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암 투병기 3편이 연재 되었습니다. 이번 글은 부끄러운 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암 환우가 있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4346 

 

"내가 암에 걸린 데는 당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어!"

[임정혁의 창 너머 풍경] 태도: 우울하고 힘든 마음이 태도로 드러나다

www.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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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셉션의 흥행을 보며 한국 영화 다 어디갔나 싶었습니다. 나오는 것마다 참패를 하니 참 마음이 아팠지요. 또 마침 안젤리나 졸리가 직접 방한하면서까지 영화 솔트를 홍보하는 걸 보며 한국 영화의 부진이 더욱 쓰리게 느껴졌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혜성처럼 개봉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아저씨입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원빈을 내세운 아저씨는 개봉하자마자 돌풍을 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 한국영화는 악마를 보았다를 통해 흥행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영화를 참 재밌게 보면서 뭔가 속이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잔인함" 때문이었습니다.


갈 수록 잔인해지는 한국 영화와 우리의 현주소

제가 "잔인함"을 얘기하는 건 이것 자체가 주는 느낌도 있습니다만 최근 한국 영화가 "잔인함"을 빼고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말하자면 영화 아저씨만 그런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어떤 까페에서 조사한 걸 보니 텔미 썸씽, 섬 등 제법 오래된 것부터 잔인한 영화의 순위가 쭉~정리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아저씨나 악마를 보았다는 잔인함 그 자체를 주제로 다루지는 않습니다(제가 가장 최근에 본 제법 잔인한 영화다보니 이렇게 제목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빼놓고 영화를 얘기하기도 굉장히 어렵지요. 그만큼 잔인함이 영화에 잘 녹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미디어 자본이 관객의 코드를 따를 수 밖에 없음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즉, 관객의 욕구에 반응을 해야 영화가 성공하고, 이를 반대로 말하면 우리 안에 내재한 의식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잔인함에 점점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왜 잔인한 영상과 내용을 욕하면서도 보게 되는가 

우리가 이렇게 자극적인 영상과 액션에 호응하는 건 우리 안에 내재된 분노와 폭력성의 대리만족 때문이라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분노와 폭력성에 매몰되어 있는 지 알 수 있지요. (사실 잔인함 뿐 아니라 갈 수록 선정적으로 변하는 영상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호 앞에서 3초를 못 기다리고 경적을 울려대며 욕을 합니다. 어깨만 부딪쳐도 죽일 듯이 쳐다보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아이들은 욕이 안 섞이면 대화가 안되고, 새벽녁 도심을 가보면 술에 취해 여기 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익명성에 자신을 숨기며 마구 악플을 달며 자신을 달래지요.


즉, 이러한 우리 안에 내재된 분노와 폭력성의 대리만족 욕구와 미디어 자본의 확장에 따른 향상된 영상미와 액션이 잘 부응하고 있는 것이 지금 영화 흥행의 저변에 깔려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저는 최근 잔인함이 잘 물들어 있는 한국 영화의 흥행이 반갑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어야 화합도 가능하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된데에 여러 원인이 있다 보는 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유로 전쟁경험,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 및 살해 경험, 양극화에 따른 무기력감 및 상실감 등을 들고 싶습니다. 어느 것하나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니지요. 또 매우 장기간에 걸쳐 눈에 보이지 않게 내면화 되는 것들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를 인정하고 나가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트라우마를 온전히 치유하지 못하고는 결코 하나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뭐든지 공격적으로 하게 되겠지요. 싸움도 공격적으로, 공부도 공격적으로 심지어 종교에서의 선교마저도 공격적으로...

지금도 계속되는 억압기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잔인함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 되는 것이지요. 마음껏 자기 소리를 낼 수 있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야 하는 데 오히려 우리는 더 후퇴한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나 싶은 걱정마저 듭니다.

