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몸’에 대한 고민은 사실 저자의 집필 동기이기도 하다. "팔, 가슴, 어깨, 허리, 엉덩이, 허벅지, 다리, 손과 발,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얼굴의 부분 부분들.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자신이 그것들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심지어 혐오와 인정의 상태를 넘어서기까지 할 수 있을까." - 1996년 1월 26일 일기는 이러한 저자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란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유롭지 못함을 반성하며 저자는 ‘몸’의 역사와 이해의 역학관계를 역사적으로 성찰하고, 우리 삶의 영역에 적용하는 도식을 따라 책의 내용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책의 흐름은 굳이 여성학에 대한 전이해가 없어도 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런 구조는 자칫 내용이 장황하고, 거창해져 지루해지거나 부담스러워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현실의 구체적인 논쟁의 지점을 제시하고, 생생한 증언을 제시하며 우리의 주의를 끌고 간다. 예를 들어, 외모 가꾸기가 굳이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용되지만 이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 무게감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귀결되는지 밝히는 대목은 굳이 냉철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외모에 대한 저항이 봉쇄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 이것을 실제적인 증언들로 채우고 있어 이 책이 아카데믹하다는 느낌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받게 해준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상당히 진지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아쉬워진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저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마지막 줄에 ‘저항 없는 치유는 불가능하다’ 는 드라마틱한 명언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물론 10여년 전 출판되기도 했지만-‘몸’에 관한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국한하여 그 해결책으로 여전히 ‘저항’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책의 중간중간 남성의 문제를 함께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현실의 문제가 여성에게 직접적이고 보다 비중 있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양성평등 또는 성평등의 문제로 함께 남녀가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오늘에 있어 상호주체적 인식과 의식의 공유 없이 풀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전략적으로나 세계적 여성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도 약간은 미진한 대안이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독서를 마친 후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재미나다’라는 것이다. 분량도 적어서 넉넉히 세 시간이면 이 책의 독서를 마칠 수 있다. 더욱 좋은 것은 가격도 착한 데, 내용도 알차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고, 고민할 수 있는 문제를 해박하고, 전문적인 식견으로 풀어가는 책의 흐름은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한신의 후배들에게 꼭 한번 권하고 싶은 맘이 들게 한다.

부제 :「다이어트 성정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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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일반적 분류

1)일반적 분류(분리주의적 접근)

1세대 페미니즘 : 자유주의 페미니즘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2세대 페미니즘 : 20세기 중반(1960년대부터)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분리주의적 접근은 페미니즘의 흐름이 단절되고, 여성의 문제가 본래적 문제임을 은폐 즉, 처음부터 있었던 문제임을 설명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2)재구성의 흐름

혁명기-자유주의-도덕적 사회주의, 맑스(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의 주요내용

1)혁명기 페미니즘

: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주류를 이루기 전까지의 페미니즘을 의미한다. 이 때는 계몽주의 등 합리성과 인권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던 시기였고, 프랑스 혁명을 대표로 하는 민주의식의 고양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제기된 인간의 권리는 소유권의 권리로 환원되며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분할이 이뤄졌고, 이 속에서 여성은 소외된 존재로써 공사분할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운동 역시 소유권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어 결국 이 시기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써의 성격을 띄며 그 한계성이 있었다.

