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회개 그러나 우리는

회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그렇지요. 내 안의 죄성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꿇으며 시작하는 겁니다. 또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수없이 죄에 빠지기에 우리는 회개를 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쉬운 것이 교회에서는 그렇게 울면서 회개한 사람이 밖에 나오면 다시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합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며 변하지 않는 내 자신을 합리화 시켜서는 곤란하겠지요.

성경에는 회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오는데요. 저는 오늘 그 중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다

사도행전 2:37을 보니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탄식과 2:41에 잘못과 회심을 인증하는 세례에의 참여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전에 "말씀" 을 듣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리는 일종의 '가책'을 느꼈던 것이지요.


저는 믿음이 성장하는 데는 여러 요인과 과정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내가 해석을 하려 하지 않고 그냥 말씀을 쭉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맘속에 감동과 변화의 싹이 틀 수 있을 거라 저는 믿습니다. 말씀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은 내가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과 같지요. 또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어 주지요. 저는 우리가 그냥 내 마음속에 찔리는 것을 위안받고자 회개를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이건 회개라기 보다는 내 도덕적, 심정적 위안에 불과하지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써 회개를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改 의 사건이 일어나다!

두번째는 이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는 대목입니다. 생활양식의 변화가 온 것이지요. 말하자면 첫번째 경우는 "회" 사건이 있었던 것이고, 이제는 "개"의 사건이 지속된 것입니다. 


그 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눔의 삶을 사는 데 있었습니다. 즉, 나 혼자만의 삶, 자폐적인 삶, 이기적인 삶에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 삶으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회"와 "개"가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찔리는 행위에 용서를 구했다 알리바이를 삼고, 내 자신을 위안하며 나아가지요. 심하면 이것이 습관 또는 체질화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을 겁니다. 애절한 '뉘우침'과 여기에 근본적인 '삶의 방향'이 전환되고, 생활의 '구조적인 변혁' 을 포함하는 "개"의 요소가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회개를 의미하는 원어 메타노이아 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냥 마음만을 돌린다는 게아닙니다. 내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 바꿔 반대 방향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죄에 대한 단상(짧게 봅니다)

끝으로 제가 앞서 죄 얘기를 잠깐 했는데요. 잠깐 죄에 대해 살펴볼까요(말 그대로 잠깐). 죄악을 의미하는 원어 '오페일레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이걸 좀 알아보니까요. 이건 도덕적, 심정적 죄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회경제적 삶의 구조 안에서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각 종 채무의 관계를 의미하였습니다.


왜 성경에 보면 빚을 탕감해주는 농장 주인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걸 생각하면 쉽지요. 이건 결국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회와 사회에서 뒤틀린 관계를 서로 용서하고, 감싸안는 삶의로의 변화 즉, 구체적인 삶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요한이 얘기하는 것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의 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시어요. 그는 세리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는 변했지요.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정하게 거둔 것을 네배로 갚는다 하였습니다. 바로 이거지요. 회개는 말씀을 통해 깨닫고, 애절한 '뉘우침'을 하며, 내 삶의 방향과 구조가 완전히 변해야 합니다.

 
개인만이 아닌 연대의 회개가 필요

개인적으로 요즘처럼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없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끼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모습을 일부의 얘기라 치부하고, 우리는 괜찮다 하는 모습입니다.

왜 함께 연대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 걸까요. 저는 그들의 죄를 그들만의 죄로 여기면 안된다 생각합니다. 함께 아파하며 기도해야 하지요.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 역시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悔와 改의 균형을 이루며 "소" 처럼 걸어가봅시다!

