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잘 생긴 편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썩 좋은 인상도 아닙니다. 확실히 저는 타고난 인상 자체가 강했습니다. 짙은 눈썹과 엄청난 수염..ㅠ.ㅜ;; 어릴 적에는 속눈썹도 길고, 날씬해서 참 예뻤다하는 데,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전설과 같은 얘기이지요.

그러나 타고난 것만이 제 인상을 결정짓는 건 아니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살아온 남들과 조금은 다른 삶의 환경은 제 인상도 다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제 나이 다섯에 제 부모님이 헤어지시는 과정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가보니 허여멀건한 서울놈이 맘에 안드는가 봅니다. 참 무던히도 친구들에게 맞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복수심에 불타 태권도를 했고, 나름 소질이 있던 저는 조부모님 모르게 싸움 좀 하고 살았습니다.

또 인생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보면서,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500원짜리 삯바느질로 저를 키우시기 위해 고생하시던 조부모님을 보는 것, 또 이렇게 '버림'받은 나를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겐 '악'밖에 없었나 봅니다. 공부도 잘 했지만 이것 역시 조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악으로 잘 했던 것이었습니다. 싸움도 잘 했지만 이것역시 지기 싫어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이것 역시 무시당하기 싫어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악'이 제 사춘기를 지배하였습니다.

'악'으로 사는 삶은 대학시절도 계속 되었습니다. 제 나이 19살에 독립을 했습니다.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서 둘다 잘 하고 싶었지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직장에서도 상당히 인정받고, 대학에서도 과수석을 다투는 정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니 제 인상이 장난 아니였습니다. 지금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약 10년전 찍었던 면허증 사진입니다. 이번에 면허갱신을 하면서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스캔으로 받아 두었지요.

어떤가요. 인상이 장난 아니지요? 물론 화질도 좀 떨어지고, 피부색도 좀 검게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사물을 바라보는 눈빛이 기본적으로 약 10도쯤 올라가 있지요. 뭔가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좀 슬퍼보이지요. 금방이라도 울것만 같은 모습입니다. 예, 이 때는 한창 마음속에 적대감과 불만, 우울과 슬픔이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자, 이건 얼마 전 면허갱신을 위해 찍었던 사진입니다. 어떤가요? 저는 제 자신을 보면서 좀 더 부드러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또 보다 편안해 보이고 말이지요.

예, 요즘의 저는 참 편안하고, 부드러워 졌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다보니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상당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인생이 많이 변한 케이스입니다.

제 인생이 변한 계기는 대략 네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아내와의 연애이지요. 수업시간에 하도 비판을 많이 해서 상처만 주던 제가 사랑을 얘기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아내와의 연애는 그 사람의 맘을 헤아려 주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역시 사랑은 위대한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우리 딸 건희의 탄생입니다. 건희를 처음 안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서 녹아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이 작은 녀석을 보며 눈물이 나왔던 그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지요. 그 후 녀석과 함께 즐겁게 놀면서 저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신학공부였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며 제가 깨달은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자아와 욕심을 통해 많은 문제가 비롯되고 있음을 깨달으며 저는 물질을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나니 얼마나 편안하던지요. 저희 부부는 그저 "일용할"만큼의 양식만 취하며 평생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끝으로 네번째는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블로그는 단순히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제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지요.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휴~시간이 어찌나 빠른지요. 시골에서 복수의 칼을 갈던 한 아이가 이렇게 자라 두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남은 인생을 더 어렵고, 가난한 이와 함께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글을 통해 인생을 함께 나누는 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 다가올 10년 후가 기대됩니다. 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런지요. 그 때도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며 한바탕 웃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 여러 분들이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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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짬을 내어 책을 펼쳤다. 논문을 엮음 모음집이었는 데, 이런 저런 어렵고 중요한 내용이 많아 밑줄을 그어야 했다. 필기도구가 필요했다. 평소 연필을 자주 쓰던 터라 연필을 찾았다.


그런데 허걱..연필심이 부러져 있다..ㅡ.ㅡ;;


흔히 "샤파"라고 하는 연필깎이를 찾았다.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ㅜ.ㅠ;;

연필꽂이를 보니 커터가 있다. 무심결에 집어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연필이 너무 작아 깎는 게 쉽지가 않다. 순간 어린 시절 기억이 오버랩 되며 스쳐 지나갔다.


나는 생선장사와 삯바느질을 하시던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께서는 월남에서 허리를 다치셔 거동이 불편하셨기에 할머님께서 돈벌이를 하셨었다. 그래서 나와 여동생의 교육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고교 졸업을 할 때까지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하셨었다.

다섯살에 시골에 내려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할머님은 시장에서 3000원짜리 가방과 800원짜리 철제필통, 1200원짜리 연필 한다스(지우개 달린 것)을 사오셨었다. 학교에 처음 가던 날 할아버지께서는 연필을 손수 깎아 주셨었다. 정확히 다섯개를 깎아 주셨었다. 한시간에 하나씩 쓰고, 혹시 모르니 한두개는 여유분으로 두라는 거였다.

이 후로도 할아버지는 매일 밤마다 연필을 깎아 주셨다. 자기 전에 미리 미리 책가방과 준비물을 챙기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주셨었고, 내가 모든 준비를 끝내면 최종적으로 할아버지께서 깎아 주신 연필을 필통에 넣어 확인을 해주셨다. 

