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회는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 세상적인 것 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세상의 가치나 관념이 들어설 수 없는 거룩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구별되지 않기도 합니다. 교회 역시 세상의 한 구성원이고, 크리스챤의 삶의 무대 역시 세상입니다. 또한 먹고 사는 문제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경제와 신학을 혼동할 우려를 지적합니다(구티에레즈). 그러나 신학과 교회가 경제문제를 외면한다면 이는 먼 세상의 구름 잡는 듯한 힘없는 이야기만 하게 될 뿐입니다. 본래 신학의 성격 자체가 종합학문이상 또한 이 세상의 작은 조화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신 의지가 미쳐야하는 이상 신학과 교회는 경제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의 물신숭배적 성격이나 공산주의의 한계 등을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개혁, 크리스챤의 삶 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격동의 우리 사회 속에서 크리스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균형잡힌 시각으로 그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예컨대 이런 경우를 봅니다.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쌍용차 근로자의 해고였습니다. 물론 시장의 요구대로 근로자 해고의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회생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경영진의 무능력과 수익창출실패의 책임을 힘없는. 십수년씩 일한 근로자만이 모두 져야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경제와 회사사정이 어려워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노동시간이나 정년을 낮추면서라도, 봉급을 낮춰서라도 함께 일자리는 나눠 회생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2000cc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계획이 있다 해봅니다. 그러면 총 구입금액과 한달 유지비 등의 견적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이 때 2000cc가 아닌 한단계 낮은 차량을 구입해 구입금액의 차액과 한달 유지비 차액만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것입니다.

'나뉘어진 밥은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나뉘어진 고난은 모든 사람을 단결시킨다' 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과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출발은 먹을 것을 함께 나누는 데서(유월절) 시작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성경적으로 풀어가며 뭔가 세상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3.저는 신학을 전공했지만 국제경제학 역시 부전공하며 공부하였습니다. 투자까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며 주식상담을 해주기도 합니다. 석박사급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경제공부를 하며 느낀 것은 두가지 입니다. 먹을 것으로는 사람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목회자는 반드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즉, 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양떼를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한국 교회와 목회자가 성장과 소비만을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치우치기도 했고, 나눔이 없는 성장과 생명이 없는 소비는 파멸만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무조건적인 금욕과 절제나 교회의 성장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기왕에 성장할거면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위해 성장하는 것이 좀 더 성경적이지 않냐는 것입니다. 소비를 할거면 기름값이 비싸서 자가용을 안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위해 기쁨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소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균형잡히고, 높아진 소양이 경제위기를 경험하는 우리의 정신없는 이 세상과 성도의 삶을 살리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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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니는 건 사후 보험 드는 것?

혹시 '보험' 들어놓으셨습니까? 인생을 살다 뜻하지 않은 큰 문제를 대비해 드는 게 바로 보험이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도 보험으로 들고 있다는 얘기 혹시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그러더군요. 한국 교회는 신도를 ‘내세 보장보험’ 소비자로 취급하는 "기업" 이라 말이지요.


많은 크리스챤은 불편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 하지요. 진짜 본향은 따로 있고, 이 세상은 잠깐 스쳐지나가는 곳이라 합니다. 대개 구원이란 것도 내 영혼이 죽은 다음 구원받는 얘기로 설명하곤 하지요. 내세 지향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김경재 목사님(한신대 교수)은 이를 보고 '소승적 기독교'의 전형적 특징이라 설명 하는 데요. 이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회들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과 천국에서의 영생복락이라는 타계신앙이 중심을 이루면서 현세의 공동체가 자유 정의 평화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면서 안타까움을 담아 한국 교회에 쓴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세상과 담을 쌓는 한국 교회

한국 교회가 욕 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나 부정부패 등과 담을 쌓는 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칭찬 받겠지요. 그만큼 참여도 적고, 참여한다 해도 봉사활동 정도일 뿐 사회정의를 세우거나 민주주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과의 연대는 참 보기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요. 분명 목사님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신다는 거지요. 그런데 철거민들과 함께 연대하며 시위라도 하면 배후세력이니 뭐니 하며 비판을 합니다정의를 말씀하시긴 하는 데요. 그런데 
과거 전00 같은 군사독재 정권에 축도를 해주었지요.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한 여러 가치를 얘기하긴 하는 데,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 당하며 죽어 나갈 때 침묵했고, 우상을 경계하라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 살상무기를 핑계로 엄청난 살상을 자행한 미국을 '신이 축복한 나라' 라며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 찬양합니다.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사죄하지를 않지요.

최근에는 우병 파동으로 시끄러운 이 나라에 화해를 중재하기는 커녕 사탄의 무리라 하며 갈등을 조장하고,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 정권의 발목을 잡는다 하며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질을 하였습니다.

이러니 그렇게 욕을 먹는 겁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지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면서 정작 이 사회의 주요 현안에는 등을 돌립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다하며 실제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역사 속 한국 교회의 신앙

제가 너무 안좋은 면만 보고 있어 그런 걸까요? 제 눈이 너무 편향되어 있나요? 아니요. 사실 이 얘기는 인터넷 검색만 한번 해봐도 쫙~나오는 얘기들입니다. 그동안 보기 싫다 안 보고, 듣기 싫다 안 들어왔을 뿐입니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처
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애국, 애족의 종교였고,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이 후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1888년 12월 윤치호의 글을 한번 볼까요.
 
내팔자 임의 됴선사람되여 한심하여도 쓸대 읍고 탄식 통곡하여도 무익하매 아무주록 상뎨의 도우심을 입어 내 평생을 아국 조흔 일의 진심갈녁하여 비록 내생전의넌 내 나라이 나뮈 나라 갓치 번승하넌 것을 못볼지라도 내 마음것 내 나라를 섬기넌 것이 내 직분이라. 상뎨난 나의 약한 것을 도와 주새 내 일생이 야소성국과 내나라의 유용하게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민경배 교수
는 이 글을 보며 "하늘에 올라가 영복을 누리며 기리 살 것을 바라는 종교 본연의 신앙이 여기 있었지만, 결국은 내 나라를 위해 헌신하되 이 신앙이 나라와 겨례에 유용하게 씌어지도록 하겠노라는 다짐이 굳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와볼까요. 1960년 4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하나 발송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 한국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개화 운동, 3.1운동 그리고  일제 항거 운동의 선봉에서 과감히 싸웠던 찬란한 자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간의 집권 정부가 강압 정치를 하고 있는 동안 국민의 진정한 자유와 사회 정의의 엄정한 수호를 위하여 교회로서 하여야 할 마땅한  예명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자책하여 마지아니 한다.


