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창기 필자부부는 명절로 인한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다
. 평소 아내에게 최선을 다해왔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 자부했지만 명절 때만 되면 늘 이래왔다. 또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극으로 다가왔다. 명절 연휴 내내 서로 즐거워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필자부부의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부부들이 명절만 되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먼저 여성의 경우를 보자. 현재 여성은 주로 명절 연휴 내내 살림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온 몸이 부러질 듯 하다. 또 가만 앉아 있는 남편이 어찌나 얄미운지 모른다. 끝으로 내 부모님께 가지 못한다는 죄스럼도 가해져 "명절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러면 그렇다고 남성은 편하고, 즐겁기만 한 것일까. 언뜻 보면 그런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선 오랜시간 운전을 하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다. 또 부쩍 얇아진 지갑탓에 심적 부담이 상당하다. 특히, 한국 남성들이 갖고 있는 '효자노릇'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다. 아내의 스트레스를 보면서 내 맘과 달리 이렇게 싸움까지 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함께 밀려오기도 한다. 

결국 모두 즐거워야할 명절이지만 여성은 물론 남성 역시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전국가정법원의 자료를 보면 07년 추석연휴 다음 달에는 협의이혼이 8,888건으로 전달인 7,497건보다 1,300여건 늘었다. 08년 역시 추석연휴가 낀 9월에 4,579건이었으나 10월에는 7,965건으로 3,300여건이나 급증하였다.

출처 : 서울경제신문


그렇다면 우리는 해마다 반복되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일까. 필자의 경우는 "평등명절"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필자의 경우는 "평등명절"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평등명절"이란 양성 모두 행복한 명절을 보내자는 마음에서 출발한 운동이다. 물론 주로 여성단체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그 취지와 목표점은 그렇다. 지금의 관습대로는 양성모두 고통을 겪기 쉬우니 서로 행복할 수 있는 명절을 보내보자는 것이다. 실제 필자의 경우는 이런 노력을 통해 부부간 갈등을 최소화 또는 거의 없앨 수가 있었다. 그 방법론을 아래와 같이 밝혀보도록 한다.

1.음식은 함께 하고, 함께 쉰다.

출처 : 매일신문


위 표를 보면 알 수 있듯 일단 음식하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차례를 지내는 경우는 특히 더욱 그렇고,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해도 온 가족이 먹을 음식을 한다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우는 필자가 함께 음식을 하게 되었다. 요즘은 전체 음식의 상당부분을 필자가 하는 것 같다. 함께 일하고, 함께 쉬는 데 남편이 좀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내는 그것자체를 고마워한다.


2.시가-처가 방문은 상황에 맞게 한다.

보통 여성단체는 시가를 먼저 한번 갔으면 그 다음은 처가에 먼저 가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처럼 가정상황에 문제가 있다면 상황에 따르되 서로 섭섭하지 않는 선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의 경우는 명절 전에 처가를 방문하여 처가에서 꽤 많은 일을 하고 오고 있다. (예 : 운전, 음식, 설거지 등 각 종 집안일 및 장인, 장모님과의 대화) 그래서 아내는 명절 당일에 처가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주고 있는 상황이다.


3.환경을 생각하는 간소한 명절을 보낸다.

일단 음식량 조절부터 필요하다. 차례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경우 기름기나 입맛에 맞지 않는 이유 등으로 손이 잘 안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이를 과감히 빼버리거나 딱 1접시 분량만 하는 게 좋다. 필자의 경우는 기독교 예배를 드리지만 비신자들이 많아 차례상을 차리는 데, 항상 음식이 남게 되어 그 양을 과감히 줄이는 대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식(예:갈비찜 등)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버려지는 음식량도 줄고, 비용도 절약하며, 환경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1회용품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각 지자체나 단체에서도 "평등명절" 보내기 운동을 벌여 이 운동이 점점 확산되는 추세이다. 심지어 어떤 지자체 후보는 아예 평등명절을 테마로 한 유세를 벌인다고도 한다. 때로 어떤 이는 이 모든게 정치적 야욕에 의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평등명절의 필요성을 점점 인식하고, 이것이 확장되어 가는 추세라는 것이다. 

이번 추석연휴는 부쩍 길어진 기간탓에 운전, 음식장만 등의 피로강도가 부쩍 강해질 것이다. 또한 여전히 어려운 경기탓에 얇아진 지갑은 우리네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부부 또는 가족이 서로 돕고, 배려하는 문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추석연휴 만큼은 평등명절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여 작은 것부터 변화하는 노력을 기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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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교장"의 등장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놀라움과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는 저는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보면서 언젠가는 터질일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 이렇게 생각했던 근거는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희롱 예방교육의 현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희롱이 일어나는 원인과 관련한 것입니다. 오늘 이 글은 두 가지를 다루며 진행될 것입니다.


1.성희롱이 발생하는 원인은?

우선 첫째는 권력의 문제입니다. 성희롱은 항상 권력의 차이 속에서 비롯합니다. 대개가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경우가 많지요. 상식적으로 부하직원이 상급자를 성희롱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자신의 고용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성희롱의 가해자로 많이 지목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주로 상급자인 남성이 하급자인 여성에게 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이 논리대로라면 모든 직장에서 성희롱이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거지요. 여기서 두번째 원인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조직의 경직성입니다. 조직이 경직되었다 함은 민주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상급자와 하급자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조직 분위기가 딱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은 조직문화개선에 큰 촛점이 있지요.

끝으로 세번째는 왜곡된 성인식을 들 수 있습니다. 대개 성희롱 가해자의 특징을 보면 물(物)화된 이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주로 남성). 그래서 그 사람을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본인의 성적 판타지를 투영시키거나 음담패설을 즐겨 하곤 합니다. 

2.학교내 성희롱 예방교육의 현실

현재 공공기관은 1년에 1회 이상 의무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시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년에 1회 이상 반드시 교육을 시행해야 합니다.  경우는 상당히 잘 하고 있었습니다. 의무적으로 보고를 하게 되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교육의 시행여부 다음에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교육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학교에서의 교육은 교육의 시행내용에 따라 평점을 매기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교장 선생님이 참여했느냐가 있는 데, 만약 교장 선생님이 참여하시게 되면 가산점이 붙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가산점이고, 참여하지 않을 때 가해지는 페널티는 없습니다. 

즉, 그냥 중간쯤만 한다 생각하면 교장 선생님께서 굳이 들어오실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 저와 제 동료 강사님드이 교육했던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참여하신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또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료 교육의 내용입니다. 제가 교육을 하다보면 '왜 이게 성희롱이예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성희롱 예방교육이 피해예방이나 피해자 구제 뿐 아니라 가해예방에 촛점이 맞춰져야 함을 잘 알게 되는 대목입니다.

3.교장 선생님이 성희롱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

자, 이러니 문제가 생기지요. 앞서 저는 성희롱이란 권력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직된 조직문화와 왜곡된 성인식 속에 생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원인들이 학교 교장 선생님의 경우 쉽게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대개 학교는 학교장을 감시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은 최고 권력자란 것이지요. 따라서 인사권을 갖고 있는 교장 선생님이 평교사나 학생에게 성희롱을 가할 확률이 더 높아지게 됩니다. 

또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으시는 교장 선생님들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성지식을 갖고 있는지도 문제가 됩니다. 제가 학교에 가서 수많은 선생님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또는 테스트를 해본 결과 매년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성희롱의 경우나 성립 조건 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계신 분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니 교육에 참여조차 안하시는 교장 선생님은 어떨런지요. 

정리하며

어느 사업장이든 최고 책임자의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리더의 마인드에 따라 조직의 분위기와 방향성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교에서의 성희롱 예방교육에는 반드시 교장 선생님께서 참여하셔야 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학교내 성문제에 관심을 갖는 만큼 학교내 성문제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선량하고, 좋은 교장 선생님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교장 선생님의 교육참여를 제도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내 성범죄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장 선생님의 경우는 제도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합니다. 반면 교육이 저조한 경우는 페널티가 가해져야 합니다. 세번째로 성폭력 피해예방이 아닌 가해예방에 촛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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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 거세에 대한 제 의견은 부정적입니다. 예전에 작성했던 "화학적 거세를 하면 성범죄가 줄어드나?"를 통해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리적 거세를 하자 주장하며 이게 근본적인 처방이라는 분들도 계시던데요.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우선 물리적 거세 자체가 성기 절단이 아닙니다. 고환을 적출해 내는 것입니다. 허나 여전히 발기는 이루어집니다.

대체적으로 여성계 역시 화학적 거세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제 이미경 성폭력상담소 이사의 경우도 비슷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러자 항의 전화가 오기도 했다는 데요(관련글 : 화학적 거세로 성폭력 범죄를 예방한다고?). 사실 이 얘기는 이번에만 나온 게 아닙니다. 이미 수년전부터 여성계는 이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밝혀왔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이 글에서는 크게 세 가지만 보겠습니다.
 