혁명기 페미니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노동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로서 노동권이라는 관념은 여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로서 ‘여성권’이라는 관념을 도출되었다. 생시몽주의 여성들은 이러한 여성권을 성적 차이의 권리, 즉 모성과 성욕에 대한 여성의 권리로 구체화했다. 생시몽주의 여성들은 여성권을 노동권과 더불어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 권리로 만들고자 했고, 따라서 여성권에 기초하여 남성과 동등하게 공동체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 때,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협동조합, 노동조합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여성해방과 사회변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남성성, 여성성의 성적차이에 의한 공사분할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여성해방과 사회변혁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성욕을 포함한 여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푸리에는 가족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가족의 속박을 벗어날 때만 여성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하다 보았다. 생시몽은 여성메시아를 주장하며 자본주의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는 사랑과 재생산능력을 보유한 여성의 본성만이 가능하다 보았고, 여성 육체에 대한 긍정을 얘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시기 주목할 나라로 영국과 미국을 더 볼 수 있는 데, 우선 영국은 차티스트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티스트 운동 당시 핵심은 남성의 보통선거권이라 할 수 있고, 이들은 자신이 여성의 권리를 대변할 수 있다 보았다. 또한 여성 역시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계급차이에 의한 억압에서의 해방 즉, 여성도 곤궁할 수밖에 없는 상황개선이라는 진일보성을 고려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가족과 남녀관계의 안정이라는 거대한 테제속에 진행된 것이라 한계가 존재한다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인종과 성별차이에 대한 갈등이 계속 되었다. 노예폐지운동과 참정권 운동 역시 여성 그 중에서도 흑인 여성이 배제되는 가운데 이 같은 수정헌법의 내용을 어떻게 지지할 것이냐는 논쟁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보편적인 투표권 운동에서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만이 투표를 한다는 보수적 퇴행 아래 사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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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 남편, 여성단체에 취직하다

약 백여일간의 전업주부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여성단체에서 양성평등 및 직장내 성희롱 예방 전문강사로써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 취업소식을 들은 주변 반응이 참 흥미롭습니다. 도대체 왜 여성단체에 남자가 들어가 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들으며 일단 그 바탕에 깔린 생각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엔 '여성단체는 남성과의 대립(싸움)을 주로 조장하는 데 네가 자기편 자리도 제대로 못보고 갔다' 는 게 첫번째이고, '여성단체에서의 활동은 여자만 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또한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이게 순전히 제 오해이면 참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여성단체에 들어간 논리적 이유 세가지

우선, 여성운동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며 글을 전개해 가야겠습니다. 흔히 여성해방, 여성운동 등을 총칭해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쓰곤 합니다. 예, 사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작되었고, 자연스레 남성과의 대립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지금도 여성운동 진영의 얘기를 듣다보면 '남자는 다 죽일놈' 또는 '남자는 모두 잠정적 범죄자'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여성운동은 기존의 여성해방 논리의 한계에 봉착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여전히 여성의 입장에선 여러 문제가 상존한다 보겠지만 지금과 같아서는 남성과의 대립만 있을 뿐 더이상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운동의 효율성 및 여성의 삶의 질 등과도 직결되는 것이기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고, 이것은 또한 남성의 삶의 질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쪽은 자신이 불행하다 느끼고, 다른 한쪽은 내가 수세에 몰린다 느끼며 서로 행복한 삶을 살 순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여기서 봐야하는 게 바로 "흐름"입니다. 즉, 지금은 애나 어른이나 양성평등의 개념 없이 살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싫든 좋든 이 나라가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려 발버둥을 치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려 애쓰는 이상 결국 우리는 양성평등의 시대로 접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여성" "남성" 만으로 사는 게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대라는 거지요. 이 흐름을 놓치면 결국 아무리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직장에서 용을 써도 모든 개인과 이 나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끝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바로 "양성평등 운동의 지향점" 입니다. 양성은 서로 화성과 금성에서 온 것처럼 많은 차이가 있다 합니다. 예, 살다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너네는 그렇게 살아라, 우리는 이럴게' 라고 해야할까요? 서로 끊임 없이 대화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양성평등 운동은  바로 '양성간 대립' 이 아닌 '대화와 인정, 배려' 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여성단체에 들어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양성평등 운동을 한다는 데, 가만 그 얘기를 듣다보니 여성운동 하시는 분들이 여성해방논리 펼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교육하는 분들도 전부~여자들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요. 아무튼 바로 여기서 제가 여성단체에 들어간 이유가 나옵니다.


지금 제가 속한 화성 여성회는 노동부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양성평등 및 직장내 성희롱 예방 전문강사단을 육성, 파견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곳에서 다른 8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기존의 여성의 입장에서만 보고 제시하는 논리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남성의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합리적인 접점을 찾아가려는 것입니다.

당연히 현재 제가 개발한 양성평등 교육안과 직장내 성희롱 예방 교육안에는 이 모든 것이 강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 시강을 본 여선생님들이 하나 같이 얘기하지요.

