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이 있는 한 한반도의 평화는 없다

[시사]세상살이 2010. 11. 25. 01:24 Posted by 바람몰이


연평도 포격사건은 그 자체가 충격입니다. 그 전에도 국지도발이 있어 왔지요. 하지만 최근 남북관계가 조금씩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례없는 민가에 대한 육상포격은 더욱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타서 한반도에 전술 핵무기를 재배치하겠다는 움직임이 탄력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물론 미국은 배치계획이 없다 했지만 우리네 여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웹 검색을 해보니 트위터를 비롯 여기저기서 전술핵무기 배치에 관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 모 포털에서 진행하는 투표에서는 전술핵무기 배치 찬성의견이 압도적입니다. 이를 통해 핵억지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말이 계속 나오는 전술핵무기란 무엇일까요. 흔히 우리는 전략 핵무기와 전술핵무기를 혼동하곤 합니다. 전술핵무기란 기존의 전략 핵무기와 폭발 강도나 범위면에서 차이가 나고, 이동이 용이하다는 큰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반경 1-2km 안에만 폭발을 일으킨다 하지요. 또한 크기가 크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하여 핵무기가 아닌 것은 아니지요.

물론 혹자는 우리가 더 강한 핵억지력을 갖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씀을 합니다. 이른바 '핵무기 평화유지론'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한쪽이 공격했을 때 동시에 대응해도 공멸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호 공멸할 수 밖에 없는 핵전력의 보유는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으로 선택의 옵션이 되기 힘듭니다

또한 핵억지력을 갖기 위해서는 상호 비슷한 위력의 핵전력을 보유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술 핵무기로 북한의 전략 핵무기를 억제하겠다는 건 상식적으로 그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 핵억지력을 보유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해야한다면 우리 역시 전략 핵무기를 배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운 내용이지요.

셋째로 남북한에 핵무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한반도 평화의 위협입니다. 북한의 주장은 늘 자기 중심적입니다. 물론 모든 나라가 그렇겠지만 북한은 특유의 자존심과 고립으로 인한 '독기'가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 우리가 전술 핵무기 배치를 하겠다하면 자신들의 핵개발을 다시 한번 정당화 할 것 입니다. 안보를 위한 자위적 행위로 핵 억지력을 보유하겠다며 남북간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남북만이 아니라 동북 아시아의 권력 구도의 문제이지요. 원칙적으로 일본은 군 전력 보유가 안 되지만 이미 그들의 전력은 세계적 수준으로 호시탐탐 전력 증강과 핵개발을 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핵 보유는 일본의 군비증강과 핵개발의 주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비슷한 논리를 개발할 것 이겠지요. 일본의 군비증강과 주한 미군의 핵보유는 중국과 러시아의 직접적 위협으로 간주되며 자신들의 대북한 지원과 전력증강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을 것입니다.

끝으로 본래 핵무기란 미사일이나 포탄과는 다른 성질의 투하지역의 모든 생명의 뿌리 그 자체를 제거하며 그 피해를 대에 대를 이어가게 하며 동시에 전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최악의 무기입니다. 우리마저도 이 같은 옵션을 선택한다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칼로 흥한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는 격언을 기억해야 하지요.


따라서 평화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반도 자체와 동북 아시아의 긴장만을 야기시킵니다. 가만보면 자신의 안위를 지키겠다고 총기 보유를 허용한 나라일 수록 총기사고가 많지요. 서로 칼을 들고 있으면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보다 다툼 후 상처를 입을 확률이 더욱 높아지고, 서로를 불신할 수 밖에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한반도는 핵무기가 없어야 합니다. 핵무기가 지배하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북한의 이런 만행에 분노를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우리 나라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겠다는 움직임이나 여론에는 반대할 것입니다. 오히려 한반도와 내 가족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연평도의 피해자 구호와 복구에 힘쓰고, 대응체계를 수정하는 게 우선입니다. 전술 핵무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라 꼬일대로 꼬여버린 북미관계의 물꼬를 트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이 글을 잘 읽으셨으면 추천 한방 눌러주세요~


,

치킨과 성찰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9. 11. 16. 17:14 Posted by 바람몰이

어제 오랜만에 치킨 한마리를 먹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 돈 내고 사먹은 건 아니구요 ㅡ.ㅡ;;; 처형이 한마리 사주셔서 저희 가족이 먹게 된 것이었습니다. 딸아이가 워낙 좋아하다보니 늦은 시간임에도 방방 뛰더라구요.