이것은 "회" 와 "개" 가 함께 있는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회"에만 빠져 있습니다.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지요.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애절한 뉘우침과 지속적인 고쳐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주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맺어가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는 힘들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내 옆에는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함께 손잡고, 조금은 더디더라도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 보아요. 우보천리란 말처럼 우직하게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천리를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가져보자구요. 주님께서 손을 내밀고 계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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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번 글을 통해 기도우리의 정신과 삶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 중 첫 번째로 우리의 "정신"이 확장되어, "적대자상"을 해체하는 것에 대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먼저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학창시절 저는 모든 이를 용서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전직 대통령도 있었구요. 외국인도 있었는데요. 그 핵심에는 바로 저희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희 오누이를 제 나이 다섯, 여동생 나이 셋에 버렸습니다. 제가 버렸다 표현한 것은 그 후 15년간 전화한통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때 저희 오누이를 키우시던 조부모님은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오백원짜리 삯바느질을 하며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또 이러더군요. 당신께서 신용불량자이다보니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핸드폰을 해서 국제전화요금을 수백만원씩 물린 적도 있고, 대출을 받아 쓰기도 하였지요. 당연히 저는 제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이 모든 걸 갚아야만 했구요.

아버지를 보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그 분에 대한 정은 당연히 없고, 끌림 같은 건 저 세상 이야기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제 주먹이 날라가지 않은게 다행이었죠. (정말 신학하기 잘했다 싶을 때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분은 "주적"이었고,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2.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형제와 다투고 예배드릴 생각도 말라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지요. 예수께서 또 그런 삶을 사셨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한없이 찔리고, 힘이 든 겁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랑과 화해를 얘기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묵상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였는데요. 물론 환청처럼 들린 것은 아니나 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처럼 도전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도 분노하고 있느냐?' '정말 그렇게 네 아버지가 죽일 놈이 것이냐?' '그럼 너는?'

예수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고, 제가 지은 모든 죄와 다른 이들에게 상처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건 그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성화되어 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가 무얼 잘 하고 잘 못 했다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내 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직은 조금 미흡한 것이고, 그만큼 교만함이 마음 속에 들어와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도 용서를 강조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으며, 강도를 용서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셨던 것일 겝니다.


3.이제 아버님을 뵙는 제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원수였고, 제 인생의 가장 피곤한 암적존재이자, 심지어 "쓰레기 인생" 이라 생각했던 그 분의 인생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 분의 영혼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분 역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나 처럼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인생이 소위 "실패한 인생"이 된 것에 대해 매우 아파하고 있는 이제는 자포자기마저 해버린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차마 자식 앞에 전화한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거지요.

이제 저는 그 분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분을 적으로 여기고, 원망하던 제 자신을 먼저 보고, 그 분을 "쓰레기 인생"이라 하던 "교만한" 제 자신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란 그리스어로 방향을 돌이키다라는 뜻인데요(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한번 더 글을 쓰겠습니다). 제 삶과 마음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4.저는 성령님께서 제 영에 임하시고, 예수께서 저를 보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 소중한 체험을 통해 제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제 마음의 그릇이 한단계 더 넘어선 것이고, 정신의 깊이 역시 한 영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저 혼자 발버둥친다하여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제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 분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말이 쉬워 그렇지 약 20여년 동안 저희 오누이가 겪었을 그 아픔과 고통을 생각해보면.......이건 정말.....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얘기입니다.......

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적대자상이란 그렇다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대자상이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원망의 대상이나 증오, 분노의 대상을 의미하는 데요. 저는 이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여야만 가능하다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해체 가능하다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생은 다 그런거야..' '부질 없는 짓..'이라며 냉소하거나 관조하는 게 아니라 이와 다시 하나되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까지 얻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삶이기 때문입니다.


5.오늘 저는 이 글을 읽는 다시 한번 제 자신과 크리스챤 독자님들께 도전을 드리며 글을 맺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넘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건 내가 그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용서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먼저 내 자신을 보고, 그를 내려보는 내 교만함과 그 속에 있는 원망과 증오  검은 때를 닦아내는 "기도"입니다. 지금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님께서는 나를 먼저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군자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원망과 증오, 분노를 닦아가는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때일 수록 더 오랜 시간 닦아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함께 하고 계시기에 끊임 없이 닦아감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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