우선, 성폭력은 단순히 호르몬에 의해 일어나는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인 범죄가 아니란 것입니다. 성폭력은 보다 복잡한 사회구조가 얽혀있습니다. 이 속에는 강자/약자의 구도가 깔려있고, 우리 사회의 성평등의 문제가 결부됩니다. 또한 가해자의 내면적 불안과 피해의식 등이 있으며 피해자의 현실적 삶의 모순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동 성폭력의 경우 아동인권과 복지의 측면으로 접근해야만 근본적인 예방대책 수립이 가능합니다. 가해자에게는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찾아가고, 피해의식이나 대인관계 특히, 여성과의 문제를 풀어가는 치료를 병행해야만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폭력이란 "성적행위"가 아닌 "폭력의 일환"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 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지금 우리는 성폭력을 너무 "성기중심"으로만 보고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현행법도 그렇습니다. 부녀자에게 강제로 성기가 삽입되지 않으면 강간이 성립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지요. 성폭력은 성기가 삽입되었다하여 성립되고 아니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성폭력이란 개념의 범주 속에 이미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이 혼재되어 있고, 가령 피해자의 구강 등에 강제로 성기를 삽입했다 해봅시다. 그러면 이건 성폭행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당연히 이것도' 성적인 폭력'이 가해진 성폭행인 것입니다. 


끝으로 세번째는 그 효과에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조지프 프랭크 스미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자는 성범죄를 저지른 후 화학적 거세를 받아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보도된 사람입니다.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는 15년 후 75건의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다시 잡혀오게 됩니다.

(이것 못지 않게 화학적이든 물리적이든 거세 방식 자체가 갖고 있는 폭력성도 매우 강하게 지적됩니다) 

요컨대 성폭력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며 성적인 문제라기보다 폭력이란 큰 틀에서 봐야하는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학적이든 물리적이든 거세를 하는 건 강력한 처벌의 일환일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예방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호르몬에 의한 문제라는 인식 속에 그 이면이 깔려있는 양성간의 수많은 문제들은 은폐시켜 버리고 맙니다. 문제의 핵심포인트를 놓치고, 아예 바꿔버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지요.

저는 지금의 정치권의 행태가 굉장히 포퓰리즘 이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먼저, 사실 우리에겐 이미 수많은 나영이가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렇게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서로 나서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가만보면 대중이 원하는 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서 거세시켜 버리자 하니 거세 얘기만 꺼냅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연일 계속되는 아동 성범죄를 보며 너무 흥분해 있습니다. 분노가 너무도 거센 나머지 침착하게 검증되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범죄가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 자체를 놓치고 있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보다 피해 아동 또는 여성, 남성을 향한 따뜻한 가슴으로 그러나 차분하고, 냉정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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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총 5회로 기획되었던 [아동성폭력, 이렇게 예방하자]의 마지막 글입니다. 사실 겨우 5회로 아동 성폭력 예방에 대한 방대한 분야를 다룰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4회동안 저는 좀 더 가까운 곳 즉, 부모님에 대한 부분, 교육의 내용에 관한 부분, 학교에서의 부실한 모습 등을 지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은 그 마지막 편으로서 아동 성폭력 예방을 위한 전체적인 틀 즉, 우리의 의식과 접근법, 시스템에 대한 내용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동 성폭력 예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는 늘 있어왔습니다. 늘 대안을 제시했었고, 정부의 분발을 촉구해왔습니다. 그나마 지난 정부서부터 각 종 성관련 제도가 정비되고, 여러 교육이 시작된 것은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국회의원 또는 정부관료들 자체가 성의식 또는 성평등 의식이 매우 낮습니다. 우리는 국회의원이 성희롱을 하고, 검사가 성접대를 받으며 경찰청장 관련 인물이 성매매를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처벌 형량도 중요하나 처벌 가능성 자체가 낮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런 분들이 국가권력의 핵심에 있는 현실 속에서 그 변화를 담보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습니다. 그 분들이 조두순 사건과 김수철 사건 이 후 제시한 것이 거세, 각 종 형량 높이기 입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신고율 자체가 낮고, 신고를 한다해도 기소되어 재판에 이르는 비율이 50%도 채 안되는 데 형량만 높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사형이 있다해서 강력범죄가 없는 게 아니듯 아동 성폭력 형량이 높다하여 예방되는 게 아닙니다. 현행 제도의 가장 큰 맹점은 신고를 해도 피해를 입은 피해당사자와 그 가족이 조사과정에서 더 고통을 당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신고를 해도 처벌 자체가 잘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나영이만 해도 같은 진술을 몇 번이나 하였다 하지요. 도대체 7-8살 짜리 아동이 얼마나 일관된 진술을 해야한다는 것인지요. 이 시기 아이들은 멀쩡할 때도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게 정상입니다. 


둘째, 보여주기 행정이 아닌 근본적인 인식변화부터 필요합니다. 

성폭력에는 기본적으로 강자/약자 구도가 깔려 있고, 양성간 성적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동 성폭력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아동의 현실적 모순이 집약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부모 가정에서 성장한 여아들 중에는 친부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저소득층 맞벌이 가정에서 방치된 아이들이 그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동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그저 '분노'나 '거세' 만으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건 마치 맹장이 터졌는 데, 배에 파스를 붙이는 것과 같은 근본적이지도 않고, 처방 자체도 틀린 접근입니다.
아동 성폭력 예방을 위한 접근은 '아동인권'이란 큰 틀에서 접근해 가야만 합니다. 아동의 인권을 보호하는 구조를 만들어 가며 아동 성폭력 예방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근본적인 처방이 가능합니다. 


셋째, 국가적 마스터 플랜이 필요합니다.

이런 맥락 위에서 국가적 마스터 플랜이 구상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지난 여러 사건 이 후 국회에 각 종 법률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처벌 위주일 뿐이었고, 개별적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아동의 인권이란 큰 틀이 없었고, 보다 유기적인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연구가 부족했습니다.

이미 선진국에서 비슷한 시스템이 가동 중에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1970년 대부터 시작되어 심지어 온라인상에서의 문제까지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늦은 거지요. 또 그 범위도 매우 한정적입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아동인권부터 시작하는 종합관리시스템국가라는 중앙핵심기구가 없으면 유지-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종합정리

'아동 성폭력'은 심각한 '아동학대'입니다. 따라서 아동 성폭력 예방교육이란 아동학대를 방지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면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1년에 40분짜리 예방교육을 강당에 수백명씩 모아놓고 진행하는 정도입니다. 

이제는 정말 대중에게 관심이나 받으려 하는 개별정책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종합 관리 할 수 있는 마스터 플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문제가 생겼을 때 신고를 하면 피해자가 배려되는 조사가 되고, 피해자가 마음 놓고 치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동 성범죄 전문가 양성이 시급합니다. 아동의 특성과 여성 피해자의 심리를 고려하지 않는 지금과 같은 조사방식은 2차 피해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아이들의 말은 원래 앞뒤가 안 맞습니다.

<관련글>
아동성폭력, 어떤 사람이 가장 위험할까?
아동 성폭력, 착한 아이일 수록 더 위험하다
학교에 있는 10분동안 아무도 제지 안했다
아동 성폭력, 낯선 아저씨만 조심하면 되나?
어머니 폴리스 모집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
제2조두순 사건, 왜 아동성폭력에 분노만 하나?
화학적 거세를 하면 성범죄가 줄어드나?
성범죄가 만연한 세상을 탓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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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아동성폭력 이렇게 예방하자-1>

오늘(21일) 오전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고 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친구들이 대상이었지요. 어찌나 귀엽고 예쁘던지요. 너무나도 정직하고, 순수하게 반응하는 이 아이들과 함께 하면 저도 1학년이 된 것만 같습니다. 저는 성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마다 이 아이들의 꿈이 보입니다. 제 교육을 통해 이 아이들의 꿈과 생명이 지켜지길 기도하며 진행하지요.


그런데 항상 교육을 할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학교를 돌아다니는 동안 저를 제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학교 내부에서 이동하는 약 10여분 동안 저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있었던 "김수철 사건"의 악몽이 떠오른 순간이었습니다.


필자의 강의모습. 왼쪽은 중고등학교 강당교육, 오른쪽은 어린이집에서 이야기 및 체험교육 중이다.



사실 중고등학교만 해도 외부인이 오면 아이들이 먼저 반응합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아이들 특히, 저학년은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 김수철 사건도 있고해서 보건 선생님과 얘기를 했습니다. 다행이 얘기를 들어보니 이 학교는 CCTV가 충분히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선생님도 신경을 많이 쓰고 계셨습니다. 그나마 좀 안심이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김수철의 모습이 담긴 CCTV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이러지 못한 학교들이 더 많습니다. 적어도 제가 교육하러 갔던 학교는 상당수가 그랬지요. 해마다 약 1천여건 이상의 아동성폭력 중 약 200여건 이상이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죠. 상식적으로 보면 우리 아이들은 가정보다 학교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저는 학교를 개방하여 지역사회에 그 기능을 환원하는 것도 좋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방문자가 적어도 한번 거쳐가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학교 정문을 다 열어 두는 건 차량 통과 문제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요. 이것역시 외부인이 들어오는 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는 건지 저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왠만한 아파트도 차단장치를 설치하거나 외부 차량 또는 외부인이 경비실을 한번쯤 거쳐가게 되어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캐나다의 경우는 아무리 부모라해도 반드시 인터폰을 통해 연락을 해야지 직접적으로 교실에 들어갈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독일과 미국의 경우는 아동 성범죄자는 학교 주변을 아예 다닐 수 없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단 학교 관계자를 한번 거쳐야 하고, 우범자는 아예 접근을 못하게 하는 거지요.