온 가족이 모여 앉으니 딸아이가 '아빠~아빠도 이거 먹어~' 라며 날개를 집어 주더라구요. 속으로 '하하, 이 녀석 다컸네~' 싶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딸아이가 자신이 먹던 치킨 조각을 내려 놓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제 다 먹었으니 다른 걸 먹겠다 합니다.

당연히 저는 '건희야, 아직 많이 남았네~다 먹고 다른 거 먹어' 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이 녀석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에요. 건희, 다 먹었어요~' 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 건희 아빠 먹는 거 보세요~' 라며 뼈있는 데까지 깨끗하게 발라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후후, 이 녀석. 그 때야 고기를 깨끗하게 먹어야 하는 걸 알았나 봅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엄마나 제가 발라주곤 했던 탓에 배우질 못했던 거지요.

문득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네 삶도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저도 고기의 겉만 먹고, 속을 볼 줄 모르던 딸아이처럼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현상만 보고 그 이면에 담긴 함의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지요.

이번 한주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은 물론 스스로의 내면을 한번 더 살펴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님들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평화!


,


중학교 시절 제게 충격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최후의 대예언"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연구하는 무슨 단체에선가 발행한 것이었는 데요. 요지는 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모두 맞춰왔었고, 이제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으며, 이건 틀림이 없을 거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허나 이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지금 돌아보면 이들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팔아 이슈를 만들어 먹고 사는 뭐 그런 부류에 불과했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좀 다릅니다. 예언으로 먹고 살기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은 한문으로 미리 예자를 씁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 즉, 맡을 예자도 있습니다. 뭔가를 맡아서 얘기하는 거지요.
성경의 예언자는 그렇습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데,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받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어느 날 갑자기 영험하다 하는 산에 올라가 도를 닦다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1)일상에서 생활하며 당시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내면의 영혼을 복합적으로 볼 줄 아는 고도의 학식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2)동시에 하나님께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 있는 매우 예민한 영성을 갖춘 자였고, 오직 3)말씀에 따른 정도가 아니면 죽음도 불사하는 곧은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는 당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 내면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뜻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곧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언은 먼저 주제 선포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흔히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심령의 회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라는 얘기인 거지요.

즉, 예수는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사람을 신분과 성별 부유함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고, 권력으로 약자를 억누르며, 강자 즉, 기득권 층이 약자 즉,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이로 인해 타락한 영혼과 상처 받고 절망한 심지어 귀신마저 들려버리는 영혼을 보면서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로 천국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 하나님 나라이지요.

왜 우리 나라는 항상 죽은 다음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땅의 삶을 살면서는 천국의 삶을 살려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어야 하고,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럴 수 있도록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친절하고, 사랑해서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됩니다. 추락할 만큼 추락한 도덕성을 갖고 서는 하나님의 "하"자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언자였던 예수는 크리스챤에게 참으로 힘든 요구 즉, 예언자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냥 편히 교회 출석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맘에 늘 깨어있으라 명을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뭔가 다른 거룩한 삶을 살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곧은 의지를 전하며, 생명의 삶을 살 것을, 평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뒷일을 책임져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은 지금처럼 너무 교인늘리기나 분점 내기에 열중하기보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3:50 Posted by 바람몰이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런데 예수가 만드는 평화는 흔히 말하는 현실의 삶을 무시한 내면이나 내세의 평화라기 보다 좀 더 적극적 의미를 품은 분명한 현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예수는 온 몸을 투신해서 평화를 선포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적극적 개념의 평화를 갖고 있던 예수
먼저 예수는 구약 성경의 샬롬 신앙을 갖고 있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샬롬" 이란 직역하면 평화를 말하는 것인 데,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쟁반대' 구호로 대변되는 전쟁부재, 개인 내면의 평화 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의 개념입니다. 즉, 전쟁부재 상황을 유지하는 보존 활동과 질적으로 다른 '평화 부재의 상황에서 작업을 통해 비로소 평화를 이룩해내는 창조 활동'을 말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평화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
예수의 이러한 평화는 예언자 이사야가 정의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야기 하고, 시편 기자가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이야기 했듯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정의를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렘22:3). 또한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생명을 구원하고, 도움이 없는 자를 건지고,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라 합니다. (시72:4)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고, 제왕들을 왕자에서 끌어 내리며, 낮은 사람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 정의가 없고, 착취와 부정, 거짓, 파괴, 양극화 만이 계속되는 예루살렘을 보며
평화가 없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강팍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이 보여 너무 가슴이 아프니 말입니다. 또한 이런 맥락 위에서 예루살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도 선포하고 하는 거지요.


