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동남 아시아에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와 많은 사람이 희생된 일이 있었다. 그 때, 개신교단을 대표하는 대형교회의 김 모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여 물의를 빚었었다.

그런데 지금 역시 몇 년전 쓰나미가 왔었던 것 같은 비슷한 반응이 보이고 있다. 쓰촨성 대지진을 두고 '하나님의 심판 또는 경고'라 하는 글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중국은 기독교인보다 아닌 사람이 더 많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또는 경고'가 내려졌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 논리로만 따져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보고 아파하며 찾으시는 분이다.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모두 그분의 생명과 호흡을 나눈 자녀로 안아주는 어버이시다. 아울러 세상 어느 곳에나 고르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생명이 움트게 하시는 분이다.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시며 사랑을 제일로 여기시는 분이다.

그런데 만약 비기독교인이기에 이들을 선택적으로 심판하고 경고하였다면 그것은 만인에게 고른 사랑과 온 세상 만물을 자신의 호흡과 생명으로 지어 안아주시는 어버이라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보고 아파하기 보다 이들을 징벌하는 가혹한 지옥의 사자가 될 수 밖에 없고, 세상 어느 곳에나 햇빛과 비를 내려 생명을 움트게 하는 생명의 하나님이 될 수 없게 된다. 끝으로 정의나 평화, 사랑을 제일로 여기며 인류의 하나됨과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전능자가 아닌 심판의 선택을 중히하는 심판자이자 특별 집단만을 편애하는 일개 집단 신으로 전락해버리고 말게 된다.

따라서 만약 이들이 비기독교인이기에 심판을 내리고 특별히 이들을 선별하여 경고하였다면 그 신은 참 신이 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이런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은 성경의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는 또 다른 신을 믿는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굳이 신학적이고 전문적 수준으로 파고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단순한 논리이다.

또한 유한한 인간의 인식은 무한한 신의 의지를 모두 간파할 수 없기에 자기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무조건 옳다 주장하는 것은 오만과 독선, 교만함에 불과하다. 그저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은 겸손히 신의 뜻을 묻고 선을 행하며 순례자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심판이나 경고를 강조하며 살필요는 없다.

끝으로 무분별한 난개발과 자연파괴 이로 인한 생태계 및 세계 기후의 변화는 모두 인간이 초래한 것이기에 이것을 신의 심판으로 돌려서도 안된다. 이번 쓰촨성 지진 역시 샨샤댐이 원인이라는 논란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지금은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보내야 할 때다. 무엇보다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할 때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우리네 인간사의 방향과 시스템을 전환해가는 반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외치고 다함께 생명살림의 길을 걷자 기도하고 이번 사고에 도움을 줄 수있는 방법 논의를 하는 것이 좀 더 신앙인다운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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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은 옳지 않다. 또한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하려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전자의 경우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정치와 군사, 경제 등은 자신이 맡을 테니 교회는 국민들의 영혼 문제에 전념을 기울여달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전쟁에 교회가 동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후자의 경우는 마치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중세는 기독교에 있어서는 가장 전성기였지만 세상은 중세를 "암흑시기"라고 부른다.

결국 이 같은 역사적 교훈에서 볼 때
종교를 정치와 완전히 분리시키거나 합일하려는 것은 모두 과거를 답습하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필자는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에게서 그 교훈을 찾는다. 그는 젊은 나이에 목사가 되어 99%의 독일 교회가 찬성하던 히틀러를 저항하고 그의 암살을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운전자가 버스를 몰고 절벽을 향해 승객을 태우고 갈 때는 그 운전자를 깨워내거나 버스를 멈출 수 있도록 해야한다 하였다.

암살계획을 통해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정의와 평화의 뜻을 구현하려 적극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를 정치가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교분리주의자라 평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즉, 그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참여하지 않은 좁고 오묘한 긴장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종교와 정치는 이런 것이다. 종교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정치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나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늘 끊임없이 정치를 비판하고 비판하며 바른 길을 가도록 조언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잘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바로 종교의 몫인 것이다.



