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허름한 곳이지요. 예수가 태어난 곳 말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한다 해도 지금도 마굿간은 냄새가 나고 지저분 한것이 사실이지요. 게다가 누가 동물 먹이통을 씻어주고 한단 말입니까. 바로 이런 곳에서 아기 예수는 태어난 거지요. 지금 같이 깨끗하고, 좋은 산부인과를 이용하는 우리로써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먼저 이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천년 전 유대 사회의 구조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한 마디로 "공의"가 없던 시대
였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착취는 두말 할 것 없이-물론 유대인을 통한 것이었지만- 종교마저 타락하여 소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수탈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에는 상처와 절망만이 찰 수 밖에 없지요. 평안이 없었습니다영혼이 메말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정신줄을 놓아 버리는 경우마저 있었지요.

자,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나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가 투숙할 객실이 없었음을 얘기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데요. 과거 유대 전통은 나그네나 고아, 과부를 정성으로 섬기라는 게 있습니다. 그 만큼 약자를 배려하라는 가르침과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태어날 당시 유대 사회는 만삭이 되어 출산을 앞둔 임산부를 보고도 전혀 도움의 손길이나 양보를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전혀 이런 배려가 이뤄지지도 않고, 이룰 수 있는 여유조차 없는 사회 구조적으로나 인간의 영혼으로나 모두 최악의 성격을 지닌 바로 그러한 곳이 유대사회였다
는 거지요. 

말하자면 성경은 예수의 이 어이없는 탄생을 자세히 기록함을 통해 당시 유대 사회와 사람의 영혼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고, 폭로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기 예수가 왜 이 땅에 오게 되었나 그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 삶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아기 예수가 마굿간 위에서 태어난 걸 보며 또한 성탄을 맞이한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며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아니 어쩌면 더 심한 양극화의 사회를 살고 있지요. 하루에 수십명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이웃끼리도 살인이 일어나는 세상을 삽니다. 그 만큼 문제가 있는 사회이지요. 사람의 영혼에 평안과 여유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아기 예수를 또 다시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겠지요. 

하지만 이 사회의 마지막 보루여야 하고, 완충제이자 거름막이어야 할 교회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부의 축적이나 명예획득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가르칩니다. 이런 신기루와 같은 것에서 벗어나 예수처럼 참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은 별로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또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며 1등만을 기억하는 사고의 틀을 유지합니다. 화해보다는 대결과 반목을 조장하는 듯한 행동을 거듭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정직함을 잃어 갑니다.


이번 겨울은 유독 더욱 강추위가 많이 몰려올 것이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는 "우리끼리"만 선물을 주고 받고 행복하거나 술에 쩌들어 있는 날이 아닌나 자신을 돌아보며 가난한 이웃을 더 배려하고, 아껴주는 이 사회에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성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쯤은 내가 살아가는 모양새나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고민해 보고, 기도해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러면 조금은 더 살만한 세상이 되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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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봅니다. 어둠과 함께 울려대는 크나큰 천둥소리를 듣고 천지를 번뜩이는 벼락을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무서움과 거대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작은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낀다는 건 내게도 생명이 있음이고,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그 분의 생명호흡 안에 있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인간에게 뭇 생명을 맡기고, 역사를 만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한없이 나약하지만 한없이 큰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사람이고, 이 생명을 없애는 것도 사람입니다. 세상의 희망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도 사람입니다.

선택은 사람의 몫입니다. 무엇보다 "나" 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있게 감당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내가 어렵고, 소외된 이들과 얼마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생명의 싹이 트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때로 저는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사는 삶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네 소시민의 삶이란 대부분 이럴 듯 합니다. 이런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이란 생각도 들지는 않습니다. 한번쯤 쉬어가듯 인생의 큰 물결에 나를 맡길수는 있으나 내 온전한 정신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알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였고,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미쳤다 소리를 듣는 병자를 치유하며 너의 인생을 살라 했을 것입니다.

어제 창세기를 읽으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위해 늙은 종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앞에 나와있는 대목 즉, 아브라함에 이어 그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자신의 인생을 정체시키지 않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은..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 사람은...아브라함에 이어 이삭, 야곱, 다윗, 예수에게까지 이어지는 축복이 임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대지를 울리고 적시는 이 천둥과 벼락, 굵은 빗줄기 속에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다듬어 봅니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언제나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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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극단적이면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이나 집단은 대화가 통화지 않는 경우가 많아 멀쩡하던 사람도 멀쩡하지 않게 하고,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건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든 자신만의 '진리' 가 있지요? 그리고 이걸 믿는 '신앙' 이란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타협의 문제가 될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해야할 문제가 됩니다. 그래야 내 종교와 내 신념, 내 신앙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정말 내가 믿는 진리가 유일한 진리이고, 생명이라 생각하여 포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과 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해보자 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반드시 해야만한다'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그 종교는 폭력이 되어 버리고, 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맙니다.



어제 H대 신대원에서 부처님 오신 날 축하 현수막이 찢겼다 다시 걸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가 다녔기도 하고, 다시 다닐 예정이기도 하여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 내용보다 흥미로운 게 그 밑에 달린 댓글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댓글이 달린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예, 신학적 입장과 해석이 다른 그래서 교단이 다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 열정과 헌신적인 삶의 자세를 보며 저는 많은 반성을 하고, 제가 꼭 배워야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자신들의 믿음의 방식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크리스챤이고, 핵심적인 믿음 즉, 십자가나 부활, 성령, 삼위일체론 등은 사실상 같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상대를 정죄하려 하는 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꼭 상대를 무섭게 몰아쳐 구석에 몰아넣을 필요까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부모님 없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생선장사를 하시던 조부모님과 살며 나름 재능있었던 태권도와 주먹을 쓰며 자칫 탈선의 길을 걸을뻔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부터는 허리가 부러질정도로(실제 부러졌지요. 그래서 수술도 했다는..ㅠ.ㅜ;;) 지독하게 살아왔습니다.

너무 힘들었지요. 이건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천만원이 드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고..그러면서 학업을 하고..길을 걷다 졸아서 다쳐보지 않고, 밥을 먹다 지쳐 쓰러져 국을 온 몸에 쏟아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저 바람몰이 이 사람. 지금가지 믿음 하나로 한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 하게도 저희 집에서 크리스챤은 저와 할머니 뿐이었습니다. 저희 큰 고모님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마저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십수년간 살아오는 모습을 보며 '야, 너 사는 거 보니까 나도 교회라는 거 한번 다녀봐야겠다' 라고 하십니다. '너 목사 되면 내가 꼭 너희 교회 나가고 싶다' 라고 하십니다.

