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소천

[LIFE]이 남자의 인생 2021. 4. 18. 23:52 Posted by 바람몰이

 

하늘이 부르다.

할머니는 희한한 삶을 사셨다. 자식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남편 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없었던 것도 아니고...옆에서 볼 때 인생을 잘 산 것도 아니고 못 산 것도 아니고...

정말 내가 옆에서 본 것처럼 본인 스스로는 별 스트레스 없이 잘 사셨던게 맞을까? 어쩌면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점점 무뎌진 신경의 조각들이 과하리만큼 낙천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전히 내 기억 속 할머니는 그냥 그렇게 본인 좋은게 좋은 대로 사셨던 것 같긴 하다.

오전 7시 51분.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이 사실이다. 7시 59분. 큰 고모에게 전화가 왔다. 역시 내 예상대로이다. 잠시 후 다시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얼마나 걸리겠냐고...한 두 시간이라 답했다. 그러면 임종을 못 지킬 수도 있다는 답을 들었다.

선향과 함께 건희를 깨운다. 건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린이집에 처음 들어갈 때까지 할머니와 살았다. 참 유난히도 건희를 많이 예뻐하셨다. 할머니의 '둥개둥개 둥개야~'는 건희의 리듬감과 행복을 깨우는 마법같은 주문이었다. 건희와 함께 면도도 안 한 채 달려갔다.

8시 25분. 병실에 들어갔다. 순간 내가 잡았던 왼손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1초 내외로 다시 풀린다. 그저 눈물이 핑돈다. 인사를 하라는 병원직원의 말과 상관없이 감정이 북받쳐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곁의 건희는 더 서럽게 북받쳐 운다. 이 아이의 터져나오는 눈물과 울음은 무뚝뚝해 보이던 녀석의 진심이 오롯이 모인 사랑의 표현이었다.

작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도착 10여 분전이라는데, 불과 10여 분의 차이로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전화기 넘어 통곡이 들려온다. 삼촌은 할아버지, 큰아버지,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 했다는 죄책감과 아쉬움, 서운함, 추억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안정실에 모셔진 할머니를 다시 한 번 보고 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 삼촌은 또 다시 대성통곡을 하고, 상혁이는 그 옆에서 계속 흐느끼며 손을 놓지 못한다.

오산 장례문화원으로 모셨다. 코로나로 인해 공식적으로 조문을 받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친인척은 계속 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북에서 내려와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내고, 이 분들의 연세도 6-70대가 되면서 단순한 의무감이 아닌 더 깊은 감정의 유대, 동질감 등이 이 시국에도 함께 모이는 원동력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밤 11시 46분. 오랜만에 블로그에 일기를 쓰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드라이 한 글을 쓴 것이 얼마만일까...이 드라이함은 너무 슬프고, 지친 내 마음이 드러난 흔적이다.

할머니는 애증,,,이란 말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분이다. 고아원에 버리지 않고, 정말 고생고생 하면서 나와 동생을 키우셨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참 함께 하기 힘든 분이기도 했고, 여러모로 어려운 점도 많았었다. 고맙고, 미안한 것이 참 많지만 사소한 것 하나 부터 열까지 참 부딪치는 부분도 많았다. 그래도 손자 자랑이 인생의 낙이었던 분의 사랑은 이분이 나이롱 신앙이라 놀림을 당해도 나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했다는 그 기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고백하게 한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화장을 하고, 하관을 하면...나는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까? 이제 지쳐서 눈물은 오늘로 정리하고 싶기에 벌써부터 내일의 감정이, 모레의 감정이...그리고 할머니께서 계시지 않은 날의 감정이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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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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