학교에 들어서려면 "일단정지"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저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위험할 수 있으나 학교가 가장 위험하다 생각합니다. 요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초인종을 눌러야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데비해 학교는 너무도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 입구에서 아이들의 통학이나 안전을 지켜주는 경비를 배치하거나 최소한 차단장치 정도는 설치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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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 사건 이 후 불안감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영등포의 경우 일선 학교에 '어머니 폴리스'란 명칭으로 일종의 학부모 자율방범조직을 운영하려는 것 같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학교당 50명 정도의 모집을 경찰이 요청했다 합니다.그래서 '할당'이란 비판마저 나오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영등포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강원도나 남양주, 성남, 수원 등 여러 곳에서 어머니 폴리스를 모집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매우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요. 




먼저, 경찰 또는 국가의 책임인 치안과 국민의 생명보호 업무 특별히 어린이 보호의무를 부모에게 떠넘기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1차적 책임과 의무는 경찰의 몫이지요. 인력을 확충하거나 업무를 보다 분담하여 1차적 책임을 지려는 생각은 안하고 경로당 어르신들과 어머니들을 불러서 해결하려는 게 너무 안일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 이들은 대개 2인 1조로 움직이는 데요. 만약 어떤 문제에 실제로 직면하게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전업주부의 힘으로 흉기로 위협하는 범죄자를 제압하겠습니까. 경찰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신고하라 교육하겠다는 데, 이게 말이 되는 건지요. 만약 어머니 폴리스를 보다 확충하려 한다면 실제 경찰이 동행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합니다.




셋째, 학부모님들은 그렇지 않아도 너무 고달픕니다. 요즘 학부모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8-90%는 대개 맞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또 시간이 나는 전업주부라고 해도 이미 녹색 어머니회, 운영위원회 등 학교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게 참 많아졌습니다. 과도한 요구라는 거지요. 따라서 경찰의 이런 발상은 학부모나 일선 학교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경찰은 물론 이렇게 파편화 된 대책만을 내세우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조두순 사건 이 후 여러 기관에서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국회에 여러 법안이 상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통과된 것도 없고,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 그대로 파편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폴리스 역시 그 중 하나이구요. 뭔가 더욱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출처 : 보건복지부



아동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우선 우리의 인식자체를 바꿔야 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처럼 분노만 하고, 가해자 중심위주의 접근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권이란 큰 틀에서 아동학대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처벌강화와 남성의 성욕 억제위주의 정책을 탈피해야 합니다. 처벌도 중요하나 이것만 집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처벌을 강화하기 전에 처벌에 이르지 않는 현실을 보는 게 더욱 중요합니다. 또 성욕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분야까지 고려해야 하지요. 

끝으로 사회적으로 종합적인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가능합니다. 즉, 국가적 마스터 플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개별적인 대책은 아무 실효성을 거둘 수 없습니다.(조만간 자세하게 이 부분을 따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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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있었던 조두순 사건의 악몽이 지워지기도 전에 또 다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에서 혼자 놀고 있던 8세 여아를 김모씨가 자신의 집으로 끌고가 성폭행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여아는 수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고, 약 6개월 이상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와 심리적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동 성폭력에는 밤낮이 따로 없다.

먼저,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대낮에 어떻게...' 라는 말이 성폭력 특히, 아동 성폭력에 있어서는 별의미 없다는 것이다. 아동을 성폭행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열등감이나 공격성 등을 해소하기 위한 "약자탐색"만이 있을 뿐이다. 조두순도 그랬고, 오늘 보도된 김모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아동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우선 순위는 아이들이 절대 혼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여럿이 있어 자신이 상황을 제어하지 못하면 쉽게 범행대상으로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상황을 자신이 완전히 제어하고, 피해자를 무기력하게 하기 위해 '폭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실제 많은 성폭행 사건에는 심한 구타가 이뤄진 경우가 많고, 성인에 비해 저항할 힘이 약한 아동은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또한 피해자의 사정을 고려할 만한 그릇이 못되고, 자신의 내면적 불안정함을 해소하는 데 1차 목표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특히, 아이들)의 국부와 항문에 매우 큰 상처가 날 때까지 성폭행을 가한다. 


무섭고, 힘들었겠지만 용감하고, 침착했던 A양..

여기서 필자가 매우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매우 힘들겠지만 피해자(특히, 아이들)가 이 상황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야만 범인도 잡고,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 필자가 성폭력 예방교육을 나가면 혹여라도 있어서는 안될 이런 상황을 겪게 되었을 때 생존하는 법을 가르친다.

조금은 과한 듯 보이는 이 명제가 중요한 것은 실제 많은 성폭행 사건이 피해자의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질식사가 중요한데, 얼마 전 오산에서 있었던 40대 여성의 경우도 질식사했고, 광주에서 있었던 여교수 사건에서도 질식사했다. 이들은 피해자들의 비명 또는 울음을 막기 위해 손 또는 기타 도구를 사용하고, 이 때 질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나 만약 처하게 된다면 초기의 저항 이 후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전략을 취해야만 한다. 

오늘 보도된 A양은 8세에 불과했지만 이 점이 가장 중요함을 알았지 않았나 싶다. 대개 피해를 당하게 되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데, A양은 가해자가 잠든 사이 그 상황을 벗어났다. 얼마나 힘들고, 아팠으며, 무서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당시 상황을 벗어난 것을 보면 이 여아가 얼마나 침착하고, 현명하게 상황에 대처했는 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분노만 하고 대책은 없는 현실이 더 문제!

경찰의 추적으로 범인은 잡혔다. 그러나 피해아동의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동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참으로 무거운 가슴을 가눌 길이 없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필자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에 이렇게 공분하는 것이리라. 허나 언제까지나 분노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우리는 학교에서 1년에 약 10시간 책정된 성관련 교육시간조차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는 필자와 같은 전문강사를 불러도 약 40분만에 2-3가지 주제를 모두 다뤄달라는 요구를 한다. 수백명의 학생을 강당 또는 시청각실에 모아놓고 교육을 하라 한다. 이런 틀에 박히고, 형식적인 교육으로 과연 무슨 예방이 되고, 사후 처리가 가능하겠는가!

지난 번 조두순 사건 때도 모두 공분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대책을 약속했지만 그 후 바뀐게 무엇이란 말인가. 조두순 사건 이 후 약 30여개의 법안이 제시되었지만 실제 법사위를 통과한 것은 DNA정보이용법 정도에 불과하다. 또 우리 역시 당시에만 분노했을 뿐 정치인들에 대한 감시와 요구는 얼마나 소홀했던가.


정리하며

 성폭력은 성인에게도 큰 상처가 된다. 아이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피해자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볼 필요도 없다. 실제 이들은 매우 용감하고, 강한 생명력을 갖고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요즘은 '피해자'란 말보다는 '생존자'란 표현을 쓴다.

허나 그렇다고해서 아이들을 보호했어야할 어른들의 책임이 경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분노만 할 뿐 아무런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루 속히 책임있는 자세로 후속 대책을 통과시켜야 할 것이고, 학교에서도 실질적으로 내용있는 교육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동 성폭력 문제는 가정에만 책임을 지울 수 없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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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지난 참여정부만큼 보육이나 여성관련 이슈에 대해 깊은 관심과 구조적 틀을 만든 정권은 없었다. 분명 2010년을 사는 우리는 지난 정부의 정책 덕을 보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필자는 지난 5년간 20조나 쏟아부은 저출산 대책을 비판하고자 한다. 저출산 대책에 대한 방향성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또 다시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고도 실패하는 우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저출산대책 - 돈 줄 테니 애 낳아라?

작년에 국회에서 있었던여성정책조례 관련 토론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곳에서 필자는 각 지자체가 갖고 있는 출산관련 조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참으로 다양한 정책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출산을 위해 돈을 주겠다하는 것이었다. 둘째를 낳으면 얼마, 셋째를 낳으면 얼마라는 것이다. (아니 그나마 이런 지원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사실상 아무 대책도 없거나 있어도 형식적으로 있는 게 태반이다)


애를 낳지 않는 두 가지 이유

그러나 이는 지극한 단견에 불과하다. 우선, 오늘을 사는 부부는 출산비용이 없어 애를 낳지 않는게 아니다. 실제 지난 2005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저출산 의식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저출산 원인 1위는 '자녀양육에 따른 부담'이었다. 아이 하나를 기르기 위해 투자되는 어마어마한 사교육 등 비용부담이 보다 현실적이란 것이다. 보도에 따라 다르지만 아이 하나를 대학졸업까지 시키는 데 최소 1억이상이 든다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기혼여성에게 가사와 육아는 일보다 우선되거나 양보돼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남자의 61.1%가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성은 결국 자신의 경력을 단절시키면서 가사와 육아의 책임을 져야만 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는 현실 속에서 출산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출산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니 여성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현실을 보면 출산휴가라도 쓰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여성이라도 출산을 할 마음이 싹 달아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시장'과 '자율'에 맡기면 보육의 질이 올라가나?