제가 제 신앙과 제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얻게 되고, 지금까지의 노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좀 쌩뚱맞은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주식투자 해보셨습니까. 주식 격언에 보면 '언제든 갈 종목은 반드시 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락장에 폭락장이라도 결국 좋은 재료가 있고, 모멘텀이 있는 종목은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고, 유일한 진리 즉, 절대성을 담보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절대성은 수많은 상대성 속에 굳이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좀 넓은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이 사회를 사는 구성원이자 내 이웃이고,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그들의 신앙도 가치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하여 내가 믿는 진리가 퇴색하거나 가려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핏대를 세우며 싸우거나, 상대를 지옥불에 던져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어 삶이 변하고, 그 존재가 새로워져 새 삶을 살게 된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에 관심을 갖고, 당신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P.S : 미리 밝혀둡니다만 저는 종교다원주의자 아닙니다. 제가 꼭 이 주제만 다루면 저를 종교 다원주의자라며 몰아세워 저를 정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신앙이 없다니, 예수가 진짜 살아있는지 돌아보라니..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 이 사람 예수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고, 신앙 하나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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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번 글을 통해 기도우리의 정신과 삶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 중 첫 번째로 우리의 "정신"이 확장되어, "적대자상"을 해체하는 것에 대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먼저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학창시절 저는 모든 이를 용서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전직 대통령도 있었구요. 외국인도 있었는데요. 그 핵심에는 바로 저희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희 오누이를 제 나이 다섯, 여동생 나이 셋에 버렸습니다. 제가 버렸다 표현한 것은 그 후 15년간 전화한통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때 저희 오누이를 키우시던 조부모님은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오백원짜리 삯바느질을 하며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또 이러더군요. 당신께서 신용불량자이다보니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핸드폰을 해서 국제전화요금을 수백만원씩 물린 적도 있고, 대출을 받아 쓰기도 하였지요. 당연히 저는 제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이 모든 걸 갚아야만 했구요.

아버지를 보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그 분에 대한 정은 당연히 없고, 끌림 같은 건 저 세상 이야기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제 주먹이 날라가지 않은게 다행이었죠. (정말 신학하기 잘했다 싶을 때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분은 "주적"이었고,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2.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형제와 다투고 예배드릴 생각도 말라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지요. 예수께서 또 그런 삶을 사셨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한없이 찔리고, 힘이 든 겁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랑과 화해를 얘기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묵상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였는데요. 물론 환청처럼 들린 것은 아니나 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처럼 도전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도 분노하고 있느냐?' '정말 그렇게 네 아버지가 죽일 놈이 것이냐?' '그럼 너는?'

예수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고, 제가 지은 모든 죄와 다른 이들에게 상처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건 그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성화되어 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가 무얼 잘 하고 잘 못 했다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내 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직은 조금 미흡한 것이고, 그만큼 교만함이 마음 속에 들어와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도 용서를 강조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으며, 강도를 용서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셨던 것일 겝니다.


3.이제 아버님을 뵙는 제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원수였고, 제 인생의 가장 피곤한 암적존재이자, 심지어 "쓰레기 인생" 이라 생각했던 그 분의 인생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 분의 영혼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분 역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나 처럼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인생이 소위 "실패한 인생"이 된 것에 대해 매우 아파하고 있는 이제는 자포자기마저 해버린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차마 자식 앞에 전화한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거지요.

이제 저는 그 분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분을 적으로 여기고, 원망하던 제 자신을 먼저 보고, 그 분을 "쓰레기 인생"이라 하던 "교만한" 제 자신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란 그리스어로 방향을 돌이키다라는 뜻인데요(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한번 더 글을 쓰겠습니다). 제 삶과 마음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4.저는 성령님께서 제 영에 임하시고, 예수께서 저를 보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 소중한 체험을 통해 제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제 마음의 그릇이 한단계 더 넘어선 것이고, 정신의 깊이 역시 한 영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저 혼자 발버둥친다하여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제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 분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말이 쉬워 그렇지 약 20여년 동안 저희 오누이가 겪었을 그 아픔과 고통을 생각해보면.......이건 정말.....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얘기입니다.......

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적대자상이란 그렇다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대자상이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원망의 대상이나 증오, 분노의 대상을 의미하는 데요. 저는 이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여야만 가능하다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해체 가능하다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생은 다 그런거야..' '부질 없는 짓..'이라며 냉소하거나 관조하는 게 아니라 이와 다시 하나되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까지 얻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삶이기 때문입니다.


5.오늘 저는 이 글을 읽는 다시 한번 제 자신과 크리스챤 독자님들께 도전을 드리며 글을 맺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넘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건 내가 그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용서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먼저 내 자신을 보고, 그를 내려보는 내 교만함과 그 속에 있는 원망과 증오  검은 때를 닦아내는 "기도"입니다. 지금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님께서는 나를 먼저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군자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원망과 증오, 분노를 닦아가는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때일 수록 더 오랜 시간 닦아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함께 하고 계시기에 끊임 없이 닦아감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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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

저는 개신교인이지만 카톨릭의 성인들이 지닌 삶의 자세와 신앙을 존중합니다. 그 중에는 성 발렌티노도 있는 데요. 성 발렌티노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보던 성자라 불리던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를 기념하며 나눔을 실천하게 되었는 데, 그것이 바로 발렌타인 데이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초컬릿 회사의 상술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말 성 발렌티노가 알면 가슴을 칠일입니다.

저는 교회도 그렇다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질이라 함은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던 바로 그 정신을 얘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 글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비교하며 정치, 경제적 측면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가판을 뒤엎었는가

예수는 자신이 직접 교회를 세운 적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철저히 저항하고, 거부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그 고유한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1.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 물자, 돈, 권력이 집중된 곳이었는 데요. 먼저 예를 들어 희생제물용 짐승 판매를 보면요. 이것은 성전 광장에서 활발히 이뤄지곤 했었는 데요,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이러한 가축 판매는 대제사장 가문의 소유였었습니다또한 성전세를 보면요. 모든 유대인은 반드시 지불해야할 것이 바로 성전세인데요. 매년 반세겔 이상을 내야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것 역시 고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하여 관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자금은 바로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에 의해 관리되는 데요. 이는 결국 제사장 귀족들의 정규적인 수입 및 독점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남아 도는 돈으로 오늘날의 은행 같은 역할까지 수행하게에 이르렀습니다. 

한번 돈 맛을 보니까 끊임없이 세를 강요하고, 이것은 결국 자기 가문끼리 나눠먹고 말이죠..


2.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시키고, 이러한 차별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였습니다. 또한 성전체제 지배자들의 정치 권력의 지지기반이었구요.

이 때,
 영악했던 로마는 바로 이 체제와 권위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위시한 제사장 귀족들을 통하여 팔레스틴 내에서 로마 제국의 식민체제를 한결 수월하게 굳히는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가난하고, 억압받는 유대백성의 자리가 아닌 국가권력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왔다는 것입니다.

3.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믿는다 하여 같은 민족끼리도 싸우고, 잡고, 죽이고..

자, 상황이 이러하니 예수는 성전을
비판하고, 뒤엎을 수 밖에 없었지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물신을 섬기는 것에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때문에 수많은 가난한 유대 민중들이 억압과 착취를 당했기에 예수에게는 매우 중차대 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곳은 기도하는 곳이라 일갈하였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비판 받는 몇 가지 사례

오늘날 교회가 비판 받는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과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해보기 위해서입니다.