정리하며


두 딸을 가진 아빠의 마음은 늘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좀 더 좋은 세상, 행복한 세상에서 두 딸아이를 살게 하고 싶지요. 그러니 잔인함이 스며든 영화를 보면 늘 안타까운 것입니다. 갈수록 영상과 액션이 발달해져서 남자인 제가 봐도 섬뜩할 때가 종종 있는 데, 이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더 분노와 공격성이 쌓여 있음을 의미하니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독특한 역사적 상처의 경험을 치유하고,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되는 억압기제를 잘 찾아내어 풀어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영화 <아저씨> 예매, 영화 <악마를 보았다> 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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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과실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해자 과실 100%, 둘째는 쌍방과실(과실비율은 다름), 셋째는 내가 과실 100% 일때 입니다. 대개 중과실 사고가 아닌 이상 첫째와 셋째보다는 두번째 경우가 많지요. 과실비율만 다를 뿐 대부분 다 쌍방과실이란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가 있습니다. 바로 내게 오는 분노 흥분이 그렇습니다.

가령 한 여름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쳐봅시다. 우리는 갑작스런 비를 맞으며 "아~오늘 되게 재수 없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욕하거나 땅에 침을 뱉지요. 하지만 돌아보면 하늘은 하늘의 일을 한거고, 문제는 이를 흥분하며 반응한 내게 있습니다. 괜히 아무 죄 없는 땅은 침을 맞게 된 것이고 말이지요. 

또 다른 예로 옆집에서 너무 시끄럽게 한다 쳐봅시다. 도저히 쉬지 못하고, 잠을 못 잘 정도로 시끄럽다 해봅시다. 자, 그러면 이 때 괴로운 건 누구입니까?  잘못은 저 시끄러운 사람이 하고 있는 데, 정작 피해를 당하는 내가 괴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끄럽다" 는 사실에 "괴롭고, 짜증난다" 는 내 느낌이 내 마음을 놓치게 한 것입니다.

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 때문에 흥분이 일어날까요? 과연 이게 꼭 상대방이 잘못해서일까요? 아니지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설사 상대가 문제를 일으켰다해도 내가 여기에 장단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해를 주는 행위 즉, 사실이 있었다면 이 사실을 사실적으로 풀지 못하고, 내 느낌이 이에 반응하며 흥분하고,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데 누명을 쓰거나 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나는 이 억울한 감정으로 계속 힘들어해야하는 걸까요. 잘못한 사람은 저기 있는 데, 왜 내가 고생해야하는 걸까요.

내 마음의 흐름을 잘 잡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을 보며 내 마음의 흐름을 잡아야 괜히 억울하게 분노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아예 상대나 사건에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피하고, 도망치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내 마음을 놓치고, 분노하며 흥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사실로써 인식하여 사실로써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고 정신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여유 없고, 정신 없이 몰아치기 때문에 여유가 없고,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바쁘면 좀 더 빠르게 일처리를 해가야지 정신 없어 한다고 일이 빨리 해결되진 않습니다. 사실과 감정의 구분은 마음을 잡아가는 훈련의 첫걸음입니다.

오늘 이 글이 독자님의 삶을 더욱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평안한 휴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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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번 글을 통해 기도우리의 정신과 삶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 중 첫 번째로 우리의 "정신"이 확장되어, "적대자상"을 해체하는 것에 대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먼저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학창시절 저는 모든 이를 용서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전직 대통령도 있었구요. 외국인도 있었는데요. 그 핵심에는 바로 저희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희 오누이를 제 나이 다섯, 여동생 나이 셋에 버렸습니다. 제가 버렸다 표현한 것은 그 후 15년간 전화한통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때 저희 오누이를 키우시던 조부모님은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오백원짜리 삯바느질을 하며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또 이러더군요. 당신께서 신용불량자이다보니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이름으로 핸드폰을 해서 국제전화요금을 수백만원씩 물린 적도 있고, 대출을 받아 쓰기도 하였지요. 당연히 저는 제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이 모든 걸 갚아야만 했구요.

