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7.11.08 가인과 아벨
  2. 2007.11.08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
  3. 2007.11.08 사람을 만드시다
  4. 2007.11.08 창조이야기-(1)

가인과 아벨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7 Posted by 바람몰이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아이를 얻습니다. 첫째가 가인이고 둘째 녀석이 아벨입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고 아벨을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세월이 지난 뒤 각 기 얻은 소출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반기셨는 데 가인의 것은 반기지를 않으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화를 내고 얼굴빛이 달라졌냐 물으십니다. 또한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기에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하니 그 죄를 잘 다스리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결국 동생을 불러다 들판에 가서 쳐 죽이고 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있는지 물으십니다. 가인은 모른다고 하며 자기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 따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 하시며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이 형벌이 너무 무겁고, 자신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는다 하시며 표를 주십니다. 그 유명한 가인의 표이지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마지막 결론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무튼 저는 그렇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질러 극형에 처해도 시원치 않을 가인에게 오히려 표를 주시어 보호해 주시니 말입니다. 

   

먼저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잡아 봅니다. 4장 1절에 있는 하와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와는 자신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것을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라고 번역합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두 번째로 7절에서 언급한 죄를 포인트로 잡아봅니다.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인간 스스로의 힘만을 의지하는 교만의 상태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주님께서 죄가 가인의 문 앞에 도사리고,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가인이 곧 하나님을 떠나 그 말씀과 가치를 버리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교만한 자기행동을 하려 한다는 것을 경고하시며 그걸 잘 다스리라 당부하시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9절에서 가인이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며 하나님께 질문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저는 세상과 인간은 서로 하나 되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이치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강제로 분리하여 분열된 “남남의 삶”을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인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핑계를 대며 각 기 다른 삶인 것처럼 분열을 꾀하며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벨과 자신을 구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도 자신이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분리된 삶을 사는 죄의 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죄 그 자체는 나쁜 것이기에 용납하지 않지만 그 죄 이전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히 여기신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아무리 당부를 해도 죄에 빠져 허우적 대는 인간마저도(!) 당신께서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 낳으신 자신의 자식들이라는 그 사랑을 보이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 바로 하나님의 끝없는 모성애적 사랑의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표현한 것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인 것이지요
1).


   이러한 맥락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세계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는지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끝까지 인간을 버릴 수 없고,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인적 삶과 이 생명세상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바로 그 이유를 말이지요.


  아울러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살펴봅시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이유를 그가 첫 소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해는 매우 편협한 것이기에 별로 신뢰할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큰 성경의 고백과 이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서 창세기 1장이 2장보다 4세기정도 늦게 쓰여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창세기를 쓴 기자가 여럿이라는 말이 됩니다. 실제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록하며 하나님을 증언한 기자는 B.C8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사회가 갖게 된 혼란을 충분히 경험했을 시기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의 기자는 이러한 가나안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지요
2). 정착 이전에 갖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문화. 즉, 유목생활과 떠돌이 생활의 고됨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동행하던 삶이었기에 당연히 이것이 옳은 신앙의 길임을 선포하였구요.


  여기서 우린 왜 하필 아벨의 제물만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생각해보면 농사를 지어 곡식을 드리는 것은 추수 감사절의 모양새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지어서 바치는 데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결국 성경이 말하는 가인의 농사는 가나안의 농경문화를 의미하고 이것은 바알이나 맘몬 같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문제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바로 이러한 우상숭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받지 않으셨던 겁니다
3).

  우리의 고백은 풍요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이자 그 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신이 되어 우리 인간의 정신을 지배해서는 당연히 아니 됩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고귀한 하늘의 삶과 가치만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게 크리스챤의 삶의 방식이자 성경의 증언인 것입니다.
 


1) 아담과 하와에게도 나뭇잎이 아닌 가죽옷을 입혀 내보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이지요.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죽옷을 입혀 보내신 것입니다.


2) 모두 아시다시피 이 때 가나안은 농경문화와 이에 따른 풍요의 문화 즉, 바알이나 맘몬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3) 첫 제물을 안 바쳤기에 그렇다는 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문제와 어려움, 하나님 유일신 신앙, 창세기의 저작시기 등을 아무것도 모르고 매우 단순히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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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4 Posted by 바람몰이
 

창세기에서 천지창조 이야기를 지나 에덴동산 이야기에 도착하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선악과’ 이야기지요.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속에는 인간에게 내재한 “원죄”에 대한 설명이 있기에 더욱 인상 깊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고 모든 걸 허락하셨는 데, 단, 하나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이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냥 그렇게 저렇게 잘 살고 있었는 데 갑자기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유혹합니다. 그래서 하와가 냉큼 먹고서 아담에게까지 건내 줍니다. 순간 이들은 눈이 번쩍 뜨이면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걸 알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후 숨게 됩니다. 그 후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고 결국 에덴동산 추방령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좀 더 주의 깊게 볼 대목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흔히 여자의 산고와 남자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주신 형벌과 저주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혹시 성도 여러분께서도 아이를 낳고 내가 벌을 받았다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던데요.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가족들이 함께 생활해가며 내가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 여겨오셨습니까? 저는 제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우리 가족이 정직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너무 좋던데 말이지요.