1.먼저, 돈과 교회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일단 딱 떠오르는 것이 "헌금강요"이지요. 물론 교회에서는 "강요"란 표현을 싫어합니다만 설교 시간 내내 헌금얘기를 하니 강요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특히, 그 항목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요..


여기서 잠깐 기복신앙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대개 헌금 기도할 때 보면 물질로 더 채워달라 합니다. 십일조 더 많이 내게 해달라 하지요. 그리고는 물질을 많이 내놓으면 이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건지 풍요의 신 맘몬을 믿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되지요. 하나님이 거지인가요.

2.두번째로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때론 국민과 국가가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중재자가 되어야지요. 때로 권력이 자신을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면(독재시절과 같이) 교회는 국민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 때 사탄의 무리 운운한 것이 누구였나요. 지금 용산참사를 보며 발목 잡는다 하는 건 또 누구인가요. 예, 다 기독교인지요. 

관련글을 옆에 링크해두오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

3.그 밖에교회가 사교판이 되고, 부자가 교회세습 하는 것, 교회 사고팔기나 신도 갈취 문제, 끊임 없는 싸움과 분열 등도 있지만 너무 길어질 듯 하니 더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보고, 일부의 문제를 다수일반화 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예,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가 말하는 것은 분명 존재했던 "FACT" 이고, 현재 한국 교회는 이것때문에 매우 많이 그것도 아주 심하게 비판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며

오늘날 한국 교회와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별로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교회에 돈이 모이고, 권력과 결탁해가는 것, 사교판이 되며 끊임 없이 싸우고 분열해가는 것 등까지 너무도 비슷해 보입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한국 교회 변해야 합니다. 신도 늘리기, 큰 교회 건물 올리기, 국민에게 사탄 운운하기, 타 종교와 갈등일으키기, 자기들끼리 싸우다 분열하기 등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가 목터지게 외치던 그 거룩한 곳은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내 몸을 치장하기보다 더 어려운 곳에 거하며 나눠주기를 즐겨하고, 이 나라와 민족 세상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곳.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 아무도 쓴소리 하지 못할때 분연히 나설 수 있는 그 곳.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따르는 그 곳. 뭐 이런 게 좀 더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가까운 모습..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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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니는 건 사후 보험 드는 것?

혹시 '보험' 들어놓으셨습니까? 인생을 살다 뜻하지 않은 큰 문제를 대비해 드는 게 바로 보험이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도 보험으로 들고 있다는 얘기 혹시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그러더군요. 한국 교회는 신도를 ‘내세 보장보험’ 소비자로 취급하는 "기업" 이라 말이지요.


많은 크리스챤은 불편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 하지요. 진짜 본향은 따로 있고, 이 세상은 잠깐 스쳐지나가는 곳이라 합니다. 대개 구원이란 것도 내 영혼이 죽은 다음 구원받는 얘기로 설명하곤 하지요. 내세 지향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김경재 목사님(한신대 교수)은 이를 보고 '소승적 기독교'의 전형적 특징이라 설명 하는 데요. 이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회들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과 천국에서의 영생복락이라는 타계신앙이 중심을 이루면서 현세의 공동체가 자유 정의 평화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면서 안타까움을 담아 한국 교회에 쓴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세상과 담을 쌓는 한국 교회

한국 교회가 욕 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나 부정부패 등과 담을 쌓는 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칭찬 받겠지요. 그만큼 참여도 적고, 참여한다 해도 봉사활동 정도일 뿐 사회정의를 세우거나 민주주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과의 연대는 참 보기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요. 분명 목사님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신다는 거지요. 그런데 철거민들과 함께 연대하며 시위라도 하면 배후세력이니 뭐니 하며 비판을 합니다정의를 말씀하시긴 하는 데요. 그런데 
과거 전00 같은 군사독재 정권에 축도를 해주었지요.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한 여러 가치를 얘기하긴 하는 데,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 당하며 죽어 나갈 때 침묵했고, 우상을 경계하라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 살상무기를 핑계로 엄청난 살상을 자행한 미국을 '신이 축복한 나라' 라며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 찬양합니다.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사죄하지를 않지요.

최근에는 우병 파동으로 시끄러운 이 나라에 화해를 중재하기는 커녕 사탄의 무리라 하며 갈등을 조장하고,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 정권의 발목을 잡는다 하며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질을 하였습니다.

이러니 그렇게 욕을 먹는 겁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지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면서 정작 이 사회의 주요 현안에는 등을 돌립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다하며 실제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역사 속 한국 교회의 신앙

제가 너무 안좋은 면만 보고 있어 그런 걸까요? 제 눈이 너무 편향되어 있나요? 아니요. 사실 이 얘기는 인터넷 검색만 한번 해봐도 쫙~나오는 얘기들입니다. 그동안 보기 싫다 안 보고, 듣기 싫다 안 들어왔을 뿐입니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처
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애국, 애족의 종교였고,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이 후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1888년 12월 윤치호의 글을 한번 볼까요.
 
내팔자 임의 됴선사람되여 한심하여도 쓸대 읍고 탄식 통곡하여도 무익하매 아무주록 상뎨의 도우심을 입어 내 평생을 아국 조흔 일의 진심갈녁하여 비록 내생전의넌 내 나라이 나뮈 나라 갓치 번승하넌 것을 못볼지라도 내 마음것 내 나라를 섬기넌 것이 내 직분이라. 상뎨난 나의 약한 것을 도와 주새 내 일생이 야소성국과 내나라의 유용하게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민경배 교수
는 이 글을 보며 "하늘에 올라가 영복을 누리며 기리 살 것을 바라는 종교 본연의 신앙이 여기 있었지만, 결국은 내 나라를 위해 헌신하되 이 신앙이 나라와 겨례에 유용하게 씌어지도록 하겠노라는 다짐이 굳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와볼까요. 1960년 4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하나 발송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 한국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개화 운동, 3.1운동 그리고  일제 항거 운동의 선봉에서 과감히 싸웠던 찬란한 자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간의 집권 정부가 강압 정치를 하고 있는 동안 국민의 진정한 자유와 사회 정의의 엄정한 수호를 위하여 교회로서 하여야 할 마땅한  예명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자책하여 마지아니 한다.


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책도 하고, 결의도 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지요.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상당히 달라 보이지요?

예, 분명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기여한 측면이 있습니다. 허나 그러면 무엇합니까.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일뿐 지금의 것이 아니지요. 지금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개독교"라 불리울 뿐 전혀 이런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좀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

저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좀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왜 자기 혼자서 구원받고, 죄 용서 받으려 합니까. 또 왜 영혼만 구원 받아 죽어서만 천국 가려고 하나요.
 
이럴 거면 굳이 예수가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으며, 성전을 뒤 엎을 까닭이 없지요. 제자들을 세워 파송하고, 성령을 약속할 이유도 없으며, 고통스럽게 뭇 생명을 위해 십자가를 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같이 저 세상 가자하면 될 테니 말이지요. 