아버지를 보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그 분에 대한 정은 당연히 없고, 끌림 같은 건 저 세상 이야기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제 주먹이 날라가지 않은게 다행이었죠. (정말 신학하기 잘했다 싶을 때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분은 "주적"이었고,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2.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형제와 다투고 예배드릴 생각도 말라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지요. 예수께서 또 그런 삶을 사셨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한없이 찔리고, 힘이 든 겁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랑과 화해를 얘기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묵상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였는데요. 물론 환청처럼 들린 것은 아니나 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처럼 도전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도 분노하고 있느냐?' '정말 그렇게 네 아버지가 죽일 놈이 것이냐?' '그럼 너는?'

예수님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고, 제가 지은 모든 죄와 다른 이들에게 상처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건 그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성화되어 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가 무얼 잘 하고 잘 못 했다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내 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직은 조금 미흡한 것이고, 그만큼 교만함이 마음 속에 들어와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도 용서를 강조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비우며 순종하셨으며, 강도를 용서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셨던 것일 겝니다.


3.이제 아버님을 뵙는 제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원수였고, 제 인생의 가장 피곤한 암적존재이자, 심지어 "쓰레기 인생" 이라 생각했던 그 분의 인생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 분의 영혼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분 역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나 처럼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인생이 소위 "실패한 인생"이 된 것에 대해 매우 아파하고 있는 이제는 자포자기마저 해버린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차마 자식 앞에 전화한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거지요.

이제 저는 그 분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분을 적으로 여기고, 원망하던 제 자신을 먼저 보고, 그 분을 "쓰레기 인생"이라 하던 "교만한" 제 자신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란 그리스어로 방향을 돌이키다라는 뜻인데요(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한번 더 글을 쓰겠습니다). 제 삶과 마음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4.저는 성령님께서 제 영에 임하시고, 예수께서 저를 보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 소중한 체험을 통해 제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제 마음의 그릇이 한단계 더 넘어선 것이고, 정신의 깊이 역시 한 영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저 혼자 발버둥친다하여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제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 분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말이 쉬워 그렇지 약 20여년 동안 저희 오누이가 겪었을 그 아픔과 고통을 생각해보면.......이건 정말.....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얘기입니다.......

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적대자상이란 그렇다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대자상이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원망의 대상이나 증오, 분노의 대상을 의미하는 데요. 저는 이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여야만 가능하다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해체 가능하다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생은 다 그런거야..' '부질 없는 짓..'이라며 냉소하거나 관조하는 게 아니라 이와 다시 하나되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까지 얻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삶이기 때문입니다.


5.오늘 저는 이 글을 읽는 다시 한번 제 자신과 크리스챤 독자님들께 도전을 드리며 글을 맺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넘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건 내가 그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용서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먼저 내 자신을 보고, 그를 내려보는 내 교만함과 그 속에 있는 원망과 증오  검은 때를 닦아내는 "기도"입니다. 지금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님께서는 나를 먼저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군자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원망과 증오, 분노를 닦아가는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때일 수록 더 오랜 시간 닦아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함께 하고 계시기에 끊임 없이 닦아감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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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다투고 난 뒤 마음은 늘 무겁다. 나는 꼭 싸운 후 '그게 화낼 일이었나?'를 스스로 묻곤 하는 데, 가만보면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닌 경우가 대다수여서 내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한 경우가 허다하다.

가만보면 우리가 사는 삶도 그런 것 같다. 그 때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인양 불 같이 화를 내며 다투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인 경우가 참 많다. 그리고는 '그 때 한번 더 참을걸..'이란 후회를 하곤 한다.

