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샘의 수학강사생활 일기

[LIFE]이 남자의 인생 2009. 5. 15. 15:33 Posted by 바람몰이


저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20살부터 계속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학업을 진행해 왔었지요.

처음 시작했던 건 직장이라기보다 단순 아르바이트 였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전까지 짧게 초등학교 6학년 학생과 중 3 형제 과외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입학 후 호프집에서 시간당 2천냥씩 받으면서 열심히 땀흘리던 생각이 납니다. 이것도 대략 석달정도(한 학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태권도 사범을 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모시던 관장님은 문대성 선수를 기르셨던 국가대표 코치출신 여관장님이셨는데요. 저도 상당히 고생하며 지도했던 생각이 납니다. 이것도 약 석달정도 아르바이트로 했던 것 같네요. 그리고 그 다음에 들어간 곳이 바로 학원이였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나이 스물하나에 처음으로 분필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종의 보조강사처럼 원감님 밑에서 시작했더랬습니다. 당시 80만원을 받았는데요.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쉬지 않고 계속 수업을 하는 강도 높은 시간이 계속 되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원감님께서 제가 마음에 들어 키워주고 싶어 그랬다 하더군요. 그래서 기초부터 확실하게 쌓으라는 의미로 고된 강의 스케쥴을 짰었다 합니다.

이 때는 제가 전공하는 학문에 회의를 느껴 약 2년간 휴학을 했던 시기였는데요. 아무튼 이런 훈련과 원감님의 맨투맨 전수 생활을 약 1년 정도 하고 나니 나름 수업진행과 학원 운영에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원감님이 학원을 떠나신 후 저는 정식으로 제 교실을 갖고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학원에서 제 별명은 "꺽정이 선생님" 이였습니다. 제 외모 즉, 상당한 수염과 엄청난 털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좀 독특한 외모를 갖고 있고, 나름 웃기는 면이 있다보니 아이들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학부모님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제 이름을 듣거나 소문을 듣고 오는 아이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또 1년의 시간이 흘렀지요.


그런데 이 때 저와 함께 근무하던 영어 선생님께서 학원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연스레 승진을 하였고, 나이 스물셋에 수학과 주임이 되었습니다. 오호, 제게는 정말 둘도 없는 기회였지요. 바로 중등부를 신설해 졸업생을 그대로 흡수했고, 저와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 지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근무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우리 나라에서 출판되는 모든 문제집을 풀어보며 공부했고, 각 종 교육기법과 노하우 습득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상담도 열심히 하고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근무했었지요. 그 결과 아이들의 성적도 괜찮았고, 학원도 두산동아에서 2년 연속 우수학원에 선정되게도 하였으며 저 개인적으로는 표창장도 받는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되고, 넘치면 흐르는 법. 너무나 무리한 강의와 과외 탓에 저는 어린 나이에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추간판 탈출증 수술을 받게 되었지요. 또한 피로에 쪄든 몸과 메마른 정신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강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순간 이었습니다. 


이 때, 저를 잡아준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습니다. 학원에 가니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강의를 다시 시작하며 활력을 찾았고, 아이들의 웃음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녀석들을 보며 제 자신을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용기를 내게 되었지요. 새로운 도전을 하려 마음 먹었습니다.

복학을 하였던 것이지요. 이 때 학원은 제가 꾸려놓은 중등부가 운영되고 있었기에 저는 학교에서 신학을 전공으로, 교육학과 국제경제학을 부전공하며 모든 수업을 오후 세시 또는 세시 반 이전으로 맞추고,  바로 출근하여 초등 고학년과 중등부 학생을 지도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발전하더군요. 현장에서의 노하우에 이론이 더해지니 더욱 탄탄해지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벌어놓은 돈을 모두 학비에 투자하여 제 손에는 한푼도 남은 게 없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제게는 아이들이 있었고, 학문함의 기쁨이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렇게 약 2년을 보냈습니다. 휴~정말 힘든 시간이었지요. 3분 카레에 밥을 비벼 먹다 입에 음식을 넣은채로 잠이 들어 온 몸에 카레를 묻혀 보지 않은 사람. 길을 걷다 졸아서 전신주에 헤딩하여 다쳐 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보며 잘 이겨낼 수 있었지요. 제 자신의 의지로 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이들의 계속되는 지지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가장 큰 힘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생활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늦깍이 군복무를 하며 7년간 근무하던 학원을 자연스레 그만 두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지요. (대신 지금은 다음 신지식 자녀교육 카테고리 엑스퍼트 활동을 하고, 블로그에 자녀교육에 관한 글을 쓰고 있지요) 

