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새로 조성되고, 진행중인 신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중교통도 불편하고, 아직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입니다. 아직 초창기라는 거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새로 입주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상가에 입주하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전철역 바로 옆이자 공원 바로 옆에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처음 저는 무슨 상가가 올라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도 커서 말이지요. 그러나 알고보니 모 지역에서 굉장히 유명한 대형교회가 저희 동네에 건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자기가 이사하는 게 아니였습니다. 이곳에 이른바 '지성전'이라고 하는 '지부'를 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걸 문제삼고자 하는 건 이게 거의 깡패 논리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깡패 논리라 하면 힘이고, 물량이지요. 이 대형교회들은 참으로 대단한 힘과 물량으로 승부합니다. 처음 교회를 열면 엄청난 선물과 음식을 돌립니다. 또 잘 갖춰진 교회 시설로 사람들을 모읍니다. 동네 구석구석 차량 운행이 안되는 곳이 없습니다.

점입가경인 것은 건축의 위치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딱 다른 교회 옆에 건축을 하는지요. 물론 저희 동네에 올라가고 있다는 이 교회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만 그 역시 겨우 500m내외입니다. 저희 집 주변 반경 1km이내에 제가 본 것만도 2개의 입주한 상가교회가 있고, 2개가 추가로 입주할 예정인데 바로 여기에 건물을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대형마트 덕에 동네 슈퍼가 전부 문 닫는 것처럼 동네 교회들은 대형 교회앞에서 힘을 못쓰게 될 것만 같은 형국입니다.

사실 이는 제가 사는 동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 옆 동네는 상당히 각광받는 D신도시입니다. 이곳은 더욱 심한 형편입니다. "00유명교회" 시리즈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유명교회라는 건 서울에 있는 그 유명한 교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 지 신도시 기독교 연합에서 지성전 추방운동까지 벌이는 실정입니다.

저는 교단이 정책적으로 성전건축 또는 관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를 개인 사업장처럼 생각하니 사업확장하듯 자꾸 건물을 올리는 것입니다. 교구별로 한두개 정도 지어서 그 지역에 있는 크리스챤은 모두 그 쪽으로 가게 하자는 거지요.(카톨릭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밀한 활동은 여러 지회를 만들어 그들이 작은 사무실을 통해 일하면 되고 말입니다.

어디든 자본이 힘인 시대임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대형으로 물량으로 몰아치면 끝나는 그런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를 비판하고, 건강한 지역운동을 해야할 교회가 이를 앞장서는 듯하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얘기하는 생명구원의 사업을 위한 확장이라면 더욱 본인들께서 안 나서셔도 됩니다. 내가 아니면 안되는 다는 것처럼 교만한게 없습니다. 그 지역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으시면 그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를 도우시어 지역을 위해 열심으로 섬기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면 될 것입니다)

,


1.교회는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 세상적인 것 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세상의 가치나 관념이 들어설 수 없는 거룩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구별되지 않기도 합니다. 교회 역시 세상의 한 구성원이고, 크리스챤의 삶의 무대 역시 세상입니다. 또한 먹고 사는 문제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경제와 신학을 혼동할 우려를 지적합니다(구티에레즈). 그러나 신학과 교회가 경제문제를 외면한다면 이는 먼 세상의 구름 잡는 듯한 힘없는 이야기만 하게 될 뿐입니다. 본래 신학의 성격 자체가 종합학문이상 또한 이 세상의 작은 조화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신 의지가 미쳐야하는 이상 신학과 교회는 경제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의 물신숭배적 성격이나 공산주의의 한계 등을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개혁, 크리스챤의 삶 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격동의 우리 사회 속에서 크리스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균형잡힌 시각으로 그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예컨대 이런 경우를 봅니다.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쌍용차 근로자의 해고였습니다. 물론 시장의 요구대로 근로자 해고의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회생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경영진의 무능력과 수익창출실패의 책임을 힘없는. 십수년씩 일한 근로자만이 모두 져야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경제와 회사사정이 어려워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노동시간이나 정년을 낮추면서라도, 봉급을 낮춰서라도 함께 일자리는 나눠 회생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2000cc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계획이 있다 해봅니다. 그러면 총 구입금액과 한달 유지비 등의 견적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이 때 2000cc가 아닌 한단계 낮은 차량을 구입해 구입금액의 차액과 한달 유지비 차액만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것입니다.