정리 하는 글 : 우리 사회를 보면서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지금 이 사회를 본다면 또 다시 두번째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서민을 위한다 말은 하지만 정작 서민 눈에는 부자를 위한 정책 밖에 보이지 않고. 경제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양극화는 계속 심화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보다 냉혹한 입시의 경쟁에 빠져야만 하지요. 대북 관계는 지금 죽어가는 수만의 어린이와 동포를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갈 수록 더 늘어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루살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어려운 세상에 대형 교회 목회자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 타 있고, 교회는 세습의 대상이 되며, 낮은 자세로 섬기지는 못할 망정 은행 VIP나 되고 말이죠. 사회적으로는 일개 시민단체보다 도덕성이 낮다 평가 받고 있습니다. 종교간 화해와 사회 통합에 기여는 못할 망정 오히려 대립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행위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전하려 했던 그 복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향하던 가치와 노력을 받아 올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발걸음을 쫓아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참된 공동체가 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섬기며 화해의 사도가 되는 십자가를 충분히 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1) 바로가기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가기

,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2-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8. 11. 25. 22:07 Posted by 바람몰이


전통적인 해석의 한계

예수가 두번째로 눈물 흘린 것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이 부분을 예루살렘이 망할 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가 비통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가 그 뒤에 말하는 평화에 대한 이해, 당시 예루살렘과 예수의 관계 등이 적절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 한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수가 의도하는 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선명하게 대조하고, 실제 예수는 그 첫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해 예루살렘을 최종 종착지로 삼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예수와 대립관계에 있게 된 핵심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갖고 있던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말이 성전이지 사실상 성전이라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 했고, 이런 차별을 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각 종 세금을 비롯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토지 수입 등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오늘날의 은행같은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당연히 성전의 주요 관리자인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성전 경비대장, 성전 창고 관리인 등)은 정규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고, 많은 토지, 금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통로로 변질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예수의 눈에는 갈릴리나 베다니 같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곳과 이들을 끊임 없이 죄인이라 규정하고, 수탈하는 예루살렘이 강도의 소굴로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대립관계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것만 해도 벌써 통탄을 금할 수 없을 예수였던 거지요.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리게 된 근본적 이유
그런데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이미 위의 이유도 충분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평화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활동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 에 있다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라는 건 죽은 후 떠나가는 "저 세계" 라기 보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이미 도래한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사역지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언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이는 로마의 군사력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수많은 서민들의 피와 땀, 한과 눈물이 맺힌 로마의 거짓 평화에 대한 분명한 파산 선고였습니다. 마치 새벽 닭 울음소리로 어둠이 아닌 새벽이 선포되듯 말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과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뜨임을, 눌린 사람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라 기술합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냈다 이야기 합니다.

즉,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바로 "평화"의 선포이자 도래였다는 겁니다. 
2-2 편에 계속 됩니다(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예수는 왜 눈물을 흘렸나 (1)편 바로 가기

,
BLOG main image
하늘바람몰이
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by 바람몰이

카테고리

큰 머리 제목 (1160)
[성교육] 학교 교육용 영상 (0)
[LIFE]이 남자의 인생 (193)
[LIFE]몸짱 프로젝트 (21)
[LIFE]여유와 지혜의 장 (63)
[LIFE]육아 이야기 (3)
[교육]자녀교육 한마당 (73)
[안전] 안전교육 (49)
[안전] 응급처치 (18)
[성교육]생생 강의현장 (37)
[성교육]성교육 이야기 (177)
[성교육]낯설게 바라보기 (79)
[문화]방송,영화,격투기 (102)
[문화]신바람 자동차 (78)
[문화]블로그 인생 (24)
[기독교]하늘바람몰이 (87)
[기독교]변해야 산다 (35)
[경제]주식투자종목분석 (23)
[시사]세상살이 (82)
리뷰 아르바이트 (7)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NM Media textcube get rss
바람몰이's Blog is powered by Tistory.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