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언론에 기고한 제 글이 실렸기에 공유해 드립니다.
http://m.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01
전문
안희정의 무죄판결 여파가 상당하다. 도대체 이 판결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이렇게까지 여론이 들끓는 것인가. 필자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지점에서 대중의 지지를 못 받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법리자체에 매몰된 소극적 판결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에게 적용되는 처벌 조항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력’의 개념인데, 폭행이나 협박, 지위나 권력으로 상대의 의사를 제압해야 성립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이다. 재판부는 피해사실을 주장 하는 이의 내심에 반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제압’이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지적은 필자가 현장에서 자주 들어왔던 것인데, 이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성적 관계에 이름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당사자 간의 자유롭고,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제성 없음은 현상적인 부분이지 법의 본질적 취지는 아니라 할 수 있다.
둘째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판결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판단에 이를 때는 기본적인 팩트를 토대로 이것이 발생한 맥락을 보며,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특히, 성범죄는 즉각적인 증거채취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팩트체크를 거쳐 피해사실을 주장하는 이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보고, 그 위에 재판부의 해석을 더하여 판결을 해야 한다.
여기에 재판부의 역할과 책임이 있다. 피해사실을 주장하는 이의 관점에서, 국민의 법감정을 고려하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는 즉, 공감대가 형성되는 판결을 내려야 비로소 판결에 생명력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론재판을 하거나 가-피해자를 단정 짓는 재판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괴리감이 큰 것은 곤란한 문제라 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 때문이다.
재판부는 현행법 체계에서 어쩔 수 없다는 논지의 설명을 하면서 마음은 유죄인데, 현실이 무죄임이 안타까운 듯 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인지 자신들이 무죄판결을 내리고도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재판부에 독립적인 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재판부의 판결이 때론 우리 사회의 기준을 설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그 판결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자신들의 편협함과 성인지 감수성 부족의 책임을 다른 곳에 떠넘기려 하는 것인가.
사실 필자에게 이 판결은 늘 봐왔던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미 무죄가 나올 것이란 자조 섞인 예측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미 간음 자체가 발생했었고, 무죄가 곧 혐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 사건의 판결이 그간의 법원의 관례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는 점 등에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게 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재판은 법으로는 맞는 판결일지 몰라도 정의롭다거나 옳은 판결이라 보기는 어렵지 싶다. 또한 우리 사회의 후진적이고, 가부장적인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라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쯤 상식에 부합하는 성범죄 판결을 볼 수 있게 될 것인가.
임정혁 소장(한신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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