  여러분 모두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걸 들으신 하나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씀하셨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뱀과 땅에게 저주를 내리신다 합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준다 하셨고, 남자에게는 수고하여 땅에서 나는 것을 먹겠금 한다 하셨을 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를 죄라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정녕 죽으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진정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었던 죄는 본래 하나였던 에덴동산과 동물, 인간이 내가 아닌 남으로 서로를 가르고 부정하며 하나가 아닌 갈라지고 깨어진 삶을 이야기한 것. 바로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죄인 것입니다.
1)

또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과 저주 즉. 산고와 수고하는 노동은 오히려 너무나도 당신이 만드신 자녀들을 사랑하시어 그 죄에 대한 저주를 뱀과 땅에 내려 버리시며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창조 과정과 노동의 신성함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삶의 기회를 주신 축복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과 수고하며 노동하고 사는 게 힘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의 욕심과 교만함으로 없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 속에 절규하며 살게 하려 하셨던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인생을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르며 깨닫게 되는 주님의 뜻과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순수하게 자신이 흘린 땀방울을 통해 얻은 소출을 보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더욱 나 자신이 소박해지며 순결해지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선악과 이야기는 창세기 기자가 ‘어찌하여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고, 남자는 끊임 없이 땅의 소출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며 이 땅에는 물질 중심적 가치만이 제일로 여겨지는가. 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높이며 교만한 자리에 서는가’ 등의 인간의 본질적 물음을 선악과라는 “신앙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신의 판단을 절대시하고 욕망에 사로 잡힌 존재이며 우리네 인생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삶인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본래 아담이란 본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하와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란 인물은 우리네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일종의 아이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지닌 정신마저 땅으로 대변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되어 버린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삽니다. 성경은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되며 그럴 능력도 없음을 이미 바벨탑 사건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러한 교만에 빠져 있고, 그나마 신앙생활을 한다 하여도 본래 성경이 증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이 글을 읽는 고운님. 우리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멀리하는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던 문둥병자와 함께 웃으시던 분이며 모두 돌팔매질 하던 여인을 막아 주시던 분이었습니다. 모두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가장 낮은 자리에 계셨으며 모두 많은 재물을 찾으려 할 때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셨던 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맺기 원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 맺게 되는 그 열매는 분명 당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보람 있게 해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세상이 따르는 가치와 정반대의 것이라 때로 고통받기도 하고 곤궁한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1)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원죄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와 하나 되는 삶을 사는 본래적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비본래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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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드시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2 Posted by 바람몰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의 중심에 세우심은 이 생명세상을 아끼시고,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아주 잘 나타난 대목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을 땅에서 취해 만든다 할 때 “땅”이란 말 자체가 원래는 “먼지”라는 뜻입니다. 아담이란 말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것 이구요. 하와라는 말은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잠깐 아는 목사님께 들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후 여자를 만드셨잖아요. 그래서 이 구절은 남자가 여자에 비해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에 자주 동원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식의 그런 얘기 말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남자는 한낱 먼지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여자는 그 속의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갈빗대를 통해 만들어진 걸 생각해보라는 거지요. 결국 여자는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시고 난 후 나오는 많은 오류와 문제를 다 보완하여 먼지가 아닌 갈빗대를 취해 만드신 업 그레이드 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보다는 여자가 한수 위이고, 남자는 여자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해야 세상살이가 좀 더 현명해진다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그럴 싸 하지 않나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 되어 행복을 누리는 걸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뒤에 가인과 아벨 얘기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로 엮어주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함부로 나눠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열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될 뿐 아니라 사람은 서로 하나 될 때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내 남편에게 대하는 것, 내가 내 아내에게 대하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긴장이 풀려갈 수록 더욱 함부로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아내나 남편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그런 행동들 말입니다. 그리고는 혼자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에 차마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기 힘이 듭니다. 그저 서로 눈빛만 보고 확인할 뿐이지요. 그래서 ‘에구..이 웬수야..’하면서도 “정”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자식들도 있고 하니 말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 이 모든 걸 씻기도 하고 말이지요.


   다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는 의식적인 내가 일종의 가면을 쓰고(페르조나) 이뤄 집니다. 그러나 배우자에게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솔직한 부분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의식적인 내가 아닌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있는 내 모습으로써 나조차 몰랐던 솔직한 내 모습이 발현된 것이지요.


