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2.13 한국 교회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 23
  2. 2008.12.03 노스트라 다무스와 예수의 예언
  3. 2007.11.08 기도 이야기


본질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

저는 개신교인이지만 카톨릭의 성인들이 지닌 삶의 자세와 신앙을 존중합니다. 그 중에는 성 발렌티노도 있는 데요. 성 발렌티노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보던 성자라 불리던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를 기념하며 나눔을 실천하게 되었는 데, 그것이 바로 발렌타인 데이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초컬릿 회사의 상술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말 성 발렌티노가 알면 가슴을 칠일입니다.

저는 교회도 그렇다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질이라 함은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던 바로 그 정신을 얘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 글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비교하며 정치, 경제적 측면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가판을 뒤엎었는가

예수는 자신이 직접 교회를 세운 적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철저히 저항하고, 거부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그 고유한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1.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 물자, 돈, 권력이 집중된 곳이었는 데요. 먼저 예를 들어 희생제물용 짐승 판매를 보면요. 이것은 성전 광장에서 활발히 이뤄지곤 했었는 데요,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이러한 가축 판매는 대제사장 가문의 소유였었습니다또한 성전세를 보면요. 모든 유대인은 반드시 지불해야할 것이 바로 성전세인데요. 매년 반세겔 이상을 내야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것 역시 고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하여 관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자금은 바로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에 의해 관리되는 데요. 이는 결국 제사장 귀족들의 정규적인 수입 및 독점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남아 도는 돈으로 오늘날의 은행 같은 역할까지 수행하게에 이르렀습니다. 

한번 돈 맛을 보니까 끊임없이 세를 강요하고, 이것은 결국 자기 가문끼리 나눠먹고 말이죠..


2.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시키고, 이러한 차별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였습니다. 또한 성전체제 지배자들의 정치 권력의 지지기반이었구요.

이 때,
 영악했던 로마는 바로 이 체제와 권위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위시한 제사장 귀족들을 통하여 팔레스틴 내에서 로마 제국의 식민체제를 한결 수월하게 굳히는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가난하고, 억압받는 유대백성의 자리가 아닌 국가권력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왔다는 것입니다.

3.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믿는다 하여 같은 민족끼리도 싸우고, 잡고, 죽이고..

자, 상황이 이러하니 예수는 성전을
비판하고, 뒤엎을 수 밖에 없었지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물신을 섬기는 것에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때문에 수많은 가난한 유대 민중들이 억압과 착취를 당했기에 예수에게는 매우 중차대 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곳은 기도하는 곳이라 일갈하였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비판 받는 몇 가지 사례

오늘날 교회가 비판 받는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과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해보기 위해서입니다.

1.먼저, 돈과 교회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일단 딱 떠오르는 것이 "헌금강요"이지요. 물론 교회에서는 "강요"란 표현을 싫어합니다만 설교 시간 내내 헌금얘기를 하니 강요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특히, 그 항목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요..


여기서 잠깐 기복신앙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대개 헌금 기도할 때 보면 물질로 더 채워달라 합니다. 십일조 더 많이 내게 해달라 하지요. 그리고는 물질을 많이 내놓으면 이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건지 풍요의 신 맘몬을 믿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되지요. 하나님이 거지인가요.

2.두번째로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때론 국민과 국가가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중재자가 되어야지요. 때로 권력이 자신을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면(독재시절과 같이) 교회는 국민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 때 사탄의 무리 운운한 것이 누구였나요. 지금 용산참사를 보며 발목 잡는다 하는 건 또 누구인가요. 예, 다 기독교인지요. 

관련글을 옆에 링크해두오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

3.그 밖에교회가 사교판이 되고, 부자가 교회세습 하는 것, 교회 사고팔기나 신도 갈취 문제, 끊임 없는 싸움과 분열 등도 있지만 너무 길어질 듯 하니 더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보고, 일부의 문제를 다수일반화 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예,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가 말하는 것은 분명 존재했던 "FACT" 이고, 현재 한국 교회는 이것때문에 매우 많이 그것도 아주 심하게 비판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며