부분적이거나 개인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내세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과 고난에서의 구원도 중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강한 자와 약한 자-진보와 보수, 남과 북, 종교간 갈등을 화해하는 중재자로써, 이 사회의 낮고, 어두운 곳에 거하며 정의를 세우고, 전쟁과 폭력에 단호히 저항하는 평화의 사도로써, 물신주의를 거슬러 내세뿐 아니라 현실과 내세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기꺼이 인간의 죄를 지고, 뭇 생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던 고난의 십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에 좀 더 합당한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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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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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허름한 곳이지요. 예수가 태어난 곳 말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한다 해도 지금도 마굿간은 냄새가 나고 지저분 한것이 사실이지요. 게다가 누가 동물 먹이통을 씻어주고 한단 말입니까. 바로 이런 곳에서 아기 예수는 태어난 거지요. 지금 같이 깨끗하고, 좋은 산부인과를 이용하는 우리로써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먼저 이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천년 전 유대 사회의 구조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한 마디로 "공의"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착취는 두말 할 것 없이-물론 유대인을 통한 것이었지만- 종교마저 타락하여 소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수탈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에는
패배 의식과 상처만이
찰 수 밖에 없지요. 평안이 없었습니다영혼이 메말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정신줄을 놓아 버리는 경우마저 있었지요.

자,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나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가 투숙할 객실이 없었음을 얘기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데요.

과거 유대 전통은 나그네나 고아, 과부를 정성으로 섬기라는 게 있는 데요. 그 만큼 약자를 배려하라는 가르침과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태어날 당시
유대 사회는
만삭이 되어 출산을 앞둔 임산부를 보고도 전혀 도움의 손길이나 양보를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전혀 이런 배려가 이뤄지지도 않고, 이룰 수 있는 여유조차 없는 사회 구조적으로나 인간의 영혼으로나 모두 최악의 성격을 지닌 바로 그러한 곳이 유대사회였다는 거지요. 

즉, 성경은 예수의 이 어이없는 탄생을 자세히 기록함을 통해 당시 유대 사회와 사람의 영혼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고, 폭로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기 예수가 왜 이 땅에 오게 되었나 그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 삶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아기 예수가 마굿간 위에서 태어난 걸 보며 또한 성탄을 한주 앞둔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며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아니 어쩌면 더 심한 양극화의 사회를 살고 있지요. 하루에 수십명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이웃끼리도 살인이 일어나는 세상을 삽니다.

그 만큼 문제가 있는 사회이지요. 사람의 영혼에 평안과 여유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아기 예수를 또 다시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겠지요.


유독 더욱 길고, 춥게 느껴질 이번 2009년의 성탄과 겨울. 아무쪼록 이 하루는 "우리끼리"만 선물을 주고 받고 행복하거나 술에 쩌들어 있는 날이 아닌나 자신을 돌아보며 가난한 이웃을 더 배려하고, 아껴주는 이 사회에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성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쯤은 내가 살아가는 모양새나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고민해 보고, 기도해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러면 조금은 더 살만한 세상이 되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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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내에 양을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을 파는 곳 근처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참으로 특별한 곳이었는 데요. 그것은 천사가 한번씩 내려 오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천사가 오는 것도 신기하고 특별한 데 이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되고 물을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병도 상관없이 다 낫게 되는 겁니다. 정말 신묘하고 특별한 연못인 거지요.


자연스레 수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이 연못에 모여듭니다. 성경을 보니 예루살렘에 예수가 올라갔을 때도 그렇게 많이 있었다 합니다. 
물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은 병자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곁에 갑니다. 딱 보니 매우 오랫 동안 고생한 게 보입니다. 예수가 말을 꺼냅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그랬더니 이 병자가 얼른 대답하지요. 그런데 대답이 좀 이상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지요.
우리는 병자의 대답에서 중요한 점 하나를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병자는 물음에 답하기보다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데스다 연못이 갖고 있는 냉정한 정글의 법칙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약자의 마음이 표현 된 거지요.

가만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요. 1등만이 기억되지요. 오로지 최고만을 원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난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과목당 수십만원짜리 과외를 받는 아이들을 넘어설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자연스레 뒤쳐진 사람들의 마음에는 회의감, 패배의식, 불만 등이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될 수록 사회가 더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아니요. 이러면 안되는 거지요. 이 세상은 1등만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져도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정직하게 땀흘려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곳입니다. 지금처럼 이래서는 안됩니다.


자, 아무튼 그  다음을 보지요. 성경은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선언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곧 나았습니다. 자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거지요. 

예수는 바로 이러한 냉혹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철저하게 "치유해야할 대상" 으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곳, 생명에 관한 문제는 정글의 법칙으로 매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저는 오늘날 이런 세태를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앞장서고, 답습하는 교회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연말이면 전도 1등을 뽑아 어마어마한 경품을 주는 대형교회. 또한 교회끼리도 서로 교인수를 늘려 1등 교회가 되려하지요. 기도를 하면서도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만 합니다. 목회자는 축복에 축복을 더해 십일조 많이 하게 해달라 기도하기도 합니다.

전도 해야죠. 그러나 이런 큰 상품을 걸어 동기부여를 하고, 격려한다는 건 문제가 있지요. 교회 성장하면 좋지요. 허나 더 중요한 건 교회의 건강성이 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머리가 되면 좋지요. 그러나 머리가 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해달라 기도해야지요. 십일조도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더 많이 구제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거구요.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우리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은 1등하고, 물질 명예적 성공만을 하려 할 게 아니라 섬김의 1등, 정의와 평화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생명을 가꾸는 일에만 힘을 써야 하고, 오직 사랑만을 빚지며 살아야할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을 거슬러 분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 이제 다음 주면 성탄입니다. 저는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유례없는 경제위기로 그 어느 때보다 추워질 이번 겨울은 어려운 이를 더욱 어렵고, 춥게 만들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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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가 이 세상을 섬기려 왔다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죽기까지 사랑하며 섬기었다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를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처럼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이러한 예수의 섬김을 함께 나누고, 따를 수 있도록 크게 세 가지 정도 정리해 나가볼까 합니다.


먼저, 예수는 직접 낮아지는 '발바닥 섬김' 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온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직접 걸어 다니며 '발바닥' 으로 섬긴 분입니다. 가만히 앉아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지적하는 게 아니었지요. 또한 '발바닥' 까지 내려 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몸소 낮아졌고, 누구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하늘에서 높아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 누구에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을 "능력" 이라 합니다. 요즘은 교회도 그러지요. 낮고, 어려운 곳에 찾아가기 보다 은행 VIP 자리에 오르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 줄 압니다.

물론 이렇게 외형적 발전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허나 그 속에 예수처럼 발바닥까지 내려가고,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섬기려는 정신이 있는지는 각 자 돌아봐야 한다는 거지요. 만약 교회진정 예수처럼 낮아져 세상과 이웃을 섬겨왔다면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두 번째로 가림 즉, 차별 없는 섬김이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가난한 서민을 섬겼습니다. 세상이 모두 욕하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여자도 섬겼고, 이방인도 섬겼습니다. 그냥 다 똑같은 생명이자, 존귀한 존재라는 마음에 하나 같이 섬기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랑과 조언, 비판을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와는 정 반대이지요. 요즘 세상은 멋진 옷과 좋은 차, 집을 가진 부자와 권력자는 정성으로 섬깁니다. 무슨 의원이나 상급 기관 관계자가 온다하면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그냥 쉽게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힘이 잔뜩 들어가고, 발언권도 셉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 교인과 허름한 교인의 대우가 말은 안그런다 하지만 본인이 위화감을 느끼게 합니다. 헌금을 많이 내야 직분을 받으니 말이죠.