장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보수교회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장로 대통령을 통해
이 나라와 민족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다. 파쇼적 발상의 극치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도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장로이건 불교 신자이건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를 구현해 내느냐의 여부이다. 그의 정책에서 가난하고 약한 서민을 아끼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정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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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에서 모셔온 글
대한민국은 십자가 공화국인가
[작은공동체 위한 교회건축] 교회 지붕 위 조형물로서의 십자가

이정구 jkl@skhu.ac.kr


   
‘교회’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 안에는 '지붕 위의 십자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중세유럽 고딕교회부터 현대 도시 상가에 임대한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 지붕 위에는 첨탑 위의 십자가가 사라진 적이 거의 없었다.

네온조명이 없던 시절의 교회 지붕위 십자가는 적어도 해있는 낮 동안만이라도 지표역할을 했지만, 현대교회는 24시간 불야성인데도 그 수많은 붉은 네온의 지붕위 십자가는 헤매는 시민들의 지표역할을 하기는 커녕 이들의 짜증만 돋구고 있다. 어느 외국인은 과거 김포국제 공항가까이 비행기가 하강할 때 지상 위에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고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라서 안보태세를 위한 무슨 장치인줄 알았다고 한다.

   
예수 보혈을 상징해서 십자가를 붉은 네온으로 장식을 한다. 그렇다면 푸른 십자가와 노란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여기에는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네온 십자가가 너무 많아 식상해서거나, 너무 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는 시민들의 불평과 비웃음을 피하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두려고 푸른 네온이나 노란 네온으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교회를 표시하는 십자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음은 당연하며 이것은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한 교회 지붕 위에 몇 개씩 매달려 있는 작고 크고 울긋불긋한 다양한 십자가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십자가들이 적절한 곳에 설치된다면 그 십자가가 황금으로 치장되었든 십 수척 크기의 네온 십자가든 그것이 대수가 아니다.

유럽의 돌 성당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많아야 두개, 첨탑은 높아도 십자가 크기는 보일 듯 말듯하다. 교회건물의 모양세 자체가 교회임을 말해주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굳이 크고 많게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또 십자가가 적당히 작음으로써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유독 왜 대한민국 교회들만이 교회건물의 크기나 조화와 관계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울긋불긋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일까. 가히 기독교 국가 아니 십자가 국가라고 할만하다. 거기에 심오한 신학적, 교리적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무조건 드러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이다.

같은 하나의 상가건물에 교회 세 개가 입주해 있는 경우 그 상가 지붕은 참으로 처참할 수밖에 없다. 세 교회가 공동으로 첨탑과 십자가를 설치하면 경비도 절약되고 주민으로 부터의 비난도 덜 하고 상가 건물도 정리되어 좋을 텐데 그런 교회를 아직 본적이 없다. 첨탑의 높이와 십자가의 크기마저 경쟁이 된다. 천사가 한 건물 위에 있는 많은 십자가들 중에서 어느 십자가 위에 임재 할런지 감히 추정할 수 없지만 십자가 위에 앉기보다는 건물에 하나 달랑 보일듯 말듯한 십자형 피뢰침 위에 앉아 그 안의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할 것 같다.

건축가들이 교회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고심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 탑이다. 건축가마다 나름대로 십자가 탑에 대한 컨셉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설계한 다양한 형태의 교회건물에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십자가 탑을 맞춤형처럼 설치한다. 십자가 탑 모양을 보면 누가 설계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건축도 넓은 의미에서 환경조형물이지만 특히 십자가 탑은 그런 조형물 위에 또 설치되는 조형물이다. 단순히 십자가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건축주는 주변 타교회와 차별성있는 특이한 십자가 탑을 요구하고, 건축가는 심히 고심하며 만들어 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십자가 탑을 다시 변형하여 재창출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건축가는 건축가이지 전문 조각가가 아니다. 간혹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주변의 조경까지 담보하려는 욕심도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전문 조경가의 몫이다.