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책도 하고, 결의도 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지요.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상당히 달라 보이지요?

예, 분명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기여한 측면이 있습니다. 허나 그러면 무엇합니까.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일뿐 지금의 것이 아니지요. 지금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개독교"라 불리울 뿐 전혀 이런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좀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

저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좀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왜 자기 혼자서 구원받고, 죄 용서 받으려 합니까. 또 왜 영혼만 구원 받아 죽어서만 천국 가려고 하나요.
 
이럴 거면 굳이 예수가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으며, 성전을 뒤 엎을 까닭이 없지요. 제자들을 세워 파송하고, 성령을 약속할 이유도 없으며, 고통스럽게 뭇 생명을 위해 십자가를 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같이 저 세상 가자하면 될 테니 말이지요. 

부분적이거나 개인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내세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과 고난에서의 구원도 중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강한 자와 약한 자-진보와 보수, 남과 북, 종교간 갈등을 화해하는 중재자로써, 이 사회의 낮고, 어두운 곳에 거하며 정의를 세우고, 전쟁과 폭력에 단호히 저항하는 평화의 사도로써, 물신주의를 거슬러 내세뿐 아니라 현실과 내세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기꺼이 인간의 죄를 지고, 뭇 생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던 고난의 십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에 좀 더 합당한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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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득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닌 '나만의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일제 치하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기독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 기도, 내 가족 기도 밖에 안 들립니다. 가끔 '우리'가 나올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우리 교회'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썩 편치가 않습니다. 그 내용 중 교회 성장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먼저 성경의 하나님은 특정집단이나 종교, 민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구약 성경의 주요 오해소지 문구 해석과 신약의 주요 강조점을 통해 간략히 밝히고,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후 나름의 결론을 맺으며 글을 진행합니다.  



2.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철저하게 공동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특정지파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생명과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2-1)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 으로 주로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여러 지파와 집단이 존재했는 데요. 이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특정 지파나 집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 이나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식의 표현 또한 볼 수 있는 데요. 이것 역시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들의 신앙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특정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전 공동체적 의미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더 짖게 뿜는다 할 수 있겠습니다.

2-2)신약시대에 이르러는 이것이 더욱 확연해지고, 범위가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핵심인 예수유대인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 유대주의, 독선, 아집 등의 배타성을 철저하게 거부함에 이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에서는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을 높이며 그 뜻을 설파했고, 몹쓸 병에 걸려 배척받던 병자를 치유하였습니다. 또한 차별받던 여성의 역할과 그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막과 휘장이 찢어지며 하나님이 특정 종교나 집단,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잘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을 통해 하나님이 만유 위와 만유 안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전 생명과 우주질서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고백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한국 기독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를 기독교라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기독교'보다 '개독교'라 부르는 걸 더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목사' 는 '먹사 새끼'라고 부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1)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저는 그 원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특별히 한국 기독교인만이 갖고 있는 자기들끼리는 친절에 사랑이 넘치면서 다른 종교나 세상과는 분리된 듯한 또한 다른 종교나 생각을 갖지 않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종교든 그 폐쇄성과 배타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종교만의 고유한 '신앙'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신앙을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고, 이것이 신앙을 갖지 않는 다른 이에게는 '폭력'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선교하는 것 좋습니다. 어떤 종교든 선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걸 끊임없이 강요하나요. 왜 지옥불 얘기를 하며 협박을 하나요. 자신의 선행과 사랑, 변화된 삶을 통해 '아,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변하는 구나. 이런 힘든 상황도 살아가는 구나.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런걸까' 라는 말이 나오도록 선교할 수는 없는걸까요.

3-2)  굳이 선교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필요 이상의 이 폐쇄성과 배타성이 사회적으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을 넘어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일반인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을 넘어섰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 어떤 종교든 그 종교만의 특정 신앙의 영역이 있고,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그걸 신앙이라 하는 거고, 이걸 고백하는 이가 그 종교의 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것에 함몰된 나머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영역은 완전히 배제되어버렸고, 사회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멀쩡한 절에가서 불을 지르고, 학교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 목을 벱니까. 왜 이웃에게 저 사람이 나를 스토킹한다는 말이 나오게 합니까.

3-3) 어떤 분들은 제 가슴속에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시나 돌아보라 하던 데요. 그래서일까요. 저같은 사람은 지하철이나 옆집 앞에서 시끄럽게 확성기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그 시간에 노숙인과 독거노인, 외국인 근로자, 장애우 등을 섬기는 것이. 용산 참사현장을 찾아 함께 연대하고, 싸이코패쓰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라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것더 큰 선교의 효과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옳고, 사회적으로도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정말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4.어제 아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곳을 잠시 들를 일이 있었는 데요. 그 상가 앞을 보니 "세계정복 00제자" 란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내건 광고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세계 전체에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이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선교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지요.

한국 기독교는 좀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존재라는 철학용어가 있지요. 어떤 인간이든 그 시대와 문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반드시 자신들이 얘기하는 것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비롯된 폐쇄성과 배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신들의 전략적으로도 자충수를 두고 있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공격성과 배타성으로는 이 사회의 화해자가 될 수도 평화의 사도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마당에 그렇게 주장하는 선교가 될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를 존중하고, 말 그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섬김의 삶을 살 때. 이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단호히 저항하고, 끊임없이 팽배하는 물신주의에 제동을 걸며 뭔가 다른 삶을 살 때.

그 때야 비로소 교회는 교회답다 인정받고, 크리스챤은 뭔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며,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하는 기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1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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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가 이 세상을 섬기려 왔다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죽기까지 사랑하며 섬기었다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를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처럼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이러한 예수의 섬김을 함께 나누고, 따를 수 있도록 크게 세 가지 정도 정리해 나가볼까 합니다.


먼저, 예수는 직접 낮아지는 '발바닥 섬김' 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온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직접 걸어 다니며 '발바닥' 으로 섬긴 분입니다. 가만히 앉아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지적하는 게 아니었지요. 또한 '발바닥' 까지 내려 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몸소 낮아졌고, 누구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하늘에서 높아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 누구에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을 "능력" 이라 합니다. 요즘은 교회도 그러지요. 낮고, 어려운 곳에 찾아가기 보다 은행 VIP 자리에 오르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 줄 압니다.