그래서 요즘은 예전에 지도했던 학생들이 저를 찾아오거나 연락하는 보람으로 삽니다. 초등학생 코흘리개들이 벌써 고교생이 되었고, 처음 과외하던 학생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참 시간이 빠름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강사를 시작하던 시절 적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원 제목이 <선생님이 되고 싶은 선생님> 이었고, 나중에 수정한게 <얘들아, 선생님은 이런 '선생님' 이 되고자 한단다> 였습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열정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스승의 날인데요.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 지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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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나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한 수학 강사 생활에 제법 짭짤한 수입을 얻었고,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인기도 있었다. 학원생활을 접고 난 후에도 한동안 내 이름은 살아 있었다. 부천으로 이사한 후에도 안산, 화성, 수원 등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때 아내는 가장 힘들었다는 얘기를 한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돌아오는 나는 늘 여유가 없었다. 집에서는 축 쳐져 있었고, 아내와의 대화는 갈 수록 줄어들며, 겨우 말문이 트여도 늘 짜증으로 마무리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었다. 아이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었다. 물론 당시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아빠 얼굴을 몰라 잠시만 안아도 울어대는 통에 내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이 때 나는 매우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정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물질 충족을 통한 여유"가 가장 중요하다생각을 하였었다. 이걸 놓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고, 내일도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물질적 여유 없이 마음의 여유가 쉽게 허락될리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이 모든 일을 그만 두었다. 물론 허리 수술 부위의 재발이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이런 삶이 계속 되었다간 가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또한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내 영혼을 바라보며 이것은 사람이 사는 삶이 아니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당연히 수입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부족분은 아내의 취직으로 충당하고 있다.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 모습을 보며 미안함에 늘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아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한다. 훨씬 더 여유로워진 내가 좋다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아이를 안아주며,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 내가 더 좋다 한다. 비록 지금은 서로 주말부부로 떨어져 살고 있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한다. 지금 당장은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일에 비젼이 있고, 희망을 볼 수 있다 한다.

나 역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이혼과정을 모두 봐야만 했다. 생선장사와 삯바느질로 날 키우시던 조부모님과 살아오며 찢어질 듯한 가난에 너무 힘들었다. 대학시절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뒤는 물론 옆도 보지 않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물론 지금도 내 결혼식조차 오지 않았던 아버님과의 관계 등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그저 움켜 쥐려고만 하던 을 눈 딱 감고 놓아버리면서부터 찾아온 행복이고, 여유였다.


사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내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이와 함께 하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내 정신줄을 놓치 않고, 늘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그 속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에 뭔가 자꾸 움켜쥐려고만 하면 문제가 생긴다. 돈을 움켜쥐고, 명예를 움켜쥐고는 도무지 놓으려 하지 않는다. 주먹도 계속 쥐고 있으면 피가 안 통해 하얘지고, 경련이 일어나는 법이다. 인생의 행복이란 게 마치 비누와도 같아서 강하게 움켜쥘수록 자꾸 빠져나가는 것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어제 언론 보도를 보니 일가족 4명이 생활고에 시달려 동반자살을 했다 한다. 또 다른 어떤 기사에는 10억이 있으면 양심은 물론 가족마저 버릴 수 있다 응답한 이가 50%가 넘는 다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더 이상의 물질적 풍요가 아닌 여유와 행복을 채울 수 있는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블로그 메인에 올려놓은 가족사진. 우린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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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포외고 입시 부정 문제가 이슈화되고 급기야 부정과 관련된 학생 54명의 합격을 취소한다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이 문제를 보며 다년간 학원가에서 종사한 교육자로써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 입시합원과 특목고의 결탁문제는 언론보도처럼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직접적인 증언을 듣거나 그런 학원을 보지는 못했으나 학원가에서는 공공연히 나돌고 있던 얘기였습니다. 이번 사건은 그 소문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실임을 입증해주었습니다.

2.현재 경기도 교육청과 김포외고는 이 사건과 관련된 학생들(언론과 경찰은 54명이라 하고 있음)의 합격을 취소하고 불합격 처리되었던 54명을 다시 모아 재시험을 치르겠다 하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에 대한 합격취소 처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거지요. 그것은 대법원 판례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통합 민주신당이나 교육위 의원들도 이런 입장인 걸로 알고 있구요.

이에 대해 합격자 부모님의 경우 상당한 반발을 하며 합격취소 효력 가처분 신청을 하겠다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학교와 교육청 측에서 이번 사건을 그럭저럭 무마해보려는 나머지 행정편의주의적 대책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3. 저는 이 사건을 단기-장기 해결책으로 나누어 접근해야한다 봅니다. 사건처리와 재발방지를 위해서 입니다.

먼저 단기적으로는 해당교사 해고, 해당학교 교장-교감 중징계, 김포외고의 특목고 지위 박탈 및 해당관련 학생들과 불합격 되었던 54명의 학생들의 구제 대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포외고 측은 정 안되면 해당관련 학생 54명과 불합격 된 54명을 일단 합격처리 하여 입학시키고 내년 모집정원에서 54명을 감축하는 형식을 취하자 제안한 걸로 압니다.

저는 이것이
행정주의 처리방식이라 약간 불만이긴 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 봅니다
. <특목고 지위 박탈은 이번 합격생까지 지위 유지를 보장하고, 내년 입학생부터 적용해야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목적을 상실하고 명문대 입학 필수코스로 여겨지는 특목고의 역할과 위상 그리고 입학제도의 재정비를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보다 깊이 나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학벌주의, 과도한 사교육 의존 등에 대한 반성 또한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특별히 입학제도 재정비는 공교육 강화와 사교육 절감을 위해 필수적이니 매년 바뀌는 대책 말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국민들이 국회나 정부에 월급을 주는게 아닙니까..

4.끝으로 저는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또한 부끄럽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이런 처리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학교에 입학했다 해도 내 자신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자괴감이나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또한 자신들은 그저 학원에 다닌 죄와 시험을 잘보려 극도의 긴장속에서 선생님이 최종 정리해며 찍어 주는 문제를 잘 들으려 했다는. 결국 어른들의 욕심때문에 자신들만 상처입게 되었다는. 이들의 항변에 해줄 말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어른들의 욕심때문에 이 아이들이 평생 '나는 입시부정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주고 만 것이지요. 우리 어른들은 이들의 상처에 대한 분명한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향 후 재발방지를 위한 엄정한 수사와 처벌 및 대책강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건의 합리적이고 원만한 해결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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