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호흡을 고르라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9. 3. 13. 14:41 Posted by 바람몰이

호흡의 중요성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볼 때 어디를 보십니까? 흔히 듣는 대답은 제 경우 "눈"이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은 몸매를 보기도 하고, 어떤 분은 손끝을 보신다는 등 참 다양한 사람처럼 대답도 다양합니다.

저는 그 사람의 "호흡"을 봅니다. 그 사람의 기질과 생명력이 바로 "호흡"에 있다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잘 보시면 유난히 성격이 급하고,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가 호흡이 짧고, 거친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너무 여유로운 분들의 경우는 호흡이 가늘고, 여릴 때가 많지요. 호흡이 가늘다보니 힘이 약하거나 부드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네 조상님들도 이걸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숨졌다'라고 하고, 무술수련을 하면 '운기조식'이라 하여 호흡과 몸의 흐름을 조절하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호흡(생명의 바람)

그런데요 참 재밌는 것이 유대인들도 이 호흡을 참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우선 아래 성경 구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5-6)


유명한 에스겔의 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포로기의 암흑과 무덤에 갇혀 있던 유다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은 바로 '생기' 즉, 하나님의 영이자 바람인 "루아흐"가 들어가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하는 호흡과 성경이 말하는 호흡의 다른 점은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 유지에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생명이 결부된 문제라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내 인간적인 호흡에서가 아닌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던가 기억해봅시다. 성경이 뭐라 합니까? 예, 생기를 불어 넣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생기가 바로 하나님의 바람, 생명의 영인 '루아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바로 호흡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얘기입니다.


내 호흡을 쏘아대기만 하는 우리의 기도

여기서 우린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너무 뜨겁게만 하려 합니다. 정신 없이 쏘아대기 바쁘다는 얘기입니다. 호흡을 내뱉는 것에만 너무 익숙합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생명의 바람, 영을 들이마시고 음미하며 내 안에서 고를 시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주님 음성이 들릴리도 없고, 그 뜻을 헤아려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게 아니지요. 예수님도 기도의 정수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대로 하시라 함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영도 내 이기적인 욕심의 영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 화해와 사랑의 영. 정의와 바름, 낮음과 섬김, 헌신이라는 주님의 영과 주님의 호흡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내 호흡이 내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분노와 원초적인 기쁨에 좌지우지되는 어설픈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중심있고, 나를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비우는 호흡처럼 될 수 있도록 즉, 내 영이 주님께서 보내주신 그 거룩한 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그래야 성령님도 임하실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이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어 내 영이 부흥하고, 마른 뼈나 죽은 것 같은 내 영이 다시 사는 데는 주님의 바람, 호흡, 영이 오실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호흡으로 내 이기적 영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약한 자들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과 호흡으로 안아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패와 폭력, 불의와 어둠 앞에서는 성전 가판을 뒤엎는 불길 같은 호흡과 거룩한 분노로 임하셨습니다. 모진 고통을 이겨내는 끝없는 비움과 사랑의 호흡으로 골고다 언덕을 인내하며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 내 호흡을 차분히 고르며 가야 합니다. 너무 바쁜 세상이라고 나도 이에 편승하여 주님의 뜻과 은혜를 다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요. 심지어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이것도 저것도 열심히 한다 자기만족에 취해 있으면서 정작 그 시간은 주님께 내 호흡을 쏘아대기만 바쁘기도 합니다.

이건 좀 아니지요. 신앙생활.. 내 만족을 위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거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 삶이 그 분의 형상대로 달라져야 하고, 내 자신이 먼저 서야 합니다. 바로 그 핵심에 주님의 영, 바람, 생명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서 고르는 호흡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생명호흡이라 하는 거지요.