'나뉘어진 밥은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나뉘어진 고난은 모든 사람을 단결시킨다' 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과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출발은 먹을 것을 함께 나누는 데서(유월절) 시작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성경적으로 풀어가며 뭔가 세상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3.저는 신학을 전공했지만 국제경제학 역시 부전공하며 공부하였습니다. 투자까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며 주식상담을 해주기도 합니다. 석박사급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경제공부를 하며 느낀 것은 두가지 입니다. 먹을 것으로는 사람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목회자는 반드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즉, 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양떼를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한국 교회와 목회자가 성장과 소비만을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치우치기도 했고, 나눔이 없는 성장과 생명이 없는 소비는 파멸만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무조건적인 금욕과 절제나 교회의 성장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기왕에 성장할거면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위해 성장하는 것이 좀 더 성경적이지 않냐는 것입니다. 소비를 할거면 기름값이 비싸서 자가용을 안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위해 기쁨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소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균형잡히고, 높아진 소양이 경제위기를 경험하는 우리의 정신없는 이 세상과 성도의 삶을 살리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
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



예루살렘 성내에 양을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을 파는 곳 근처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참으로 특별한 곳이었는 데요. 그것은 천사가 한번씩 내려 오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천사가 오는 것도 신기하고 특별한 데 이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되고 물을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병도 상관없이 다 낫게 되는 겁니다. 정말 신묘하고 특별한 연못인 거지요.


자연스레 수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이 연못에 모여듭니다. 성경을 보니 예루살렘에 예수가 올라갔을 때도 그렇게 많이 있었다 합니다. 
물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은 병자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곁에 갑니다. 딱 보니 매우 오랫 동안 고생한 게 보입니다. 예수가 말을 꺼냅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그랬더니 이 병자가 얼른 대답하지요. 그런데 대답이 좀 이상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지요.
우리는 병자의 대답에서 중요한 점 하나를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병자는 물음에 답하기보다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데스다 연못이 갖고 있는 냉정한 정글의 법칙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약자의 마음이 표현 된 거지요.

가만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요. 1등만이 기억되지요. 오로지 최고만을 원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난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과목당 수십만원짜리 과외를 받는 아이들을 넘어설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자연스레 뒤쳐진 사람들의 마음에는 회의감, 패배의식, 불만 등이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될 수록 사회가 더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아니요. 이러면 안되는 거지요. 이 세상은 1등만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져도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정직하게 땀흘려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곳입니다. 지금처럼 이래서는 안됩니다.


자, 아무튼 그  다음을 보지요. 성경은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선언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곧 나았습니다. 자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거지요. 

예수는 바로 이러한 냉혹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철저하게 "치유해야할 대상" 으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곳, 생명에 관한 문제는 정글의 법칙으로 매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저는 오늘날 이런 세태를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앞장서고, 답습하는 교회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연말이면 전도 1등을 뽑아 어마어마한 경품을 주는 대형교회. 또한 교회끼리도 서로 교인수를 늘려 1등 교회가 되려하지요. 기도를 하면서도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만 합니다. 목회자는 축복에 축복을 더해 십일조 많이 하게 해달라 기도하기도 합니다.

전도 해야죠. 그러나 이런 큰 상품을 걸어 동기부여를 하고, 격려한다는 건 문제가 있지요. 교회 성장하면 좋지요. 허나 더 중요한 건 교회의 건강성이 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머리가 되면 좋지요. 그러나 머리가 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해달라 기도해야지요. 십일조도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더 많이 구제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거구요.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우리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은 1등하고, 물질 명예적 성공만을 하려 할 게 아니라 섬김의 1등, 정의와 평화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생명을 가꾸는 일에만 힘을 써야 하고, 오직 사랑만을 빚지며 살아야할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을 거슬러 분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 이제 다음 주면 성탄입니다. 저는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유례없는 경제위기로 그 어느 때보다 추워질 이번 겨울은 어려운 이를 더욱 어렵고, 춥게 만들 테니 말입니다. 