물론 이렇게 외형적 발전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허나 그 속에 예수처럼 발바닥까지 내려가고,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섬기려는 정신이 있는지는 각 자 돌아봐야 한다는 거지요. 만약 교회진정 예수처럼 낮아져 세상과 이웃을 섬겨왔다면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두 번째로 가림 즉, 차별 없는 섬김이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는 세상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가난한 서민을 섬겼습니다. 세상이 모두 욕하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람들조차 섬겼습니다. 여자도 섬겼고, 이방인도 섬겼습니다. 그냥 다 똑같은 생명이자, 존귀한 존재라는 마음에 하나 같이 섬기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랑과 조언, 비판을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와는 정 반대이지요. 요즘 세상은 멋진 옷과 좋은 차, 집을 가진 부자와 권력자는 정성으로 섬깁니다. 무슨 의원이나 상급 기관 관계자가 온다하면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그냥 쉽게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힘이 잔뜩 들어가고, 발언권도 셉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 교인과 허름한 교인의 대우가 말은 안그런다 하지만 본인이 위화감을 느끼게 합니다. 헌금을 많이 내야 직분을 받으니 말이죠.

우리 스스로 좀 더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우리 안에 이런 어리석은 "가림"이 계속 존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은총을 스스로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의 섬김은 이름도, 빛도 없는 "조용한 섬김" 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지요. 실제 예수 자체가 그랬습니다. 세상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게 원래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당연한 일이라는 거지요.

요즘 보면 뭐 그리 자신을 내보이려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조용히 섬기는 게 당연한 일인 거지요. 그냥 말없이 하면 됩니다. 물질이 있으면 물질로 돕고, 요리 재주가 있으면 요리로 돕고,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청소면 청소로 그냥 섬기면 되지요.

그런데 요즘은 뭘 하나만 해도 사진을 꼭 찍고, 현수막을 걸며 자랑 합니다. '기부를 얼마 했다..누구를 어떻게 도왔다' 난리 법석을 떱니다. 특히, 교회와 공직에 있는 분들이 유독 자주 보이지요.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랑을 해대는 건지.


물론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만 과연 자신의 맘 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무엇을 위하고 있는 건지 잘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입니다.



사실 세상을 섬긴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섬김 즉, 자신을 먼저 닦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닦아 간다는 것..어렵지요. 그러나 동시에 섬김의 삶을 통해 인생의 더 깊은 배움하늘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도 있음에 우리는 용기를 얻고, 다시금 어려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 이름이 욕보이지 않게 하는 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영혼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데도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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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수준 낮은 목회자이다.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8. 12. 10. 00:37 Posted by 바람몰이


긴급출동 SOS 를 보니 신도를 때리는 집사가 나온다. 아..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무튼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지 이래서는 곤란하다.(귀신 축출에 대해서는 추후 시간 날 때 한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도에게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1)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2)더 근본적으로 이것이 한국 교회 목회자의 낮은 수준에 기인한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은 것은 성경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문자 그대로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삶의 푯대와 같다. 수많은 선지자와 사도가 영감을 받아 쓴 것도 맞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인간 프린터가 되어 입력된 것을 그대로 출력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성경은 특별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저자가 신적영감을 받고, 그가 살던 상황과 인간의 한계 안에서 쓰여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면 성경 본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히려 해치는 경우가 생겨 이는 결코 바람직하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 마저 그대로 믿게 되는 꼴이니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너무 믿는 경향이 강하다. 도대체가 그 역사적 배경과 문맥, 비슷한 글 양식, 사회적 의미 등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목회자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가르칠 때 보면 문자 그대로 믿으라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교인의 신앙만 인도할 뿐 그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도록 신학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니 여기서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목회자 자신이 별로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실 우리 나라 목회자는 참으로 허술한 양성체계를 갖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주요 교단의 정식 코스는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나라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학교에 가고, 일년에 책 몇 권 읽고 레포트를 내면 목회자 안수를 주거나,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신학원에서 겨우 몇 달 출석하고 목사 안수를 주는 경우 역시 존재하고 있다.

수년에 걸쳐 다양한 분야를 수도해야 할 학문을 이렇게 단기간에 이수하고 끝내니, 여기를 나온 목회자에게- 물론 믿음 하나는 존경스러울 만큼 신실한 경우가 많지만-수준 높은 사회 인식과 성경 이해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늘의 은총을 맛보기 위함이고, 세상을 섬기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 교인을 예수의 모범따라 성숙한 경지에 오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예수를 욕보이고, 교인 한명 한명을 맹목적인 신앙에 빠지게 해버린다면 이미 그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목회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학식과 균형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수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해를 얘기하고, 평화와 정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교인의 믿음 뿐 아니라 삶까지 연결되는 전반적인 일상의 신앙을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를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나오고,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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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3:50 Posted by 바람몰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런데 예수가 만드는 평화는 흔히 말하는 현실의 삶을 무시한 내면이나 내세의 평화라기 보다 좀 더 적극적 의미를 품은 분명한 현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온 몸을 투신해서 평화를 선포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적극적 개념의 평화를 갖고 있던 예수
먼저 예수는 구약 성경의 샬롬 신앙을 갖고 있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샬롬" 이란 직역하면 평화를 말하는 것인 데,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쟁반대' 구호로 대변되는 전쟁부재, 개인 내면의 평화 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의 개념입니다. 즉, 전쟁부재 상황을 유지하는 보존 활동과 질적으로 다른 '평화 부재의 상황에서 작업을 통해 비로소 평화를 이룩해내는 창조 활동'을 말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평화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
예수의 이러한 평화는 예언자 이사야가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야기 하고, 시편 기자가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이야기 했듯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정의를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렘22:3). 또한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생명을 구원하고, 도움이 없는 자를 건지고,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라 합니다. (시72:4)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고, 제왕들을 왕자에서 끌어 내리며, 낮은 사람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 정의가 없고, 착취와 부정, 거짓, 파괴, 양극화 만이 계속되는 예루살렘을 보며
평화가 없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강팍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이 보여 너무 가슴이 아프니 말입니다. 또한 이런 맥락 위에서 예루살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도 선포하고 하는 거지요.