자, 오늘은 한번 침묵으로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며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생명을 느끼는 기도를 해보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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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번 글을 통해 기도우리의 정신과 삶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 중 첫 번째로 우리의 "정신"이 확장되어, "적대자상"을 해체하는 것에 대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먼저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학창시절 저는 모든 이를 용서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전직 대통령도 있었구요. 외국인도 있었는데요. 그 핵심에는 바로 저희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희 오누이를 제 나이 다섯, 여동생 나이 셋에 버렸습니다. 제가 버렸다 표현한 것은 그 후 15년간 전화한통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때 저희 오누이를 키우시던 조부모님은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오백원짜리 삯바느질을 하며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또 이러더군요. 당신께서 신용불량자이다보니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핸드폰을 해서 국제전화요금을 수백만원씩 물린 적도 있고, 대출을 받아 쓰기도 하였지요. 당연히 저는 제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이 모든 걸 갚아야만 했구요.

아버지를 보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그 분에 대한 정은 당연히 없고, 끌림 같은 건 저 세상 이야기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제 주먹이 날라가지 않은게 다행이었죠. (정말 신학하기 잘했다 싶을 때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분은 "주적"이었고,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2.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형제와 다투고 예배드릴 생각도 말라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지요. 예수께서 또 그런 삶을 사셨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한없이 찔리고, 힘이 든 겁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랑과 화해를 얘기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묵상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였는데요. 물론 환청처럼 들린 것은 아니나 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처럼 도전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도 분노하고 있느냐?' '정말 그렇게 네 아버지가 죽일 놈이 것이냐?' '그럼 너는?'

예수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고, 제가 지은 모든 죄와 다른 이들에게 상처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건 그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성화되어 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가 무얼 잘 하고 잘 못 했다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내 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직은 조금 미흡한 것이고, 그만큼 교만함이 마음 속에 들어와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도 용서를 강조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으며, 강도를 용서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셨던 것일 겝니다.


3.이제 아버님을 뵙는 제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원수였고, 제 인생의 가장 피곤한 암적존재이자, 심지어 "쓰레기 인생" 이라 생각했던 그 분의 인생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 분의 영혼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분 역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나 처럼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인생이 소위 "실패한 인생"이 된 것에 대해 매우 아파하고 있는 이제는 자포자기마저 해버린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차마 자식 앞에 전화한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거지요.

이제 저는 그 분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분을 적으로 여기고, 원망하던 제 자신을 먼저 보고, 그 분을 "쓰레기 인생"이라 하던 "교만한" 제 자신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란 그리스어로 방향을 돌이키다라는 뜻인데요(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한번 더 글을 쓰겠습니다). 제 삶과 마음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4.저는 성령님께서 제 영에 임하시고, 예수께서 저를 보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 소중한 체험을 통해 제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제 마음의 그릇이 한단계 더 넘어선 것이고, 정신의 깊이 역시 한 영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저 혼자 발버둥친다하여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제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 분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말이 쉬워 그렇지 약 20여년 동안 저희 오누이가 겪었을 그 아픔과 고통을 생각해보면.......이건 정말.....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얘기입니다.......

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적대자상이란 그렇다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대자상이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원망의 대상이나 증오, 분노의 대상을 의미하는 데요. 저는 이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여야만 가능하다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해체 가능하다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생은 다 그런거야..' '부질 없는 짓..'이라며 냉소하거나 관조하는 게 아니라 이와 다시 하나되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까지 얻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삶이기 때문입니다.


5.오늘 저는 이 글을 읽는 다시 한번 제 자신과 크리스챤 독자님들께 도전을 드리며 글을 맺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넘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건 내가 그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용서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먼저 내 자신을 보고, 그를 내려보는 내 교만함과 그 속에 있는 원망과 증오  검은 때를 닦아내는 "기도"입니다. 지금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님께서는 나를 먼저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군자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원망과 증오, 분노를 닦아가는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때일 수록 더 오랜 시간 닦아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함께 하고 계시기에 끊임 없이 닦아감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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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도 MP3 냐?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9. 2. 25. 10:49 Posted by 바람몰이


오늘은 지난번 총론에 이어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는 첫 시간입니다. 먼저 저는 지난 번 언급했던 이사야의 말을 다시 들어보며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이사야서는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수집되고 정리되었습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눠 보는 데요. 이것은 제 1이사야서 부분입니다. 이 글이 작성되던 시기는 대략 바빌론 포로기 직전이나 초반쯤으로 보는 게 정설입니다. 

