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상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9 Posted by 바람몰이



균형을 잡는 다 함은 절대 적당한 중간선을 찾는 게 아니다. 진정한 균형은 좌우의 모든 끝을 보고 난 후 내 자신을 온전히 세웠을 때 잡을 수 있다. 내게 잘 해주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잘 보고 내 마음을 다스리며 하늘의 이치에 맞춰 받아들일 줄 알아야 인생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우리네 생명세계나 역사 역시 하늘의 삶과 땅의 삶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한 때 우리의 역사는 땅의 삶을 물리치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추상적인 관념에만 사로잡혀 딴 세상 사람처럼 살 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동서양을 막론하고-학문세계나 정신세계는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힘을 끼치지도 못하고 도리어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의 우리네 삶은 우리네 인간사 속에서 하늘의 뜻과 이치, 그 질서 등을 완전히 배제한채 살아가고 있어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결과 생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되었고, 우리네 정신 역시 그 따뜻함과 깊이, 인간냄새 등이 사라져가고 말초적인 흥분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아주 간단히 도식화하여 정리하여 보았는 데..

실제 우리네 인생과 우주의 이치란 것은-동서양을 막론하고-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그 기본과 끝이 있다. 특별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성품을 입고 땅에 살게 하였다는 성경의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네 인생들이 당면한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신, 하늘, 추상이 지배하던 역사를 박차고 나와 땅, 물질, 현실이 지배하는 오늘의 역사를 거쳐 이제 변증법적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온 생명세상에 하늘의 생명기운을 다시금 불어넣어 흙에서 사람이 되었던 옛 고백처럼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세상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조금 엇나가는 얘기이긴 하지만..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세계가 지극히 천한 것 역시 바로 이런 더 큰 세계를 볼 줄 아는 이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바로 눈 앞 밥그릇 채우기와 기싸움만 해댈 줄 아는 이가 득실거리기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하늘의 이치와 성품속에 지극한 땅의 삶을 살며 국민들을 인도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럴싸한 대의명분과 시끄러운 입방정으로 가장 천박한 인생사를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좌우의 끝을 볼 줄 알고, 포용할 줄 아는 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그 중심을 잡고 국민들을 편하면서도 좀 더 고귀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우리의 맥으로 돌아와..아무튼 세상의 교회와 크리스챤들이 이런 큰 신앙의 맥락을 알고 살아나가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각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열매를 맺어가고, 그 가운데 예수님과 같은 사람냄새 나고 하늘 냄새나며 그래서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으로 잘 살아가는 생명의 세상을 일궈갈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이 때에 자신의 자리와 삶에서 최선을 다해가며 주께서 다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죄많고 부족한 나이지만..주님의 그 은혜로 살며 최선을 다했노라..열심으로 살았노라..그렇지만 너무 힘들었노라 이야기하며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당당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 여행의 첫번째 도전에 직면해보자.

지금 나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무얼 알고, 무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내 삶은 바로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나만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열심있고 책임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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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적은 짧은 생각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5 Posted by 바람몰이


필자는 "국제 유가와 패러다임"(
http://blog.naver.com/kkuks81/30005482669)이라는 글에서 국제유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을 예측한 바 있다. 또한 유가 상승으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의 심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성 및 착취성을 밝히며 "생명"을 향한 선택을 강조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설마..'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둘씩 '진짜 그렇게 되는 것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특별히 유류세 및 정유사 횡포가 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부담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정신사적으로는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들이 주는 장점을 놓치고 단점만이 반복되고 있고,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물질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은혜로 바로 잡아가야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선도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특별히 교회가-물질중심의 삶에서 물질과 고귀한 정신이념-정신사로의 상승지향적 성향 포함-,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 및 실증적인 것과 전일적이고도 포괄적이며 유기체적인 것의 조화를 꾸준히 추구해나가거나 유지해나갔다면 지금의 이런 파국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신령한 지혜 및 성령의 인도하심을 세상에서 유행하는 정신사 및 물질적인 삶과 온전히 구분하여 설파하여 나갔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실제 우리는 절벽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상황이기에-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온 생명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까지 기다려 주시며 은혜를 베푸셨기에 이렇게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네 인간이 가지는 본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비본래적인 상태(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참조)에 있는 즉, 원죄에 빠진 상태인 인간이 지닌 이기성과 욕심, 잔학성, 폐쇄성, 정체성, 보수성 등으로 대변되는 그 본성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필자의 주장이 꼭 다 들어맞거나 모두 공감하지 않는다해도) 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따라서 다양한 주장이 오고가는 것이며 여기에는 당연히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현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좀 더 물질적인 풍요를 중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네 인간의 심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본래적 상태에 머문 본성이었다면-우리는 에덴동산의 낙원과 같은 상태처럼-얼마든지 서로를 비판적으로 돕고 도우며 꾸준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 아니었겠는가.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논리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온 인류의 언어가 흩어지고, 다르게 된 것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알아가고, 타개해가며, 새로운 앞길을 열어 가는 것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며 그 거대한 물줄기를 생명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이다. 정작 문제를 일으키고도 깨닫지 못하고 뻔뻔하게 자기를 죽인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믿고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판단해가야 하는 걸까..

