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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8 노아 이야기
  2. 2007.11.08 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노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9 Posted by 바람몰이

 

노아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맥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신 하나님의 분노와 의인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홍수를 통한 쓸어버림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는 희망의 약속 무지개가 나오며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렇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세상이 어떤 “죄”를 지었길래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실 정도가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방주에는 정결한 것뿐 아니라 부정한 것까지 들이라 하셨는 데 도대체 왜 그러셨던 걸까요? 만약 그냥 전부 쓸어 버리실거면 기왕에 부정한 것은 모두 없애버리시어 완전히 깨끗한 것만 남기시지 말입니다.

또한 중간에 보면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거인족은 성경을 통틀어 여기서만 딱 한번 나오는 데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생뚱맞게 등장한 것일까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너무 궁금하던데..

   

이야기의 실마리는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존재 즉, ‘네피림’에 있습니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난 거인족이라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연구해보니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된 사람의 딸들이 성적인 결합을 하는 다시 말하자면 “종교 혼합”의 타락에서 비롯된 존재들이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앞서 저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인간의 교만을 의지하며 혼자서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었지요. 기억나시죠?


  결국 창세기의 기자는 막연하게 죄가 가득했다 하기가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네피림
1)을 등장시키며 우리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심판하셨던 구체적인 대상을 가르쳐 주려 하였던 것이지요. 바로 주님을 멀리하고 가나안의 바알주의라는 종교혼합에 빠진 이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고귀한 가치와 문화를 버리고 저급한 물질문명에 젖어 버린 이들의 행동. 끝으로 주님을 떠나버린 그 마음이 싫으셨던 겁니다2).  


   그러면 왜 노아가 의인이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노아는 이런 종교혼합이나 종교의 개종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했던 “흠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 들었던 거지요.


  또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멸절시켜 버리신 대상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라는 불특정 다수나 생명체가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고 낳으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냥 아무런 감정도 없이 쓸어버린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멸하시는 것은 바로 가나안의 바알주의와 맘몬주의-구약성경이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것-인 것이지요.


  실제 6-7장에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생명체를 보면 더욱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지적해드렸듯이 창세기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이나 공중의 새는 수컷과 암컷으로 각 일곱 쌍 씩 들이되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들이라 하였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나 생명체를 멸절시키는 무자비함을 보이시려면 애초에 방주를 만들라고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더욱이 부정한 짐승(!)은 아예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모두 함께 하겠금 하신다는 것이지요.


  또한 9장에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몸을 드러냈고 이를 본 함이 셈과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가나안 문화에 빠져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함이 아버지의 치부를 감싸주지 않았기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이해인거지요. 실제 성경을 잘 살펴보면 주님은 함에게 저주를 내리시지 않고(!)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셈이나 야벳을 축복하는 것이라 알아왔던 이야기는 문맥을 다시 잘 짚어볼 때 이들에 대한 축복보다 오히려 가나안이 이들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대상이 분명히 가나안의 바알주의나 맘몬주의 같은 것이고 이들과의 성적결합을 통해 종교혼합을 하거나 개종을 하는 이들임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고, 이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구체적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당시 중동 지방에는 노아 이야기와 비슷한 홍수 이야기가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기자는 이런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되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의 관점에서 그 분의 뜻을 극적으로 증언하였던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였던 것이구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더욱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며 주님을 저버리거나 멀리하며 동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노아 이야기를 통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저는 이러한 주님의 뜻이 여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곁에 있는 현대판 바알주의를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가나안 문화를 말입니다. 혹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면을 쓴 바알이라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1) 네피림에 대한 성경의 보도는 창세기 6장과 민수기 13장 딱 두 번만 나옵니다. 


2) 그래서 쉬운 성경은 5절의 죄악을 “악한 행동”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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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5 Posted by 바람몰이

 

여기서 잠깐 창세기 자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비물질적 세계와 인간의 생사화복 및 희노애락을 비롯한 감정, 풍요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생활 및 그 밖의 모든 이치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창조신앙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1).