,



성경은
예수가 이 세상을 섬기려 왔다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죽기까지 사랑하며 섬기었다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를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처럼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이러한 예수의 섬김을 함께 나누고, 따를 수 있도록 크게 세 가지 정도 정리해 나가볼까 합니다.


먼저, 예수는 직접 낮아지는 '발바닥 섬김' 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온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직접 걸어 다니며 '발바닥' 으로 섬긴 분입니다. 가만히 앉아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지적하는 게 아니었지요. 또한 '발바닥' 까지 내려 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몸소 낮아졌고, 누구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하늘에서 높아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 누구에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을 "능력" 이라 합니다. 요즘은 교회도 그러지요. 낮고, 어려운 곳에 찾아가기 보다 은행 VIP 자리에 오르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 줄 압니다.

물론 이렇게 외형적 발전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허나 그 속에 예수처럼 발바닥까지 내려가고,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섬기려는 정신이 있는지는 각 자 돌아봐야 한다는 거지요. 만약 교회진정 예수처럼 낮아져 세상과 이웃을 섬겨왔다면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두 번째로 가림 즉, 차별 없는 섬김이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가난한 서민을 섬겼습니다. 세상이 모두 욕하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여자도 섬겼고, 이방인도 섬겼습니다. 그냥 다 똑같은 생명이자, 존귀한 존재라는 마음에 하나 같이 섬기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랑과 조언, 비판을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와는 정 반대이지요. 요즘 세상은 멋진 옷과 좋은 차, 집을 가진 부자와 권력자는 정성으로 섬깁니다. 무슨 의원이나 상급 기관 관계자가 온다하면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그냥 쉽게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힘이 잔뜩 들어가고, 발언권도 셉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 교인과 허름한 교인의 대우가 말은 안그런다 하지만 본인이 위화감을 느끼게 합니다. 헌금을 많이 내야 직분을 받으니 말이죠.

우리 스스로 좀 더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우리 안에 이런 어리석은 "가림"이 계속 존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은총을 스스로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의 섬김은 이름도, 빛도 없는 "조용한 섬김" 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지요. 실제 예수 자체가 그랬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게 원래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당연한 일이라는 거지요.

요즘 보면 뭐 그리 자신을 내보이려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조용히 섬기는 게 당연한 일인 거지요. 그냥 말없이 하면 됩니다. 물질이 있으면 물질로 돕고, 요리 재주가 있으면 요리로 돕고,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청소면 청소로 그냥 섬기면 되지요.

그런데 요즘은 뭘 하나만 해도 사진을 꼭 찍고, 현수막을 걸며 자랑 합니다. '기부를 얼마 했다..누구를 어떻게 도왔다' 난리 법석을 떱니다. 특히, 교회와 공직에 있는 분들이 유독 자주 보이지요.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랑을 해대는 건지.


물론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만 과연 자신의 맘 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무엇을 위하고 있는 건지 잘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입니다.



사실 세상을 섬긴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섬김 즉, 자신을 먼저 닦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닦아 간다는 것..어렵지요. 그러나 동시에 섬김의 삶을 통해 인생의 더 깊은 배움하늘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도 있음에 우리는 용기를 얻고, 다시금 어려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 이름이 욕보이지 않게 하는 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영혼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데도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중학교 시절 제게 충격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최후의 대예언"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연구하는 무슨 단체에선가 발행한 것이었는 데요. 요지는 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모두 맞춰왔었고, 이제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으며, 이건 틀림이 없을 거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허나 이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지금 돌아보면 이들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팔아 이슈를 만들어 먹고 사는 뭐 그런 부류에 불과했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좀 다릅니다. 예언으로 먹고 살기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은 한문으로 미리 예자를 씁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 즉, 맡을 예자도 있습니다. 뭔가를 맡아서 얘기하는 거지요.
성경의 예언자는 그렇습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데,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받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어느 날 갑자기 영험하다 하는 산에 올라가 도를 닦다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1)일상에서 생활하며 당시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내면의 영혼을 복합적으로 볼 줄 아는 고도의 학식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2)동시에 하나님께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 있는 매우 예민한 영성을 갖춘 자였고, 오직 3)말씀에 따른 정도가 아니면 죽음도 불사하는 곧은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는 당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 내면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뜻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곧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언은 먼저 주제 선포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흔히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심령의 회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라는 얘기인 거지요.

