누드를 통해 월 15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한 여성의 예 역시 보도한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셀프 누드 마니아였다고 하는 데, 그녀는 호기심에 인터넷에 폰카로 찍은 누드 사진을 올려 놓던 중 우연히 화상 채팅을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남자들 반응이 재밌어서 시작했다가 생각보다 수입이 좋아서 요즘엔 반 직업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에로 배우 매니지먼트사인 나은 엔터테인먼트의 이경민 대표의 전언은 더 적나라하다. 이 대표에 따르면 연예인 누드 붐 때문인지 누드를 찍겠다며 스스로 찾아 오는 대학생, 직장인 등 평범한 여성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는 것.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밖에도 젊은이들의 미팅 현장에서는 셀프 누드를 찍어 핸드폰 속에 저장해 뒀다 상대에게 보여 주기도 하는 것, 사진 작가 J씨는 요즘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무료 누드 사진을 찍어 주고 있다고 하는 데, 처음에는 모델료까지 지불해도 구하기 어려웠지만, 요즘은 모델 구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즉, 다시 말하자면 주간한국은 “디지털 혁명이 세상을 하루가 다르게 만들고 있는 가운데 보수적인 한국의 성 관념마저 뒤바꿔버리고 있다.”라고 하며, 특히 인터넷의 등장, 디지털 카메라, 휴대폰의 대중화 등의 추세에 따라 알몸은 더 이상 감춰둘 수 없게 만들고 있고 그러기에 관음증과 노출증은 정신병적 현상보다는 이제 당당한 성적 취향으로서 더 강하게 다가오고 있으며, 몰카든 셀카(셀프 카메라)든 이미 통제 불가능의 상황이 된 “누드불감증 시대”라는 것이다.


 2-3.사회학적 접근

  셀프누드는 나르시시즘을 반영하는 과시본능이 만든 문화코드라는 것이 첫 번째  인식이었다. 또한 두 번째 인식은 노출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분석은 사회전반과 관련되어 있는 경제구조에 대한 몰이해와 이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예술의 장르에서 벗어난 여성의 몸을 상품화 하고, 돈벌이 한 수단으로써만 여기는 상업과 결탁한 남한 사회의 누드 열풍의 원인을 한 개인의 내면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성산업의 발전에는 그만한 경제구조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을 함께 짚어 내야만 오늘의 성산업에 의해 왜곡된 누드에 관한 보다 생산적인 담론을 끌어 낼 수 있지, 이것을 단순한 개인 내면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오늘의 누드유행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 할 것이다. 

 

  20세기에는 두 번의 성 혁명5)이 있었다. 먼저 1920년대의 1차 성 혁명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중 문화와 구애의 급진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 데이트 혁명이었다. 1차 성 혁명 당시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하게 된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상황과 관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적인 하부구조 건설을 위한 자본을 축척하기 위해서 더 이상 지속적인 노동 윤리 또는 금욕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자본은 소비자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 질서는 여러 면에서 기존 규범과 충돌하였다. 특별히 대량 소비를 위한 광고는 성적 판매를 일상화하면서 성에 대한 태도를 변혁하였다. 성 산업은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하였다. 성적 자유주의는 성을 상업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virtue'나 ’intercourse' 같은 개념을 성애화 하는 동시에, 성적 매력을 가리키는 ‘sexy'라는 신조어를 대중화 시켰다. 결국 성해방의 가장 강력하고 가시적인 모델을 제공한 것은 광고업자와 미디어였다.

   1960년대의 2차 성 혁명은 성적 자유를 가속화하였고, 핵가족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독신자 혁명이었다. 이것은 여성이 성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며 시작되었고, 그 쟁점은 피임-낙태의 권리와 동시에 성폭력-성희롱에 대한 반대, 즉,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프리섹스’ 였다. 이러한 프리섹스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여성해방을 가져 왔다기 보다는 미디에에 의한 ‘성의 상품화’와 평행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같은 문화 산업이 대항문화의 ‘해방적 수사’를 원용하고, 그 쇠퇴를 틈타 그것을 독점하면서, 역설적으로 포르노 산업이 창궐하였던 것이다. 이 배경에는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전 세계 경제 이윤율의 고도화 된 성장과 지속이 있다. 흔히 하는 말대로 ‘먹고 살만해지니 이것 저것에 관심이 많이 쏠리는 것’이다6).