즉, 나라가 패망의 기로에 있는 매우 급박하고, 힘든 상황이었다는 얘기인데요.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심지어 직접 찾아오시겠다는 말씀까지 하신다는 점입니다. 아래 구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만군의 주님께서 너를 찾아오시되,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를 일으키시며,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태워 버리는 불길로 찾아오실 것이다.(사29:6) 

상당히 충격적이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오실만큼 당시 이스라엘이 타락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했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이들의 야훼 신앙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을 노예와 나그네 생활하던 것에서 이끌어주시고, 그 어리석고 연약한 이스라엘 민중이 자기초월을 통해 출애굽 후 나라를 세우기까지 이끌어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이 어느 덧 풍요를 쫓고, 허례허식이 가득찬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자기들의 어려운 시절을 잊고 교만에 빠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세상에 이런 모양새가 얼마나 심했으면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 올까요.


마치 굶주린 자가 꿈에 먹기는 하나, 깨어나면 더욱 허기를 느끼듯이, 목마른 자가 꿈에 마시기는 하나, 깨어나면 더욱 지쳐서 갈증을 느끼듯이, 시온 산을 치는 모든 나라의 무리가 그러할 것이다.(사29:8)


자,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기도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담긴 곳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부분을 첫 글부터 강조하는 것은 바로 "진정성"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저 때 당시 이스라엘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요. 끊임없이 더 큰 파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그러나 아무리 파이를 먹어대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갈급하고, 굶주리는 모습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업 잘 되려면 교회다니라는 분이나 교회를 인맥 넓히는 사교장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참 많지 않나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 역시 교회 출석과 새벽기도 참석같은 행위나 눈에 보이는 것에 상당히 신경이 가있지는 않나요? 내가 며칠기도까지는 해봤다..뭐 이러면서..나는 방언기도를 한다..뭐 이러면서 말이지요. 들리는 얘기로는 요즘은 무슨 방언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있다지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들은 말을 흉내낼 뿐이다" 라고 개탄해 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속에 진정성이 있어야 하지요. 기도도 그럴 것입니다. 
 
중언부언 하듯 그저 양만 많이 늘려가는 게 아니라 한마디 기도를 내 뱉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골방에서 주님과 1대1로 만나며 옷이 아니라 마음을, 재가 아니라 눈물을 뿌리는 기도야말로 진정성이 담보된 기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내 곁에 계시던 주님을 만나 그 은혜에 휩싸이게 되면 우리는 이기적인 내 자아를 넘어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며,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또한 내가 가진 것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고 들에 핀 백합화처럼 솔로몬보다 더 영화로움에 감사할 줄 아는.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닦는 "수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분명한 것은 주님을 만난 이들은 그 삶이 변화하였고, 그 핵심에는 바로 늘 진정성이 가득한 기도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 오늘 이 엄청난 교회와 신도수를 자랑하는 이 한국 교회가. 매일 같이 새벽기도를 하고 주님만 따르겠다 하던 우리가. 한번쯤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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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삶의 진실한 기도를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동참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끊임없이 세상과 생명을 위해 간구하고 계심을 고백하는데요. 대표적인 로마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4)

 
즉, 내 삶을 통해 드려지는 기도는 나 혼자만 살자 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진실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동참하여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이르게 합니다(렘33:3, 왕하 20:5, 약 4:8).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해제하기도 하고약5:13-17),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세상 변혁에 참여하게 됩니다(출32:7-14, 고전3:9). 마태복음의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6:9)"의 고백은 성경적 기도는 사회적 행동이 수반됨을 의미합니다. 