정리 하는 글 : 우리 사회를 보면서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지금 이 사회를 본다면 또 다시 두번째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서민을 위한다 말은 하지만 정작 서민 눈에는 부자를 위한 정책 밖에 보이지 않고. 경제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양극화는 계속 심화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보다 냉혹한 입시의 경쟁에 빠져야만 하지요. 대북 관계는 지금 죽어가는 수만의 어린이와 동포를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갈 수록 더 늘어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루살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어려운 세상에 대형 교회 목회자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 타 있고, 교회는 세습의 대상이 되며, 낮은 자세로 섬기지는 못할 망정 은행 VIP나 되고 말이죠. 사회적으로는 일개 시민단체보다 도덕성이 낮다 평가 받고 있습니다. 종교간 화해와 사회 통합에 기여는 못할 망정 오히려 대립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행위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전하려 했던 그 복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향하던 가치와 노력을 받아 올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발걸음을 쫓아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참된 공동체가 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섬기며 화해의 사도가 되는 십자가를 충분히 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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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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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2:07 Posted by 바람몰이


전통적인 해석의 한계

예수가 두번째로 눈물 흘린 것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이 부분을 예루살렘이 망할 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가 비통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가 그 뒤에 말하는 평화에 대한 이해, 당시 예루살렘과 예수의 관계 등이 적절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 한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수가 의도하는 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선명하게 대조하고, 실제 예수는 그 첫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해 예루살렘을 최종 종착지로 삼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게 된 핵심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갖고 있던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말이 성전이지 사실상 성전이라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 했고, 이런 차별을 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각 종 세금을 비롯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토지 수입 등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오늘날의 은행같은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당연히 성전의 주요 관리자인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성전 경비대장, 성전 창고 관리인 등)은 정규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고, 많은 토지, 금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통로로 변질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예수의 눈에는 갈릴리나 베다니 같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곳과 이들을 끊임 없이 죄인이라 규정하고, 수탈하는 예루살렘이 강도의 소굴로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대립관계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것만 해도 벌써 통탄을 금할 수 없을 예수였던 거지요.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리게 된 근본적 이유
그런데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이미 위의 이유도 충분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평화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활동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 에 있다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라는 건 죽은 후 떠나가는 "저 세계" 라기 보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이미 도래한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사역지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언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이는 로마의 군사력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수많은 서민들의 피와 땀, 한과 눈물이 맺힌 로마의 거짓 평화에 대한 분명한 파산 선고였습니다. 마치 새벽 닭 울음소리로 어둠이 아닌 새벽이 선포되듯 말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과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뜨임을, 눌린 사람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라 기술합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냈다 이야기 합니다.

즉,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바로 "평화"의 선포이자 도래였다는 겁니다. 
2-2 편에 계속 됩니다(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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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예수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9. 24. 15:31 Posted by 바람몰이


1.저는 예수를 바람둥이라 생각합니다. 이성이나 홀려대는 카사노바처럼 그를 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둥이란 어떠한 성질은 지닌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인데요. 말 그대로 바람의 성질을 갖고 있는 예수이기에 바람둥이라 여기는 겁니다.

인간은 사유재산이 생기고, 권력분화가 일어난 후 단 한번도 재물, 권력, 명예 따위의 노예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여기며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의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경제는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합니다. 옛 선현들은 명예는 한 줌의 재와 같다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비록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이것들을 배제하고 살 수는 없지만, 이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살아야만 비로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일 겝니다. 

예수는 이런 세속적 가치를 버리라 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떠날 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보내신 분이지요.

그러나 이것에 얽매이기만 해서도 안됨을 설파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는 것. 즉, 자유롭게 성령에 따라 살라합니다. 성령이란 성스러운 영.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하는 바람인데요. 성령에 따라 산다는 건 결국 바람과 같이 사는 그런 겁니다.


2.본래 바람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요. 무질서하게 부는 것 같지만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거대한 흐름을 갖고 흐르고 있습니다. 때론 사람을 시원하게도 하지만 때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무섭지요.

예수가 지닌 이러한 바람의 영성은 철저하게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났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늘의 뜻이란 고기압에서 인간의 삶이란 저기압을 향해 흐르는 삶이었지요. 이것은 자유분방 한 듯 여행하며  섬김과 십자가를 향한 흐름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런 세속적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고, 붙잡히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이 땅위의 인간의 삶을 사는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려 절망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되었고, 정의가 없고 인권이 유린되는 곳에서는 강한 기둥이 되어 정의와 인권을 되찾게 하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서는 서로를 향해 기도하게 하였고, 내면의 상처와 고민으로 고통받는 자에게는 자신의 영혼이 해방되는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세상의 어떠한 가치나 제도, 이데올로기에도 붙잡히거나 정체하지 않으며 참으로 바람 같이 사신 그런 분인 거지요. 그리고는 민중을 선동했다며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란 정치범 죄목을 뒤집어 쓴 채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3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3.이 세상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심리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흐름 자체가 심리적 침체에 빠져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질과 명예 같은 가치를 잡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불안한 심리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것을 잘 잡고 삐까뻔쩍한 외제차를 몰고 와야만 능력있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침체"의 개념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는 바보 중의 상 바보입니다. 그의 바람과 같은 영혼은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가 2천년 전이 아닌 지금 와 있었다면 어느 역 앞 노숙자 신세가 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불안하고, 침체된 심리 상태가 아닌 살아있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삶을 살고 있었을 겝니다. 그의 곁에는 배고파도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소크라테스가 모여 있었을 겝니다.


4.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목회자들은 그의 바람과 같은 영성을 철저하게 본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교회 건물과 신도의 숫자, 각 종 종교행사 출석률, 사회적 명예와 지위 등에 얽매여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자식의 명문대 입학과 물질적 성공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억눌리고 힘들어 하는 자를 위한 섬김과 나눔 등의 사회적 책임 역시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룩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하면서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는 참된 하늘 바람으로 샤워하지를 못합니다. 교회 용어를 빌리자면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될거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라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기독교인들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뤄지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관용으로 용서하듯 우리가 생명세상에 지은 죄에 대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시기를 구하며 모든 것의 권위와 영광은 우리 인간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것이라 고백하게 하였지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의 두번째 글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바람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고운 님께 영혼까지 맑게 하는 시원한 예수의 하늘 바람이 지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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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은 옳지 않다. 또한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하려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전자의 경우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정치와 군사, 경제 등은 자신이 맡을 테니 교회는 국민들의 영혼 문제에 전념을 기울여달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전쟁에 교회가 동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후자의 경우는 마치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중세는 기독교에 있어서는 가장 전성기였지만 세상은 중세를 "암흑시기"라고 부른다.