 
"확실히 남자의 눈으로 접근하니 완전히 다르다"

예, 저는 좀 다르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잘나서 그런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기왕이면 남성도 별 거부감 없이 함께 공부하며, 양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래서 내 아이들만큼은 좀 더 합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내일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앞의 세가지 이유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바로 제가 여성단체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리하며

요즘은 새벽까지 공부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대학시절 공부했던 내용을 다시 돌아보고, 특히, 법 관련 공부때문에 상당한 시간소요가 됩니다. 판례도 함께 봐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보람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강의에 그대로 반영되고, 이것이 양성평등 운동을 통한 합리적인 내일을 만드는 데 작은 기여를 할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하하, 물론 제 강의를 듣고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거부감이 들수도 있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좀 신선함은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 남자 강사가 없으니..^_^;;

출강지역 : 화성시(우선), 기타 지역도 연락주시면 조정 가능합니다.

강사약력
: 군산 고등학교 졸업
: 한신대학교 신학과(전공), 한신대학교 국제경제학, 기독교교육학(부전공) 졸업
: 두산동아스쿨 수학전문강사
: 두산동아 표창장 수상
: 다음 신지식 엑스퍼트(육아-자녀교육)
: 경기여성정보웹진 "우리" 필진
: 블로그 [라이프] 하늘바람몰이 운영(잡지 및 일간지 인터뷰 또는 기사 다수 채택)
: 양성평등 및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 전문강사 (화성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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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백여일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사에 일부 참여한 것과 달리 그 한복판에 뛰어들어감으로 많은 배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경험은 제 구직에도 영향을 주었고, 저는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하, 어제 저는 여성단체에 들어가 양성평등, 직장내 성희롱 등의 교육을 하는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원래 어린 시절부터 저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뇨 조금 문자를써서 말하자면 "소수자" 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수자란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발생되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편견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자를 의미하는 데요. 제 눈에 비친 여성은 일상에서 늘 편견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의 입장이었고, 동시에 이 때문에 남성 역시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제 성장환경 영향이 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님과 자란 저는 늘 여동생과 제가 다르게 받아들여짐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여동생은 늘 이게 불만이었고, 저는 늘 여동생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 조부모님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나름 "영재" 소릴 들으며 "기대주" 로 과대평가 되었고, 게다가 "장남" 이었으며 여기에 옛 어르신들의 남아선호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던 거지요. (지금 여동생은 그 때 얘길 하면서 서운했다 얘기하며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잘 보니 양성간에 가해지는 차별 또는 편견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였던 여성을 더 힘들게 하지만 결국 남성 역시 힘들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평소 생각은 대학시절 여성신학을 공부하고, 페미니즘에 빠져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보니 역시 제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양성 모두 어려움과 아픔을 겪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 상황에 대한 양성 모두의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곳은 제가 직접 알게 된 곳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한주 연재했던 글을 보고, 제 구직자리를 찾던 아내가 제안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학습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나고, 제가 깨닫고, 경험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도 의미있다 여겼습니다.

하하, 제가 앞으로 어떤 삶을 만나게 될지..

또 어떤 이야기를 쓰고, 어떤 그림을 만들어나갈지 참으로 기대되고, 궁금해집니다. 


독자님 보시기엔 어떤가요.

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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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이중생활

[LIFE]이 남자의 인생 2008. 11. 21. 14:36 Posted by 바람몰이

장안의 화제였던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다보니 중간에 '제 아무리 날고 뛰는 여자도 애 낳으면 다 똑같아진다..저도 별 수 없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지만 우리 나라 여성의 현실이 한마디로 집약된 듯 하여 씁쓸한 마음이 들었었다.

요즘 주변을 보면 흔히 말하는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아졌다 한다. 가정내 아내의 발언권도 상당하여 요즘은 오히려 고개 숙인 남자가 많아졌다고도 한다. 가만보면 상당히 맞는 말인 것도 같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서도 가사와 육아는 여전히 아내의 몫이고, 좀 좋은 남편은 자주 도와준다는 표현이 적절한 수준의 참여를 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직장여성의 경우 가사분담 시간이 남성의 두배에 달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역시 비슷하다. 어느 잡지를 보니 한국의 남녀불평등지수가 악화되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세계경제포험의 세계 성격차 보고서를 보니 한국은 작년보다 11계단 하락하여 총 130개국에서 108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최하위권에는 아랍권 국가가 포진해 있으니 사실상 꼴등이나 다름없다.