 
도대체 화를 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얘기를 듣다보면 정치부터 시작해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이유가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화가 나게 하는 이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현상이 나이나 성별과는 별 상관 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치부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장년, 노인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이유로 화를 내며-특히, 청소년, 청년 층은 입에 욕을 달고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정말 그 일 때문에 내가 화가 난 것일까


사례1)한 여름 계속되는 장마를 경험할 때 우리는 뜨거운 햇살을 갈망하곤 한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장마가 끝나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 우리는 너무 덥다고 투덜대는 모습을 보인다.

장마는 그저 장마의 일을 하는 것 뿐이고, 햇살은 그저 여름햇살다운 더위를 내는 것 뿐인데,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며 화를 내곤 한다.


사례2)아이들은 뭔가 하나 갖고 싶기 시작하면 그것이 이뤄질때까지 떼를 쓰고, 화를 내곤 한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그것을 갖으면 그 때는 좋다 하면서도 이윽고 또 다른 것을 갖지 못해 화를 내곤 한다는 것이다.

어른도 그렇다. 내가 타고 싶은 차를 갖지 못하면 마음에서 불행을 느끼고, 내 능력과 현실에 화를 내기도 하는 데, 막상 그걸 갖고 나면 또 다른 것을 갖지 못해 불행을 느끼고, 화를 내게 된다

결국 진짜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보고, 반응하는 나의 "반응체계"에 있다는 것이다. 장마를 보고 짜증과 화를 내고, 더위를 보고 또 다시 짜증과 화를 내는 나의 반응체계.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겼는 데, 이걸 갖어도 또 다시 다른 걸 갖고 싶어 안달나버리는 욕심과 집착의 반응체계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이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당연히 배우지 못하니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잘 모르게 된다. 종교에서도 그저 화를 내지 말고, 온유하거나 그러려니 하라고만 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또 이런 "화"를 딱히 분출할만한 곳도 별로 없다. 겨우 있는 게 유흥시설정도이니 밤마다 우리의 거리는 취객과 구토로 만든 피자가 넘쳐난다. 

이래서 어디 사는 게 사는 것 같을까..몸은 망가지고, 마음은 점점 피폐해져가니 말이다. 사회는 묻지마 범죄나 이웃이나 가족마저도 살인을 하는 극단적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분노게이지가 차고 넘칠 지경인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사실 나 역시 운전을 하거나 아내와 대화를 하며 자주 화를 내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친절까지는 아니여도 화내는 횟수나 정도가 상당히 감소하는 걸 스스로 느끼곤 하는 데, 그것은 다음과 순서로 진행하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1.내가 화 내려 할 때 정신줄을 놓지 않고 그 순간을 스스로 깨닫는다.
  (아..내가 지금 화내려 하는구나..이런 식으로)


2.'지금 이게 화낼 일인가. 정말 화낼 일인가. 진짜 꼭 화를 내야만 하는가'라고 세번 묻는다.

3.내가 할 말을 한번 이상 걸러내어 내뱉는다. 

4.그래도 참지 못할 경우 속에 있는 말을 하되 반드시 깔끔하게 풀어내는 "화해"를 "먼저" 청한다. 


극도로 분노하는 경우 상대방을 공감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상처를 줄 말이 가벼운 아픔으로 줄어들고, 가벼운 아픔이 될 말이 서로 이해할 수준으로 줄어든다. 서로 이해할 수준의 말은 원활한 대화로 마무리될 수 있다. 

분명 내 의지에 따라 "화"를 내는 내 "반응체계"는 조절될 수 있다. 이것은 "화"를 원활히 풀어내며 내 인생을 좀 더 여유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러했다. 만약 내 의지가 약하다면 꼭 이런 노력을 하려하지 말고, 그저 '내가 화를 내는 구나..' 라고 내 몸을 느끼도록 해보자. 이것만으로 벌써 반은 성공한 셈일 테니 말이다. 

또한 이제는 우리 사회 역시 "화"를 다스리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좀 더 느낄 필요가 있다. 선진국처럼 학교나 직장내 전문 상담사를 배치하여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을 보급하고, 부담 없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문화공간 확보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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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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