결국 이 같은 역사적 교훈에서 볼 때
종교를 정치와 완전히 분리시키거나 합일하려는 것은 모두 과거를 답습하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필자는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에게서 그 교훈을 찾는다. 그는 젊은 나이에 목사가 되어 99%의 독일 교회가 찬성하던 히틀러를 저항하고 그의 암살을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운전자가 버스를 몰고 절벽을 향해 승객을 태우고 갈 때는 그 운전자를 깨워내거나 버스를 멈출 수 있도록 해야한다 하였다.

암살계획을 통해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정의와 평화의 뜻을 구현하려 적극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를 정치가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교분리주의자라 평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즉, 그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참여하지 않은 좁고 오묘한 긴장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종교와 정치는 이런 것이다. 종교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정치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나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늘 끊임없이 정치를 비판하고 비판하며 바른 길을 가도록 조언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잘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바로 종교의 몫인 것이다.



장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보수교회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장로 대통령을 통해
이 나라와 민족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다. 파쇼적 발상의 극치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도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장로이건 불교 신자이건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를 구현해 내느냐의 여부이다. 그의 정책에서 가난하고 약한 서민을 아끼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정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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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상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9 Posted by 바람몰이



균형을 잡는 다 함은 절대 적당한 중간선을 찾는 게 아니다. 진정한 균형은 좌우의 모든 끝을 보고 난 후 내 자신을 온전히 세웠을 때 잡을 수 있다. 내게 잘 해주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잘 보고 내 마음을 다스리며 하늘의 이치에 맞춰 받아들일 줄 알아야 인생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우리네 생명세계나 역사 역시 하늘의 삶과 땅의 삶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한 때 우리의 역사는 땅의 삶을 물리치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추상적인 관념에만 사로잡혀 딴 세상 사람처럼 살 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동서양을 막론하고-학문세계나 정신세계는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힘을 끼치지도 못하고 도리어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의 우리네 삶은 우리네 인간사 속에서 하늘의 뜻과 이치, 그 질서 등을 완전히 배제한채 살아가고 있어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결과 생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되었고, 우리네 정신 역시 그 따뜻함과 깊이, 인간냄새 등이 사라져가고 말초적인 흥분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아주 간단히 도식화하여 정리하여 보았는 데..

실제 우리네 인생과 우주의 이치란 것은-동서양을 막론하고-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그 기본과 끝이 있다. 특별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성품을 입고 땅에 살게 하였다는 성경의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네 인생들이 당면한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신, 하늘, 추상이 지배하던 역사를 박차고 나와 땅, 물질, 현실이 지배하는 오늘의 역사를 거쳐 이제 변증법적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온 생명세상에 하늘의 생명기운을 다시금 불어넣어 흙에서 사람이 되었던 옛 고백처럼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세상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조금 엇나가는 얘기이긴 하지만..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세계가 지극히 천한 것 역시 바로 이런 더 큰 세계를 볼 줄 아는 이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바로 눈 앞 밥그릇 채우기와 기싸움만 해댈 줄 아는 이가 득실거리기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하늘의 이치와 성품속에 지극한 땅의 삶을 살며 국민들을 인도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럴싸한 대의명분과 시끄러운 입방정으로 가장 천박한 인생사를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좌우의 끝을 볼 줄 알고, 포용할 줄 아는 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그 중심을 잡고 국민들을 편하면서도 좀 더 고귀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우리의 맥으로 돌아와..아무튼 세상의 교회와 크리스챤들이 이런 큰 신앙의 맥락을 알고 살아나가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각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열매를 맺어가고, 그 가운데 예수님과 같은 사람냄새 나고 하늘 냄새나며 그래서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으로 잘 살아가는 생명의 세상을 일궈갈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이 때에 자신의 자리와 삶에서 최선을 다해가며 주께서 다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죄많고 부족한 나이지만..주님의 그 은혜로 살며 최선을 다했노라..열심으로 살았노라..그렇지만 너무 힘들었노라 이야기하며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당당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 여행의 첫번째 도전에 직면해보자.

지금 나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무얼 알고, 무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내 삶은 바로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나만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열심있고 책임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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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적은 짧은 생각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5 Posted by 바람몰이


필자는 "국제 유가와 패러다임"(
http://blog.naver.com/kkuks81/30005482669)이라는 글에서 국제유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을 예측한 바 있다. 또한 유가 상승으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의 심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성 및 착취성을 밝히며 "생명"을 향한 선택을 강조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설마..'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둘씩 '진짜 그렇게 되는 것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특별히 유류세 및 정유사 횡포가 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부담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정신사적으로는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들이 주는 장점을 놓치고 단점만이 반복되고 있고,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물질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은혜로 바로 잡아가야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선도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특별히 교회가-물질중심의 삶에서 물질과 고귀한 정신이념-정신사로의 상승지향적 성향 포함-,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 및 실증적인 것과 전일적이고도 포괄적이며 유기체적인 것의 조화를 꾸준히 추구해나가거나 유지해나갔다면 지금의 이런 파국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신령한 지혜 및 성령의 인도하심을 세상에서 유행하는 정신사 및 물질적인 삶과 온전히 구분하여 설파하여 나갔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실제 우리는 절벽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상황이기에-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온 생명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까지 기다려 주시며 은혜를 베푸셨기에 이렇게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네 인간이 가지는 본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비본래적인 상태(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참조)에 있는 즉, 원죄에 빠진 상태인 인간이 지닌 이기성과 욕심, 잔학성, 폐쇄성, 정체성, 보수성 등으로 대변되는 그 본성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필자의 주장이 꼭 다 들어맞거나 모두 공감하지 않는다해도) 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따라서 다양한 주장이 오고가는 것이며 여기에는 당연히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현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좀 더 물질적인 풍요를 중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네 인간의 심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본래적 상태에 머문 본성이었다면-우리는 에덴동산의 낙원과 같은 상태처럼-얼마든지 서로를 비판적으로 돕고 도우며 꾸준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 아니었겠는가.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논리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온 인류의 언어가 흩어지고, 다르게 된 것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알아가고, 타개해가며, 새로운 앞길을 열어 가는 것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며 그 거대한 물줄기를 생명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이다. 정작 문제를 일으키고도 깨닫지 못하고 뻔뻔하게 자기를 죽인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믿고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판단해가야 하는 걸까..

