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위대합니다. 제 자신을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10년전 제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천지차이입니다. 이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힘이 들었습니다. 결혼생활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명했던 모 아나운서도 그러더군요.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이혼 할 수 밖에 없었다구요.

예, 저도 그랬습니다. 오늘 저는 제가 파경에 이를 뻔했던 대표적인 이유를 열거하고, 이에 대한 경험을 나누며 글을 전개해 가고자 합니다. 기왕에 어려운 경험을 꺼낸만큼 이 글이 여러 예비 부부와 신혼부부, 20대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1.경제적 어려움

물론 아내는 괜찮다 하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사실 저희는 신학 공부를 하며 우리의 모든 삶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바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출산 후 가장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된 제 입장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아이의 내복 한벌조차 쉽게 사줄 수 없고, 끊임 없이 은행과 대부업체로부터 독촉 전화를 받는 건 사람의 피를 말리게 하였습니다.

점점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늘 쫓기며 사는 기분이었습니다. 신경이 예민해졌고, 별것도 아닌 일에 쉽사리 화를 냈습니다. 사실 지금 돌아보면 별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고, 아내도 괜찮았는 데 당시 저로서는 제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너무도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2.고부간의 갈등

이건 끝이 없는 싸움입니다. 사실 저와 아내는 앞서 잠시 언급했듯 같은 공부를 하였고, 인생관이 비슷합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입장이 같습니다. 연애시절부터 워낙 오랜 기간 대화를 하며 준비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부간의 문제는 달랐습니다. 특히,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아닌 시할머니와 손주 며느리의 관계는 여간해서는 극복하기 힘듭니다.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벼라별 작은 사소한 일까지 모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할머니께 가서는 할머니께 화를 내고, 아내에게 가서는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사실 고부간의 문제를 중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건 정말 시간이 지나거나 누군가 하나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할머니께 가면 할머니 편을 들고, 아내에게 오면 아내편을 들면서 하나씩 풀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방법은 의외로 효과적이니 반드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3.신뢰의 문제

상황이 이러다보니 저와 아내의 관계는 극에 달했습니다. 아내와의 다툼이 늘어나며 제가 집을 나가기도 하고, 아내가 집을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마침 아내가 모교에 교직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딸아이와 함께 원룸을 구해 나갔지요. 

경제적으로는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저는 매우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제 자신의 무능력이 이 모든 상황을 야기시켰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는 저만의 문제도 아니고 제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쓸데없는 공명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또 많은 남성이 이런 느낌에서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아무튼 당시 제 아내도 많이 힘들었다 얘기합니다. 제 눈에는 어린 여대생들과  잘 지내며 새옷도 사고, 멋지게 하고 다니는 것 같아 얄미웠습니다. 표정도 더 밝아보였더랬지요. 하지만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어린 딸아이가 자는 걸 보면서 하루도 눈물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합니다. 너무도 우울했다 하지요. 아내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제가 너무도 야속했다 합니다. 앞서 1번에서 언급했던 아내의 말은 바로 이걸 의미했던 것이지요. 우리 부부의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신뢰"에 있었던 것이지요.

4.성평등 의식의 문제

이 문제는 사실 저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만 꼭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제 주변은 물론 수많은 부부가 이 문제로 매우 힘들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 서로에 대한 기대나 고마움은 커녕 '웬수'가 되어버리는 게 현실이란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그렇게 잘 해주던 여친 또는 남친이 결혼과 함께 돌변하는 걸 보며 당황 또는 실망하는 경우는 결혼 10년차까지도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일반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교육을 나가 만나는 수많은 1-20대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배우자에 대한 기대는 다른 얘기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또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즉, 이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학습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란 것입니다. 저는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 또는 신혼 부부는 반드시 이 부분을 사전에 많은 대화를 통해 맞춰나가고, 습관을 바꿔나가며, 꼭 함께 공부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5.기타

이 밖에도 부부관계(잠자리)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까지는 아닙니다. 결혼 생활은 말 그대로 혼을 맺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 조사를 보면 성관계의 지속시간이나 스킬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부부간의 관계라 합니다. 말초적인 성적 쾌락은 사실 여러 방식을 통해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라는 건 쾌락 이상의 정신적 차원이 존재하는 문제이지요.
 