  또 한편 내가 모르는 세계와 사고방식을 아내와 남편에게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보며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배움을 얻게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내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구나..’ 이러면서 말이지요.


  결국 아내나 남편은 내 자신을 더 솔직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가장 가까운 거울이라 이런 이치인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더 알아가며 인격을 더욱 성숙히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쉬운 일상의 예만 보아도 우리는 사람이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세계는 반쪽짜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함께 할 때 더욱 온전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태초부터 인간은 평등할 수밖에 없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WCC1)에서는 이미 오래 전 이런 내용을 신앙고백하며 문서화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벌써 몇 십년전 얘기이군요. 하지만 한국 교회는 아직도 이런 흐름을 잡지 못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성도님께서도 WCC라는 얘기나 아래 각주에 달아 놓은 얘기는 아마 처음 보실 겁니다. 교회에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내용이니 말이지요.


  아무튼 이것이 최신 경향이자 고백입니다. 물론 성경 속 세계를 보면 남녀관계가 완전히 평등했다 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운동 진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바울 사도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지요. ‘여자는 잠잠하라’등의 내용이 주된 그 타켓이구요.


  예, 그분들 말씀이 맞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남성 신학자나 목회자 위주의 신학계나 교계에서 경청해야할 부분도 많습니다. 저는 또 그래야만 우리가 더욱 온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은 당시대에서는 보기 힘든 보다 평등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방향을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렴 최첨단 과학과 고도의 교육수준을 보이는 요즘도 온전한 남녀간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데 몇 천년 몇 백년 전 세계에서 어찌 완전함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경향과 중심을 보고 이야기를 함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여러분께서 보기 쉽게 남녀평등이라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이 말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녀평등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남자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네 습성이 배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양성평등”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양성평등이란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교육의 확장과 민주의식의 내면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성의 경제적 안정의 기회확보는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켰습니다
2).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첨가하는 분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정부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축을 차지하기까지는 아니라고 보는 편입니다. 그만큼 보수적인 가르침이 지속되어 온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역사적 흐름에 따라 여성의 권익을 찾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 많았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페미니즘”이라 하곤 합니다. 이 페미니즘도 다양한 흐름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다 다루기 힘든 측면이 있군요.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에 관한 좋은 책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는 꼭 남성분들께서 보시기를 권합니다-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가서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네 사람을 만드신 첫 모습과 성경이 꾸준히 증언하는 남성과 여성-여성과 남성의 관계입니다.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양성평등의 개념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챤은 더욱 그렇습니다. 특별히 가사와 육아 문제 등은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남성들이 더욱 아내를 위해 열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명절에도 그렇구요. 반대로 여성들 역시 남편의 작은 변화와 노력에 많은 칭찬과 격려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2-30년간 살아오던 방식을 바꿔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최근에는 여성의 권익이 많이 신장된 나머지 남자들이 오히려 더 위축되어 있다는 말까지도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서로 싸움닭처럼 고개를 쳐들 필요도 없고 서로 내가 희생당하고 있다고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거지요. 이렇게 서로 돕고 협력해가며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런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협력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 꼭 뭘 완전히 잘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멘?



1)  이 모임은 교단과 카톨릭, 개신교 등을 총 망라한 초단위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모이는 곳이지요. 그래서 세계의 여러 문제에 대한 신앙고백과 선언을 하며 책임있는 사회의 일원이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는 곳입니다.


2) 과거 남성에게만 국한되어왔던 기초 교육 및 고급 교육이 여성에게 확대되며 여성계 내부에서 스스로의 권리와 위치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의 선거권 확보 등의 기본적 권리찾기 운동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산업화와 함께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여성이 더 이상 남성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어 졌습니다. 이른바 ‘화려한 싱글“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성과학의 발달은 여성이 임신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지요. (이것의 좋고 나쁨은 둘째로 하고요) 이런 역사적 흐름은 최근의 양성평등 개념과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며 상당히 보수적인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 법무부 장관이나 총리가 나오는 지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니다. 물론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 얘기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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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야기-(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09 Posted by 바람몰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에서 흙을 취해 만들었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온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다스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노동력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사고 파는 “경제생활”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우리네 삶의 모습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님들은 땅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하였지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절은 처음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합니다. 아무런 질서가 없는 “카오스”상태인겁니다. 이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계셨다 하는 데, 구약학자들이 보다 원어 자체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자면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이 그 물을 감싸 안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의 혼돈을 하나님의 영이 감싸 안으며 생명과 질서를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거라는 말이지요.