4.사회적 행동이 수반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단순히 교회의 수를 늘리는 것을 말하는걸까요. 기독교로 개종해가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예, 그런 측면도 있겠지요. 저는 이걸 무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외형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살아있는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평화와 화해, 사랑의 섬김이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만유 안에서, 만유 위에서, 만유를 통해 역사하는. 그의 의지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잠깐 로마서의 이야기를 또 한번 살펴볼까요.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롬8:26)

이것은 내 이기적 자아와 욕심만을 위해서 하던 어린 우리의 기도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확대 심화 증진 됨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 말씀처럼 원수를 위해서까지 기도하는 이해관계, 인종, 국결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정의구현을 위해서 기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5.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줍니다.

융은 그의 연구를 통해서 성령은 개성화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즉, 죄의식, 분노, 갈등, 상처, 실패, 좌절감을 치유하거나 수용하게 하여 승화시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며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갖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날 때, 하나님과 만날 때 진정 내 자신이 더욱 나 다워진 '사람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 얘기 하지요? 예, 기도는 쌍방통행의 성격을 띕니다. 바로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날 수 있습니다. 하워드 트루만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통신의 형태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지금 너무 초월적 신관에만 입각하여 통성기도를 통한 일방통행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고는 감정에 취해 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을 비우며, 그의 뜻대로 행하게 해달라 기도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킬켈갈(Kierkegaard)는  청원기도는 청취기도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린은 기도란 언어와 비언어, 지성과 감성, 의지와 기억, 정신과 몸을 총괄하는 전인적 존재가 절대 초월자인 하나님과의 만남이자 나눔이고, 청원이자 경청이며, 침묵이자 현시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좀 더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지요. 진정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내 삶이 변화하고, 전인적 삶이 그에게 사로잡히는 그래서 성령님의 간구를 통해 이기적 자아와 욕심에서 자기초월(안병무)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리하며

베네딕트는 "노동은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처럼 우리의 삶 전반을 통해 끊임없이 수도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14:3-5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도는 내가 아닌 '너와 나'를 위해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성령님의 탄식과 기도처럼 내 이기적 자아와 욕심을 넘어선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나는 삶. 또 다른 삶. 다시 태어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 쉽게 쓰러지고, 약해지지만 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하나 하나 천천히 그 분께서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을 믿고, 내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자, 지금까지 짧게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는 데요. 앞으로 저는 몇 회에 걸쳐 이 1,2회 내용을 바탕으로 기도에 대해 적어나가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부족한 성찰이 이 글을 읽는 크리스찬 독자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총론은 총 2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편을 읽으시려면 이 문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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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한국 교회처럼 기도의 역사를 체험하며 성장한 곳도 없습니다. 김경재 교수 등의 성찰처럼 기도는 교회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또한 세상에 시달리며 지친 민중들에게는 힘의 원천이었고, 교회갱신의 추동력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졸라대기만 하는 자기독백적 간구나 저승을 지향하는 듯한 타계주의적 기원, 물량적이고 주술적 청원, 행동이 결여된 역사이탈의 기도, 광신적이며 의타적 간구 등은 역기능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하여 저는 오늘 이 시간부터 성경이 말하는 기도에 관한 성찰을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글은 제가 앞으로 연재하게 될 기도에 관한 글의 총론이자 결론에 해당하기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 길어 2회에 걸쳐 나눠 싣고자 함과 이것은 한 크리스천 독자의 부탁을 통해 기획되었기에 구독의 대상 역시 크리스챤으로 한정하고자 함을 참고해주시기 바라며 글을 시작합니다.



1.먼저, 이사야의 말을 들어보며 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입술로만 자신을 공경하는 모습을 개탄하고 계십니다. 실제 그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후반부인데요. 원문에 좀 더 가까운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를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앞에 두고 크나큰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속에 제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고, 한국 교회가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쩜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산다 하면서도 실제 그 속에는 추악함이 가득차 "들은 말을 흉내내고 있는 것일 뿐" 일지 모릅니다.