  남한 사회의 경우는 1980년 대 중반 이 후 ‘3저 호황’을 통해 강화된 재벌 체제를 중심으로 계속된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bubble'을 형성하며 IMF까지 지속되었는 데, 특히, 95-97년 ’반도체 호황‘으로 인한 과잉축적은 6,70년대의 고도성장기의 지수적 자본성장률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7년 IMF는 우리 경제의 결정타를 먹인 사건으로써 사실상 우리 경제의 'Bubble'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사회전반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장하는 듯한 우리 경제는 이른바 'Belle epoque'로 상징될 수 있는 아메리카 경제의 이윤율 주기와 맞물려 진행되는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문화산업의 가장 활발한 성장이 가능하게 된 시기이다. 즉, 다시 말하면 하락하는 이윤율과는 상관없이 시장에 축적되어 있던 여유자금이 문화산업에 집중투자 되게 하는 것이다.

  남한에서 성 산업은 1980년 대 말 이후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러한 팽창은 1970년대 이 후 발전 전략에서 외국인에게 국한되던 성적 착취 양식이 비공식 부문의 서비스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일반화 되어 나타난다. 특히, 남한에서는 태국과 달리 성 산업이 외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내국인에게까지 허용된다.

  이러한 상업적인 성의 대중화는 우리 사회에서만의 독특한 경향을 띄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육체적 거래가 없는 성의 상품화 현상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경의 지적7)대로 성의 상품화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기준이 부재한 것이다. 따라서 성의 상품화로 파생되는 외설과 퇴폐라는 측면만 규제가 되는 것이 남한 사회의 현실이다.

  성의 상품화는 자본주의적 문화 산업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또한 성적 자유 또는 해방이라는 환상은 성의 상품화에 대해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가 기꺼이 공모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특별히 남한 남성은 공식적인 통계치로도 40배 이상의 상품화된 성을 서양 남성에 비해 이용하고 있다8). 서양의 성 혁명과 관련된 이데올로기 수입은 성산업이 번창하고 있는 상황과 접목되면서 성적 무규범성을 가속화하고 있다. 남한 남성의 상품화된 성행위의 특징은 일본 남성의 가학적인 취향과는 성격을 달리 하면서도 연령에 관계없이 청소년기의 성적 모험에 가까운 성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남한 사회의 누드열풍은 이러한 배경적 원인을 품고 있는, 과거의 에로티시즘의 이유 이상의 원인으로 인해 형성 된 것이다


1) 이 용어는 기업나라 객원기자인 진옥현이 사용한 것으로 기사제목은 “일반인도 벗기는 셀프누드 열풍”이렀다. 2005년 8월 16일자 보도이다.


2) 앞의 기사 발췌. 실제 주간한국 역시 아래의  2005년 3월 23일자 보도에서 셀프 누드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불러도 손색없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 사회의 셀프누드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먼저 알바형은 반직업적 형태로 성 취향과 관계없이 자신의 몸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경우다. 유흥가 접대부나 성 매매보다는 누드 촬영이 그나마 낫다는 인식이 있다. 연예인 누드의 대중화로 부담감이나 죄책감도 많이 사라졌다. 여대생에서부터 유부녀까지 그 대상이 폭 넓고 다양하고 모바일, 인터넷 누드 촬영이나 유료 화상 채팅 등의 분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작업의 특성상, 유료성인 화상채팅 아르바이트 등의 영역에 국한되기 일쑤다. 과시형은 얼짱, 몸짱 열풍에 기인한 우리 시대의 노출증이라고 할 수 있다. 돈벌이와 상관없이 셀프 누드 사진을 찍고 보여 주면서 자기 만족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다. 화상 채팅에 중독된 여성들이 대표적이다. 모델형은 누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동경을 갖고 있는 신세대 젊은 여성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몸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논리다. 이들은 은밀하게 스튜디오를 찾아 온 뒤, 오히려 돈을 내고서라도 자신만의 누드를 남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섹시한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올리는 유형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희생형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단지 남자 친구나 남편 등의 권유로 인해 누드 이미지를 남기는 여성이다. <신문기사 발췌 및 정리>


3) 이 용어는 주간한국의 2005년 3월 23일자 보도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4) 보도에 따르면 30대 초반인 이 여성은 그렇게 침실에서 시작해 식당, 커피숍에서부터 심지어 사람들이 오가는 공원에서까지 성기를 드러내고 누드 사진을 찍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5) 제프리즈(Jeffreys, 1990, 1993)는 1980년대의 성 산업의 레즈비언 공동체로의 침투를 또 하나의 성 혁명으로 보기도 한다.