  물론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걸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과 이에 따라서 어떤 과정과 순서로 세상을 만드셨는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매우 간단한 사실이나 실제로 진정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도 몰랐는가 그리고 안 따먹게 말리면 되지 않았느냐는 단순한 논리적 모순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 밖에 1장 26절에 기록된“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복수로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낳게 하고, 심지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동물은 6장과 7장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 님. 그동안 성경을 문자 그대로 무조건 믿어만 왔던 우리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성도 여러분.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일점일획도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과 심지어 죽음의 세상마저도 관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사고와 당대 사회의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 역시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라고 하였지요. 어찌 한낱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고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저 주님께서 계시해주시는 것과 성령님의 영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보며 한치 앞도 못 보는 인생사 속에서 그 뜻을 쫓아갈 뿐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완성해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뿐이지요. 신앙인으로써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찾아가려 노력할 뿐인 겁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몇 몇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고대 근동 지방의 이야기를 참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네 성경이 완성되기까지는  수 천 년의 세월이 걸렸던 겁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분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기록된 성스러운 책이라 바로 이런 이야기인 겁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인 것이구요.

어찌 인간의 작업을 완전 무오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 무오하신 분은 오직 우리 주님뿐이시지요!!


   그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수 천 년의 신앙고백과 전승을 수 백 여년에 걸쳐 완성하려던 신앙의 선배들의 그 모습이 얼마나 숭고하기까지 합니까. 문자 그대로만 성경을 외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성경 기자들 즉, 주의 종들의 고백과 가르침을 겸허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종 역사시대적 오류와 본문상의 차이를 통해 갈 지(之)를 그리면서도 성경 안에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맥락이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함이 좀 더 합당한 신앙인의 자세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 이러한 연구 결과는 세계 신학계에 나온 지 1백여년 이상입니다. 그리고 카톨릭에서는 평신도들도 이런 내용을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하며 말씀에 더욱 집중하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카톨릭을 개혁하며 나온 우리 개신교가 오히려 더욱 보수화되어 뒤쳐지는 모양새인 것입니다.
이제는 좀 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성경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고운 님!! 우리 하나님 말씀을 거저 받아먹으려 하지 맙시다. 이것이야말로 도둑심보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노력하여 얻는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받는 대도 부단한 공부와 노력, 기도 그리고 성도 상호간의 교류와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돕고 돕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거지요.

 

  여러분은 지금 노력하고 계십니까? 성도간의 교제도 하고 계신가요?


1)  물론 세상에서는 빅뱅이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가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설명 방식들이 옳다 한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심오하고 세밀한 과정마저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1+1 보다도 쉬운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노아의 홍수 이야기 같은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홍수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있습니다.


2)  온실속의 예쁜 화초는 자신에게 내재된 생명력을 다 펼치지 못합니다. 미운 자식은 떡을 주고, 예쁜 자식은 회초리를 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어머니이고, 아버지시라면 우리를 결코 에덴에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된 노동의 가치와 해산의 고통, 인생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더욱 펼치기를 원하셔야 하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치를 우리네 신앙의 선배들은‘어찌하여 우리 인간사가 이리도 고되고 힘든가’그리고 ‘인간은 어찌하여 이리도 교만한가’라는 물음과‘인간의 교만함속에서 좌절 될 수 있는 이 모든 어려움과 고통 역시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원죄의 아래 있음에 의한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과 하나 되어 가며 자신의 구원을 일궈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감으로써 극복 가능하다’라는 것을 창세기의 거룩한 이야기를 통해 위대한 신앙의 선언을 한 것이지요.


 
실제 창세기에 있는 창조이야기 자체 역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유행하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3). 이것을 창세기를 기록한 기자들이 신앙의 눈으로 각 기 다르게 신학적 각색을 통하여 정리해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만해도 2장에 비해 4세기정도 후 즉, 바빌론 포로기의 고통을 겪으며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을 2장 앞에 위치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고백하는 것 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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