지난 5년간 있었던 저출산 대책의 또 다른한 축은 바로 보육이다. 실제 약 20조 이상 투입된 정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예산의 70%정도인 약 14조원이 보육관련 예산으로 쓰였다. 이에 대해 매일경제신문은 보육정책을 '실패'로 규정하며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보육정책의 대안으로 '시장'과 '자율'을 들고 있었다.(기사참조) 그러나 필자는 궁금하다. 정말 시장과 자율에 맡기면 보육의 질이 올라가고, 이에 만족한 부모들이 출산을 하겠냐는 것이다. 

지금 문제는 애를 온전히 맡길 데 자체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중요하다. 물론 통계상으로는 남아돌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보육의 질을 떠나 절대적으로 맡길 수 있는 가까운 어린이 집 자체가 부족하다. 특히, 장애아동의 경우는 맡길 수 있는 곳이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 살리기 명목으로 우선 삭감된 복지예산 부족과 의지부재 때문 아닌가? 출산과 양육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려는 너무도 가부장적인 사고 때문 아닌가? 시립과 구립 어린이집은 정말 너무 부족하다. 왜 사설 어린이집에만 예산을 투입하고, 시립과 구립 어린이집 건축에는 이리도 소홀한가.


어떻게 해야 저출산을 극복할 수 있는가?

저출산 문제 해결은 사실 이미 답이 나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나라 중에 스웨덴의 경우만 간단히 보도록 하겠다. 스웨덴은 사실 우리와 같은 저출산 문제로 고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대적인 저출산 극복 대책을 시행했다. 저출산 극복 대책의 핵심은 한마디로 "취업과 양육 양립지원"이었다.
 
스웨덴은 우선 양육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육아휴직 제도인 데, 스웨덴은 아빠의 육아휴직 기간을 30일로 의무화해버렸다. 엄마 뿐 아니라 아빠에게도 양육의 책임을 나누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육아휴직 동안도 여전히 급여를 지급하는 데, 소득의 80%정도를 보전해주고 있다. 보육의 경우 양질의 보육을, 충분한 접근성과, 공공재원을 통하여 제공한다는 세 가지 원칙을 갖고 적극 지원했다. 그 결과 보육부문 지출은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약 2%정도를 차지하고, 부모의 보육비 분담비율은 전체 보육비용의 11%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스웨덴의 노력은 실질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약 1.5명 수준이었던 출산률이 약 1.85명까지 올라간 것이다. 여기서 함께 보면 좋을 것이 바로 여성의 취업률인데, 스웨덴은 2006년 기준으로 남성 82%, 여성 78%로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또한 양성평등 지수 역시 세계 최고의 수준을 보이며 삶의 질이 매우 높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즉, 저출산 문제의 해답은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부부가 함께 지는 양성평등 문화에 그 첫째가 있다. 두번째는 보육의 공공성 확대이고, 세번째는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확대 및 실질적 보장 끝으로 네번째는 가족친화적인 기업문화 확산에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며

우리 사회가 더욱 양성평등하고, 국가의 책임을 분명하게 확인하며 가족친화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결코 저출산 문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출산지원금은 출산에 따른 보조 또는 도움은 될 수 있을망정 근본적인 저출산 대책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라는 요구는 말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출산과 양육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며 국가의 책임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출산과 양육은 어디까지나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할 부분이지 결코 여성에게만 부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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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안 낳을거야?

엄마를 빼닮은 3.3kg의 건강한 딸아이를 낳았습니다.(관련글 : 1억이면 어떠랴 네가 주는 행복이 그 이상인데..) 이 녀석을 낳기 전날밤도 잠못 이뤘는 데, 녀석을 안고 나니 또 잠 못 이루고 있습니다. 하하, 주책맞아 보이긴 해도 너무 좋으니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맘을 흐트러놓는 말이 있습니다. 출산을 축하하기는 한데, 셋째는 안 낳을거냐는 것입니다.

이 분들은 저와 아내, 아기를 축복해주러 오셨습니다. 서로 가까운 관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이 분들의 의도가 나빠서가 아니라 이 한마디에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보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남자애 하나는 있어야해!

최근 양성간 성비를 보면 지난 96년 여아 100명당 남아는 111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08년도의 경우 106.4명까지 줄었습니다. 또 호주제 폐지와 사회적 성별역할에 따른 생각이 바뀌면서 남아 선호사상도 많이 줄었다 합니다. 심지어 부산일보의 2010년 1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여아를 낳기 위한 비법까지 등장했다 합니다.


하지만 이 분들의 한 마디 속에서 우리는 여성이 살아가기 너무도 힘든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고,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져도 외모가 딸리면(?) 취업조차 할 수 없는 현실과 출산과 동시에 모든 꿈을 접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뚜렷한 이유는 없으나 '어쨌든' 남자애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남아선호를 보게 됩니다. 말로는 부정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여전히 이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지요. 

예, 우리는-2009년 보고된 세계성격차보고서에 따르면-양성평등 순위가 134개국 중 115위 밖에 되지 않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아쉽습니다. 분명 일상에서는 여성이 더 기를 펴고 사는 것 같고, 남성은 인권을 보장하라는 개그프로까지 있는 데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성격차가 심하다는 거지요.


출산 보조금으로 출산율을 높인다?

저는 이런 우리 사회의 후진성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가 굳이 '후진성'이라 표현한 것은 세계적인 흐름에서 너무 뒤쳐진 우리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미 소위 말하는 선진국은 양성평등을 국가적 주요과제로 설정하고, 지속적인 정책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실제 이를 통해 출산률은 물론 삶의 질을 높이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실제 스웨덴은 낮은 출산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어설픈' 출산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아니라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여 출산율을 높인바 있습니다. 프랑스는 여성 정치인 50%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 30%를 법제화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양성평등에 신경을 쓴 것은 양성평등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국가경쟁력과 삶의 질을 훨씬 높일 수 있다 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교육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양성평등 교육을 반드시 이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부실합니다. 교사부터 훈련되어 있지 않으며 연중 이벤트성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양성평등 선진국인 노르웨이의 경우 교사는 물론 어릴 때부터 꾸준히 양성평등 교육을 하고 있고, 이를 통해 남녀 즉, 양성모두 더욱 삶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련글 : 나는 왜 양성평등 운동을 얘기하는가남자인 내가 여성단체에 들어간 이유)

양성평등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시대적 흐름을 보아야..

저는 딸아이를 잘 기를 자신도 있고, 충분히 노력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의 노력과 자신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구조적이고 의식적으로 양성평등을 이뤄가야만 가능합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삶의 질 및 국가 경쟁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성범죄 문제와도 긴요한 관계가 있으므로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아에 대한 개념 역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와 경쟁하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 양성성을 고루 갖춘 인재로 자녀를 양육하지 못하면 내 아이는 결국 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영어와 수학도 중요하나 그 이전에 성평등 교육부터 해야한 다는 것입니다. 성평등 교육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존중으로부터 시작하는 전인교육이므로 가정에서부터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관련글 : 지금은 자녀교육의 방향성을 고민해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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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까지는 아니더라도 호르몬제 주입으로 성욕을 감퇴시켜 성범죄율을 낮추자는 취지로 나옵니다. 지난 번 조두순 사건때도 강하게 제기되었고, 이번 김길태 사건(가제목, 이하 김길태 사건)에서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써 성범죄와 피해자(또는 생존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성폭력은 성충동을 제 1원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우선 성폭력에 대한 얘기부터 좀 해야겠습니다. 성폭력은 상대방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습니다. 흔히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으로 구분하곤 하지요. 그런데 이는 단순히 성욕이나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치부해서 원인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충동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많은 사건이 매우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이는 양성간 위상 또는 지위 등 평등문제와 더 연관이 깊다는 것입니다.

제가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자, 사무실에 여자 사장님과 남자 부하직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 사장님이 매우 아름답다 해봅시다. 그러면 성충동을 제어못한 남자 부하직원이 여자 사장님에게 성희롱이나 추행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해고될 수 있는 직접적 부담이 있기 때문이지요. 허나 반대로 남자 부하직원을 향해 여자 사장님은 부담없이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미스터 k, 오늘 셔츠 섹시한데~"


징벌적 차원의 화학적 거세로는 성폭력 예방이 어려워

자, 그렇다면 우리가 화학적 거세를 하자는 처음의 이슈로 돌아와 봅니다. 우리가 이를 시행하자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는 이들의 성욕이 성범죄에 주요 원인이고, 이것을 줄이면 성범죄가 줄 것이란 기대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요.
 