6)  'belle epoque'로 불리는 19세기 말 유럽의 상황은 실질적인 경제 이윤율은 바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으나, 이 때 시장에 풀려있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문화 예술 산업계에 투자됨으로써, 예술가들로 하여금 ‘풍요의 시대’라는 찬사가 나오게도 하였다. 이것은 70년대 이 후 미국경제의 사례 분석에서 좀 더 분명하게 제시되는 데, 실제 성산업이 가장 발전했던 70년대 대불황에서 90년대에 이르는 belle epoque는 5,60년대의 황금기를 거친 후 나온 장기파동에 후속하는 것이었다. 이 장기파동은 윤소영이 지적한 대로 체계적 축적 순환의 물질적 확장 국면과 금융적 확장 국면이었다. 이 때, 시장에는 상당한 자금이 퍼져있어서, 실제 경제적인 이윤율 하락 국면과는 별도로 문화산업이 창궐하는 시기와 연관되어 있다. 경제 상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본 보고서가 경제학 분석 보고서가 아니므로 생략하겠으니 윤소영 지음,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과천연구실 2001을 참조하라. 성 혁명에 관한 내용은 이미경 지음, <신자유주의적 ‘반격’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페미니즘적 비판의 쟁점들>,과천연구실 1999 윤소영 지음,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워싱턴 콘센서스’-마르크스적 비판의 쟁점들>. 과천연구실 1999 제1장 6절 ‘아메리카 핵가족의 형성’을 를 참조하라.


7) 이미경, 앞의 책,


8) 이미경, 앞의  책 p.76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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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사회-(2)

[문화]방송,영화,격투기 2007. 11. 12. 17:40 Posted by 바람몰이

 

1.접근과 추세

  1-1. 접근-예술의 영역에서는

 원시예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거나 조각하는 데서 비롯된 조형예술은 육체를 예술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취급해왔다. 인간의 생명력과 움직임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육체 또는 그것 자체가 복잡 미묘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예술에서도 기술의 발달과 함께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이용하여 누드는 중요한 피사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예술의 영역에서 미적 대상으로서의 육체, 즉 작품화되는 나체의 전통이 그리스시대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반라 또는 전라의 육체에 직접 그림물감을 칠하는 보디페인팅도 이 누드의 전통을 확대한 것이고, 보디빌딩도 자기의 육체를 미화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적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무대에서의 누드댄스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르네상스 이 후 남성 누드는 시간이 갈수록 그 수효가 급격히 줄어든 반면, 여성 누드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여성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기에 그 중심이 옮겨 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만은 않았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성의 아름다움과 대등하게 바라보게 된 미술 쪽의 시각과 달리, 사회적으로 여성은 여전히 ‘불완전한 남성’ 취급을 받았다. 여성은 ‘하위의 성’일 뿐이었다. 변한 것은 여성미의 독자성을 발견하고, 여성 누드가 지닌 힘의 폭발성을 갈 수록 강하게 느꼈던 미술이, 누드 미술을 주체로 표현하는 미술에게 객체를 표현하는 미술로 변형시켰다. 말하자면 남성이 스스로를 찬양하는 미술로서의 누드 미술을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미술로서의 누드 미술로 바꿔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여성 누드가 에로티시즘의 목적을 띄고 있지는 않다. 특히, 중세의 누드는 순수함이나 헐벗음, 죄, 진실 등 다양한 상징성을 지녔고, 이 전통은 후대에도 어느 정도 이어져 내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에로티시즘은 여성 누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미술 속의 여성 누드가 취하고 있는 포즈만 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의 남자 누드처럼 ‘시선을 던지는 자’가 아니라 ‘시선을 받는 자’이다. ‘자기를 의식하는 자’가 아니라 ‘남을 의식하는 자’이다. 즉,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1)이다.