우선 조화를 깨뜨리는 지극한 편향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지극한 편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그 끝에서 하나의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설픈 편향으로 인한 폐쇄성일 것이다. (오늘의 삶이 지극히 물질적인 삶에만 편향된 것은 어쩌면 이것이 어설픈 편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물질적인 땅의 삶에서 고귀한 인간애를 깔고 있는 하늘의-하나님의-삶으로의 반전을 통한 변증법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일적인 삶의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말고..은혜마저 값싸게 팔아버리지 말고..겸손하면서도 열심있는 삶의 추구를 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지향 및 소비지향적 성향을 이겨내고, 지속적인 개발 및 유지가 가능한 생태적이고도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만큼 살아가며 휴머니즘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역사적인 생명으로의 삶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이고도, 전생명적인 삶과 조화가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성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의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인류의 하나됨과 행복의 추구 및 생명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 빈부격차 및 자연, 영혼과 생명의 파괴를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끝으로 우리 한명 한명이 "성인군자(?)"가 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인군자라 하니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며, 온 생명을 볼 줄 아는 시대와 역사, 생명을 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른 '의식화(?), 계몽(?)' 등이 된 성숙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어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며 날마다 거듭나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아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나와 우리가 사는 오늘을 바로 보고, 뒤를 반성하며, 내일을 살아가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기체적이고도 정신지향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삶의 현실속에서 전일적으로 판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워낙 두서없이 쓰다보니 서론이 좀 긴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글이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하려는 말은 알아서 흘리고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분명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다시 건강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책을 필자는 제시한 것이니 이를 통해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나를 돌아보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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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어제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가 배럴당 86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우리가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역시 76달러를 넘어섰구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국제 유가의 고공행진에 따른 경제 침체나 위기설이 언론에 심심치 않게 보도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골드만삭스는 이미 올해 95달러까지 유가가 오를 것이라 보았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국제 유가가 최대 200달러까지(장기적으로 볼 때)상승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대다수 언론은 겨울철 사용량 증가에 따른 수급문제와 터키의 이라크 진공계획 등을 상승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OPEC이 생산량을 늘리겠다 해도 쉽게 가격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게다가 터키의 진공계획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겠습니다만 이런 일이 없었어도 국제유가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석유의 매장량 자체입니다. 이미 이것은 피크에 가까워졌거나 지났다고 보고 있는 것이구요. 따라서 유가는 꾸준히 상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아마도 미국은 이런 상황을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9.11 테러는 가장 확실한 전쟁 명분을 제공했기에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적어도 향후 3-40년간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석유"의 이권확보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은 중동정세 및 수급상황의 불안으로 인한 유가 상승을 부채질하였고 여기에 최근 계속되는 미국의 약한 달러 정책은 국제 유가의 상승을 가속화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제 유가 상승의 두번째 이유입니다.

미국이 이런 전략을 선택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영국의 가디언지에 따르면 미국은 자국의 비밀보고문서에서 이미 2007년 이후 전세계적인 이상기후 현상이 점점 심해질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냉난방의 문제와 직결될 것입니다. 냉난방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지요. (또한 전세계 식량시장의 개방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식량 또한 패권유지의 전략적 무기로 선택한 측면 역시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로 약한 달러 정책을 통한 자본유입의 확대와 끊임없는 확전은 계속되는 쌍둥이 적자라는 기형적인 자국 경제상황과 무너져 가는 제조업 상황의 개선 및 부시 행정부의 지원세력인 군수업체의 경영상황 개선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지요.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또한 이에 따라 앞으로도 국제 유가는 계속 오를 것입니다.

3.이러한 상황은 우리 경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달러의 약세는 환율과 직결되기에 우리 나라가 석유를 수입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 아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유가가 배럴 당 95달러를 넘어서면 아무 소용 없어진다 하니 저달러로 인해 큰 타격을 받기 시작한 우리 나라 산업의 8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정말 위기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심지어 인터넷에는 만약 유가가 200달러에 육박하게 되면 도로에 움직이는 차가 없을 것이란 암울한 예상을 담은 글 조차 존재하는 실정입니다.(아무리 연비가 좋다는 차라도 고유가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으니 말입니다.)

아울러 생각해볼 점은 이런 상황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란 점입니다. 지금 꾸준히 계속되는 세계화란 것은 금융 세계화를 그 핵심실체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금융세계화란 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금융세계화란 환율, 이자율, 유가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화를 시작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 때,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외환 시장, 유로 통화시장 같은 단기 금융시장을 활용하여 현금 플로우를 관리하고 환투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금융세계화란 투기적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고, 각 국의 중앙은행은 재무부로부터 독립하여 고도금융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미국 경제에 종속되어 있는 세계 경제의 특징을 볼 때 당연히 미국의 경제적 모순 심화가 심해질 수록 세계적 경제위기가 다가올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충격은 각 나라를 가리지 않고 서민들에게 돌아갈 것이기에 저는 이것을 계속 경고하려 하는 것이지요.(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처럼 경제적 기득권자나 상위계층은 위기가 와도 다 잘 살지요. 피해는 서민 중산층이 떠안는 것이구요) 

4.이제 저는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저는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 봅니다. 세계 경제나 미국 경제가 좋던지 나쁘던지 아무튼 어떤 방식이든 그 끝을 볼 때까지 오를 것입니다. 석유 매장량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이 배후에 미국의 전략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에 따른 세계적 경제 위기도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더욱 심해질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는 이런 상황을 염두해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측이 빗나가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집중될것이니 말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이 상처들을 정신적, 물적 피해를 안아줄 곳이 없습니다. 각 정부 역시 재무부가 고도금융에 종속된 형편에서 큰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 상황일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께 작은 팁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새차를 사시려면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국제 유가와 세계 및 한국 경제의 상황을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래도 사셔야 한다면 가스차를 사십시오. 천연가스는 한국형 대체연료로 고려될 정도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된 걸로 압니다. 기왕이면 걸어다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연습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두번째로 아파트는 구입하지 않는 게 나으실 것입니다. 그 돈으로 개인주택을 구입하여 "연탄" 가는 연습을 좀 해두시는 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만약 구입하시게 되면 되도록 저층을 구입하십시오. 15층까지 어떻게 걸어다시렵니까.  끝으로 주가가 아무리 계속 오른다해도 섯불리 투자하지는 마십시오. 특히 중국쪽 투자는 올림픽 거품이 있으니 신중하시고 상황을 보며 적절히 매수하시길 바랍니다.