즉, 예수는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사람을 신분과 성별 부유함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고, 권력으로 약자를 억누르며, 강자 즉, 기득권 층이 약자 즉,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이로 인해 타락한 영혼과 상처 받고 절망한 심지어 귀신마저 들려버리는 영혼을 보면서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로 천국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 하나님 나라이지요.

왜 우리 나라는 항상 죽은 다음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땅의 삶을 살면서는 천국의 삶을 살려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어야 하고,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럴 수 있도록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친절하고, 사랑해서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됩니다. 추락할 만큼 추락한 도덕성을 갖고 서는 하나님의 "하"자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언자였던 예수는 크리스챤에게 참으로 힘든 요구 즉, 예언자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냥 편히 교회 출석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맘에 늘 깨어있으라 명을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뭔가 다른 거룩한 삶을 살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곧은 의지를 전하며, 생명의 삶을 살 것을, 평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뒷일을 책임져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은 지금처럼 너무 교인늘리기나 분점 내기에 열중하기보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
기독교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에서 모셔온 글
대한민국은 십자가 공화국인가
[작은공동체 위한 교회건축] 교회 지붕 위 조형물로서의 십자가

이정구 jkl@skhu.ac.kr


   
‘교회’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 안에는 '지붕 위의 십자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중세유럽 고딕교회부터 현대 도시 상가에 임대한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 지붕 위에는 첨탑 위의 십자가가 사라진 적이 거의 없었다.

네온조명이 없던 시절의 교회 지붕위 십자가는 적어도 해있는 낮 동안만이라도 지표역할을 했지만, 현대교회는 24시간 불야성인데도 그 수많은 붉은 네온의 지붕위 십자가는 헤매는 시민들의 지표역할을 하기는 커녕 이들의 짜증만 돋구고 있다. 어느 외국인은 과거 김포국제 공항가까이 비행기가 하강할 때 지상 위에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고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라서 안보태세를 위한 무슨 장치인줄 알았다고 한다.

   
예수 보혈을 상징해서 십자가를 붉은 네온으로 장식을 한다. 그렇다면 푸른 십자가와 노란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여기에는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네온 십자가가 너무 많아 식상해서거나, 너무 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는 시민들의 불평과 비웃음을 피하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두려고 푸른 네온이나 노란 네온으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교회를 표시하는 십자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음은 당연하며 이것은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한 교회 지붕 위에 몇 개씩 매달려 있는 작고 크고 울긋불긋한 다양한 십자가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십자가들이 적절한 곳에 설치된다면 그 십자가가 황금으로 치장되었든 십 수척 크기의 네온 십자가든 그것이 대수가 아니다.

유럽의 돌 성당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많아야 두개, 첨탑은 높아도 십자가 크기는 보일 듯 말듯하다. 교회건물의 모양세 자체가 교회임을 말해주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굳이 크고 많게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또 십자가가 적당히 작음으로써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유독 왜 대한민국 교회들만이 교회건물의 크기나 조화와 관계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울긋불긋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일까. 가히 기독교 국가 아니 십자가 국가라고 할만하다. 거기에 심오한 신학적, 교리적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무조건 드러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이다.