 

  1-2.추세

 신라와 고려시대 일부에서 개방화됐던 우리 나라의 성문화는 조선시대 이래 유교적인 틀 속에서 오랫동안 보수적인 색채를 띠었다. 우리 나라에서 성과 누드가 공론화 된 시기는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 선두에는 연예인이 서있다. 1991년 가수 겸 영화배우인 유연실이 반라와 전라 등의 사진 81컷을 모아 사진집 ‘이브의 초상'을 펴낸 것이 시초. 이후 10여 년 간 모델 이승희를 비롯해 서갑숙, 성현아, 김지현, 권민중, 이혜영, 고소영 등 내노라하는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출판했으며 매번 큰 충격과 함께 화제의 중심에 섰다. 최근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경쟁적으로 누드집을 내면서 우리 사회에 `벗기 열풍`이 불고 있다.

  성현아가 처음 온라인에 누드 영상을 공개했을 때는 사이트가 해킹을 당하는 수난을 겪으며 1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했다. 권민중의 누드공개에서는 해킹 위험이 적은 모바일을 중심으로 서비스하면서 해외 화보집 제의를 합해 매출 규모가 50억원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현재 누드영상을 공개 중인 김완선은 기대치가 더 올라가 일부에서는 100억원대를 거론한다. 물론 모바일 접속자를 막연하게 추정한 수치여서 그다지 신빙성은 없지만, 그만큼 누드영상이란 콘텐츠의 경제 규모가 커졌다는 반증이다. 이혜영은 아직 누드영상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에 24억원을 받고 초상권을 판매했다. 이쯤 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따로 없다. 한번 벗었다 하면 수 십억의 매출이 오르고 인기도 높아지니 `꿩 먹고 알 먹는`셈이다. 옷을 벗는 행위가 일종의 사업이자 자신을 홍보하는 마케팅 수단이 된 것이다.

  몸값으로 먹고사는 연예인들이 너나없이 누드를 찍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지금의 우리사회는 누드가 돈이 되는 사회이고, 섹슈얼리티가 이상적인 미의 기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세상이 달라지고 사회가 변하면서 `누드`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달라졌다. 그래서일까. 이제 누드 열풍은 더 이상 돈을 위해 옷을 벗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우리사회에는 각각의 이유로 옷을 벗고, 그 벗은 몸을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개인과 집단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대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돈을 받고 팔 것도 아닌 누드 사진을 돈을 들여 찍기도 하고, 셀프 카메라로 찍어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한다.



1) 이주헌 지음 <신화 그림으로 읽기> 학고재 2000






참고)링크 프라이스에 소개된 건강,미용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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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사회-(1)

[문화]방송,영화,격투기 2007. 11. 12. 17:39 Posted by 바람몰이

  서 론
요즘 문화계의 화두 중 하나는 성(性)이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성과 관련한 원색적인 대사들과 불륜을 소재로 한 내용이 여과 없이 나오더니, 연예인들의 누드열풍이 일반인에게까지 전가돼 ‘누드 전국시대'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옷을 벗는 연예인들부터 시작해 누드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생활의 한 영역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성(性)의 공개가 이제는 표현의 자유 중 하나쯤으로 여겨지며, 보편화 되는 추세다. 옷과 사회적 통념을 입은 채, 은밀한 성은 최근 누드열풍 속에서 소통과 자유, 즐거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때로는 매춘과 상업화의 대상으로, 또 마케팅의 강력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성은 이제 일상이자 상품이며 자기과시의 강력한 무기로 바뀌었다. 몸값으로 먹고사는 연예인들이 너나없이 누드를 찍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지금의 우리사회는 누드가 돈이 되는 사회이고, 섹슈얼리티가 이상적인 미의 기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제 누드 열풍은 더 이상 돈을 위해 옷을 벗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우리사회에는 각각의 이유로 옷을 벗고, 그 벗은 몸을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개인과 집단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들이 이렇게 옷을 벗고 사진을 찍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보고서는 최근 일고 있는 이러한 누드열풍이 본래의 예술적 관심과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이고, 이러한 원인을 진단하고자 한다. 또한 이것이 품고 있는 사회적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대학시절 보고서로 제출한 글)






참고)링크 프라이스에 소개된 건강,미용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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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탕 만들기

[문화]방송,영화,격투기 2007. 11. 12. 10:01 Posted by 바람몰이
냉장고에서 굴러다니던 고구마 3개
어떻게든 처리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원체 냉장고가 작다보니..ㅠ.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맛탕"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지요.
엠파스에 접속했습니다.
맛탕 으로 검색을 해보니 글이 쫙~나오더군요.