2.이사야의 이런 통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삶 속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입으로만 행해지는 기도에 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평생을 '도'를 닦는 생활을 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란 당연히 '십자가의 도' 이겠지요. 이것을 동양에서는 '수도'라 하였는 데요. 말 그대로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평생 수도하는 삶을 살아가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던가요. 매우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이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보고, 잘 듣는 분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그는 그의 전 생애를 내 뜻대로 구하지 않고 주의 뜻대로 하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2)

이는 내 삶 자체가 기도하는 수도의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됨을 의미합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던 예수처럼 내 안의 내 이기적 욕심과 자아를 버리고, 십자가의 도를 걷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 참으로 기도는 입으로도 해야하지만 삶으로 드려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총론은 총 2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편을 읽으시려면 이 문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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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상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9 Posted by 바람몰이



균형을 잡는 다 함은 절대 적당한 중간선을 찾는 게 아니다. 진정한 균형은 좌우의 모든 끝을 보고 난 후 내 자신을 온전히 세웠을 때 잡을 수 있다. 내게 잘 해주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잘 보고 내 마음을 다스리며 하늘의 이치에 맞춰 받아들일 줄 알아야 인생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우리네 생명세계나 역사 역시 하늘의 삶과 땅의 삶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한 때 우리의 역사는 땅의 삶을 물리치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추상적인 관념에만 사로잡혀 딴 세상 사람처럼 살 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동서양을 막론하고-학문세계나 정신세계는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힘을 끼치지도 못하고 도리어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의 우리네 삶은 우리네 인간사 속에서 하늘의 뜻과 이치, 그 질서 등을 완전히 배제한채 살아가고 있어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결과 생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되었고, 우리네 정신 역시 그 따뜻함과 깊이, 인간냄새 등이 사라져가고 말초적인 흥분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아주 간단히 도식화하여 정리하여 보았는 데..

실제 우리네 인생과 우주의 이치란 것은-동서양을 막론하고-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그 기본과 끝이 있다. 특별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성품을 입고 땅에 살게 하였다는 성경의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네 인생들이 당면한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신, 하늘, 추상이 지배하던 역사를 박차고 나와 땅, 물질, 현실이 지배하는 오늘의 역사를 거쳐 이제 변증법적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온 생명세상에 하늘의 생명기운을 다시금 불어넣어 흙에서 사람이 되었던 옛 고백처럼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세상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조금 엇나가는 얘기이긴 하지만..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세계가 지극히 천한 것 역시 바로 이런 더 큰 세계를 볼 줄 아는 이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바로 눈 앞 밥그릇 채우기와 기싸움만 해댈 줄 아는 이가 득실거리기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하늘의 이치와 성품속에 지극한 땅의 삶을 살며 국민들을 인도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럴싸한 대의명분과 시끄러운 입방정으로 가장 천박한 인생사를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좌우의 끝을 볼 줄 알고, 포용할 줄 아는 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그 중심을 잡고 국민들을 편하면서도 좀 더 고귀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우리의 맥으로 돌아와..아무튼 세상의 교회와 크리스챤들이 이런 큰 신앙의 맥락을 알고 살아나가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각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열매를 맺어가고, 그 가운데 예수님과 같은 사람냄새 나고 하늘 냄새나며 그래서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으로 잘 살아가는 생명의 세상을 일궈갈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이 때에 자신의 자리와 삶에서 최선을 다해가며 주께서 다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죄많고 부족한 나이지만..주님의 그 은혜로 살며 최선을 다했노라..열심으로 살았노라..그렇지만 너무 힘들었노라 이야기하며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당당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 여행의 첫번째 도전에 직면해보자.

지금 나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무얼 알고, 무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내 삶은 바로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나만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열심있고 책임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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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7. 11. 10. 09:52 Posted by 바람몰이
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1. 인기를 위한 목회가 아닌, 인격적인 목회를! (롬12:10-20)

2. 직업적인 목회가 아닌, 소명감에 불타는 목회를! (겔34:1-16)

3. 최고, 최대를 위한 목회가 아닌, 최선의 목회를! (살전2:1-12)

4. 경쟁적인 목회가 아닌, 성실한 목회를! (마25:14-30)

5. 자랑을 위한 목회가 아닌, 겸손한 목회를! (눅17:10)