하루는 내가 직접 연필을 깎아 보겠다 한적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위험해서 안된다 하셨다. 허나 나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검정색 학생용 칼을 들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고사리 같던 손에 무슨 힘이 있어 연필을 제대로 깎겠나..당연히 삐뚤빼뚤했고, 할아버지께서 마무리를 해주셨다.(지금 생각해보면 손가락을 베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실 당시 친구들은 모두 "샤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끝이 뾰족한 연필을 사용했었다. 저학년 시절은 샤프의 사용이 금지되었었기에 뾰족한 연필심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샤파가 필요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샤파를 살 여유까지는 되지 않았었다. 내가 아직도 당시 책가방과 필통, 연필 가격을 기억하는 건 우리 집의 수입에 비해 너무도 큰 지출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런 것마저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 했다. (또 사실 감사했다. 두분이 얼마나 힘들게 우리 남매를 기르셨는 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할아버지는 돌아가셔 곁에 계시지 않는다. 살아생전 너무 고생만 하셔 내가 반드시 호강시켜드리리라 다짐했건만 내가 결혼하던 그 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매일 밤 연필을 깎아 주시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가슴의 한으로 남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나는 작년 초까지 안산의 한 작은 교회에서 독거노인을 섬기는 일을 해왔다. 지금 잠시 사정이 있어 떠나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갈 곳이다. 그러나 몸뚱아리만 움직여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그렇다. 다시 책을 잡는 일이다.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체계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또한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여의도를 감시하는 일이다. 저 양반들이 함부로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팔아먹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너무 먼 얘기이겠다. 당장 모시고 있는 할머님부터 챙겨야겠다. 장인, 장모님께 전화라도 드려야 겠다. 아내와 좀 더 행복한 가정을 이뤄야겠다.

아하..오늘 저녁은 내가 해야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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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할머니의 수박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8. 15. 10:30 Posted by 바람몰이
나는 이른바 조손가정에서 자랐다. 내 나이 다섯에 부모님께서 헤어지시고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께 맡겨졌던 것이다.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던 내 할머님. 월남에서 허리를 다쳐 500원짜리 삯바느질을 하시던 내 할아버님. 나는 15년간 그렇게 성장했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 덕에 국가 지원도 못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 형편은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장차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두분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사랑을 먹으며 그렇게 자라났다. 할아버님, 할머님은 내겐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분이셨다.

성인이 된 후 결혼을 하였다.  아쉽게도 할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나는 할머님만을 모시고 살고 있다. 하지만 월세방에 살며 지은지 20여년이 다 되는 집에 살며 변변히 용돈 한번 못 챙겨드리고 있다. 그래도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할머님의 말씀은 내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래도 할머님 보시기에 나는 아직까지 어린 아이 같은가 보다. 퇴근 후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시며 밥을 챙겨주신다(아내보다 내가 먼저 퇴근). 또한 식사 후 꼭 챙겨주시는 게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수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이기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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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퇴근해보니 할머님 얼굴이 매우 피곤해 보이신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봤더니 복도 한쪽 켠에 있는 수박이 보인다. 얼핏보니 크기가 꽤 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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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를 재어보니 8.8kg이나 되었다. 이 뜨거운 여름에 힘든 몸을 이끌고 사오셨으니 안 지칠래야 안 지칠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고맙고, 뭉클한 마음과 달리 할머님께 신경질을 내곤한다. 이렇게 뜨거울 땐 좀 집에 가만히 앉아 쉬시라는 거다.

그러나 나는 올해 여름 단 하루도 수박이 끊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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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들고 쪼개보니 제법 잘 익었다. 칼을 넣자마자 쫙~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쪼개지고 나니 향긋한 냄새가 난다. 할머님께서도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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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내가 수박 물 흘리는 걸 싫어해 주로 화채를 담아 먹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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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라 담아보니 한참을 먹었는 데도 두통이나 나왔다. 양이 상당하다. 또 다시 엄청난 땀을 흘리며 손자에게 수박 한쪽 먹이겠단 마음으로 뙤약볕을 다니셨을 할머니 생각이 난다.

또 다시 뭉클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삼킨다..


할머님께서는 기초노령연금 수혜자이시다. 가끔 작은 아버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받으신다. 그 외에 수입은 전혀 없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늘 돈이 딱 맞아 떨어지기는 하는 데, 정작 할머니 자신에게 쓰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집 반찬거리와 손자와 증손녀 먹일 간식 거리로 다 나가는 게다.

나는 또 다시 신경질을 낸다.
 
왜 그러시냐고..제발 그러지 마시라고..이제는 그만큼 고생하셨으면 되었으니 할머니 자신을 위해 쓰시라고..놀러도 다니고, 친구도 사귀며, 맛있는 것도 사서 드시라고..

하지만 벌써 2년이 넘게 이런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자식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부모님께 은혜를 갚으려 해도 늘 부족하다. 바다 같은 부모님의 사랑에 시냇물 수준의 자식의 효도가 비교 될수는 없다.

허나 그래도 늘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맛난 걸 먹이고자..죽을 때까지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사랑을 내 자식과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자 마음 먹게 된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이 되고자 다짐해본다.

이것이야말로 늘 부족한 이 철딱서니 없는 자식이..

그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자, 최선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첨부설문 : 내가 부모님께 하는 효도는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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