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까운 블로그 이웃이신 따뜻한 카리스마님께 자극도 받았고, 그간 너무 공부에 소홀한 듯 해서 말이죠. 지금 보는 건 책보다는 주로 논문인데요. 국제학술 세미나 후 나온 논문을 묶어놓은 신학연구 40호를 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박근원), 미혹하는 우상들(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기독교와 문화들(김경재),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제로서 종교혼합주의(마갈랴잉스), 그리스도교와 문화들 : 혼합주의의 문제(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목회활동과 주술 : 복음, 문화 그리고 혼합주의(J.R.Farris), 한국의 경제위기와 선교신학적 과제(채수일), 세계화된 세계에서 복음 선포와 민족문화(성정모)

이렇게 목록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의깊게 읽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혹하는 우상들> 입니다. 캄프하우젠은 예수가 받은 대표적인 시험사화 즉,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던 세가지 시험을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캄프하우젠의 통찰과 더불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시험 : 소비주의의 미혹

당시는 소위 능력있다 하는 마술사들과 기적행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고, 먹을 것을 보여주며 자신을 메시아인양 치켜 세웠습니다. 어느 시대든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고, 이것을 해결해주는 자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영웅이 되고 맙니다. 지금 악마는 민중의 먹고 사는 문제를 걸고 너의 마술력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 는 민중의 "생존" 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엘리사의 시험은 예언자의 철저한 절망과 공궁한 삶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내려진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생명이나, 절망 등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마술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허나 이것은 예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능력이 그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강하게 논박하며 자신의 가치와 사람의 인생이 무엇에 근거해야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루이제 쇼트로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굶주림과 굶주림의 공포가 지배하지 못한다 ; 왜냐하면 굶주림은 비록 현실이지만. 만유의 지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한 이를 몸으로 준행함에 있다 하였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물질에 종속되며 내 영혼을 내어놓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은 어렵더라도 서로 더불어 사는 삶만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섬기면서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야함을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소비의 사회입니다. 경제도 소비가 되지 않으면 성장이 불가능 합니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소비하고 넘기며 순환을 시켜줘야 합니다. 예, 변하는 거 좋지요. 성장도 좋습니다. 제가 뭔가 변화하는 걸 나쁘다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의 희생이 정당화 되고,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만 들끓게 하는 것은 잘 못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이 파괴되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건 잘 못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이를 앞장서 조장하고, 여러 이적이나 말씀의 왜곡으로 목회자를 높이는 것. 민중의 삶을 외면하며 침묵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소비주의의 미혹.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휩쓰는 이 분위기!! 이거 정말 무섭습니다. 특히, 교회 내부마저 이 흐름에 편승하고, 오히려 앞장서는 듯한 모습. 이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올린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때론 참 저도 헷갈립니다. 제가 성경에서 읽고, 보았던..제 심중 깊은 곳을 울리며 제 온 영혼을 휘어잡아 삶이 변하게 하신 예수가 어디계신건지..제가 교회를 정말 다니고 있는 게 맞는 건지...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는 건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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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3:50 Posted by 바람몰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런데 예수가 만드는 평화는 흔히 말하는 현실의 삶을 무시한 내면이나 내세의 평화라기 보다 좀 더 적극적 의미를 품은 분명한 현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온 몸을 투신해서 평화를 선포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적극적 개념의 평화를 갖고 있던 예수
먼저 예수는 구약 성경의 샬롬 신앙을 갖고 있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샬롬" 이란 직역하면 평화를 말하는 것인 데,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쟁반대' 구호로 대변되는 전쟁부재, 개인 내면의 평화 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의 개념입니다. 즉, 전쟁부재 상황을 유지하는 보존 활동과 질적으로 다른 '평화 부재의 상황에서 작업을 통해 비로소 평화를 이룩해내는 창조 활동'을 말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평화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
예수의 이러한 평화는 예언자 이사야가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야기 하고, 시편 기자가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이야기 했듯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정의를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렘22:3). 또한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생명을 구원하고, 도움이 없는 자를 건지고,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라 합니다. (시72:4)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고, 제왕들을 왕자에서 끌어 내리며, 낮은 사람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 정의가 없고, 착취와 부정, 거짓, 파괴, 양극화 만이 계속되는 예루살렘을 보며
평화가 없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강팍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이 보여 너무 가슴이 아프니 말입니다. 또한 이런 맥락 위에서 예루살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도 선포하고 하는 거지요.