(2007년 10월 19일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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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쇼크 또 올까요?

[시사]세상살이 2007. 11. 12. 09:53 Posted by 바람몰이

저는 지난 해 처음 쓴 "국제 유가와 패러다임"이 후 약 두 차례 더 국제 유가 상승을 경고해 왔습니다. 또한 미국 경제 붕괴와 급속한 금융 세계화와의 관련성을 통해 세계 경제가 겉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경고했습니다. 특히, 교회는 최악의 시나리오마저 염두해두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란 당부를 해왔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 글을 쓸 때만해도 '설마 유가가 그렇게까지..설마 미국이..걱정이 지나치다..'는 반응이 많았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하긴 골드만 삭스가 보고서를 발표했을때도 그랬으니 좀 위안은 됩니다 ^.^) 하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 국제 유가가 100불을 넘을 것이란 예상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언제냐라는 말만 다를 뿐 이지요. 또한 심심치 않게 세계 경제 위기설이 모락모락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경제 역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주변의 반응이 달라진 게 사실입니다. 제 말을 보는 시각 역시 그렇구요 ^.^;;

음..

저는 앞으로도 유가가 계속 상승할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경제 위기가 찾아올 확률도 매우 높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론이 호들갑떠는 것처럼 지금 당장 올것이라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역시 세계 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는 것이 연 10%에 달하는 중국경제의 성장률이고 그 동안 일종의 내공(?)이 쌓인 우리 및 세계 경제의 상황 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아마도 중국이 꾸준히 성장해가는 한 쉽사리 경제 위기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국이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 동안 축적된 이윤율로 인해 당장의 어려움이 위기로까지 번지지 않을 것이라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및 세계 경제에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 보는 것은 먼저 그 이윤율이 하락하고 역전되는 시점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란 점과 중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더 많이 공급되어야 할 석유가 그 매장량이 이미 그 정점을 지나 하향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금융 세계화란 것 자체가 미국이 지닌 헤게모니의 위기의 반증이며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는 미국 경제의 취약성 때문입니다.

저는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겠지만-아마도 경제위기가 2010-2015년 사이에 오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신대 윤소영 교수의 견해에 상당히 근거한 것으로써 이 시기쯤 되어 그동안 축적된 이윤율이 역전되면서 꾸준히 병들어간 경제를 지탱치 못하고 쓰러지게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20대의 건장한 젊은이는 몸에 멍이 들거나 감기에 걸려도 아픈지 모르거나 금방 낫지만 나이를 많이 먹어 몸이 약해지면 같은 멍이나 감기에도 쉽게 쓰러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아마도 이런 저의 예측은 중국 및 세계 경제의 석유 의존도 감소와 하락하는 이윤율을 역전시킬 수 있는 신기술의 개발이나 기존 경제체제의 보완 및 새로운 대안체제로의 전환이 없으면 그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젠가는 찾아오며 적중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경제사가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던 자유주의의 실패는 결국 뉴딜 정책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개입주의 즉, 케인즈 주의로 변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깨닫게 된 국가 개입의 실패 즉, 케인즈 주의의 한계는 브레튼 우즈 체제의 와해로 귀결되었고 이것은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며 하락하는 세계 경제의 이윤율을 역전시키려는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걸 이겨 내기 위해 먼저 화석연료 의존의 극복이라는 당연한 이야기와 각 개별국가 경제의 생존(성장은 여기서 통용되지 않습니다. 살아남는 생존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을 위해 고도금융 종속성을 최대한 벗어나 실물경제를 살릴 수 있는 제조업의 부활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결국 전 국민의 80%가 취업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실물경제가 살아있어야만 그 나라의 경제가 삐걱거리기는 해도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것은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권과 떼어서 운영될 수는 없기에 우리가 고도 금융에의 종속성에서 최대한 안전지대 확보를 하여야 생존이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 일본이 선언한 "모노쯔구리"라는 제조업으로의 회귀 역시 세계 경제의 흐름을 2-30년 이상 놓고 예측해볼 때는 다시금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신기술의 개발이란 것 역시 필요하나 이것은 일시적 반동작용밖에 하지 못하지 않을까 싶은 거지요.

이제 글을 정리합니다.

아마도 당장 1-2년 내에 오일쇼크에 따른 세계 경제나 한국 경제의 위기가 오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유가는 계속 오르겠지만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010-15년 사이에 위기가 닥칠 확률과 그 위험성은 상당히 높다고 봅니다. 물론 그 시기가 정확치는 않을 수 있습니다만(저는 점쟁이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니까요) 분명 이윤율의 저하와 세계 경제가 이를 감당치 못 할 그 언젠가의 시점이 분명 존재할 것이기에 언젠가는 올거라는 거지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의 화석연료 의존 극복 및 신기술 개발, 기존 경제체제의 보완 또는 새로운 대안체제의 도입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실물경제의 부활을 통해 생존의 여지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거구요. 아울러 실물경제의 생존을 위해서는 각 국이 고도금융에 종속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해도 최대한 안전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거구요. (일전에 저는 자본주의 자체의 본성을 볼 때 위기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동생에게 한통의 전화를 받다"참조)

그리고 역시 교회는-특히 목회자는-이런 상황을 염두해 두고 있어야 할 것이란 겁니다. 교회가 아니면 사회의 혼란을 받아주고 완충해줄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또한 결국 진흙탕에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이 우리 크리스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구제 및 교회의 유지를 위한 계획을 세워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과 같이 앞을 내다보며 국가 정책을 세울 수 있는 비전있는 지도자가 뽑히거나 정책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가장 기본이면서도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모든 성도가 하나되어 기도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가르며 인도해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는 무지개를 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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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웹서핑 중 우리 정서로 표현한 그림을 발견하였다.