같은 하나의 상가건물에 교회 세 개가 입주해 있는 경우 그 상가 지붕은 참으로 처참할 수밖에 없다. 세 교회가 공동으로 첨탑과 십자가를 설치하면 경비도 절약되고 주민으로 부터의 비난도 덜 하고 상가 건물도 정리되어 좋을 텐데 그런 교회를 아직 본적이 없다. 첨탑의 높이와 십자가의 크기마저 경쟁이 된다. 천사가 한 건물 위에 있는 많은 십자가들 중에서 어느 십자가 위에 임재 할런지 감히 추정할 수 없지만 십자가 위에 앉기보다는 건물에 하나 달랑 보일듯 말듯한 십자형 피뢰침 위에 앉아 그 안의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할 것 같다.

건축가들이 교회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고심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 탑이다. 건축가마다 나름대로 십자가 탑에 대한 컨셉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설계한 다양한 형태의 교회건물에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십자가 탑을 맞춤형처럼 설치한다. 십자가 탑 모양을 보면 누가 설계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건축도 넓은 의미에서 환경조형물이지만 특히 십자가 탑은 그런 조형물 위에 또 설치되는 조형물이다. 단순히 십자가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건축주는 주변 타교회와 차별성있는 특이한 십자가 탑을 요구하고, 건축가는 심히 고심하며 만들어 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십자가 탑을 다시 변형하여 재창출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건축가는 건축가이지 전문 조각가가 아니다. 간혹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주변의 조경까지 담보하려는 욕심도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전문 조경가의 몫이다.

건물 지붕 위에 부착된 십자가탑 자체가 또 하나의 환경조각품으로써 건물 본체와 독립된 또 다른 미디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 탑도 조각가에게 과감하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붕위의 십자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재질도 다양하지만 본 건물과 어색하지 않으며 주변 스카이라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주민들에게 위화감만 주지 않는다면 십자가 개수가 문제겠는가.

   
이 정구 (성공회대학교)


,

창조 이야기-(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1 Posted by 바람몰이

  앞 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와 그 이치에 대해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과 하늘의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삶의 방향성을 찾고 구원 받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인간답고, 땅은 더욱 땅 다우며, 하늘은 더욱 하늘답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제 눈에는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심지어 크리스챤마저도 물질적인 생활에 종속되어 이것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기도할 때 물질의 축복을 더해 달라 하지요.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물질적으로 비대해져 이제는 각 은행이 대형교회를 알아서 VIP로 모신다 하지요. 목사님들은 고급 대형 승용차를 몰고 다니시구요. 마치 말로는 주님을 섬긴다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더 섬기는 것 같아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시장의 논리에 휩쓸려 살고 있으면 이제는 “시장이 하나님이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교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이제 세상은 아무도 교회를 신성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세계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수탈하며 부를 누리는 일종의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요.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여전히 불균형한 상태이구요
1). 우리네 정신세계는 전 세계에 몰아닥친 왜곡된 해체주의적 물결에 휩쓸려 이제는 허무주의만이 가득하고 오히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눈에 확실한 것을 보여주며 대중을 선도하는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것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2차 대전이나 황우석 사건 같은 것은 그런 대표적인 예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인간답게 사는 법을 공부하던 철학을 비롯한 각 종 인문학이 사라질 지경입니다. 그리고 실용성만을 추구하며 오로지 먹고 사는 데만 유용한 것을 학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2).

문화는 어떻습니까. 문화란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며 그 사회의 수준을 끊임없이 살아있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란 것은 돈의 논리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일반인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동원해 많이 팔리거나 전문가라는 사람이 방송에 나와 소개해주면 고급문화가 되고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을 지불해야만 누릴 수 있는 그런 형국입니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통해 인간의 말초적인 신경만을 자극하는 포르노 산업만이 꾸준히 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류의 문화가 얼마나 추락하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3).


1)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홀로 짝이 없이 있는 것을 보고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잠들게 하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대목은 가부장제나 남존여비 사상 정당화에 많이 동원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자나 남자는 한몸에서 나와 만들어졌고, 하나가 되어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우리 속담처럼-“일심동체”의 신앙적 증언인 것입니다.


2) 어째서 이런 것만이 쓸모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모르는 돼지에게 진주를 안겨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매우 비싼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면서도 저질스런 운전매너를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이치 아닌가요?