만약 예쁜 여성에 대한 성욕이 성폭행의 직접적 원인이라면 우리는 영아로부터 8-90대 노파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성폭행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노출이 잦는 여름에 더 많아야하는 데, 꼭 그렇지도 않음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많은 남성들이 잠재적 성폭력 범죄자란 매우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성충동은 충분히 제어가능하지요. 저는 제어불가능하다 하는 남자를 본적도 없고, 만약 그런다면 우리 나라는 지금 성폭력으로 넘쳐 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지요. 대부분 선량한 남성들은 성충동 제어를 할 수 있고, 또 교육이나 치료를 통해 그렇게 만들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잔혹한 범죄가 있어야만 관련 법률정비와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쏟는 걸까요. 저는 조두순 사건이 후 나영이 등과 같은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 수없이 존재하는 어른 나영이 즉,
성인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전무함보았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조두순 사건을 모두 끔찍하게 기억하고는 있으나 이 역시 얼마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지며 우리는 아무런 제도도 정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김길태 사건이 터지자 또 다시 나오는 얘기가 징벌적 성격이 짙은 "화학적 거세"입니다. 화학적 거세를 떠나서 우리는 성폭력에 대한 예방교육과 관련 대책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앞으로 또 다른 김길태, 조두순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니 제가 씁쓸할 수 밖에요. 분명 이쪽일을 하는 사람으로써 이런 관심과 사회적 분위기가 더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거라 생각되지만도....그 원인을 짚어내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친 처방을 내려 보다 본질적인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며

저는 이 안타깝고, 끔찍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좀 변했으면 합니다. 우선 관련제도 정비를 해야합니다. 꾸준한 예방교육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이 잘 서야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를 돕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것만을 강조하면 국가의 책무성에 대한 부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두번째로 감정적 차원에서 징벌적 요구를 하는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피해자(또는 생존자)를 동정적인 시선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이들은 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관련제도 정비 후 법에 따라 분명하게 처벌 및 교육, 치료를 해가야하는 것이지 우리 감정에 따라 죽여라 살려라 한다면(그 울분과 안타까움은 이해되나)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체계와 토대를 만드는 것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덧1) 부족한 글이 다음 메인에 실렸습니다. 방문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허나 화학적 거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논의가 진행되는 듯 하여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양깡님의 "조두순 사건, 화학적 거세가 정답일까?" 가 가장 쉽게 잘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덧2) 이 글은 1편만이 아닌 후편이 하나 더 기획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내에 업로드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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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소녀시대는 보호해줘야돼”

“야, 카라를 빼면 어떡하냐. 카라도 같이 보호해 주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어쩌다보니 걸그룹 얘기가 나왔고, 이들이 소녀시대와 카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줘야 한다 얘기합니다.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왜 보호해 줘야하는 데?”

“야, 소녀시대 없었으면 나 군대 제대 못했다. 걔네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한줄기 빛이야. 걔네들은 어떻게든 보호해 줘야돼”

  친구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 했습니다. 유독 요즘은 걸그룹이 인기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보기


이 글은 경기도여성능력개발센터에서 발행하는 웹진 '우리'에 필자가 보낸 글입니다. 이에 전문을 싣지 못하고, 링크해 두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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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 걸그룹 멤버들의 뱃살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소녀시대의 태연이나 카라의 구하라 등이 그 예입니다. 아, 그 전에 고현정 씨의 경우도 뱃살 보도가 나왔지요. 댓글이나 기사 제목을 보니 '귀엽다' 등의 반응이 대세이긴 했지만 이 기사와 반응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건 왜일까요.


여성의 몸과 시간의 흐름

과거 여성들은 사회적 진출과 성공이 제한된 조건속에서 권력이 있는 남성의 여인이 됨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모를 가꾼다'는 것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였던 것이고, 시대의 이상적 기준에 부합하는 소수만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한서설아 '다이어트 성정치' 참조) 


그러나 이것이 자본을 만나자 달라졌습니다. 사람의 몸과 특히, 여성의 성이 매우 매력적인 상품이 된 지금은 여성의 외모가 '경쟁력'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튼튼한 허벅지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소녀의 청순함과 이에 대비되는 섹시함은 어려운 사회적 환경과 결합하며 걸그룹의 열풍을 만들어내기도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보드리야르가 그의 저서 <소비의 미학>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육체 그 자체와 육체를 이용한 사회적 활동 및 정신적 표상은 사유재산과 똑같은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라고 하기도 했던 것처럼 외모 그 자체가 재산과 같은 최고선의 지위에 오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걸그룹은 청순하면서도 섹시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보드리야르의 명제가 남배우들보다 유독 여배우들에게 혹독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과거보다 좀 더 나아진듯한 여성의 위치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앞서 잠시 얘기를 꺼냈던 여배우들에 관한 얘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여배우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우리는 말로는 '배우는 연기로 승부해야' 라고 하지만 여배우는 '예쁘면서 연기도 잘해야한다' 라는 명제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물론 그 반대도 성립가능 : 예쁘면 연기 못해도 봐줄 수 있다). 또한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면 전통적으로 적용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이 추가로 적용됩니다. 나이를 먹어도 남자 배우들은 중후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비해 여배우들은 젊은 여배우들로 대체되어 갑니다.

저는 우리 나라 여배우들의 현실적 위상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여배우는 예뻐야한다는 것이나 걸그룹은 보호받아야할 만큼 청순해야만 하며(동시에 섹시함을 요구하는 아이러니), 그의 뱃살마저 머릿기사가 되어야하는 현실인 것입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카트린 방셰는 <욕망의 심리학>에서 "사회가 부과하는 이미지들은 교육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또는 미디어와 광고가 점점 더 중요하게 차지하는 역할을 통하여 우리의 사고방식에 파고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자리잡은 가부장적 또는 남성중심적 관점을 통해 '이런 것이 당연해' 라는 얘기를 하며 미디어와 광고를 통해 그들을 동경하며 '이상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이는 여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지요. 흔히 우리는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얘기를 하는데요. 가만보면 웹상에 인기 여배우들의 뱃살이나 굴욕 사진을 올리는 건 여성유저들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 악플을 달기도 하고 말입니다. 여성 역시 남성 중심으로 편재된 자본과 기준에 따라 미의 기준을 적용하고, 이에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배우들의 뱃살을 허락하라!

저는 좀 더 우리 사회가 여배우들의 뱃살에 관대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성년자 걸그룹을 벗겨가며 섹시함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슬럼프에 빠졌던 여배우가 노출을 하며 복귀하는 악습도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그 이면에 자리잡은 외모 지상주의와 자본, 남성중심적인 미적 기준 등을 극복해가는 결과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것과 자신의 직업에 적합한 몸이 아름다운 것이지 특정한 몸매를 만드는 게 아름다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획일화된 사고방식은 심지어 '파쇼'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김연아와 소녀시대는 물론 장미란의 악력과 이상화의 근육도 아름답다생각이 필요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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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는 조금(?) 내용이 길어집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1.시대적 배경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진행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계몽주의 당시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미래의 진보성에 대한 낙관을 바탕으로 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 영향을 받은 초기 페미니즘은 이성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신념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19세 중엽 산업혁명의 발생입니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입니다. 이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는 여성에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여성은 일종의 '동산'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낮은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장제 기계공업이 들어오자 여성 노동력에 대한 가치는 더욱 떨어졌고, 남성에 비해 반도 못되는 임금을 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때 여성은 프랑스 혁명 이 후 제기된 공사분할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고, 이것은 장시간 노동에 의해 어머니로써의 역할에 소홀한 여성을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바로 이런 시기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2.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적 발전

(1)18세기 페미니즘 :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교육 18세기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여성의 지위가 더욱 내려간 시기입니다. 바로 이럴 때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 크래프트가 등장했습니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성서이자 선언문인 “여권옹호론”을 저술했는 데요. 이 책은 사실 당시에는 큰 영향이 없었습니다. 진정한 재평가는 1970년대부터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초기 루소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윽고 자신만의 색깔을 내게 됩니다. 그녀는 상류층 여성의 삶을 보면서 여성은 상하류층을 막론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는 그녀의 어린 시절의 삶 즉, 결혼은 법으로 보장된 매춘이란 생각을 할 정도의 불행한 가정환경과 상류층 여성들의 어리석은 삶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이런 삶의 원인으로 불합리한 사회제도의 모순 특별히 불평등한 교육제도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예 자신이 27세 때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시기 많은 진보적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때,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초기 그녀는 이를 매우 환영했습니다. 사회변혁이 없이 교육의 변화도 없고, 여성의 변화도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곧 실망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여성이 소외되고, 이 후 공포정치가 자행되는 걸 보았던 거지요.  또 이 때 탈레랑 같은 혁명가와 대화하며 그녀는 <공공교육에 대한 보고서>에 대한 답신으로 여권옹호론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특별히 여자 어린이 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당시로써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상류층 여성들도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었는 데, 그것도 평민의 여아 교육을 얘기했으니 말이죠. 또한 여자로써 최고로 행복한 것은 남성에게 경제적,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에 쓸모 있는 시민이 되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자체가 여성이 배제된 남성의 권리에 대한 것이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층을 대변하는 온건파로 분류되어 계층성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2)19세기 페미니즘 :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엇 테일러 밀은 부부입니다. 그래서 밀스라고 하지요 ^^ 이 둘은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특히, 존 스튜어트 밀은 15년을 넘는 사랑속에 여성에 대한 의식을 더욱 고취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또 나중에 둘이 결혼한 이 후에는 J.S밀이 쓴 걸 테일러의 손을 거쳐 출판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은 사실상 하나라고 하고, J.S 밀의 경우 자신은 그녀의 제자였다고까지 합니다. 아무튼 뭐 그렇구요..ㅎㅎㅎ 

밀스는 만일 사회가 성적 평등 또는 성별 정의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 사회는 여성에게 남성이 향유하는 것과 똑같은 교육뿐만 아니라 똑같은 정치적 권리들과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투표권은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러한 체계들, 구조들 및 태도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거지요. 