건물 지붕 위에 부착된 십자가탑 자체가 또 하나의 환경조각품으로써 건물 본체와 독립된 또 다른 미디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 탑도 조각가에게 과감하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붕위의 십자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재질도 다양하지만 본 건물과 어색하지 않으며 주변 스카이라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주민들에게 위화감만 주지 않는다면 십자가 개수가 문제겠는가.

   
이 정구 (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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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7. 11. 10. 09:52 Posted by 바람몰이
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1. 인기를 위한 목회가 아닌, 인격적인 목회를! (롬12:10-20)

2. 직업적인 목회가 아닌, 소명감에 불타는 목회를! (겔34:1-16)

3. 최고, 최대를 위한 목회가 아닌, 최선의 목회를! (살전2:1-12)

4. 경쟁적인 목회가 아닌, 성실한 목회를! (마25:14-30)

5. 자랑을 위한 목회가 아닌, 겸손한 목회를! (눅17:10)

6. 수와 양에 치중하는 목회보다는, 알곡을 키우는 질적인 목회를! (요10:9,16)

7. 자아 중심의 목회가 아닌, 주님 중심의 목회를! (빌1:20)

8. 명예를 위한 목회가 아닌, 영혼을 위한 목회를! (고전9:19-23)

9. 인간의 칭찬을 받기 위한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목회를! (마6:16-18)

10. 과장된 위선의 목회가 아닌, 양심적인 정직한 목회를! (마23:1-36)

11. 내 힘으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목회를! (행1:8)

12. 받기 위한 이기주의적인 목회가 아닌, 생명까지도 주는 희생적인 목회를! (행20:24)

13. 의무감으로 하는 타율적인 목회가 아닌, 사랑 때문에 하는 목회를! (살전2:8)

14. 정죄하는 목회가 아닌, 이해와 관용의 목회를! (마26:41)

15. 책망의 목회가 아닌, 권면과 위로와 칭찬의 목회를! (살전1:2-8)

16. 명령과 지시만 하는 권위의 목회가 아닌, 본을 보이는 실천의 목회를! (벧전5:3-4)

17. 발로 뛰기만 하는 목회가 아닌,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회를! (눅2:39-46)

18. 십자가를 타고 가는 교만의 목회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종의 목회를! (16:24)

19. 인간의 지혜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경말씀 중심의 생명있는 목회를! (딤후3:15-17)

20. 교인을 외모로 보는 계산적인 목회가 아닌,
의롭고 괴로운 자의 편에 서는 진실된 목회를! (약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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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기독교인이여 예수를 욕보이지 말라
영화 <다빈치 코드> 상영 저지하려는 한국 기독교
  임정혁(kkuks81) 기자   
▲ 한기총으로부터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영화 <다빈치 코드>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영화 <다빈치 코드>의 상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독교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한기총의 경우 서울지검에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하였다.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들 역시 상영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이들의 반대 논리는 '신성모독'과 '신앙'이다. 신성모독이란 말 그대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써 그 중심 축은 당연히 '예수'이다.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 그리고 자녀 출산 등이 가장 큰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이 생겨난 배경 그리고 그 '신성'을 유지하여야만 하는 집단의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해 나온 '신앙'의 자리이다.

예수는 가난한 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사셨던 분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예수'에 대한 '신성'은 서구 정통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들이다. 서구 정통주의 신학은 서양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실제 현실 속의 예수의 삶과는 상관없이 대부분 '관념' 속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또한 사제 계층과 특별히 서양의 기득권 백인남성에게만 독점되어 생겼던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기득권 계층의 종교적 카타르시스 충족에만 봉사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생긴 왜곡은 매우 다양하다. '예수'만 해도 그렇다. 실제 예수는 가난한 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사셨던 분이다. 기득권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대립의 각을 세우기도 했던 분이다. 그는 목수로써 두툼한 손과 팔을 지녔을 확률이 매우 높은 분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기도 하였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던 분이다. 그 역시 인간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 예수'는 없애버리고, 오직 '신의 아들 예수'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십자가의 무거운 형틀을 지녔던, 가난한 서민과 함께 하던 예수는 사라지게 되었다. 두툼한 손과 팔을 지녔을 예수는 앙상한 뼈만 남은, 하얀 피부와 긴 얼굴을 지닌 미남자가 되었다. 목이 마르던 예수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완전한 인간으로써, 완전한 신의 아들로써의 예수는 온전히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는 오직 신의 아들로써의 예수이다. 영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미남자일뿐이라는 것이다. 실제의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이 두 가지는 어느 것 하나 간과됨이 없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목사는 월급 받는 노동자... 그런데 왜 세금을 내지 않는가