우선 조화를 깨뜨리는 지극한 편향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지극한 편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그 끝에서 하나의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설픈 편향으로 인한 폐쇄성일 것이다. (오늘의 삶이 지극히 물질적인 삶에만 편향된 것은 어쩌면 이것이 어설픈 편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물질적인 땅의 삶에서 고귀한 인간애를 깔고 있는 하늘의-하나님의-삶으로의 반전을 통한 변증법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일적인 삶의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말고..은혜마저 값싸게 팔아버리지 말고..겸손하면서도 열심있는 삶의 추구를 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지향 및 소비지향적 성향을 이겨내고, 지속적인 개발 및 유지가 가능한 생태적이고도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만큼 살아가며 휴머니즘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역사적인 생명으로의 삶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이고도, 전생명적인 삶과 조화가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성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의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인류의 하나됨과 행복의 추구 및 생명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 빈부격차 및 자연, 영혼과 생명의 파괴를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끝으로 우리 한명 한명이 "성인군자(?)"가 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인군자라 하니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며, 온 생명을 볼 줄 아는 시대와 역사, 생명을 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른 '의식화(?), 계몽(?)' 등이 된 성숙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어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며 날마다 거듭나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아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나와 우리가 사는 오늘을 바로 보고, 뒤를 반성하며, 내일을 살아가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기체적이고도 정신지향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삶의 현실속에서 전일적으로 판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워낙 두서없이 쓰다보니 서론이 좀 긴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글이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하려는 말은 알아서 흘리고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분명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다시 건강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책을 필자는 제시한 것이니 이를 통해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나를 돌아보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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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에서 모셔온 글
대한민국은 십자가 공화국인가
[작은공동체 위한 교회건축] 교회 지붕 위 조형물로서의 십자가

이정구 jkl@skhu.ac.kr


   
‘교회’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 안에는 '지붕 위의 십자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중세유럽 고딕교회부터 현대 도시 상가에 임대한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 지붕 위에는 첨탑 위의 십자가가 사라진 적이 거의 없었다.

네온조명이 없던 시절의 교회 지붕위 십자가는 적어도 해있는 낮 동안만이라도 지표역할을 했지만, 현대교회는 24시간 불야성인데도 그 수많은 붉은 네온의 지붕위 십자가는 헤매는 시민들의 지표역할을 하기는 커녕 이들의 짜증만 돋구고 있다. 어느 외국인은 과거 김포국제 공항가까이 비행기가 하강할 때 지상 위에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고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라서 안보태세를 위한 무슨 장치인줄 알았다고 한다.

   
예수 보혈을 상징해서 십자가를 붉은 네온으로 장식을 한다. 그렇다면 푸른 십자가와 노란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여기에는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네온 십자가가 너무 많아 식상해서거나, 너무 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는 시민들의 불평과 비웃음을 피하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두려고 푸른 네온이나 노란 네온으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교회를 표시하는 십자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음은 당연하며 이것은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한 교회 지붕 위에 몇 개씩 매달려 있는 작고 크고 울긋불긋한 다양한 십자가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십자가들이 적절한 곳에 설치된다면 그 십자가가 황금으로 치장되었든 십 수척 크기의 네온 십자가든 그것이 대수가 아니다.