우리 스스로 좀 더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우리 안에 이런 어리석은 "가림"이 계속 존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은총을 스스로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의 섬김은 이름도, 빛도 없는 "조용한 섬김" 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지요. 실제 예수 자체가 그랬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게 원래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당연한 일이라는 거지요.

요즘 보면 뭐 그리 자신을 내보이려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조용히 섬기는 게 당연한 일인 거지요. 그냥 말없이 하면 됩니다. 물질이 있으면 물질로 돕고, 요리 재주가 있으면 요리로 돕고,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청소면 청소로 그냥 섬기면 되지요.

그런데 요즘은 뭘 하나만 해도 사진을 꼭 찍고, 현수막을 걸며 자랑 합니다. '기부를 얼마 했다..누구를 어떻게 도왔다' 난리 법석을 떱니다. 특히, 교회와 공직에 있는 분들이 유독 자주 보이지요.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랑을 해대는 건지.


물론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만 과연 자신의 맘 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무엇을 위하고 있는 건지 잘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입니다.



사실 세상을 섬긴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섬김 즉, 자신을 먼저 닦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닦아 간다는 것..어렵지요. 그러나 동시에 섬김의 삶을 통해 인생의 더 깊은 배움하늘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도 있음에 우리는 용기를 얻고, 다시금 어려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 이름이 욕보이지 않게 하는 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영혼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데도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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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제게 충격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최후의 대예언"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연구하는 무슨 단체에선가 발행한 것이었는 데요. 요지는 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모두 맞춰왔었고, 이제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으며, 이건 틀림이 없을 거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허나 이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지금 돌아보면 이들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팔아 이슈를 만들어 먹고 사는 뭐 그런 부류에 불과했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좀 다릅니다. 예언으로 먹고 살기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은 한문으로 미리 예자를 씁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 즉, 맡을 예자도 있습니다. 뭔가를 맡아서 얘기하는 거지요.
성경의 예언자는 그렇습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데,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받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어느 날 갑자기 영험하다 하는 산에 올라가 도를 닦다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1)일상에서 생활하며 당시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내면의 영혼을 복합적으로 볼 줄 아는 고도의 학식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2)동시에 하나님께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 있는 매우 예민한 영성을 갖춘 자였고, 오직 3)말씀에 따른 정도가 아니면 죽음도 불사하는 곧은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는 당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 내면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뜻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곧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언은 먼저 주제 선포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흔히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심령의 회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라는 얘기인 거지요.

즉, 예수는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사람을 신분과 성별 부유함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고, 권력으로 약자를 억누르며, 강자 즉, 기득권 층이 약자 즉,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이로 인해 타락한 영혼과 상처 받고 절망한 심지어 귀신마저 들려버리는 영혼을 보면서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로 천국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 하나님 나라이지요.

왜 우리 나라는 항상 죽은 다음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땅의 삶을 살면서는 천국의 삶을 살려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어야 하고,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럴 수 있도록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친절하고, 사랑해서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됩니다. 추락할 만큼 추락한 도덕성을 갖고 서는 하나님의 "하"자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언자였던 예수는 크리스챤에게 참으로 힘든 요구 즉, 예언자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냥 편히 교회 출석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맘에 늘 깨어있으라 명을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뭔가 다른 거룩한 삶을 살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곧은 의지를 전하며, 생명의 삶을 살 것을, 평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뒷일을 책임져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은 지금처럼 너무 교인늘리기나 분점 내기에 열중하기보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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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3:50 Posted by 바람몰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런데 예수가 만드는 평화는 흔히 말하는 현실의 삶을 무시한 내면이나 내세의 평화라기 보다 좀 더 적극적 의미를 품은 분명한 현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온 몸을 투신해서 평화를 선포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적극적 개념의 평화를 갖고 있던 예수
먼저 예수는 구약 성경의 샬롬 신앙을 갖고 있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샬롬" 이란 직역하면 평화를 말하는 것인 데,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쟁반대' 구호로 대변되는 전쟁부재, 개인 내면의 평화 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의 개념입니다. 즉, 전쟁부재 상황을 유지하는 보존 활동과 질적으로 다른 '평화 부재의 상황에서 작업을 통해 비로소 평화를 이룩해내는 창조 활동'을 말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평화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
예수의 이러한 평화는 예언자 이사야가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야기 하고, 시편 기자가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이야기 했듯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정의를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렘22:3). 또한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생명을 구원하고, 도움이 없는 자를 건지고,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라 합니다. (시72:4)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고, 제왕들을 왕자에서 끌어 내리며, 낮은 사람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 정의가 없고, 착취와 부정, 거짓, 파괴, 양극화 만이 계속되는 예루살렘을 보며
평화가 없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강팍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이 보여 너무 가슴이 아프니 말입니다. 또한 이런 맥락 위에서 예루살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도 선포하고 하는 거지요.


정리 하는 글 : 우리 사회를 보면서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지금 이 사회를 본다면 또 다시 두번째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서민을 위한다 말은 하지만 정작 서민 눈에는 부자를 위한 정책 밖에 보이지 않고. 경제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양극화는 계속 심화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보다 냉혹한 입시의 경쟁에 빠져야만 하지요. 대북 관계는 지금 죽어가는 수만의 어린이와 동포를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갈 수록 더 늘어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루살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어려운 세상에 대형 교회 목회자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 타 있고, 교회는 세습의 대상이 되며, 낮은 자세로 섬기지는 못할 망정 은행 VIP나 되고 말이죠. 사회적으로는 일개 시민단체보다 도덕성이 낮다 평가 받고 있습니다. 종교간 화해와 사회 통합에 기여는 못할 망정 오히려 대립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행위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전하려 했던 그 복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향하던 가치와 노력을 받아 올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발걸음을 쫓아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참된 공동체가 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섬기며 화해의 사도가 되는 십자가를 충분히 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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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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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2:07 Posted by 바람몰이


전통적인 해석의 한계

예수가 두번째로 눈물 흘린 것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이 부분을 예루살렘이 망할 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가 비통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가 그 뒤에 말하는 평화에 대한 이해, 당시 예루살렘과 예수의 관계 등이 적절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 한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수가 의도하는 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선명하게 대조하고, 실제 예수는 그 첫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해 예루살렘을 최종 종착지로 삼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게 된 핵심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갖고 있던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말이 성전이지 사실상 성전이라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 했고, 이런 차별을 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각 종 세금을 비롯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토지 수입 등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오늘날의 은행같은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당연히 성전의 주요 관리자인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성전 경비대장, 성전 창고 관리인 등)은 정규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고, 많은 토지, 금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통로로 변질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예수의 눈에는 갈릴리나 베다니 같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곳과 이들을 끊임 없이 죄인이라 규정하고, 수탈하는 예루살렘이 강도의 소굴로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대립관계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것만 해도 벌써 통탄을 금할 수 없을 예수였던 거지요.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리게 된 근본적 이유
그런데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이미 위의 이유도 충분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평화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활동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 에 있다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라는 건 죽은 후 떠나가는 "저 세계" 라기 보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이미 도래한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사역지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언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이는 로마의 군사력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수많은 서민들의 피와 땀, 한과 눈물이 맺힌 로마의 거짓 평화에 대한 분명한 파산 선고였습니다. 마치 새벽 닭 울음소리로 어둠이 아닌 새벽이 선포되듯 말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과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뜨임을, 눌린 사람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라 기술합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냈다 이야기 합니다.