방법을 숙지하고 조리대 앞에 섰습니다.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고구마를 썰었지요.
고구마는 저를 무척이나 믿는 눈치였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후라이팬과 식용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렌지앞에 서자.
'네가 오늘 사고 치려느냐~~'하는 것만 같은 느낌..
수많은 요리를 경험했을 렌지 만큼은 저를 못 미더워하는 듯한 느낌이..흑흑..

이쯤에서 포기할 순 없기에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불을 올리고 먼저 고구마를 튀겼습니다.
제법 노릇노릇해지는 게 모양이 나더군요..

그러나 역시 방심은 금물..
순간 교회 까페에 접속해서 여기 저기 클릭하다 보니, 상당수가 갈색으로 변한 고구마들..
탄게 좀 생겼습니다 ㅡ.ㅡ;;

고구마들에게 미안한 마음 가눌길이 없기에
저는 '좋다 이제부터 너희에게만 내 온 정열을 쏟겠다' 다짐했지요.

고구마를 어느정도 튀긴 후 그 기름기를 쫙 뺐습니다.

그리고 고구마를 다시 후라이팬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주 조심 조심..정성을 다해..너희가 내 생명이다는 마음으로..(룸메이트 및 여자친구를 먹여야하기때문에 특별한 정성이 필요했지요)

고구마 위에 약간의 "요리당"을 뿌렸습니다.
엠파스 검색에서는 설탕과 물로 시럽을 만들라고 했지만, 설탕보다 상대적으로 덜 단 요리당이 좋겠다 싶었던 거죠. 하지만 소심한 제 가슴이 '그래도 설탕을 좀 넣어야 하지 않겠어?' 라고 소리치기에 어쩔 수 없이 한수저 정도..

요리당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고구마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의 그 뜨거운 사랑이 저희를 녹이고 말았어요. 보드랍고, 달짝찌근한, 맛있는 맛탕이 되어 드릴게요' ㅋㅋ

몇 분의 쫄임끝에 드디어 맛탕이 완성되었습니다.
여자친구와 룸메이트에게 줄 것은 예쁘게 장식하고, 제가 먹을 것은 구석에 있는 실패작들 위주로 챙겼지요 ㅡ.ㅡ;; (모든 엄마들의 마음으로..ㅋ)

드디어 시식 시간.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고구마를 하나 집었습니다.
제 입으로 오기까지 녀석은 부끄러운 듯 몸을 숨겼고, 제 가슴은 콩닥거리며 마구 뛰었지요.

고구마를 먹는 순간.
입에서는 아밀라에제가 급격하게 분비되며 소화를 준비시켰고, 뇌에서는 각 종 엔돌핀이 분비되며 기분을 한 층 업시켜주었습니다. 움찔거리는 혀와 위아래 왕복운동을 하는 치아들은 맛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지요.

맛이 어떤지 궁금하시죠?ㅋㅋ

그건 모두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지요..휴~~~

(대학 자취 시절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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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뉴스에 올렸던 글
10월 2일, 노인의 날을 아십니까?
텍스트만보기   임정혁(kkuks81) 기자   

2006년 10월의 절반이 기념일이라 한다. 실제 달력을 보며 확인해보니 이래저래 기념일이 열댓개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 나름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굵직굵직한 날은 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추석연휴, 9일 한글날 정도가 되지 않을 까 싶다. 어린 시절부터 교과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 학습 되어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10월 2일이 "노인의 날"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효"를 강조하는 나라이면서도 말이다.

노인의 날은 지난 97년부터 경로효친 사상의 미풍양속을 확산시키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노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각종 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만들어져 기념되고 있다. 그래서 이날은 간단한 기념식을 갖기도 하고, 경로잔치를 열기도 하며, 노인복지단체 등에 포상을 하기도 한다.

100세가 되시는 노인들께는 명아주로 만든 전통 지팡이 "청려장"을 증정하기도 한다. 많은 노인관련 단체나 노인들은 이날만큼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맘껏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벌써 10주년이나 된 지금의 "노인의 날"이 지니는 '의의'에 대하여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노인의 날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주로 경로잔치나 기념식 위주로 지켜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처럼 잔치와 기념식 위주로만 계속 노인의 날이 지켜진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개 숙인 채 쓸쓸히 앉아 계신 노인들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없이 선언이나 기념으로만 그치는 속빈 강정과 같은 날이 될 것이니 말이다.