유럽의 돌 성당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많아야 두개, 첨탑은 높아도 십자가 크기는 보일 듯 말듯하다. 교회건물의 모양세 자체가 교회임을 말해주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굳이 크고 많게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또 십자가가 적당히 작음으로써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유독 왜 대한민국 교회들만이 교회건물의 크기나 조화와 관계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울긋불긋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일까. 가히 기독교 국가 아니 십자가 국가라고 할만하다. 거기에 심오한 신학적, 교리적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무조건 드러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이다.

같은 하나의 상가건물에 교회 세 개가 입주해 있는 경우 그 상가 지붕은 참으로 처참할 수밖에 없다. 세 교회가 공동으로 첨탑과 십자가를 설치하면 경비도 절약되고 주민으로 부터의 비난도 덜 하고 상가 건물도 정리되어 좋을 텐데 그런 교회를 아직 본적이 없다. 첨탑의 높이와 십자가의 크기마저 경쟁이 된다. 천사가 한 건물 위에 있는 많은 십자가들 중에서 어느 십자가 위에 임재 할런지 감히 추정할 수 없지만 십자가 위에 앉기보다는 건물에 하나 달랑 보일듯 말듯한 십자형 피뢰침 위에 앉아 그 안의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할 것 같다.

건축가들이 교회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고심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 탑이다. 건축가마다 나름대로 십자가 탑에 대한 컨셉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설계한 다양한 형태의 교회건물에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십자가 탑을 맞춤형처럼 설치한다. 십자가 탑 모양을 보면 누가 설계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건축도 넓은 의미에서 환경조형물이지만 특히 십자가 탑은 그런 조형물 위에 또 설치되는 조형물이다. 단순히 십자가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건축주는 주변 타교회와 차별성있는 특이한 십자가 탑을 요구하고, 건축가는 심히 고심하며 만들어 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십자가 탑을 다시 변형하여 재창출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건축가는 건축가이지 전문 조각가가 아니다. 간혹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주변의 조경까지 담보하려는 욕심도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전문 조경가의 몫이다.

건물 지붕 위에 부착된 십자가탑 자체가 또 하나의 환경조각품으로써 건물 본체와 독립된 또 다른 미디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 탑도 조각가에게 과감하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붕위의 십자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재질도 다양하지만 본 건물과 어색하지 않으며 주변 스카이라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주민들에게 위화감만 주지 않는다면 십자가 개수가 문제겠는가.

   
이 정구 (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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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7. 11. 10. 09:52 Posted by 바람몰이
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1. 인기를 위한 목회가 아닌, 인격적인 목회를! (롬12:10-20)

2. 직업적인 목회가 아닌, 소명감에 불타는 목회를! (겔34:1-16)

3. 최고, 최대를 위한 목회가 아닌, 최선의 목회를! (살전2:1-12)

4. 경쟁적인 목회가 아닌, 성실한 목회를! (마25:14-30)

5. 자랑을 위한 목회가 아닌, 겸손한 목회를! (눅17:10)

6. 수와 양에 치중하는 목회보다는, 알곡을 키우는 질적인 목회를! (요10:9,16)

7. 자아 중심의 목회가 아닌, 주님 중심의 목회를! (빌1:20)

8. 명예를 위한 목회가 아닌, 영혼을 위한 목회를! (고전9:19-23)

9. 인간의 칭찬을 받기 위한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목회를! (마6:16-18)

10. 과장된 위선의 목회가 아닌, 양심적인 정직한 목회를! (마23:1-36)

11. 내 힘으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목회를! (행1:8)

12. 받기 위한 이기주의적인 목회가 아닌, 생명까지도 주는 희생적인 목회를! (행20:24)

13. 의무감으로 하는 타율적인 목회가 아닌, 사랑 때문에 하는 목회를! (살전2:8)

14. 정죄하는 목회가 아닌, 이해와 관용의 목회를! (마26:41)

15. 책망의 목회가 아닌, 권면과 위로와 칭찬의 목회를! (살전1:2-8)

16. 명령과 지시만 하는 권위의 목회가 아닌, 본을 보이는 실천의 목회를! (벧전5:3-4)

17. 발로 뛰기만 하는 목회가 아닌,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회를! (눅2:39-46)