(세계경제포럼은 교육과 보건, 고용, 정치 등 4개 부문에서 불평등 상황을 계량화 하여 완전 평등을 0으로 가정한 후 평가하게 되는 데, 올해 우리는 작년 0.6409에서 0.6154로 떨어졌다.) 

특히, 최근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물결에 따른 여성 근로자의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핵심가치 중 하나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들고 있다. 이는 결국 고용과 해고가 자유롭고, 적은 임금지출이 가능한 비정규직의 확산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물론 남성 근로자 역시 특별히 나은 건 아니지만- 정리해고의 1순위도 여성 근로자이고, 현재 여성근로자의 70%가 비정규직임을 보면 상대적으로 여성 근로자에게 더 많은 부분 영향이 끼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만약 그 여성 근로자가 그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라면 그 영향은 더 크게 작용하고 만다.
  

얼마 전 신차 구입 후 열심히 운전 중인 여동생의 푸념을 들을 수 있었다. 운전을 하다보면 도대체 사람들이 비켜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양보가 줄어든 요즘 모습일 수 있으나 유독 여자 운전자에게 더 심한 것 같다 한다.

나는 여동생의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예전에 어떤 이가 우리 나라 여자는 자신들이 얼마나 존중받는 지 모르고 부당한 대우 받은 것만 기억하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을 느끼게 하는 현실이 존재하여 느끼는 건데 어쩌란 말인가. 

아하..그런데 이거 참 웃긴다.

이런 글을 쓰는 나이지만 글을 쓰며 새벽 출근 전 함께 막 잠에서 깨어난 아내를 보고 "나 아침밥 안해줄거야?"라 따지던 게 생각난다. 신혼 초 인터넷으로 구입한 의자를 남자인 내가 조립해야한다 바득바득 우기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아내에게 윽박질러 울게 만든 것이 떠오른다. 새벽에 마구 울던 아이에게 똑같이 일하고 퇴근 한 아내를 깨워 우유를 주고, 달래라 하던 게 떠오른다. 

허허..잠시 거울을 피해다녀야 할까보다.

나의 이중생활에 코가 얼마나 길어져 있을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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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드시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2 Posted by 바람몰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의 중심에 세우심은 이 생명세상을 아끼시고,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아주 잘 나타난 대목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을 땅에서 취해 만든다 할 때 “땅”이란 말 자체가 원래는 “먼지”라는 뜻입니다. 아담이란 말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것 이구요. 하와라는 말은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잠깐 아는 목사님께 들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후 여자를 만드셨잖아요. 그래서 이 구절은 남자가 여자에 비해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에 자주 동원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식의 그런 얘기 말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남자는 한낱 먼지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여자는 그 속의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갈빗대를 통해 만들어진 걸 생각해보라는 거지요. 결국 여자는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시고 난 후 나오는 많은 오류와 문제를 다 보완하여 먼지가 아닌 갈빗대를 취해 만드신 업 그레이드 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보다는 여자가 한수 위이고, 남자는 여자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해야 세상살이가 좀 더 현명해진다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그럴 싸 하지 않나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 되어 행복을 누리는 걸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뒤에 가인과 아벨 얘기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로 엮어주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함부로 나눠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열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될 뿐 아니라 사람은 서로 하나 될 때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내 남편에게 대하는 것, 내가 내 아내에게 대하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긴장이 풀려갈 수록 더욱 함부로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아내나 남편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그런 행동들 말입니다. 그리고는 혼자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에 차마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기 힘이 듭니다. 그저 서로 눈빛만 보고 확인할 뿐이지요. 그래서 ‘에구..이 웬수야..’하면서도 “정”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자식들도 있고 하니 말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 이 모든 걸 씻기도 하고 말이지요.


   다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는 의식적인 내가 일종의 가면을 쓰고(페르조나) 이뤄 집니다. 그러나 배우자에게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솔직한 부분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의식적인 내가 아닌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있는 내 모습으로써 나조차 몰랐던 솔직한 내 모습이 발현된 것이지요.