(성정체성과 사회적 환경)-밀스는 여성성, 남성성 이라는 것도 원래 본질적이란 믿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는 오히려 사회적 학습에 의한 것이라 보았고, 여성이 이제껏 억압당했던 것은 시대에 따른 사회적 환경이 남성지배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오늘 아침 여기까지 저하고 함께 가볍게 짚어 봤습니다. 다음 이시간에는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주로 공부했던 게 바로 맑스주의 페미니즘인데요. 이게 내용이 엄청 많습니다. 그러나 초 압축 신공을 발휘하여 흐흐흐흐~~~ㅋㅋ 한시간동안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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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일반적 분류

1)일반적 분류(분리주의적 접근)

1세대 페미니즘 : 자유주의 페미니즘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2세대 페미니즘 : 20세기 중반(1960년대부터)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분리주의적 접근은 페미니즘의 흐름이 단절되고, 여성의 문제가 본래적 문제임을 은폐 즉, 처음부터 있었던 문제임을 설명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2)재구성의 흐름

혁명기-자유주의-도덕적 사회주의, 맑스(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의 주요내용

1)혁명기 페미니즘

: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주류를 이루기 전까지의 페미니즘을 의미한다. 이 때는 계몽주의 등 합리성과 인권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던 시기였고, 프랑스 혁명을 대표로 하는 민주의식의 고양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제기된 인간의 권리는 소유권의 권리로 환원되며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분할이 이뤄졌고, 이 속에서 여성은 소외된 존재로써 공사분할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운동 역시 소유권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어 결국 이 시기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써의 성격을 띄며 그 한계성이 있었다.

혁명기 페미니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노동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로서 노동권이라는 관념은 여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로서 ‘여성권’이라는 관념을 도출되었다. 생시몽주의 여성들은 이러한 여성권을 성적 차이의 권리, 즉 모성과 성욕에 대한 여성의 권리로 구체화했다. 생시몽주의 여성들은 여성권을 노동권과 더불어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 권리로 만들고자 했고, 따라서 여성권에 기초하여 남성과 동등하게 공동체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 때,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협동조합, 노동조합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여성해방과 사회변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남성성, 여성성의 성적차이에 의한 공사분할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여성해방과 사회변혁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성욕을 포함한 여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푸리에는 가족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가족의 속박을 벗어날 때만 여성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하다 보았다. 생시몽은 여성메시아를 주장하며 자본주의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는 사랑과 재생산능력을 보유한 여성의 본성만이 가능하다 보았고, 여성 육체에 대한 긍정을 얘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시기 주목할 나라로 영국과 미국을 더 볼 수 있는 데, 우선 영국은 차티스트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티스트 운동 당시 핵심은 남성의 보통선거권이라 할 수 있고, 이들은 자신이 여성의 권리를 대변할 수 있다 보았다. 또한 여성 역시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계급차이에 의한 억압에서의 해방 즉, 여성도 곤궁할 수밖에 없는 상황개선이라는 진일보성을 고려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가족과 남녀관계의 안정이라는 거대한 테제속에 진행된 것이라 한계가 존재한다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인종과 성별차이에 대한 갈등이 계속 되었다. 노예폐지운동과 참정권 운동 역시 여성 그 중에서도 흑인 여성이 배제되는 가운데 이 같은 수정헌법의 내용을 어떻게 지지할 것이냐는 논쟁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보편적인 투표권 운동에서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만이 투표를 한다는 보수적 퇴행 아래 사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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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게 얼마전 있었던 "꿀벅지" 논란과 관련해 의견을 물으셨던 분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1)사건개요

얼마 전 모 그룹 멤버의 "꿀벅지" 논란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사건은 이 여가수의 허벅지를 꿀벅지라 하는 걸 보고 한 여고생이 여성부 게시판에 이 용어를 쓰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후 인터넷 상에는 수많은 논쟁이 오고 갔는 데, 그 핵심을 정리하자면 1)칭찬을 성희롱이라 여기는 과민반응이라는 측과 2)꿀벅지가 음담패설의 한 용어로 사용되던 것인데 이걸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건 안된다는 측 3)끝으로 여성의 몸을 음식에 비유했으므로 명백한 성희롱이란 세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여성부의 입장성희롱은 피해자의 모멸감 등이 핵심기준이므로 개인적인 문제라는 의견을 밝혔고, 언론사의 표현을 규제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문제제기

그러나 돌아볼 문제이다. 과연 성희롱 문제를 이슈화 하며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는 무엇일까. 당초 시민사회측에서 이 얘기를 꺼냈던 건 기존에 만연화 되어 있던 남녀의 성차별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또한 여성 등의 성을 하나의 객체로 바라보며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것을 제도화 된 방식으로 표출한 게 바로 성희롱 문제였고, 성희롱 문제를 통해 문화를 바꾸는 통로를 여는 데 그 본래적 의미가 있었다.

만약 이걸 보지 못하고 '성희롱이 무엇인가?', '굴욕감의 기준이 뭐냐?', '어떻게 처벌해야 하느냐' 라는 데 묻혀 버리면 성희롱 문제는 아무런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루한 논쟁에 빠져 버리기 쉽다. 성적 굴욕감이나 처벌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성차별적 (조직)문화이고, 이것이 왜 어떤 구조로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느냐인 것이다.


3)실망스러운 여성부의 입장

꿀벅지 논란은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특히, 여성부의 입장은 더욱 그렇다. 우리가 한 여고생의 지적을 보며 주목해야하는 건 '과연 이것이 성희롱이냐 아니냐' 가 아니다. '왜 꼭 칭찬을 성별화 된 방식으로만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몸"과 "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육덕"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 문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 논쟁의 이해당사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이걸 보고, 지적하지 못하게 되면 "그럼 너네도 초컬릿 복근이라 하지 않느냐' 라는 말이 나오며 지루한 말꼬리 잡기가 이어지게 된다. 또한 '남자들은 다 그런 존재' 라는 말이 나오며 여성부처럼 "개인적인 문제"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나온다. 어떻게 이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여성 문제를 비롯 성차별적 구조를 확인하고, 양성평등이란 세계적 흐름을 만들어갈 여성부에서 나온 대답이라 하기엔 정말 실망스러운 "단견" 이라 아니 할 수 없다.


4)육덕이 지배하는 문화

다시 필자가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와 보도록 하자. 요즘 방송을 보면 "육덕", "짐승돌" 등의 용어가 칭찬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먼저 "왜 꼭 성별화된 방식으로 칭찬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자본과 미디어 산업의 발달이 가속화 시킨 여성 또는 남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필자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성별 불평등 권력관계를 작동하는 중요한 기제가 되고 있다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은 잠시 접어둔다쳐도 "건강" 과 "삶의 질"을 얘기하며 시작되던 "몸"에 대한 관심이 왜 이렇게 변질된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5)꿀벅지 논쟁을 보며 웃고 있는 건

여기서 잠시 자본의 상술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필자는 앞서 이 논쟁의 이해당사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하였다. 과연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데로 "남성"과 "여성"일까? 필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양성간 진행된 논쟁을 통해 그 반사이익을 보는 건 모 여가수를 모델로 채용했던 소주회사이고, 이를 긴요한 방송소재로 사용했던 방송사였기 때문이다. 즉, 일종의 문화상품으로서의 여가수와 그녀에 대한 관심과 집중을 통해 누가 반사이익을 얻었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에 주목해야 하는 건 이것이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슈화 되었으며 또한 전개되었고, 또 다시 다른 이름으로 반복 재생산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때마다 이 논쟁에 휩싸여 공연한 힘을 빼야하는 걸까. 지금 이 꿀벅지 논란을 보며 웃고 있는 건 남성과 여성 그 누구도 아닌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6)정리

성희롱 문제는 성희롱 자체에만 국한해 볼 수 없다. 아쉽게도 지금 우리는 그런 측면이 매우 많으나 만약 계속 이런 식으로 성희롱 문제를 접근한다면 성희롱 문제를 제기했던 그 본래적 의미는 사라지고, 지루한 말싸움과 상처 입은 감정만 남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희롱이란 문제를 왜 제기했는지 그 속의 함의를 보고, 문화를 바꿔나가는 노력을 경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꿀벅지 논란 역시 마찬가지이다. 꿀벅지란 용어 자체와 성희롱 문제 자체만 바라보면 끝없는 감정싸움만 나오게 된다. 필자는 이를 통해 우리는 '왜 성별화 된 방식으로만 칭찬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논쟁의 뒤에는 은폐된 자본의 상술과 우리 사회의 "육덕문화" 그리고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취업조차 할 수 없는 구조가있다. 우리가 이를 보고, 변화의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제2, 제3의 꿀벅지는 언제든 재생산 될 것이다.