18. 십자가를 타고 가는 교만의 목회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종의 목회를! (16:24)

19. 인간의 지혜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경말씀 중심의 생명있는 목회를! (딤후3:15-17)

20. 교인을 외모로 보는 계산적인 목회가 아닌,
의롭고 괴로운 자의 편에 서는 진실된 목회를! (약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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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2 Posted by 바람몰이

 

기왕에 말이 나온김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도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더욱 성경이 계시해주는 하나님은 물론 내 자신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의 가장 모범이신 예수님을 보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거나 어떤 결정을 하실 때도 항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시되 정확하고 똑바르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의 끝에서 내 뜻을 이루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뤄 달라 기도하며 주의 뜻을 들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일단 말이 많습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 지 침이 튀어 바닥을 적실 정도입니다. 또 쉬지도 않고 몇 시간씩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어 목소리가 쉰 상태로 정서가 순화됨을 느끼고 만족함을 느끼며 기도를 마치고 일어납니다. 도대체 언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만 해대는 게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고 위안을 얻는 것이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내가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언을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방언은 믿음이 좋다 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님들을 합니다. 그래서 은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어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통변”이라고 해서 방언을 해석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이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성경 사도행전까지 말하는 방언은 한마디로 “외국어”입니다. 각 지방과 나라의 언어란 말입니다. 언어가 통하는 게 방언이고 이것은 구약시대 바벨탑 사건에서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모이는 사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속에 인간의 사고가 있고, 인간의 사고는 언어활동과 함께 이뤄진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신 것은 만남과 하나 됨의 인간관계 속에 있는 영혼의 교류를 흩으신 게 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하게 하신 것은 다시금 그 교류의 통로를 열어주신 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고린도 전서 14장은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혼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방언만 해대다 교회가 분열되기 보다는 모두 똑바로 알아듣는 예언이 더 낫다는 후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방언 만마디 보다는 알아듣는 기도 다섯마디가 낫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도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방언을 아무리 해대도 교회가 하나 되거나 우리 사회가 변하는 역사가 없습니다. 심지어 방언을 잘 하는 분일 수록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방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방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4장을 정독해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방언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하더군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 다구요..

  기도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되게 해달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잘되게 해달라 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 합니다. 물질생활에 부족함 없이 축복해 달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문제인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온 몸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치셨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구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됨과 동시에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이가 잘 되게 해달라 해야 하며 셋째로 머리가 되어도 교만치 않도록 도와달라 하거나 남들이 싫어하는 꼬리가 되어 더욱 섬길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합니다. 끝으로 물질생활에 부족함이 없게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을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방법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수많은 위인들은 모두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이 말씀에 의해 깨지고, 쪼개지며 변화했고 눈물로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중요한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일종의 경고 표시인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고운 님이여!!

  지금 이 순간 잠시 책을 덮으시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깨닫고, 주님의 뜻을 발견했다면 이 책을 안보고 버리셔도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주의 뜻을 전할 뿐인 종에 불과하구요.


  만약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찾아와 감동을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 순간 주님 앞에 불려 간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작은 열매를 맺으셨고, 저는 그 사명을 감당한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희망을 갖고 아름다운 씨앗을 또한 뿌리고 키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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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5 Posted by 바람몰이

 

여기서 잠깐 창세기 자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비물질적 세계와 인간의 생사화복 및 희노애락을 비롯한 감정, 풍요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생활 및 그 밖의 모든 이치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창조신앙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1).


  물론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걸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과 이에 따라서 어떤 과정과 순서로 세상을 만드셨는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매우 간단한 사실이나 실제로 진정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도 몰랐는가 그리고 안 따먹게 말리면 되지 않았느냐는 단순한 논리적 모순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 밖에 1장 26절에 기록된“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복수로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낳게 하고, 심지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동물은 6장과 7장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 님. 그동안 성경을 문자 그대로 무조건 믿어만 왔던 우리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성도 여러분.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일점일획도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과 심지어 죽음의 세상마저도 관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사고와 당대 사회의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 역시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라고 하였지요. 어찌 한낱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고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저 주님께서 계시해주시는 것과 성령님의 영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보며 한치 앞도 못 보는 인생사 속에서 그 뜻을 쫓아갈 뿐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완성해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뿐이지요. 신앙인으로써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찾아가려 노력할 뿐인 겁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몇 몇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고대 근동 지방의 이야기를 참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네 성경이 완성되기까지는  수 천 년의 세월이 걸렸던 겁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분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기록된 성스러운 책이라 바로 이런 이야기인 겁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인 것이구요.