  또 한편 내가 모르는 세계와 사고방식을 아내와 남편에게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보며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배움을 얻게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내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구나..’ 이러면서 말이지요.


  결국 아내나 남편은 내 자신을 더 솔직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가장 가까운 거울이라 이런 이치인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더 알아가며 인격을 더욱 성숙히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쉬운 일상의 예만 보아도 우리는 사람이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세계는 반쪽짜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함께 할 때 더욱 온전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태초부터 인간은 평등할 수밖에 없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WCC1)에서는 이미 오래 전 이런 내용을 신앙고백하며 문서화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벌써 몇 십년전 얘기이군요. 하지만 한국 교회는 아직도 이런 흐름을 잡지 못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성도님께서도 WCC라는 얘기나 아래 각주에 달아 놓은 얘기는 아마 처음 보실 겁니다. 교회에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내용이니 말이지요.


  아무튼 이것이 최신 경향이자 고백입니다. 물론 성경 속 세계를 보면 남녀관계가 완전히 평등했다 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운동 진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바울 사도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지요. ‘여자는 잠잠하라’등의 내용이 주된 그 타켓이구요.


  예, 그분들 말씀이 맞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남성 신학자나 목회자 위주의 신학계나 교계에서 경청해야할 부분도 많습니다. 저는 또 그래야만 우리가 더욱 온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은 당시대에서는 보기 힘든 보다 평등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방향을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렴 최첨단 과학과 고도의 교육수준을 보이는 요즘도 온전한 남녀간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데 몇 천년 몇 백년 전 세계에서 어찌 완전함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경향과 중심을 보고 이야기를 함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여러분께서 보기 쉽게 남녀평등이라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이 말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녀평등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남자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네 습성이 배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양성평등”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양성평등이란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교육의 확장과 민주의식의 내면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성의 경제적 안정의 기회확보는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켰습니다
2).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첨가하는 분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정부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축을 차지하기까지는 아니라고 보는 편입니다. 그만큼 보수적인 가르침이 지속되어 온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역사적 흐름에 따라 여성의 권익을 찾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 많았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페미니즘”이라 하곤 합니다. 이 페미니즘도 다양한 흐름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다 다루기 힘든 측면이 있군요.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에 관한 좋은 책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는 꼭 남성분들께서 보시기를 권합니다-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가서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네 사람을 만드신 첫 모습과 성경이 꾸준히 증언하는 남성과 여성-여성과 남성의 관계입니다.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양성평등의 개념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챤은 더욱 그렇습니다. 특별히 가사와 육아 문제 등은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남성들이 더욱 아내를 위해 열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명절에도 그렇구요. 반대로 여성들 역시 남편의 작은 변화와 노력에 많은 칭찬과 격려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2-30년간 살아오던 방식을 바꿔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최근에는 여성의 권익이 많이 신장된 나머지 남자들이 오히려 더 위축되어 있다는 말까지도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서로 싸움닭처럼 고개를 쳐들 필요도 없고 서로 내가 희생당하고 있다고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거지요. 이렇게 서로 돕고 협력해가며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런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협력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 꼭 뭘 완전히 잘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멘?



1)  이 모임은 교단과 카톨릭, 개신교 등을 총 망라한 초단위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모이는 곳이지요. 그래서 세계의 여러 문제에 대한 신앙고백과 선언을 하며 책임있는 사회의 일원이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는 곳입니다.


2) 과거 남성에게만 국한되어왔던 기초 교육 및 고급 교육이 여성에게 확대되며 여성계 내부에서 스스로의 권리와 위치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의 선거권 확보 등의 기본적 권리찾기 운동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산업화와 함께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여성이 더 이상 남성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어 졌습니다. 이른바 ‘화려한 싱글“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성과학의 발달은 여성이 임신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지요. (이것의 좋고 나쁨은 둘째로 하고요) 이런 역사적 흐름은 최근의 양성평등 개념과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며 상당히 보수적인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 법무부 장관이나 총리가 나오는 지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니다. 물론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 얘기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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