6. 수와 양에 치중하는 목회보다는, 알곡을 키우는 질적인 목회를! (요10:9,16)

7. 자아 중심의 목회가 아닌, 주님 중심의 목회를! (빌1:20)

8. 명예를 위한 목회가 아닌, 영혼을 위한 목회를! (고전9:19-23)

9. 인간의 칭찬을 받기 위한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목회를! (마6:16-18)

10. 과장된 위선의 목회가 아닌, 양심적인 정직한 목회를! (마23:1-36)

11. 내 힘으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목회를! (행1:8)

12. 받기 위한 이기주의적인 목회가 아닌, 생명까지도 주는 희생적인 목회를! (행20:24)

13. 의무감으로 하는 타율적인 목회가 아닌, 사랑 때문에 하는 목회를! (살전2:8)

14. 정죄하는 목회가 아닌, 이해와 관용의 목회를! (마26:41)

15. 책망의 목회가 아닌, 권면과 위로와 칭찬의 목회를! (살전1:2-8)

16. 명령과 지시만 하는 권위의 목회가 아닌, 본을 보이는 실천의 목회를! (벧전5:3-4)

17. 발로 뛰기만 하는 목회가 아닌,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회를! (눅2:39-46)

18. 십자가를 타고 가는 교만의 목회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종의 목회를! (16:24)

19. 인간의 지혜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경말씀 중심의 생명있는 목회를! (딤후3:15-17)

20. 교인을 외모로 보는 계산적인 목회가 아닌,
의롭고 괴로운 자의 편에 서는 진실된 목회를! (약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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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0. 09:46 Posted by 바람몰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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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주 헌금을 합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고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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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체험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8 Posted by 바람몰이

하나. 꿈에 로또 번호를 보았다. 몇 개를 보긴 했는 데 선명히 기억나는 게 단 3개였다.

이튿날 오랜만에 복권을 샀다. 별 생각 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추첨하는 날 밤에 보니 꿈에 본 3개의 번호가 모두 맞았더라.


둘. 반쯤은 꿈인듯..반쯤은 환상인듯..사후세계를 여행하고 왔다.(지금 돌이켜보면 시기를 알 수 없는 미래사회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어떤 이는 걸어서 밝은 빛이 나는 곳을 지났다 하고, 또 다른 이는 배를 타고 건넜다고도 했다. 나 역시 밝은 빛이 나는 곳을 지나기는 했다. 그런데 조금은 다르게 기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도착한 회색빛이 도는 신비한 곳. 갖가지 사연을 안고 죽어온 사람들이 보였다. 몇 몇과는 기억나지 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건물 복도를 지나 사무실 같은 곳을 들어가는 나. 지금 보면 박순경 박사님 같기도 한 그러나 확실치 않은 메마른 노 여교수님(목사님)을 만났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저것 책을 보기도 하였다. 다리 한쪽이 잘려 있는 젊은 친구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이 세상은 이 세상 나름의 체계를 갖고 알아서 잘 돌아가니 너는 아무염려나 기도를 하지 말고 그저 열심히 네 인생을 살아라'

다른 대화는 다 선명치 않은데 이것만은 또렷하다.


셋. 할아버지 백일기도를 하고 있는 도중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왔다. 할아버지는 잘 계시니 더 이상 기도하지 말아라..

그저 잘 맞이하고, 천천히 내게 주어진 메세지를 느끼려 한다. 그 의미를 잘 생각해보려 한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만큼, 필요한 때이니 주신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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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도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4 Posted by 바람몰이

매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온 집안을 뒤 엎는 아이를 보며

고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과 아이 그리고 저를 한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보며

평소 용돈 한번 못드려도 함께 살아 행복해 하는 할머님을 뵈며

제가 사는 인생과 삶의 자리가 고됨을 넘는 은혜의 바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무엇을 해달라, 무엇을 들어달라 조르기보다

하루의 삶과 순간 순간에 감사기도를 더 드릴 수 있게 하시며

그저 당신의 뜻을 헤아리고 들을 수 있는 믿음과 넉넉한 여유를 갖게 하신 당신이시이기에

저는 오늘도 가슴을 적시는 눈물에 영혼을 촉촉히 가꾸어 갑니다.