어찌 인간의 작업을 완전 무오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 무오하신 분은 오직 우리 주님뿐이시지요!!


   그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수 천 년의 신앙고백과 전승을 수 백 여년에 걸쳐 완성하려던 신앙의 선배들의 그 모습이 얼마나 숭고하기까지 합니까. 문자 그대로만 성경을 외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성경 기자들 즉, 주의 종들의 고백과 가르침을 겸허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종 역사시대적 오류와 본문상의 차이를 통해 갈 지(之)를 그리면서도 성경 안에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맥락이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함이 좀 더 합당한 신앙인의 자세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 이러한 연구 결과는 세계 신학계에 나온 지 1백여년 이상입니다. 그리고 카톨릭에서는 평신도들도 이런 내용을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하며 말씀에 더욱 집중하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카톨릭을 개혁하며 나온 우리 개신교가 오히려 더욱 보수화되어 뒤쳐지는 모양새인 것입니다.
이제는 좀 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성경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고운 님!! 우리 하나님 말씀을 거저 받아먹으려 하지 맙시다. 이것이야말로 도둑심보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노력하여 얻는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받는 대도 부단한 공부와 노력, 기도 그리고 성도 상호간의 교류와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돕고 돕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거지요.

 

  여러분은 지금 노력하고 계십니까? 성도간의 교제도 하고 계신가요?


1)  물론 세상에서는 빅뱅이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가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설명 방식들이 옳다 한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심오하고 세밀한 과정마저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1+1 보다도 쉬운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노아의 홍수 이야기 같은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홍수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있습니다.


2)  온실속의 예쁜 화초는 자신에게 내재된 생명력을 다 펼치지 못합니다. 미운 자식은 떡을 주고, 예쁜 자식은 회초리를 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어머니이고, 아버지시라면 우리를 결코 에덴에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된 노동의 가치와 해산의 고통, 인생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더욱 펼치기를 원하셔야 하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치를 우리네 신앙의 선배들은‘어찌하여 우리 인간사가 이리도 고되고 힘든가’그리고 ‘인간은 어찌하여 이리도 교만한가’라는 물음과‘인간의 교만함속에서 좌절 될 수 있는 이 모든 어려움과 고통 역시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원죄의 아래 있음에 의한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과 하나 되어 가며 자신의 구원을 일궈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감으로써 극복 가능하다’라는 것을 창세기의 거룩한 이야기를 통해 위대한 신앙의 선언을 한 것이지요.


 
실제 창세기에 있는 창조이야기 자체 역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유행하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3). 이것을 창세기를 기록한 기자들이 신앙의 눈으로 각 기 다르게 신학적 각색을 통하여 정리해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만해도 2장에 비해 4세기정도 후 즉, 바빌론 포로기의 고통을 겪으며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을 2장 앞에 위치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고백하는 것 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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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야기-(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09 Posted by 바람몰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에서 흙을 취해 만들었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온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다스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노동력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사고 파는 “경제생활”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우리네 삶의 모습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님들은 땅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하였지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절은 처음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합니다. 아무런 질서가 없는 “카오스”상태인겁니다. 이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계셨다 하는 데, 구약학자들이 보다 원어 자체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자면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이 그 물을 감싸 안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의 혼돈을 하나님의 영이 감싸 안으며 생명과 질서를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거라는 말이지요.


인간을 만드신 후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루아흐”인데, 이것은 숨, 바람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하늘에서 부는 것이지요. 이 하늘이란 것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땅과는 또 다른 곳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둡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공을 만드시고 나서 땅과 바다가 구분되었다 합니다. 즉, 질서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하시고 하늘에서는 인간이 살아갈 방향이자 그 근본 질서를 부여해 주신 것이라는 게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안에 계시며 그 영으로 품으시며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신 것이구요. 