정리하며

대학원 다니고 있어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할머님과의 관계나 아내와의 관계는 매우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작은 것마저도 고마워하되 내가 해준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기준치'의 변화와 이에 따른 '신뢰의 회복'에 비결이 있었습니다.

예, 저는 오랜 결혼생활을 하거나 긴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의 핵심이 바로 '신뢰'라고 생각 됩니다. 그런데 이 신뢰는 그냥 믿는다는 말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많은 매우 "의식적인 노력""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점을 결론으로 삼고, 독자님의 가정과 미래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하며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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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과 성찰

[LIFE]여유와 지혜의 장 2009. 11. 16. 17:14 Posted by 바람몰이

어제 오랜만에 치킨 한마리를 먹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 돈 내고 사먹은 건 아니구요 ㅡ.ㅡ;;; 처형이 한마리 사주셔서 저희 가족이 먹게 된 것이었습니다. 딸아이가 워낙 좋아하다보니 늦은 시간임에도 방방 뛰더라구요.

온 가족이 모여 앉으니 딸아이가 '아빠~아빠도 이거 먹어~' 라며 날개를 집어 주더라구요. 속으로 '하하, 이 녀석 다컸네~' 싶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딸아이가 자신이 먹던 치킨 조각을 내려 놓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제 다 먹었으니 다른 걸 먹겠다 합니다.

당연히 저는 '건희야, 아직 많이 남았네~다 먹고 다른 거 먹어' 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이 녀석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에요. 건희, 다 먹었어요~' 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 건희 아빠 먹는 거 보세요~' 라며 뼈있는 데까지 깨끗하게 발라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후후, 이 녀석. 그 때야 고기를 깨끗하게 먹어야 하는 걸 알았나 봅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엄마나 제가 발라주곤 했던 탓에 배우질 못했던 거지요.

문득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네 삶도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저도 고기의 겉만 먹고, 속을 볼 줄 모르던 딸아이처럼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현상만 보고 그 이면에 담긴 함의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지요.

이번 한주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은 물론 스스로의 내면을 한번 더 살펴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님들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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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과실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해자 과실 100%, 둘째는 쌍방과실(과실비율은 다름), 셋째는 내가 과실 100% 일때 입니다. 대개 중과실 사고가 아닌 이상 첫째와 셋째보다는 두번째 경우가 많지요. 과실비율만 다를 뿐 대부분 다 쌍방과실이란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가 있습니다. 바로 내게 오는 분노 흥분이 그렇습니다.

가령 한 여름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쳐봅시다. 우리는 갑작스런 비를 맞으며 "아~오늘 되게 재수 없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욕하거나 땅에 침을 뱉지요. 하지만 돌아보면 하늘은 하늘의 일을 한거고, 문제는 이를 흥분하며 반응한 내게 있습니다. 괜히 아무 죄 없는 땅은 침을 맞게 된 것이고 말이지요. 

또 다른 예로 옆집에서 너무 시끄럽게 한다 쳐봅시다. 도저히 쉬지 못하고, 잠을 못 잘 정도로 시끄럽다 해봅시다. 자, 그러면 이 때 괴로운 건 누구입니까?  잘못은 저 시끄러운 사람이 하고 있는 데, 정작 피해를 당하는 내가 괴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끄럽다" 는 사실에 "괴롭고, 짜증난다" 는 내 느낌이 내 마음을 놓치게 한 것입니다.

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 때문에 흥분이 일어날까요? 과연 이게 꼭 상대방이 잘못해서일까요? 아니지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설사 상대가 문제를 일으켰다해도 내가 여기에 장단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해를 주는 행위 즉, 사실이 있었다면 이 사실을 사실적으로 풀지 못하고, 내 느낌이 이에 반응하며 흥분하고,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데 누명을 쓰거나 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나는 이 억울한 감정으로 계속 힘들어해야하는 걸까요. 잘못한 사람은 저기 있는 데, 왜 내가 고생해야하는 걸까요.