지금의 노인의 날은 노인을 행사의 대상이나 단순한 정책 대상자로만 보고 있지 우리가 마땅히 사회적 약자로서 배려하고, 풍요로운 2006년의 대한민국을 만든 선배이자 공로자로서 보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은 이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서있는 데, 우리는 이들을 좀 과격한 표현으로 어쩔 수 없이 한번씩 챙겨주는 "애물단지"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말이다.

노인의 날은 평소 꾸준히 노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갖는 가운데 그것을 확인 및 점검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결단, 다짐하는 날이 되기도 하여야 한다. 어르신들께 지난 날 부족하고, 잘못했던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바꿔가며 더 노력해 보겠다는 비젼을 제시해 줄 수 있기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기념일을 지정하고, 경로잔치를 열며, 포상을 하는 것도 좋기는 하다. 하지만 경로효친 사상의 미풍양속 확산이나, 노인들의 노고 치하는 하루 아침의 행사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모두 꾸준히 내 삶속에서 하나 하나 내공(?)이 쌓여져가야만 할 문제라는 것이다.

얼마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한 통계는 우리가 얼마나 일상 속에서 노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많은 언론은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노인학대의 가장 큰 가해자가 '아들'이었고, 대부분 '가족'에 의해 자행된다는 선정적인 사실을 중점적으로 그래프까지 보충해가며 보도하였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대행위별 분류에서 언어,정서적 학대가 44%, 방임이 23%를 차지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꾸준히 삶 속에서 지속되는 유형의 학대이다. 단시일에 이뤄지는 유형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 그만큼 일상의 삶속에서 노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자신을 돌아보라. 나는 얼마나 자주 내 부모님과 연락을 하고, 그들을 찾아뵙고 있는 것인지..

이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이번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나와 우리 사회는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며 대하고 있고, 노인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 서있는 지 등을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잘못하고, 부족했던 것이 있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 나 자신부터 변화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변화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순간 수화기를 들고 안부전화 한통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변화 아니겠는가. 이번 연휴동안 내 부모님과 이 땅의 수많은 다른 부모님을 향해 따뜻한 미소하나 건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변화 아니겠는가.

아무쪼록 이번 연휴동안 끼어있는 노인의 날이 마음 속에 기억되고, 내 부모님과 이 땅의 수많은 부모님을 생각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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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단풍이 절정을 지나 조금씩 떨어지며 바야흐로 가을과 겨울의 중간에 서있는 시기입니다. 남은 가을을 건강히 보내고, 다가오는 겨울을 잘 맞이 할 수 있는 노하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규칙적인 식사 사람의 몸은 가을, 겨울의 찬기운에 적응하기 위해 신진대사율을 높입니다. 따라서 식사를 거르지 않고 규칙적으로 영양만점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표준체중 유지에 힘쓰자. 가을철은 맛난 음식들이 많이 있지요. 그렇지만 풍부한 먹거리때문에 오히려 과잉 섭취가 되어 비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한 겨울은 추운 날씨 탓에 활동량이 적어져 비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적절한 체중조절을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3.면역력 강화와 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양질의 단백질 섭취를 하자. 요즘 같은 환절기는 일교차가 크지요. 따라서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여러 질병에 걸리기 쉬워집니다. 약해진 면역력을 강화하고 스트레스 완화를 위해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육류, 어류, 우유, 콩제품이 적절합니다.

4.제철에 많이 나오는 해산물 섭취하기. 바지락, 김, 다시마 등 해조류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칼슘, 철분 등의 조혈성분도 풍부합니다. 당연히 빈혈 예방에 좋겠지요. 또한 비타민 역시 풍부하니 건조하고 추운 날씨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피부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5.감기 예방에 좋은 비타민과 무기질을 풍부하게. 기온이 떨어지면 체내 대사율의 증가로 비타민 요구량이 증가합니다. 비타민 A는 목의 점막을 강하게 해주고, 비타민C는 호흡기의 상피조직을 건강하게 해주므로 감기 예방에 효과적입니다. 또한 무기질이 부족하면 대사이상, 면역기능 약화 등으로 호흡기 질환, 근육이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감, 귤, 사과 등의 과일과 신선한 채소를 많이 드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건강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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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4일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글
[주장] 우리가 정말 '축구'를 사랑하는 걸까?
목적론적 사고와 승리 지상주의 넘어야
  임정혁(kkuks81) 기자   
2002년 월드컵 당시 전국은 축구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붉은 옷을 입었다. 거리를 가득 메우며 매 경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우리는 12번째 선수로 그 자리를 지켜나갔다. 너도나도 얼싸안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난 후 그 열기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힘들다. K-리그 관중석은 매일같이 비워져 있다. 그 원인에는 제도적 문제, 경기력의 문제, 서비스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듯하다.