여기서 잠깐 사람을 만들 때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을 두셨으니 말이지요. 먼저 앞 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땅을 취해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말입니다. 여기서 “땅”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땅”이란 말의 의미가 “먼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먼지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며 생명체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지요. 아무리 먼지가 많이 싸여도 거기서 씨앗의 새싹이 트지는 않구요. 즉,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게 바로 먼지란 얘기입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신앙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도 그렇다는 거지요. 우리네 사람이 아무리 잘난 것 같아 보여도 그 속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인간이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는 나약한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라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 즉, 숨을 거두게 되면 인간은 죽게 되는 것이고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거지요.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이란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릴 살게 하시고 모든 것을 먹을 거리로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더해주신 겁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통해 혼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영으로 함께 하시며 말입니다.
  

 

그런데요 성도여러분. 여기서 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위의 구절들은 과거 서구 사회에서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정당화 하는 데 자주 동원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정복이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양 여겨 왔지요.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그 후손인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당연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도로 악화된 생태계의 현실 속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환경 친화적 개발이니 지속 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움직임도 사회 전체적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아직까지 매우 미미한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지금의 현실
1)인 것이지요.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래 주님께서 의미하신 바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지요.


잠깐 생각해봅시다. 자연에 있는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하루의 먹거리만 먹는 다 합니다. 일단 먹이를 먹으면 자신의 눈앞에 먹이가 지나가도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만 취하는 원리입니다. 한편, 생육이란 말은 낳고 기른다는 것으로서 그 종족이 번식해 나간다는 거지요.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다스리는 자의 뜻이 땅에 펼쳐지는 것으로 이것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겁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와봅시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겠습니까. 왜 땅의 먼지 같은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는 죄 많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라는 명령이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은 작은 미물 하나마저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뜻으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어우러져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들을 먹거리로 주심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서로를 살리는 생명나눔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과소비하지도 많은 재물만을 탐하지도 말고 일용할 만큼 취하며 내가 죽으면 내 자신을 자연에 돌려 다시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는 바로 그 이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안고 살아가며 널리 번성하여 더욱 이 세상이 주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라는 정의와 사랑, 평화, 생명의 그 이치.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무분별한 살생을 하지 않는 바로 그 이치 말입니다. 

   

이제 첫 번째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인간이란 땅에서 흙을 취해 그것을 통해 만들어졌고 땅 위라는 구체적 터전위에서 물질생활을 통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기운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땅에 속해 땅에서 살며 땅을 가꿔가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인생이지만 여기에만 종속되지 않고 땅이 주는 물질적 가치들을 넘어 하늘의 삶과 하나님의 가치를 보고 그 방향성을 견지하며 하나로 통전시켜 살아가는 기본적인 인생사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네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은혜받기 합당한 공의, 평화, 사랑, 생명 등의 소중한 가치들로 충만케 하여 땅이 더욱 땅이 되고, 하늘이 더욱 하늘 될 수 있게 하여야합니다. 바로 이런 귀한 직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살 수 있는 근거이고, 우리가 사는 방향이며 모두가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며 살 수 있는 에덴. 즉, 구원 받은 하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유대땅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에 가장 낮고 더러운 자리라는 터전을 택해 오시었습니다. 인간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는 땅의 물질적 가치 속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시험당하셨고 이를 위대하게 이겨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라져버린 하늘의 가치 즉, 인간의 고귀함과 생명의 존엄성, 정의와 평화, 사랑을 되살리며 죽음의 거대한 물길을 십자가라는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 물꼬를 하나님의 방향으로 돌려 세우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고 우리에게는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이라는 그 물꼬를 끝까지 잘 지키고 깨끗하게 보전하라며 이를 세상끝까지 전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이 그 최후에서 어찌할 수 없어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닌 “죽음” 마저도 부활로써 이겨내시며 진정한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끝까지 희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모든 걸 완성하여 상을 차려주는 슈퍼맨이나 물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떠먹여주는 어리석은 주인이 아닌 진정한 메시아이신 우리 예수님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실제 영국의 가디언지는 미국의 극비보고문서를 소개하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갈 수록 계속되는 이상기후 현상이 2007년 이 후 더욱 가속화되며 증가할 것이라 본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식량”이 거대한 무기가 될 것이라 본다는 거지요. 이런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이들이 왜 자꾸 전 세계의 식량 시장을 개방하라 압력을 가하는 지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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