오늘날 한국 교회와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별로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교회에 돈이 모이고, 권력과 결탁해가는 것, 사교판이 되며 끊임 없이 싸우고 분열해가는 것 등까지 너무도 비슷해 보입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한국 교회 변해야 합니다. 신도 늘리기, 큰 교회 건물 올리기, 국민에게 사탄 운운하기, 타 종교와 갈등일으키기, 자기들끼리 싸우다 분열하기 등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가 목터지게 외치던 그 거룩한 곳은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내 몸을 치장하기보다 더 어려운 곳에 거하며 나눠주기를 즐겨하고, 이 나라와 민족 세상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곳.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 아무도 쓴소리 하지 못할때 분연히 나설 수 있는 그 곳.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따르는 그 곳. 뭐 이런 게 좀 더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가까운 모습..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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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제게 충격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최후의 대예언"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연구하는 무슨 단체에선가 발행한 것이었는 데요. 요지는 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모두 맞춰왔었고, 이제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으며, 이건 틀림이 없을 거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허나 이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지금 돌아보면 이들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팔아 이슈를 만들어 먹고 사는 뭐 그런 부류에 불과했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좀 다릅니다. 예언으로 먹고 살기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은 한문으로 미리 예자를 씁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 즉, 맡을 예자도 있습니다. 뭔가를 맡아서 얘기하는 거지요.
성경의 예언자는 그렇습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데,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받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어느 날 갑자기 영험하다 하는 산에 올라가 도를 닦다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1)일상에서 생활하며 당시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내면의 영혼을 복합적으로 볼 줄 아는 고도의 학식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2)동시에 하나님께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 있는 매우 예민한 영성을 갖춘 자였고, 오직 3)말씀에 따른 정도가 아니면 죽음도 불사하는 곧은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는 당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 내면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뜻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곧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언은 먼저 주제 선포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흔히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심령의 회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라는 얘기인 거지요.

즉, 예수는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사람을 신분과 성별 부유함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고, 권력으로 약자를 억누르며, 강자 즉, 기득권 층이 약자 즉,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이로 인해 타락한 영혼과 상처 받고 절망한 심지어 귀신마저 들려버리는 영혼을 보면서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로 천국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 하나님 나라이지요.

왜 우리 나라는 항상 죽은 다음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땅의 삶을 살면서는 천국의 삶을 살려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어야 하고,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럴 수 있도록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친절하고, 사랑해서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됩니다. 추락할 만큼 추락한 도덕성을 갖고 서는 하나님의 "하"자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언자였던 예수는 크리스챤에게 참으로 힘든 요구 즉, 예언자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냥 편히 교회 출석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맘에 늘 깨어있으라 명을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뭔가 다른 거룩한 삶을 살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곧은 의지를 전하며, 생명의 삶을 살 것을, 평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뒷일을 책임져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은 지금처럼 너무 교인늘리기나 분점 내기에 열중하기보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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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2 Posted by 바람몰이

 

기왕에 말이 나온김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도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더욱 성경이 계시해주는 하나님은 물론 내 자신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의 가장 모범이신 예수님을 보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거나 어떤 결정을 하실 때도 항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시되 정확하고 똑바르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의 끝에서 내 뜻을 이루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뤄 달라 기도하며 주의 뜻을 들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일단 말이 많습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 지 침이 튀어 바닥을 적실 정도입니다. 또 쉬지도 않고 몇 시간씩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어 목소리가 쉰 상태로 정서가 순화됨을 느끼고 만족함을 느끼며 기도를 마치고 일어납니다. 도대체 언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만 해대는 게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고 위안을 얻는 것이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내가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언을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방언은 믿음이 좋다 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님들을 합니다. 그래서 은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어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통변”이라고 해서 방언을 해석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이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성경 사도행전까지 말하는 방언은 한마디로 “외국어”입니다. 각 지방과 나라의 언어란 말입니다. 언어가 통하는 게 방언이고 이것은 구약시대 바벨탑 사건에서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모이는 사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속에 인간의 사고가 있고, 인간의 사고는 언어활동과 함께 이뤄진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신 것은 만남과 하나 됨의 인간관계 속에 있는 영혼의 교류를 흩으신 게 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하게 하신 것은 다시금 그 교류의 통로를 열어주신 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고린도 전서 14장은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혼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방언만 해대다 교회가 분열되기 보다는 모두 똑바로 알아듣는 예언이 더 낫다는 후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방언 만마디 보다는 알아듣는 기도 다섯마디가 낫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도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방언을 아무리 해대도 교회가 하나 되거나 우리 사회가 변하는 역사가 없습니다. 심지어 방언을 잘 하는 분일 수록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방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방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4장을 정독해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방언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하더군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 다구요..

  기도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되게 해달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잘되게 해달라 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 합니다. 물질생활에 부족함 없이 축복해 달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문제인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온 몸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치셨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구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됨과 동시에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이가 잘 되게 해달라 해야 하며 셋째로 머리가 되어도 교만치 않도록 도와달라 하거나 남들이 싫어하는 꼬리가 되어 더욱 섬길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합니다. 끝으로 물질생활에 부족함이 없게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을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방법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수많은 위인들은 모두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이 말씀에 의해 깨지고, 쪼개지며 변화했고 눈물로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중요한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일종의 경고 표시인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고운 님이여!!

  지금 이 순간 잠시 책을 덮으시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깨닫고, 주님의 뜻을 발견했다면 이 책을 안보고 버리셔도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주의 뜻을 전할 뿐인 종에 불과하구요.


  만약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찾아와 감동을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 순간 주님 앞에 불려 간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작은 열매를 맺으셨고, 저는 그 사명을 감당한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희망을 갖고 아름다운 씨앗을 또한 뿌리고 키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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