즉,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바로 "평화"의 선포이자 도래였다는 겁니다. 
2-2 편에 계속 됩니다(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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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01:26 Posted by 바람몰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

1.전통적 해석의 한계

그 동안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가 자신과 그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모든 걸 절망하고, 포기한 이들을 보며 민망히 여기고, 통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보았습니다. 또한 나사로가 살아남을 통해 이들의 믿음이 온전케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믿음의 측면에만 국한 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좀 더 솔직히 교회의 입맛에 끼워 맞췄다는 느낌도 듭니다. 저는 이 부분을 좀 더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까지 함께 볼 때 예수가 눈물을 흘린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인간적인 공감을 먼저 하는 예수
예수는 수많은 경비병이 있는 성전을 뒤 엎을 정도로 상당히 터프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보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는 마르다, 마리아를 보며 눈물을 함께 흘리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는 나사로가 그의 한마디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알고 있던 그였다면 사실 '걱정마라'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거나, 웃으며 그냥 나사로를 살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예수는 비통하여 괴로워하면서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의 눈에는 그들의 아파하는 마음이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겉보이는 모습과 달리 예수는 따뜻함과 이해심이 가득한 마음을 소유한 이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온 몸이 메마른 듯 지쳐버린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공감" 하였던 이였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를 보고도 그랬고, 돌팔매질을 당하던 부정하게 취급 받는 여인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마르다와 마리아, 주변인의 아픔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어떻게 그 마음을 이렇게 따뜻한 이가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인간적인 공감을 먼저 했던 거지요.  

3.사회의 부조리에 일침을 놓는 예수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게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시 온전히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여자였다는 겁니다. 또한 두번째는 이들이 사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살던 곳이라는 거지요. 바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을 예수는 당시 사회를 거슬러 사랑하였고, 함께 눈물 흘렸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집중 주목을 받던 그의 행보는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쳐 지는 게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 사회의 기득권 층과 지배계층에게 찍혀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가 베다니로 가고, 심지어 여기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죽어 있던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 그냥 조용히 지나쳐질리 없습니다. 사회지배층은 대다수 서민(민중)이 동요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이 싫으니 말입니다.

실제 저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의 행위 때문에 많은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예수를 죽일 모의를 시작하지요.

결국 이것은 그의 눈물을(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역시 믿음의 차원으로만, 그가 사람들을 보고 답답하고, 안타까워서만 흘린 것으로 머무를 수 없게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버린 차별 받는 이들, 마음 아파 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은총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부조리는 단호히 거부하며 분명한 일침을 놓겠다는 그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정리하는 글
저는 예수가 오늘의 우리를 보면 또 다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먼저 너무 힘들고, 지쳐 버린 우리를 보며 안아주고 싶어하고,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겠지요. 또한 동시에 이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게 만든 이 세상과 이런 탐욕을 키워가는 우리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겁니다. 끝으로 갈 수록 심해지는 이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도 그러겠지요. 여전히 우리는 돈 없고, 빽 없는 서민의 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엄격한 법적용을 받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나아가자면 끊임 없이 파괴되는 생명세상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 정의, 평화가 부재한 그런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고,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안의 기름띠를 이겨 냈고, 백혈병에 걸린 한 사람을 위해 줄을 서 골수를 기증하며, 국가의 중요 문제를 위해 작은 촛불을 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갈 수록 경제가 어려워지고, 각박해지는 세상이라 하지만 우리가 이런 희망을 보고, 함께 마음을 모아 갈 때 어려움도 극복 되고, 세상도 더욱 따뜻해지는 거겠지요.

기독교는 예수를 완전한 인격과 신격의 결정체라 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지요. 그는 눈물을 흘리던 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언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요.  

성경에는 예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두번 나오고, 한번 증언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죽어 있는 나사로 때문에 아파하던 가족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 되어 흘렸던 눈물을 들수 있겠습니다(요11:35). 두번째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흘렸던 눈물을 들 수 있습니다(눅19:41). 끝으로 세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흘렸던 눈물이었습니다(히5:7). 

이 글은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흘렸던 눈물에 대해 살펴보려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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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2-2) 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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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땀흘려 일하는 예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0. 13. 17:23 Posted by 바람몰이


1.저는 로또를 사지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로또 살 돈도 아깝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첨되도 기분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왠 로또 얘기냐구요. 요즘 보면 가만 앉아서 돈 버는 사람이 자주 보여 그렇습니다. 부모 잘 만나 유산 상속 받는 것까지는 좋으나 세금을 안 내도 처벌 받지 않는 모습이나 부동산이나 그림 잘 사서 돈 벌어대는 모습..뭐 좋게 말하면 투자겠지만 저 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허탈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땀흘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먼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노동을 통해 천지를 창조했다 성경은 고백합니다. 그냥 거저 생긴 게 아니라는 거지요. 

또한 예수 자신이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부모가 하던 일을 자연스레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으니 예수 자신도 아버지 요셉처럼 목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자신이 만든 멍에는 가볍다는 비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2.예수가 일하며 먹고 사는 데는 분명한 범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용할 수 있는 만큼의 양식을 버는 데 까지 였습니다.

그가 일용할 양식을 강조한 것은 사람이 그 이상을 원할 때 오게 되는 유혹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 끝없는 욕망은 사람의 삶을 항상 불행하게 느끼게 합니다. 또한 사람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인생의 여유를 놓쳐 버리게 됩니다. 끝으로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모른 채 이기적인 삶만을 살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맙니다.

구약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 이상의 양식을 모을 때 그것이 썩어 진동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욕심을 버리고, 공동체의 삶을 살며, 인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은 수십년간 매일 같이 양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이러한 성경의 맥 정점에 서서 분명히 선포를 하고 있는 겁니다.