내 마음의 흐름을 잘 잡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을 보며 내 마음의 흐름을 잡아야 괜히 억울하게 분노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아예 상대나 사건에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피하고, 도망치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내 마음을 놓치고, 분노하며 흥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사실로써 인식하여 사실로써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고 정신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여유 없고, 정신 없이 몰아치기 때문에 여유가 없고,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바쁘면 좀 더 빠르게 일처리를 해가야지 정신 없어 한다고 일이 빨리 해결되진 않습니다. 사실과 감정의 구분은 마음을 잡아가는 훈련의 첫걸음입니다.

오늘 이 글이 독자님의 삶을 더욱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평안한 휴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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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싸늘함을 느껴 집안의 모든 창문을 닫았습니다. 할머님도 그렇고 딸아이도 춥다 합니다. 비가 온 탓이겠지요. 아~확실히 문을 닫고 나니 금방 집안 온도가 올라갔습니다. 바닥에 살짝 불을 넣어두니 더욱 좋았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밤을 까먹기도 하고 TV를 보며 수다를 떨기도 했던 평온한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답답함이 느껴졌습니다. 몸이 좀 더워지기도 하고 공기 자체가 텁텁하게 느껴졌습니다. 새집인 탓이겠지요. 또한 공기가 너무 더워진 탓인 것 같았습니다. 이젠 하나둘 창문을 좀 열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문을 살짝 열었습니다. 아~어찌나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던 지요. 조금전만해도 비 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는 데, 이젠 비 냄새가 너무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빗방울이 제법 운치 있게 느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문득 우리가 사는 인생이 참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삶을 나 하나의 세계로 국한시켜버리면 당장은 좋고, 편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삶은 쉽게 고독을 거쳐 우울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지요. 반면 마음의 문을 살짝만 열어주면 교류를 통해 좀 더 상쾌하고, 시원한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탁한 공기도 있고, 먼지가 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래도 아예 환기를 안하는 것보다 한번씩 창문을 열어주는 게 좋다 합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요. 때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르시즘이나 이기적인 삶에 빠지는 것보다는 서로 한번쯤 싸우더라도 정을 나누며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늘 저녁 저희 집은 귀뚜라미가 울고 있습니다. 

저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은 없나...

또 내가 용서 못하고 단절된 관계는 없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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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분 정도 늦게 일어났습니다. 확실히 조금 늦게 일어나니 벌써 마음이 조급해지게 됩니다. 엑셀레이터를 좀 더 거칠게 밟으며 새벽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이렇게 가나 규정속도를 지키며 가나 거기서 거기임을 상기하며 다시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아, 결국 2-3분 정도 늦게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제 마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여유로웠습니다. 훨씬 어깨가 가볍고 출발할 때보다 느리게 가는 데 더 경쾌하게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상행길보다 10분정도 더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습니다. 하하, 그러나 집에 도착한 저는 여전히 여유로웠습니다.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겠지요. 스스로 제 자신을 급하게 몰아갔기 때문에 생긴 부담입니다.  결국 저는 5분 늦게 일어나도 2-3분 밖에 안 늦었고, 과속을 하며 달렸어도 빨라야 2-3분이었을 텐데 이 작은 차이 때문에 마음의 중심을 놓치고 평정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속박하며 몰아가던 것을 버리고 나니 하행길은 이렇게나 여유로왔단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삶의 환경과 다른 사람 등으로 인해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여깁니다. 항상 "탓"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하며 숨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하나님이 부르시지요. 그리고는 몇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때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참 재밌습니다. 서로 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탓"을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결국 나 자신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역시 나 스스로 입니다. 내가 내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잡고, 소화하느냐가 내 삶의 여유를 만들기도 하고, 나를 늙어가게도 만듭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님은 지금 어떤 마음이신지요. 그 마음의 중심을 잘 다스리며 삶을 만들어가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그 마음에 여유가 깃들고, 평안함을 만들어가시는 복된 시간들 되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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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말마다 부천, 오산, 잠실을 왕복하곤 합니다. 특히, 요즘은 오산에서 잠실까지 매일 새벽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제 옆을 강한 소리를 내며 총알처럼 지나는 승용차를 보았습니다. 분노의 질주를 하는 이 차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왜 인생을 이렇게 빨리 살려 하는걸까..'