인간을 만드신 후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루아흐”인데, 이것은 숨, 바람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하늘에서 부는 것이지요. 이 하늘이란 것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땅과는 또 다른 곳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둡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공을 만드시고 나서 땅과 바다가 구분되었다 합니다. 즉, 질서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하시고 하늘에서는 인간이 살아갈 방향이자 그 근본 질서를 부여해 주신 것이라는 게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안에 계시며 그 영으로 품으시며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신 것이구요. 


여기서 잠깐 사람을 만들 때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을 두셨으니 말이지요. 먼저 앞 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땅을 취해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말입니다. 여기서 “땅”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땅”이란 말의 의미가 “먼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먼지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며 생명체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지요. 아무리 먼지가 많이 싸여도 거기서 씨앗의 새싹이 트지는 않구요. 즉,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게 바로 먼지란 얘기입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신앙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도 그렇다는 거지요. 우리네 사람이 아무리 잘난 것 같아 보여도 그 속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인간이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는 나약한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라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 즉, 숨을 거두게 되면 인간은 죽게 되는 것이고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거지요.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이란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릴 살게 하시고 모든 것을 먹을 거리로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더해주신 겁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통해 혼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영으로 함께 하시며 말입니다.
  

 

그런데요 성도여러분. 여기서 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위의 구절들은 과거 서구 사회에서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정당화 하는 데 자주 동원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정복이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양 여겨 왔지요.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그 후손인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당연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도로 악화된 생태계의 현실 속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환경 친화적 개발이니 지속 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움직임도 사회 전체적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아직까지 매우 미미한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지금의 현실
1)인 것이지요.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래 주님께서 의미하신 바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지요.


잠깐 생각해봅시다. 자연에 있는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하루의 먹거리만 먹는 다 합니다. 일단 먹이를 먹으면 자신의 눈앞에 먹이가 지나가도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만 취하는 원리입니다. 한편, 생육이란 말은 낳고 기른다는 것으로서 그 종족이 번식해 나간다는 거지요.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다스리는 자의 뜻이 땅에 펼쳐지는 것으로 이것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겁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와봅시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겠습니까. 왜 땅의 먼지 같은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는 죄 많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라는 명령이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은 작은 미물 하나마저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뜻으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어우러져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들을 먹거리로 주심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서로를 살리는 생명나눔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과소비하지도 많은 재물만을 탐하지도 말고 일용할 만큼 취하며 내가 죽으면 내 자신을 자연에 돌려 다시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는 바로 그 이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안고 살아가며 널리 번성하여 더욱 이 세상이 주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라는 정의와 사랑, 평화, 생명의 그 이치.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무분별한 살생을 하지 않는 바로 그 이치 말입니다. 

   

이제 첫 번째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인간이란 땅에서 흙을 취해 그것을 통해 만들어졌고 땅 위라는 구체적 터전위에서 물질생활을 통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기운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땅에 속해 땅에서 살며 땅을 가꿔가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인생이지만 여기에만 종속되지 않고 땅이 주는 물질적 가치들을 넘어 하늘의 삶과 하나님의 가치를 보고 그 방향성을 견지하며 하나로 통전시켜 살아가는 기본적인 인생사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네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은혜받기 합당한 공의, 평화, 사랑, 생명 등의 소중한 가치들로 충만케 하여 땅이 더욱 땅이 되고, 하늘이 더욱 하늘 될 수 있게 하여야합니다. 바로 이런 귀한 직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살 수 있는 근거이고, 우리가 사는 방향이며 모두가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며 살 수 있는 에덴. 즉, 구원 받은 하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유대땅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에 가장 낮고 더러운 자리라는 터전을 택해 오시었습니다. 인간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는 땅의 물질적 가치 속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시험당하셨고 이를 위대하게 이겨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라져버린 하늘의 가치 즉, 인간의 고귀함과 생명의 존엄성, 정의와 평화, 사랑을 되살리며 죽음의 거대한 물길을 십자가라는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 물꼬를 하나님의 방향으로 돌려 세우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고 우리에게는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이라는 그 물꼬를 끝까지 잘 지키고 깨끗하게 보전하라며 이를 세상끝까지 전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이 그 최후에서 어찌할 수 없어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닌 “죽음” 마저도 부활로써 이겨내시며 진정한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끝까지 희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모든 걸 완성하여 상을 차려주는 슈퍼맨이나 물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떠먹여주는 어리석은 주인이 아닌 진정한 메시아이신 우리 예수님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실제 영국의 가디언지는 미국의 극비보고문서를 소개하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갈 수록 계속되는 이상기후 현상이 2007년 이 후 더욱 가속화되며 증가할 것이라 본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식량”이 거대한 무기가 될 것이라 본다는 거지요. 이런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이들이 왜 자꾸 전 세계의 식량 시장을 개방하라 압력을 가하는 지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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