3.예수가 직접 땀흘려 하던 노동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넓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노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좁게는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지탄 받던 당시 세리장이. 그 중 한명은 예수를 만나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 나라가 가득차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둔 재물 중 부당하게 거둔 것은 네배로 돌려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새롭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은총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훗날 쓰여진 성경 본문에는 마음이 가난하다 표현되어 있으나 원문은 그냥 가난한 자이다.) 이미 이 세상이 버리고, 지금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고, 위로해주신다 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 대한 분명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를 만나 세상의 가치에 묶인 자신이 해방되고, 눈이 뜨이며, 억눌림에서 자유를 얻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가 함께 상생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은총의 해가 되었습니다. 그 사회나 개인 모두의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4.오늘날 우리의 삶은 아무리 잠 안자고, 발버둥치며 일해도 반지하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내가 땀흘리지 않아도 돈이 돈을 벌게 하고, 이 돈은 곧 힘이 되어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정당하게 재물을 모은 자마저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하고, 죄인처럼 살아가게 합니다. 결국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구조가 됩니다. (사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가 그렇기도 합니다만) 

사람들은 소외감, 박탈감, 허무함 등에 빠져 점점 영혼이 곤고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 모두 똑같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직접 땀흘려 일하고, 일용할 양식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 모두에게 해방감과 자유를 주고자 합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행복하고, 참된 인생을 살 수 있게 인도하고자 합니다. 실제 자신이 직접 나무를 다룬 목수로써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노동을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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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예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9. 24. 15:31 Posted by 바람몰이


1.저는 예수를 바람둥이라 생각합니다. 이성이나 홀려대는 카사노바처럼 그를 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둥이란 어떠한 성질은 지닌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인데요. 말 그대로 바람의 성질을 갖고 있는 예수이기에 바람둥이라 여기는 겁니다.

인간은 사유재산이 생기고, 권력분화가 일어난 후 단 한번도 재물, 권력, 명예 따위의 노예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여기며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의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경제는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합니다. 옛 선현들은 명예는 한 줌의 재와 같다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비록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이것들을 배제하고 살 수는 없지만, 이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살아야만 비로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일 겝니다. 

예수는 이런 세속적 가치를 버리라 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떠날 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보내신 분이지요.

그러나 이것에 얽매이기만 해서도 안됨을 설파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는 것. 즉, 자유롭게 성령에 따라 살라합니다. 성령이란 성스러운 영.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하는 바람인데요. 성령에 따라 산다는 건 결국 바람과 같이 사는 그런 겁니다.


2.본래 바람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요. 무질서하게 부는 것 같지만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거대한 흐름을 갖고 흐르고 있습니다. 때론 사람을 시원하게도 하지만 때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무섭지요.

예수가 지닌 이러한 바람의 영성은 철저하게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났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늘의 뜻이란 고기압에서 인간의 삶이란 저기압을 향해 흐르는 삶이었지요. 이것은 자유분방 한 듯 여행하며  섬김과 십자가를 향한 흐름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런 세속적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고, 붙잡히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이 땅위의 인간의 삶을 사는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려 절망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되었고, 정의가 없고 인권이 유린되는 곳에서는 강한 기둥이 되어 정의와 인권을 되찾게 하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서는 서로를 향해 기도하게 하였고, 내면의 상처와 고민으로 고통받는 자에게는 자신의 영혼이 해방되는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세상의 어떠한 가치나 제도, 이데올로기에도 붙잡히거나 정체하지 않으며 참으로 바람 같이 사신 그런 분인 거지요. 그리고는 민중을 선동했다며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란 정치범 죄목을 뒤집어 쓴 채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3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3.이 세상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심리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흐름 자체가 심리적 침체에 빠져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질과 명예 같은 가치를 잡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불안한 심리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것을 잘 잡고 삐까뻔쩍한 외제차를 몰고 와야만 능력있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침체"의 개념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는 바보 중의 상 바보입니다. 그의 바람과 같은 영혼은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가 2천년 전이 아닌 지금 와 있었다면 어느 역 앞 노숙자 신세가 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불안하고, 침체된 심리 상태가 아닌 살아있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삶을 살고 있었을 겝니다. 그의 곁에는 배고파도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소크라테스가 모여 있었을 겝니다.


4.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목회자들은 그의 바람과 같은 영성을 철저하게 본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교회 건물과 신도의 숫자, 각 종 종교행사 출석률, 사회적 명예와 지위 등에 얽매여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자식의 명문대 입학과 물질적 성공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억눌리고 힘들어 하는 자를 위한 섬김과 나눔 등의 사회적 책임 역시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룩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하면서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는 참된 하늘 바람으로 샤워하지를 못합니다. 교회 용어를 빌리자면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될거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라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기독교인들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뤄지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관용으로 용서하듯 우리가 생명세상에 지은 죄에 대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시기를 구하며 모든 것의 권위와 영광은 우리 인간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것이라 고백하게 하였지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의 두번째 글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바람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고운 님께 영혼까지 맑게 하는 시원한 예수의 하늘 바람이 지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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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창 인기를 끌었던 '그 놈 목소리'라는 영화가 있지요. 자식 가진 부모 입장이 되니 예전과는 달리 이런 내용의 영화는 쉽게 손이 가지 않더군요. 하지만 새삼 유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며 '어쩌다 인정 많고, 사람 순하기로 소문난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가만보면 요즘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취급되는. 인간성이 유린 되는 이런 일이 여전히 반복될 뿐 아니라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런 일이 반복 및 증가하게 하는 사회 구조 역시 여전히 존재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두말 하면 잔소리지요. 모두 사람의 가치보다 재물 같은 물질이나 이데올로기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잘못된 사회제도와 분위기, 사고방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아 버린 거지요.


2.성경은 이것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전통은 이런 가치관이 매우 강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못하고 우상을 섬긴다는 거지요. 물론 이런 전통은 신약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 아닌 세상적인 것에 몰두한다는 겁니다. 그 핵심 원인이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이란 겁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넣어주셨던. 공동체를 지향하고, 서로를 아끼던 우리의 인간성을 부끄러울 정도로 타락하게 만들어 죄악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는 거지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인정이 메마르고, 무시무시한 문제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겁니다. 공기에 젖어 사니 공기가 있는 줄 모르듯, 죄악에 물든 세상에 사니 이게 당연한 건줄 알고 있는. 얼마나 우리가 죄에 무감각해져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3.성경의 핵심인 예수 역시 돈이나 명예를 쫓고, 이기심이 가득하여 선한 본성을 죄에 빠지게 하는 이 어이 없는 사회 분위기를 보며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영혼이 귀하게 여겨지지 못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지 못하는 세상을 보며 "정신 차리라" 정확히 꾸짖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가 바리새인과 안식일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39가지나 되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안식일 금지조항, 정결규정으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백성들을 죄인이라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재물과 권력 즉,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유다의 지배권력세력과 체제>를 통렬히 꾸짖습니다. 안식일 마저도 자신들의 도구로 삼아 사람을 소외시켜버리는 이들을 향해 말입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이 꾸짖음은 사람, 인간성, 영혼이 사라진 종교, 사회로 대표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에게 가해진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10:14는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것 모두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것이라 분명히 선언합니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하나님 중심주의>가 의도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고 불의한 제도, 권력, 체제, 사회분위기에 맞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즉,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사람 중심에 그 가치가 있다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 사회를 보며 정신 차리라 아주 통렬하게 꾸짖을 수 밖에요..자기 스스로 사람을 소외시켜 가고, 굴레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정신차리라 할 수 밖에요..

사람이 중심이 되고, 그 영혼을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4.
우리는 흔히 신의 아들 예수.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가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었는지는 소홀히 여기곤 하지요.