우리는 축구 자체를 사랑하고 즐기는 '과정'에 중심을 두었다기보다는 축구를 매개로 승리를 즐기는 '목적'에 중심을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축구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승리의 쾌감을 주는 꽤 스펙터클한 운동경기로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문제는 목적론적 사고와 승리지상주의 문화다

이것은 비단 축구 얘기만으로 끝낼 성격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목적론적 사고'와 '승리지상주의 문화'이다. 축구는 이것이 표출된 또다른 예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뿌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조심스레 그 뿌리를 과거의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며 생긴 군사문화와 획일적인 교육, 특히 남성의 경우 군대 경험에 두려한다.

군대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강한 목적론적 집단이다.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승리지상주의적 집단이다. 물론 군대는 그래야만 하는 측면이 강하다. 군대의 승패는 곧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임무 달성에 실패하면 더 많은 집단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통해 형성된 개개인의 사고틀이다. 20대의 가장 좋은 시기를 군대에서 보낸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게 군대의 가치를 마음에 새기며 길들여졌을 수 있다. 본래 인간의 사고란 한번 그 방향과 틀이 잡히면 그것을 깨고 나오기 매우 어렵다. 제대 후에도 그 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전반에 걸쳐 형성된 군사문화는 더 심각한 문제이다. 교육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 교육의 내용은 하나같이 획일적이다. 내용은 물론 가르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들어 의견을 묻는 서술형 문제가 늘었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모범답안이 존재해 학생들은 그 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선생님들의 노력에도 학교의 현실 자체가 선생님들의 창의성 발휘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직도 아이들은 두발 길이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세상에 호소하고 있는 게 현실 아니던가.

지금 기성세대를 형성하고 있는 과거(?) 교육 수혜자들은 어떠할까.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학생의 인성형성과 급우관계 및 교육시스템을 통한 사회성 향상 등과 상관없이, 우리는 오직 1등을 하고 1류 대학만을 가야하는 4당 5락의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2등을 하고 한 문제를 틀려 96점을 맞으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런 교육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목적에만 치우친 승리 지상주의의 또다른 모습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회 전반의 군사문화와 어린 시절부터 거치는 획일적인 교육의 세계를 받으며(특히 남자들은 군대를 거치며) 목적론적 사고와 승리 지상주의에 길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그 영향력을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자신의 모든 걸 바쳐 경기를 치른 선수가 패배 후 고개를 숙이며 다음 번 승리를 약속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왜 이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도 자신을 채찍질하며 아파해야 하는 건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새로운 월드컵 문화가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목적론적 사고와 승리 지상주의에 물들어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마치 이에 반대되는 개념처럼, 과정론적 사고와 즐기는 문화만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

현실을 주도하는 이런 문화에 버금가게끔 반대적인 성격의 문화를 부각시켜, 일종의 기세를 몰아가야한다는 것도 일면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또 다른 목적론적 사고와 승리주의일 수 있다. 하나를 밟고 내가 일어서야 한다는 논리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온전히 통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한 문화의 단점을 지적하고, 또다른 문화의 장점을 부각하며, 하나를 없애고 다른 하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변증법적 통일의 과정'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목적과 승리는 그 자체가 아닌 과정의 지향점으로 추구되어야 하고, 과정은 승리를 향한 노력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6년 월드컵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상업주의에 빠져 월드컵 마케팅에 빠져 있는 그리고 승리와 목표 달성에만 빠져 있는 사회전반의 분위기 및 문화를 직시하자. 재벌의 사욕을 충족시켜 주거나, 목표 달성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언론의 의도에 휘말리지도 말자. 말 그대로 전 국민과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되는 아름다운 월드컵 문화를 만들어 보자. 승패를 떠나 모두가 하나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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