3) 심지어 인간의 영혼과 사랑의 교류가 없는 무분별한 성행위마저도 인간의 본능이라 가르치는 포르노 산업과 이에 이용되는 각 종 미디어는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본래 섹스란 것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동물적 본능. 즉, 생득적 능력입니다. 여기에 정신적 동물인 인간은 그 속에서 고차원적인 사랑과 영혼의 교류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창조과정과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그 어떤 동물이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는 말입니까. 오로지 인간만이 합니다. 이것이 각 종 포르노를 중심으로 한 성산업의 발달과 맞닿으며 아무런 감정교류가 없는 특히, 남성의 판타지 충족만을 위한 성행위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인생을 사는 게 고달픈 겝니다. 주님의 뜻이라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곳이니까요. 에덴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양새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교회에 가 평안을 찾으며 본향을 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또 여러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족과 재산, 인간관계까지 모두 잃어 갑니다. 그저 죽어서 천국가는 게 구원이라 여기는 거지요.


  사실 구원이란 그렇게 단순한 얘기는 아닙니다. 세계의 신학이 설명하는 구원만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모두 지적하는 분명한 것 하나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구원받은 기쁨의 삶이 되지 못하고 죽은 후에야 구원받는 것은 진정한 구원이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지요. 죽었던 나사로의 삶을 바꾸셨고, 우물가의 여인의 삶을 바꾸셨으며 모두에게 돌팔매질 당하던 여인의 삶 또한 구원받은 삶으로 바꾸셨던 겁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그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로 충만하여 자기가 거짓되게 거둔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까지 하였지요.


  결국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이 땅에서의 내 삶 또한 구원받은 에덴의 삶이 되게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말입니다. 세상을 두개로 구분하여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등으로 단정 지어 보지 말고 말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세상은 땅과 하늘, 영혼과 육체, 이상과 현실 등으로 구분(이원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의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속에 있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전일적 세계체계”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것은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어떻게 육체 없는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영혼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약해지는 것이고, 반대로 강한 정신을 갖고 있으면 약한 육체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요. 바울 역시 부활은 영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육체의 부활이 있다하였고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첫 열매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제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읽는 고운님이여. 우리는 죽어서만(!) 본향1)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 역시(!) 본향처럼 살아 갈 수 있어야 하지요. 더욱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추종하는 물질적 가치는 멀리하고 아둔해지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둘로 보지 말고 하나로 온전히 통전시켜 나갈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히브리 사람들은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고, 신성화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떨어져버린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냥 잠자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것도 지하세계. 즉, 스올에 내려가서 말이지요. 스올이란 하나님의 영이 비취지 않는 곳 이구요. 하지만 주님의 사람들은 훗날 부활할 때 신령한 몸으로 모두 일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증언이구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옥에 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 거지요. 사실 지옥이란 말 자체가 불교 용어이기도 하구요.

'[기독교]하늘바람몰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인과 아벨  (0) 2007.11.08
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0) 2007.11.08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  (0) 2007.11.08
사람을 만드시다  (0) 2007.11.08
창조이야기-(1)  (0) 2007.11.08

,
BLOG main image
하늘바람몰이
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by 바람몰이

카테고리

큰 머리 제목 (1160)
[성교육] 학교 교육용 영상 (0)
[LIFE]이 남자의 인생 (193)
[LIFE]몸짱 프로젝트 (21)
[LIFE]여유와 지혜의 장 (63)
[LIFE]육아 이야기 (3)
[교육]자녀교육 한마당 (73)
[안전] 안전교육 (49)
[안전] 응급처치 (18)
[성교육]생생 강의현장 (37)
[성교육]성교육 이야기 (177)
[성교육]낯설게 바라보기 (79)
[문화]방송,영화,격투기 (102)
[문화]신바람 자동차 (78)
[문화]블로그 인생 (24)
[기독교]하늘바람몰이 (87)
[기독교]변해야 산다 (35)
[경제]주식투자종목분석 (23)
[시사]세상살이 (82)
리뷰 아르바이트 (7)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NM Media textcube get rss
바람몰이's Blog is powered by Tistory.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