그래서 한국 교회 교인들하나님 중심주의내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아주 열심이면서 이웃 사랑이나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낮은 자리에 서는 데는 약합니다. 대형교회가 넘쳐나고, 대형고급차가 넘쳐나는 데 이웃을 섬기는 손길을 점점 줄어듭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는 사람 중심주의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라는 거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소외된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보며 한없이 눈물흘리며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살게 됩니다. 좀 더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 잘 사는 자나 못 사는 자나 서로 존중할 수 있게 하려 애를 쓰게 됩니다.


5.물질 만능주의와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이 시대. 사람마저 상품이 되는 이 시대.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나, 존경받는 잘 사는 부족한 이 시대. 평화보다 전쟁이 더 많은 이 시대.

저는 <예수 알아가기> 라는 주제로 약 10회 정도의 글을 연재해 보려 하는 데요.

오늘 그 첫번째 시간.
김준태라는 시인이 ‘아무나 보듬고 싶다’라는 시기 참 다가와서요. 이 시를 통해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제 글이<예수님은 누구신가?!> 묻고,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아무나 보듬고 싶다

무식하게 정말 일자무식하게

사람이여 환장하게 좋은 사람이여


아무나 보듬고 설레이고 싶다


그리하여 더욱 아무나 보듬고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놀라움을


강물에 입술 적시듯 노래하고 싶다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것들이여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사람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우리가 너무 깊이 보듬어


마음에 행여 가시가 박힌다손


육신에 행여 손톱자국이 머무른다손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눈동자여


사람의 뼈는 하늘의 하늘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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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기독교인이여 예수를 욕보이지 말라
영화 <다빈치 코드> 상영 저지하려는 한국 기독교
  임정혁(kkuks81) 기자   
▲ 한기총으로부터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영화 <다빈치 코드>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영화 <다빈치 코드>의 상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독교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한기총의 경우 서울지검에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하였다.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들 역시 상영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이들의 반대 논리는 '신성모독'과 '신앙'이다. 신성모독이란 말 그대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써 그 중심 축은 당연히 '예수'이다.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 그리고 자녀 출산 등이 가장 큰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이 생겨난 배경 그리고 그 '신성'을 유지하여야만 하는 집단의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해 나온 '신앙'의 자리이다.

예수는 가난한 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사셨던 분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예수'에 대한 '신성'은 서구 정통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들이다. 서구 정통주의 신학은 서양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실제 현실 속의 예수의 삶과는 상관없이 대부분 '관념' 속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또한 사제 계층과 특별히 서양의 기득권 백인남성에게만 독점되어 생겼던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기득권 계층의 종교적 카타르시스 충족에만 봉사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생긴 왜곡은 매우 다양하다. '예수'만 해도 그렇다. 실제 예수는 가난한 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사셨던 분이다. 기득권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대립의 각을 세우기도 했던 분이다. 그는 목수로써 두툼한 손과 팔을 지녔을 확률이 매우 높은 분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기도 하였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던 분이다. 그 역시 인간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 예수'는 없애버리고, 오직 '신의 아들 예수'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십자가의 무거운 형틀을 지녔던, 가난한 서민과 함께 하던 예수는 사라지게 되었다. 두툼한 손과 팔을 지녔을 예수는 앙상한 뼈만 남은, 하얀 피부와 긴 얼굴을 지닌 미남자가 되었다. 목이 마르던 예수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완전한 인간으로써, 완전한 신의 아들로써의 예수는 온전히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는 오직 신의 아들로써의 예수이다. 영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미남자일뿐이라는 것이다. 실제의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이 두 가지는 어느 것 하나 간과됨이 없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목사는 월급 받는 노동자... 그런데 왜 세금을 내지 않는가

▲ 지난 19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주최한 '기독교 사학수호를 위한 한국교회 비상구국기도회'에 퍼포먼스용으로 등장한 대형 나무십자가가 네티즌의 냉소를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상당수의 보수적 교회들은 영은 신성하고, 육은 더러운 것으로 본다. 이 땅의 삶은 고달프고 힘든 것으로 본다. 우리 모두 영혼의 구원을 받고, 본향을 찾아가자고 가르친다. 이에 상당수 신자들은 새벽기도를 하며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고, 본향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요지의 가르침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유지시켜 나가는 매우 순응적인 교인들을 양성한다. 목사의 설교를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아멘쟁이' 신자들만을 양성한다. 이 땅의 불합리한 현실과 자신의 삶을 개선시켜 보려는 노력보다는 이를 참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달라 기도하는 '인내의 신자'들을 양성한다.

이러한 신자들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것은 바로 '목사'이다. 일반적으로 목사는 그 교회의 소유주처럼 생각되고 있다(물론 그들은 아니라고 한다). 목사들은 자신들이 정기적인 월급을 받는 노동자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직이라고만 여긴다. 그래서 세금도 내지 않는다. 이들의 차량유지비 및 생활비, 심지어는 자녀 교육비까지 교회에서 대주는 경우가 많다(물론 그렇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소수의 건전한 교회들도 있다).

또 다른 수혜자들은 이 땅의 기득권자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득권을 지닌 측면도 있고, 소수자적 측면을 지니고도 있다. 그래서 최근의 민중신학 진영에서는 자신의 소수자적 측면과 기득권적 측면을 온전히 발견해나가자 한다. 자신의 소수자적 측면은 적극 연대하여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하고, 기득권적 측면 역시 소수자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땅에는 기득권자들이 존재한다. 사회의 각 영역에 없는 곳이 없다. 이들은 이러한 현실 순응적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교회에서는 여성 목회자가 설 수 없게 되고, 사회 개혁 시도는 거센 저항을 받게 된다.

비리 덩어리 보수 정당은 개혁 비슷한 정당의 변변치 않는 모습에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성추행을 하고도 뻔뻔하게 카메라 앞에 서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오죽하면 한 정당의 대표가 한편의 영화 상영을 저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 나올까.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데 힘을 쏟아라

신앙이란 신앙인 자신의 형편과 삶의 색깔에 따라 다양하다. 이 모두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신앙이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의 모습을 따르는 신앙인지 아닌지는 늘 성찰해나가야 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연장선에 있는지 기득권자들의 자기 유지의 연장선에 있는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예수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서 비리를 옹호해주지는 않았다. 성추행을 하였던 죄 자체까지 사랑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인간을 사랑했고, 그 인간이 하늘의 신비를 맛보며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던 분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사시며 이 땅에 생명세상을 활짝 열어가려 하였다.

영화에서 괴물이 나온다 하여 지구방위대를 결성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엄청난 자연재해가 닥쳐온다 하여 생필품 사재기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지금 기독계가 보이는 이런 과민반응은 스스로 편협함을 보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교양수준 및 신앙의 가벼움을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자신을 욕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진정한 '신성모독'과 '신앙'의 위협은 영화 한편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이 생명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속 좁은 분이 아니시다. 먼저 자기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여유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런 엉뚱한 데에 힘을 쏟지 말고,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이웃을 사랑하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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