당신의 종으로 바르게 서 가기를

당신이 허락하신 생명을 당신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함께 인생을 살게 하신 아내와 가족들을 사랑하고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생명세상을 가꾸갈 수 있기를


이 한 청춘과 호흡을 바쳐 원하고 또 원합니다.


당신께서 이 가슴에서 솟고 있는 뜨거운 피를 식지 않게 도와주시고

주위를 둘러보고 뒤를 돌아보며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발이 지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이치와 당신의 뜻을 보려하는 번뜩이는 눈이 흐려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어디서나 제소리를 내게 하시고

그러나 그 보다 더 많이 듣게 하시며

날카롭게 잘라낼 때보다 더 많은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은혜를 나뢰어 주시어


당신을 경외할 줄 알고

당신께서 뜻을 하늘에서 이룸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뤄 갈 수 있는 자 되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되 남는 것은 넉넉히 나눌 줄 알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내 자신을 성찰하며

시험에 들었을 때도 낙망치 않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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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2 Posted by 바람몰이

 

기왕에 말이 나온김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도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더욱 성경이 계시해주는 하나님은 물론 내 자신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의 가장 모범이신 예수님을 보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거나 어떤 결정을 하실 때도 항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시되 정확하고 똑바르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의 끝에서 내 뜻을 이루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뤄 달라 기도하며 주의 뜻을 들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일단 말이 많습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 지 침이 튀어 바닥을 적실 정도입니다. 또 쉬지도 않고 몇 시간씩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어 목소리가 쉰 상태로 정서가 순화됨을 느끼고 만족함을 느끼며 기도를 마치고 일어납니다. 도대체 언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만 해대는 게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고 위안을 얻는 것이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내가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언을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방언은 믿음이 좋다 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님들을 합니다. 그래서 은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어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통변”이라고 해서 방언을 해석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이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성경 사도행전까지 말하는 방언은 한마디로 “외국어”입니다. 각 지방과 나라의 언어란 말입니다. 언어가 통하는 게 방언이고 이것은 구약시대 바벨탑 사건에서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모이는 사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속에 인간의 사고가 있고, 인간의 사고는 언어활동과 함께 이뤄진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신 것은 만남과 하나 됨의 인간관계 속에 있는 영혼의 교류를 흩으신 게 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하게 하신 것은 다시금 그 교류의 통로를 열어주신 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고린도 전서 14장은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혼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방언만 해대다 교회가 분열되기 보다는 모두 똑바로 알아듣는 예언이 더 낫다는 후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방언 만마디 보다는 알아듣는 기도 다섯마디가 낫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도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방언을 아무리 해대도 교회가 하나 되거나 우리 사회가 변하는 역사가 없습니다. 심지어 방언을 잘 하는 분일 수록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방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방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4장을 정독해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방언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하더군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 다구요..

  기도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되게 해달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잘되게 해달라 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 합니다. 물질생활에 부족함 없이 축복해 달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문제인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온 몸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치셨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구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됨과 동시에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이가 잘 되게 해달라 해야 하며 셋째로 머리가 되어도 교만치 않도록 도와달라 하거나 남들이 싫어하는 꼬리가 되어 더욱 섬길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합니다. 끝으로 물질생활에 부족함이 없게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을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방법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수많은 위인들은 모두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이 말씀에 의해 깨지고, 쪼개지며 변화했고 눈물로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중요한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일종의 경고 표시인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고운 님이여!!

  지금 이 순간 잠시 책을 덮으시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깨닫고, 주님의 뜻을 발견했다면 이 책을 안보고 버리셔도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주의 뜻을 전할 뿐인 종에 불과하구요.


  만약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찾아와 감동을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 순간 주님 앞에 불려 간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작은 열매를 맺으셨고, 저는 그 사명을 감당한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희망을 갖고 아름다운 씨앗을 또한 뿌리고 키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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