정리 하는 글 : 우리 사회를 보면서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지금 이 사회를 본다면 또 다시 두번째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서민을 위한다 말은 하지만 정작 서민 눈에는 부자를 위한 정책 밖에 보이지 않고. 경제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양극화는 계속 심화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보다 냉혹한 입시의 경쟁에 빠져야만 하지요. 대북 관계는 지금 죽어가는 수만의 어린이와 동포를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갈 수록 더 늘어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루살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어려운 세상에 대형 교회 목회자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 타 있고, 교회는 세습의 대상이 되며, 낮은 자세로 섬기지는 못할 망정 은행 VIP나 되고 말이죠. 사회적으로는 일개 시민단체보다 도덕성이 낮다 평가 받고 있습니다. 종교간 화해와 사회 통합에 기여는 못할 망정 오히려 대립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행위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전하려 했던 그 복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향하던 가치와 노력을 받아 올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발걸음을 쫓아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참된 공동체가 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섬기며 화해의 사도가 되는 십자가를 충분히 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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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01:26 Posted by 바람몰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

1.전통적 해석의 한계

그 동안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가 자신과 그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모든 걸 절망하고, 포기한 이들을 보며 민망히 여기고, 통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보았습니다. 또한 나사로가 살아남을 통해 이들의 믿음이 온전케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믿음의 측면에만 국한 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좀 더 솔직히 교회의 입맛에 끼워 맞췄다는 느낌도 듭니다. 저는 이 부분을 좀 더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까지 함께 볼 때 예수가 눈물을 흘린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인간적인 공감을 먼저 하는 예수
예수는 수많은 경비병이 있는 성전을 뒤 엎을 정도로 상당히 터프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보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는 마르다, 마리아를 보며 눈물을 함께 흘리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는 나사로가 그의 한마디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알고 있던 그였다면 사실 '걱정마라'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거나, 웃으며 그냥 나사로를 살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예수는 비통하여 괴로워하면서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의 눈에는 그들의 아파하는 마음이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겉보이는 모습과 달리 예수는 따뜻함과 이해심이 가득한 마음을 소유한 이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온 몸이 메마른 듯 지쳐버린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공감" 하였던 이였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를 보고도 그랬고, 돌팔매질을 당하던 부정하게 취급 받는 여인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마르다와 마리아, 주변인의 아픔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어떻게 그 마음을 이렇게 따뜻한 이가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인간적인 공감을 먼저 했던 거지요.  

3.사회의 부조리에 일침을 놓는 예수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게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시 온전히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여자였다는 겁니다. 또한 두번째는 이들이 사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살던 곳이라는 거지요. 바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을 예수는 당시 사회를 거슬러 사랑하였고, 함께 눈물 흘렸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집중 주목을 받던 그의 행보는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쳐 지는 게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 사회의 기득권 층과 지배계층에게 찍혀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가 베다니로 가고, 심지어 여기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죽어 있던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 그냥 조용히 지나쳐질리 없습니다. 사회지배층은 대다수 서민(민중)이 동요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이 싫으니 말입니다.

실제 저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의 행위 때문에 많은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예수를 죽일 모의를 시작하지요.

결국 이것은 그의 눈물을(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역시 믿음의 차원으로만, 그가 사람들을 보고 답답하고, 안타까워서만 흘린 것으로 머무를 수 없게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버린 차별 받는 이들, 마음 아파 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은총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부조리는 단호히 거부하며 분명한 일침을 놓겠다는 그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정리하는 글
저는 예수가 오늘의 우리를 보면 또 다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먼저 너무 힘들고, 지쳐 버린 우리를 보며 안아주고 싶어하고,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겠지요. 또한 동시에 이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게 만든 이 세상과 이런 탐욕을 키워가는 우리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릴 겁니다. 끝으로 갈 수록 심해지는 이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도 그러겠지요. 여전히 우리는 돈 없고, 빽 없는 서민의 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엄격한 법적용을 받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나아가자면 끊임 없이 파괴되는 생명세상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 정의, 평화가 부재한 그런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고,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안의 기름띠를 이겨 냈고, 백혈병에 걸린 한 사람을 위해 줄을 서 골수를 기증하며, 국가의 중요 문제를 위해 작은 촛불을 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갈 수록 경제가 어려워지고, 각박해지는 세상이라 하지만 우리가 이런 희망을 보고, 함께 마음을 모아 갈 때 어려움도 극복 되고, 세상도 더욱 따뜻해지는 거겠지요.

기독교는 예수를 완전한 인격과 신격의 결정체라 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지요. 그는 눈물을 흘리던 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언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요.  

성경에는 예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두번 나오고, 한번 증언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죽어 있는 나사로 때문에 아파하던 가족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 되어 흘렸던 눈물을 들수 있겠습니다(요11:35). 두번째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흘렸던 눈물을 들 수 있습니다(눅19:41). 끝으로 세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흘렸던 눈물이었습니다(히5:7). 

이 글은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흘렸던 눈물에 대해 살펴보려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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