<출강문의-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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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사람은 역사적 존재(하이데거)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 인식의 한계성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정신과 의지를 통해 한계의 범위를 확장하고,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도모할 수는 있다. 명확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판단, 노력은 우리 삶의 진보를 가져오는 힘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만이 희망인 이유이다. 또한 이 글은 필자의 이와 같은 신념위에 쓰여질 것이다.

두번째로 이 글에서 필자는 성폭력의 원인을 나름의 시각으로 고찰하고,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사회변혁과 제도 개선도 필요하나 성폭력 문제는 제도의 확립만으로 예방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회과학적 접근보다 철학적 접근을 그 방법론으로 택하게 될 것이다.


성폭력 원인에 대한 다양한 접근

2.성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어떤 여성운동가는 "습관" 이라 얘기하기도 한다. 성구매를 하는 습관, 접대문화속에 여성을 부르는 습관 같은 성매매 습관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습관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기껏해야 2등 시민이란 인식을 갖게 한다 이야기 한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성폭력은 양성간의 문제 뿐 아니라 아동과 동성간에도 이뤄지는 것이기에 이는 한계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의 연구는 일탈행동을 얘기하기도 하고, 문화를 얘기하기도 한다. 갈등주의적 접근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현상에 대한 연구로써는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이면에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이면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작금의 물신주의와 힘과 권력에 의지한채 객체화 된 사람의 성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라 하겠다. 


물신주의와 지배욕에 대한 구체적 접근

3.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 사회전반의 풍토에 만연해 있는 물신주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게 한다. 즉, 인격과 그 존엄성을 보지 못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보게 한다는 것이다. 객체로 전락해버린 인간의 몸과 성은 더 이상 존중받을 대상이 아니게 된다. 하나의 물건처럼 사고 팔며 성적 욕구의 만족을 위한 "도구"되어 버리게 된다.

또한 지배와 통제의 욕구라는 인간의 본성은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힘과 권력의 차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불평등한 위치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집단의 문화에 결탁하며 내 자신을 은폐하고, 반복 지속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강자 앞에서는 숨기다 약자 앞에서 야수적 본성으로 표출하며 피해자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게 된다.

자, 이제 이런 관점으로 성폭력을 다시 보도록 하자. 우선 성희롱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희롱에 대한 법령이 형법이 아닌 남녀고용평등법에 제시된 것부터 생각할 수 있다. 남녀간의 사회적 위치와 힘의 차이가 바로 성희롱을 일으키는 원인이라 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성 상사가 남자 부하직원을 성희롱 하는 것도 이해되고, 심리적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자 상사를 반권력적 성희롱 모델에 따라 성희롱 하는 것도 이해되게 된다. 이들에게 성희롱 대상자는 더 이상 인격체가 아니고 내 위치와 힘을 이용해 성적 유희를 즐기거나 희롱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두번째로 성폭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부는 여성의 야한 옷이 성충동을 일으켜 우발적으로 범행이 일어나게 한다 하지만 실제 성폭행 사건은 70% 이상 계획된 범죄이다. 또한 동성간에도 성폭행이 일어나고, 아동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범죄를 보면 어떠한가. 이를 보며 필자는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굽신거리다 조금이라도 약한 자에게는 그 태도가 돌변하는 노예근성 같은 지배욕과 동물적 본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마음이 필자 개인만의 것이라 쉽게 치부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시대를 탓하기 전에 내 자신부터!

4.린다 레드레이는 "성폭력은 성적만족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격앙되고 과격한 욕구의 표현" "성폭력의 기저는 폭력, 분노와 지배욕"이라는 말을 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그녀의 견해가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성적 불평등이 시작된 이래 양성간에 가해진 성폭력은 물론 최근 이슈가 되는 동성간, 아동 성폭력 역시 이 모든 것에 그대로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악마와 계약을 교환하고 풍부함을 대가로 초월성과 목적성을 팔아 넘겼기 때문에, 이제는 목적의 부재에 괴로워하고 있다"라고 하였던 보드리야르나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 하는 병든 현상"이라 진단한 소로스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이는 비단 경제와 문화 뿐 아니라 성폭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조차 나를 알 수 없게 하는 이 정신 없는 시대는 성폭력의 수위와 양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어떤 정신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또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의 변화가 사회가 변하게 하는 밀알임을 상기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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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성적 불평등의 기원과 양성평등운동

1.초기 원시공동체는 "성적 불평등" 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별 차이에 따른 "분업" 만 있었습니다. 이 때 말하는 성별 분업은 아직 농경사회로 진입하기 전이기에 지금 생각하는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문제로 여성의 경우 채집경제를 이루고, 남성은 수렵경제로 이뤄지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모계중심 사회구성)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 수 있습니다. 자연상태에서의 남성은 여성보다 물리적으로 강하니 더 많은 생산물을 얻는 여성을 남성이 지배하려 들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왜 남자가 굳이 수렵을 떠나냐는 거지요. 그러나 이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크나 홉스 같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완전자연 상태에서는 성적 불평등이 없었다 얘기합니다. 언뜻 보면 남성이 위력으로 여성을 지배할 것 같지만 특히, 홉스의 경우는 이것이 문화 속에서 이뤄진 것이지 원래 자연적으로 있던건 아니라 보았던 것입니다. 
 

예, 그렇지요. 누군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은 아직 조금 더 지난 뒤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 때, 여성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따른 정착이 보다 자연스러웠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남성은 이동이 많은 게 더 당연한 것입니다.


2. 아무튼 초기 원시공동체가 도구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 증대에 이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농경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성의 힘이 더욱 중요시 되겠지요. 또 본격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생산물에 대한 집착이 시작됩니다. (사유재산의 발생) 이제는 전쟁을 통해 이웃 부족을 공격하며 그 생산물들을 가져오고, 노예를 만드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노예"의 등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노예란 곧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노동력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즉, 경제잉여가 더욱 커지는 조건이 되고, 이를 통한 계급의 형성과 고착의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는 점점 여성의 모계 중심구조에서 남성중심으로 변해가겠지요. 잦은 전쟁과 모든 생산의 중심에 남성이 있고, 상대적으로 여성은 그 중심에서 점점 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가 나오게 되는 시점이지요. 또 여성을 소유 또는 규제하기 위한 여러 이데올로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예 : 정절이데올로기, 양성에게 주어지는 성역할 등..) 

이제는 사회의 문화 자체가 여성 스스로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인 측면 모두 더욱 남성에게 의존하도록 그리고 원래 이런 것이라 믿겠금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거지요.


초기-->원시공동체-->농경의 시작-->잉여와 사적소유발생-->전쟁을 통한 노예의 획득-->계급의 형성과 가부장제의 성립-->밀려나는 여성의 지위-->각 종 이데올로기와 성체제(sex-gender system) 형성(문화적 재생산)

우리는 지금까지의 흐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 세 가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물질(재물따위)"과 "힘" 그리고 "문화" 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양성간 차별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가장 큰 이유라 볼 수 있겠습니다.

(흔히 양성의 생물학적 차이나 고정된 성체제 때문에 성적 불평등이 일어났다 하는 건 그 이면에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놓치고만 것이지요. 또한 이것이 생기게 된 변증법적 과정과 논리적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자, 지금까지 제가 성적 불평등의 기원을 고찰해 보았는데요. 중요한 건 이렇게 성립된 체제가 여성은 물론 남성 스스로에게도 부담을 주는 굴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기쁨이 없는 서로 힘든 세상이 되었단 거지요.