100%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름의 색깔을 지니고 고백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여 이렇게 모셔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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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에서 모셔온 글
대한민국은 십자가 공화국인가
[작은공동체 위한 교회건축] 교회 지붕 위 조형물로서의 십자가

이정구 jkl@skhu.ac.kr


   
‘교회’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 안에는 '지붕 위의 십자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중세유럽 고딕교회부터 현대 도시 상가에 임대한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 지붕 위에는 첨탑 위의 십자가가 사라진 적이 거의 없었다.

네온조명이 없던 시절의 교회 지붕위 십자가는 적어도 해있는 낮 동안만이라도 지표역할을 했지만, 현대교회는 24시간 불야성인데도 그 수많은 붉은 네온의 지붕위 십자가는 헤매는 시민들의 지표역할을 하기는 커녕 이들의 짜증만 돋구고 있다. 어느 외국인은 과거 김포국제 공항가까이 비행기가 하강할 때 지상 위에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고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라서 안보태세를 위한 무슨 장치인줄 알았다고 한다.

   
예수 보혈을 상징해서 십자가를 붉은 네온으로 장식을 한다. 그렇다면 푸른 십자가와 노란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여기에는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네온 십자가가 너무 많아 식상해서거나, 너무 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는 시민들의 불평과 비웃음을 피하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두려고 푸른 네온이나 노란 네온으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교회를 표시하는 십자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음은 당연하며 이것은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한 교회 지붕 위에 몇 개씩 매달려 있는 작고 크고 울긋불긋한 다양한 십자가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십자가들이 적절한 곳에 설치된다면 그 십자가가 황금으로 치장되었든 십 수척 크기의 네온 십자가든 그것이 대수가 아니다.

유럽의 돌 성당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많아야 두개, 첨탑은 높아도 십자가 크기는 보일 듯 말듯하다. 교회건물의 모양세 자체가 교회임을 말해주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굳이 크고 많게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또 십자가가 적당히 작음으로써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유독 왜 대한민국 교회들만이 교회건물의 크기나 조화와 관계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울긋불긋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일까. 가히 기독교 국가 아니 십자가 국가라고 할만하다. 거기에 심오한 신학적, 교리적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무조건 드러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이다.

같은 하나의 상가건물에 교회 세 개가 입주해 있는 경우 그 상가 지붕은 참으로 처참할 수밖에 없다. 세 교회가 공동으로 첨탑과 십자가를 설치하면 경비도 절약되고 주민으로 부터의 비난도 덜 하고 상가 건물도 정리되어 좋을 텐데 그런 교회를 아직 본적이 없다. 첨탑의 높이와 십자가의 크기마저 경쟁이 된다. 천사가 한 건물 위에 있는 많은 십자가들 중에서 어느 십자가 위에 임재 할런지 감히 추정할 수 없지만 십자가 위에 앉기보다는 건물에 하나 달랑 보일듯 말듯한 십자형 피뢰침 위에 앉아 그 안의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할 것 같다.

건축가들이 교회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고심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 탑이다. 건축가마다 나름대로 십자가 탑에 대한 컨셉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설계한 다양한 형태의 교회건물에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십자가 탑을 맞춤형처럼 설치한다. 십자가 탑 모양을 보면 누가 설계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건축도 넓은 의미에서 환경조형물이지만 특히 십자가 탑은 그런 조형물 위에 또 설치되는 조형물이다. 단순히 십자가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건축주는 주변 타교회와 차별성있는 특이한 십자가 탑을 요구하고, 건축가는 심히 고심하며 만들어 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십자가 탑을 다시 변형하여 재창출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건축가는 건축가이지 전문 조각가가 아니다. 간혹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주변의 조경까지 담보하려는 욕심도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전문 조경가의 몫이다.

건물 지붕 위에 부착된 십자가탑 자체가 또 하나의 환경조각품으로써 건물 본체와 독립된 또 다른 미디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 탑도 조각가에게 과감하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붕위의 십자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재질도 다양하지만 본 건물과 어색하지 않으며 주변 스카이라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주민들에게 위화감만 주지 않는다면 십자가 개수가 문제겠는가.

   
이 정구 (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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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7. 11. 10. 09:52 Posted by 바람몰이
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1. 인기를 위한 목회가 아닌, 인격적인 목회를! (롬12:10-20)

2. 직업적인 목회가 아닌, 소명감에 불타는 목회를! (겔34:1-16)

3. 최고, 최대를 위한 목회가 아닌, 최선의 목회를! (살전2:1-12)

4. 경쟁적인 목회가 아닌, 성실한 목회를! (마25:14-30)

5. 자랑을 위한 목회가 아닌, 겸손한 목회를! (눅17:10)

6. 수와 양에 치중하는 목회보다는, 알곡을 키우는 질적인 목회를! (요10:9,16)

7. 자아 중심의 목회가 아닌, 주님 중심의 목회를! (빌1:20)

8. 명예를 위한 목회가 아닌, 영혼을 위한 목회를! (고전9:19-23)

9. 인간의 칭찬을 받기 위한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목회를! (마6:16-18)

10. 과장된 위선의 목회가 아닌, 양심적인 정직한 목회를! (마23:1-36)

11. 내 힘으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목회를! (행1:8)

12. 받기 위한 이기주의적인 목회가 아닌, 생명까지도 주는 희생적인 목회를! (행20:24)

13. 의무감으로 하는 타율적인 목회가 아닌, 사랑 때문에 하는 목회를! (살전2:8)

14. 정죄하는 목회가 아닌, 이해와 관용의 목회를! (마26:41)

15. 책망의 목회가 아닌, 권면과 위로와 칭찬의 목회를! (살전1:2-8)

16. 명령과 지시만 하는 권위의 목회가 아닌, 본을 보이는 실천의 목회를! (벧전5:3-4)

17. 발로 뛰기만 하는 목회가 아닌,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회를! (눅2:39-46)

18. 십자가를 타고 가는 교만의 목회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종의 목회를! (16:24)

19. 인간의 지혜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경말씀 중심의 생명있는 목회를! (딤후3:15-17)

20. 교인을 외모로 보는 계산적인 목회가 아닌,
의롭고 괴로운 자의 편에 서는 진실된 목회를! (약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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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0. 09:46 Posted by 바람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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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주 헌금을 합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고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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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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