▲ 지난 19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주최한 '기독교 사학수호를 위한 한국교회 비상구국기도회'에 퍼포먼스용으로 등장한 대형 나무십자가가 네티즌의 냉소를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상당수의 보수적 교회들은 영은 신성하고, 육은 더러운 것으로 본다. 이 땅의 삶은 고달프고 힘든 것으로 본다. 우리 모두 영혼의 구원을 받고, 본향을 찾아가자고 가르친다. 이에 상당수 신자들은 새벽기도를 하며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고, 본향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요지의 가르침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유지시켜 나가는 매우 순응적인 교인들을 양성한다. 목사의 설교를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아멘쟁이' 신자들만을 양성한다. 이 땅의 불합리한 현실과 자신의 삶을 개선시켜 보려는 노력보다는 이를 참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달라 기도하는 '인내의 신자'들을 양성한다.

이러한 신자들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것은 바로 '목사'이다. 일반적으로 목사는 그 교회의 소유주처럼 생각되고 있다(물론 그들은 아니라고 한다). 목사들은 자신들이 정기적인 월급을 받는 노동자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직이라고만 여긴다. 그래서 세금도 내지 않는다. 이들의 차량유지비 및 생활비, 심지어는 자녀 교육비까지 교회에서 대주는 경우가 많다(물론 그렇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소수의 건전한 교회들도 있다).

또 다른 수혜자들은 이 땅의 기득권자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득권을 지닌 측면도 있고, 소수자적 측면을 지니고도 있다. 그래서 최근의 민중신학 진영에서는 자신의 소수자적 측면과 기득권적 측면을 온전히 발견해나가자 한다. 자신의 소수자적 측면은 적극 연대하여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하고, 기득권적 측면 역시 소수자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땅에는 기득권자들이 존재한다. 사회의 각 영역에 없는 곳이 없다. 이들은 이러한 현실 순응적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교회에서는 여성 목회자가 설 수 없게 되고, 사회 개혁 시도는 거센 저항을 받게 된다.

비리 덩어리 보수 정당은 개혁 비슷한 정당의 변변치 않는 모습에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성추행을 하고도 뻔뻔하게 카메라 앞에 서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오죽하면 한 정당의 대표가 한편의 영화 상영을 저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 나올까.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데 힘을 쏟아라

신앙이란 신앙인 자신의 형편과 삶의 색깔에 따라 다양하다. 이 모두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신앙이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의 모습을 따르는 신앙인지 아닌지는 늘 성찰해나가야 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연장선에 있는지 기득권자들의 자기 유지의 연장선에 있는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예수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서 비리를 옹호해주지는 않았다. 성추행을 하였던 죄 자체까지 사랑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인간을 사랑했고, 그 인간이 하늘의 신비를 맛보며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던 분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사시며 이 땅에 생명세상을 활짝 열어가려 하였다.

영화에서 괴물이 나온다 하여 지구방위대를 결성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엄청난 자연재해가 닥쳐온다 하여 생필품 사재기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지금 기독계가 보이는 이런 과민반응은 스스로 편협함을 보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교양수준 및 신앙의 가벼움을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자신을 욕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진정한 '신성모독'과 '신앙'의 위협은 영화 한편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이 생명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속 좁은 분이 아니시다. 먼저 자기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여유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런 엉뚱한 데에 힘을 쏟지 말고,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이웃을 사랑하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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