즉, 과정에서 여성의 소외와 억압 뿐 아니라 결과적으론 양성 모두 상처만 남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양성평등 운동과 이를 위한 노력이 왜 중요한가 나오게 됩니다. 저는 양성평등 운동의 지향점이 기존의 양성대립적 시각에서 벗어나고, 사회구조의 변화를 꾀하며 양성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다성평등은 논외). 이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현실을 인식하고, 변화하게 하는 일종의 자기해방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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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 남편, 여성단체에 취직하다

약 백여일간의 전업주부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여성단체에서 양성평등 및 직장내 성희롱 예방 전문강사로써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 취업소식을 들은 주변 반응이 참 흥미롭습니다. 도대체 왜 여성단체에 남자가 들어가 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들으며 일단 그 바탕에 깔린 생각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엔 '여성단체는 남성과의 대립(싸움)을 주로 조장하는 데 네가 자기편 자리도 제대로 못보고 갔다' 는 게 첫번째이고, '여성단체에서의 활동은 여자만 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또한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이게 순전히 제 오해이면 참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여성단체에 들어간 논리적 이유 세가지

우선, 여성운동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며 글을 전개해 가야겠습니다. 흔히 여성해방, 여성운동 등을 총칭해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쓰곤 합니다. 예, 사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작되었고, 자연스레 남성과의 대립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지금도 여성운동 진영의 얘기를 듣다보면 '남자는 다 죽일놈' 또는 '남자는 모두 잠정적 범죄자'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여성운동은 기존의 여성해방 논리의 한계에 봉착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여전히 여성의 입장에선 여러 문제가 상존한다 보겠지만 지금과 같아서는 남성과의 대립만 있을 뿐 더이상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운동의 효율성 및 여성의 삶의 질 등과도 직결되는 것이기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고, 이것은 또한 남성의 삶의 질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쪽은 자신이 불행하다 느끼고, 다른 한쪽은 내가 수세에 몰린다 느끼며 서로 행복한 삶을 살 순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여기서 봐야하는 게 바로 "흐름"입니다. 즉, 지금은 애나 어른이나 양성평등의 개념 없이 살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싫든 좋든 이 나라가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려 발버둥을 치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려 애쓰는 이상 결국 우리는 양성평등의 시대로 접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여성" "남성" 만으로 사는 게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대라는 거지요. 이 흐름을 놓치면 결국 아무리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직장에서 용을 써도 모든 개인과 이 나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끝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바로 "양성평등 운동의 지향점" 입니다. 양성은 서로 화성과 금성에서 온 것처럼 많은 차이가 있다 합니다. 예, 살다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너네는 그렇게 살아라, 우리는 이럴게' 라고 해야할까요? 서로 끊임 없이 대화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양성평등 운동은  바로 '양성간 대립' 이 아닌 '대화와 인정, 배려' 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여성단체에 들어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양성평등 운동을 한다는 데, 가만 그 얘기를 듣다보니 여성운동 하시는 분들이 여성해방논리 펼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교육하는 분들도 전부~여자들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요. 아무튼 바로 여기서 제가 여성단체에 들어간 이유가 나옵니다.


지금 제가 속한 화성 여성회는 노동부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양성평등 및 직장내 성희롱 예방 전문강사단을 육성, 파견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곳에서 다른 8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기존의 여성의 입장에서만 보고 제시하는 논리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남성의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합리적인 접점을 찾아가려는 것입니다.

당연히 현재 제가 개발한 양성평등 교육안과 직장내 성희롱 예방 교육안에는 이 모든 것이 강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 시강을 본 여선생님들이 하나 같이 얘기하지요.

 
"확실히 남자의 눈으로 접근하니 완전히 다르다"

예, 저는 좀 다르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잘나서 그런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기왕이면 남성도 별 거부감 없이 함께 공부하며, 양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래서 내 아이들만큼은 좀 더 합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내일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앞의 세가지 이유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바로 제가 여성단체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리하며

요즘은 새벽까지 공부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대학시절 공부했던 내용을 다시 돌아보고, 특히, 법 관련 공부때문에 상당한 시간소요가 됩니다. 판례도 함께 봐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보람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강의에 그대로 반영되고, 이것이 양성평등 운동을 통한 합리적인 내일을 만드는 데 작은 기여를 할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하하, 물론 제 강의를 듣고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거부감이 들수도 있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좀 신선함은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 남자 강사가 없으니..^_^;;

출강지역 : 화성시(우선), 기타 지역도 연락주시면 조정 가능합니다.

강사약력
: 군산 고등학교 졸업
: 한신대학교 신학과(전공), 한신대학교 국제경제학, 기독교교육학(부전공) 졸업
: 두산동아스쿨 수학전문강사
: 두산동아 표창장 수상
: 다음 신지식 엑스퍼트(육아-자녀교육)
: 경기여성정보웹진 "우리" 필진
: 블로그 [라이프] 하늘바람몰이 운영(잡지 및 일간지 인터뷰 또는 기사 다수 채택)
: 양성평등 및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 전문강사 (화성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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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이고, 파격적인 플라톤의 주장

플라톤 시대의 여성은 사적소유의 대상 즉, 재산이었다. 재산의 일부로써의 여성은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여기서 제한이라 함은 성행위에서부터 활동 등 삶 전반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은 교육과 사회진출 자체가 불가능했다 봐도 무방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 이 아니었다 보면 쉬울 듯 하다. 플라톤의 주장에 혁명성을 느끼게 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자, 그럼 조금 더 깊이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의 수호자 그룹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이들은 완전한 이상국가를 완전하게 수호하는 이기심이 없고, 충성심이 강하며 형제애로 뭉친 그룹이다. 만약 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온전한 국가의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적인 부나 결혼 제도 없이(가족폐지)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고 본다. 개인의 부인이 있고, 가정의 살림을 맡은 여자가 가족의 특수이익을 위해 이기심을 발동하기 시작하면 공동체의 온전한 유지가 어려워질 수 있고, 이들이 수호자 그룹이기에 원칙적으로 국가에 대한 수호자들의 헌신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이는 일종의 짝짓기 축제 등의 여러형식을 통해 임신을 하고 출생과 동시에 전문적인 교육기관에 맡겨져야 한다고 본다.(플라톤에게 있어 이상사회는 형제애로 결속된 정치 공동체이다.)

이런 논리적 흐름속에 전통적으로 남자의 소유가 되고, 가정내에 국한되어 있었던 여자의 역할 즉, 어머니나 가정주부로써의 역할은 자연스레 더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여성을 더 이상 전통적인 역할을 통해 규정할 수도 없고, 이래서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에 위배된다는 게 바로 플라톤의 시각이다.

이에 플라톤은 교육과 노동을 통해 여성의 잠재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본다. 양성간의 차이는 생식기능의 차이 정도일 뿐이고, 양성은 각자가 지닌 영혼의 성격에 따라 모든 기술을 연마해야한다 주장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여성은 활용되지 못한 엄청난 능력을 갖춘 개인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좀 더 나아가 마침내 국가를 통치하는 철인군주 역시 남성과 여성 모두 포함된 개념이 되게 된다.


다시 한번 곱씹어 보기

자,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처음 시작했던 그의 이상국가를 향한 논리적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의 통치를 위한 철인을 얘기하고, 구조를 얘기한다. 바로 이 구조 속에 "공동재산" 또는 "공동생활" 이 있고, "사유재산" 과 "가족" 의 개념은 배척되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기심의 발로와 가족의 특수이익의 추구는 완전한 공동체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오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필자가 이 연장선상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틀에서 봐야 플라톤이 여성의 교육을 주장하고, 가족제도의 폐지를 얘기하는 의미 또는 맥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만 하자면 여성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낳은 후 그 고통과 신비를 뒤로한채 이름 모를 전문기관으로 아이를 보내야 한다. 그리곤 다시 나와 군사훈련을 받으며 국가에 헌신하는 데, 그것도 남자들처럼 나체로 받아야 한다.

자, 그렇다면 보라. 이것은 양성간 성적 차이를 뒤로 한채 남성의 영역 또는 남성중심 사회 구조 속에 여성이 진출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또한 국가가 개인과 가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여성)과 가족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본말이 전도된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플라톤이 여성해방 또는 친여성적 의식을 갖고 있어 가족폐지와 여성의 교육, 사회진출 등을 얘기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는 오킨 자신도 지적한 것처럼 하위층 여성에 대한 언급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플라톤의 의의와 한계

지금까지 필자는 오늘 읽었던 오킨 등 페미니즘 진영에서 얘기하는 플라톤의 여성과 가족관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적어 보았다. 그의 여성을 향한 시각은 물론 당시대에서는 혁명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보기에도 상당히 세련미가 있고, 매력이 있다) 또한 양성간 능력의 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여성 역시 소중한 존재임을 밝히는 의가 있다. 끝으로 가족제도 속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라 이해되는 개념이 여성의 삶을 종속시키는 굴레가 될 수 있음을 밝힘 역시 의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틀 속에서 보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아닌 국가를 위해 장기말 처럼 이용되는 개인 특히, 여성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양성간의 성적차이를 인정하고, 그 고유의 가치를 귀히 여김이 아닌 남성의 영역에 진출하는 여성 또는 남성화 되는 여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를 아예 무시하는 것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친여성적이라거나 양성평등주의자 등이라 포장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수전 몰러 오킨의 "철인여왕과 가정주부-플라톤이 본 여성과 가족"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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