여기서 자동차의 연비 얘기 잠깐 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승용차 연비는 시속 80km 쯤에서 가장 좋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이 되면 점점 연비가 떨어지고, 특히 고속으로 넘어가면 급격히 연비가 나빠지게 됩니다. (관련글 : 내 차 연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요. 이렇게 빨리 달려도 결국 대부분은 그 다음 톨게이트나 신호등에서 다시 만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규정속도를 지키거나 일반적인 도로 흐름에 맞추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지요. 또 시간을 단축했다해도 10분 내외인 경우가 많더군요. 결국 연료를 많이 쓰고, 엔진과 여러 부품을 혹사하며 달려도 그만한 효율성을 내거나 만족도를 주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달리다보면 그 순간의 만족은 있을 수 있으나 그 종착역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 더 많은 돈을 벌고, 조금 더 빨리 앞서나간다해도 결국 누구나 늙게 되고, 죽음 앞에서 평등한 존재입니다.
 
너무 느리게 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굳이 이렇게 삭막하고, 차갑게 살 필요는 없겠지요. 다른 차량 사이를 파고들 듯 눈 앞의 만족을 위해 파고들며 사람 맘에 상처 줄 필요도 없을 겁니다. 서로 웃으며 얘기하고, 싸우면 다시 화해하고 또 다시 밥 한끼 먹으며 손을 맞잡는게 우리네 인생의 행복 아닐까요.

제 옆을 지나던 차량은 결국 톨게이트 앞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하이패스를 쓰고, 그 차는 쓰지 않았더군요..^._^;;
 
이 아침 이 글을 읽는 독자님과 저의 가슴에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바람몰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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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징기스칸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읽어 잠깐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유사이래 징기스칸만큼 영토를 확장한 왕이나 용장이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 군대를 이끌고 중국과 페르시아로 쳐들어갔고 많은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그의 용맹스런 행위에 대해 이야기 했고, 세상에 그와 같은 왕은 없었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런 징기스칸이 전쟁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와 있던 어느날 아침입니다. 그는 그날 하루동안 사냥을 즐기려고 숲으로 말을 달렸습니다. 많은 보좌관이 그와 함께 갔습니다. 징기스칸과 그의 사냥꾼들은 하루 종일 숲 속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많은 사냥감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날은 매우 무더운 데, 사냥은 이뤄지지 않고..징기스칸은 매우 힘이 들었고,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냥터를 해매던 중 어떤 바위 가장자리에서 물이 조금씩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징키스칸은 말에서 뛰어내려 물방울을 받으려고 작은 은컵을 바쳐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목이 말라 더 기다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징기스칸이 막 컵을 입에 대고 막 마시려는 순간, 그가 아끼던 매가 갑자기 컵을 쳐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 더 그의 컵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도 아끼던 매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이 마른 징기스칸은 아예 물이 떨어지는 곳을 따라 위로 올라가서 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샘을 찾은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샘속에는 독이 매우 강한 커다란 뱀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징기스칸은 갈증도 잊은 채 자기의 성급한 행동으로 가엾게 죽어버린 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우리네 삶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먹고 사는 것, 옷을 입는 것 등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정치인을 뽑을 때도 그냥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사람을 뽑습니다. 아이들도 성적의 굴레에 얽매여 자신들의 생명을 맘껏 펼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맙니다. 사람이 사는 게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니고 아이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게 성적이 전부가 아닐텐데 우리는 이것을 전부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재물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으며 공부를 잘 하면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즐기는 데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요. 재물이 많다하여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고, 공부를 더 잘한다 하여 반드시 인생을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던 정치인은 오히려 다른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며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무것도 못 배우고, 시장 한켠에서 김밥을 파시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인생의 깊이를 느끼고, 그 분의 기부를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성급함과 욕심을 아예 지워버리거나 버릴 수는 없습니다. 또 이것 없이 세상을 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허나 우리는 내 마음을 다스려가는 노력을 할 수 있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가치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런 노력과 실천이 인생의 행복과 여유를 만들어 주며 내 자신을 더 존귀하게 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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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딸아이가 저에게 부쩍 자주 혼나곤 합니다. 가장 많이 혼나는 주제는 "때찌" 하는 것인데요. 이 녀석이 어느 날부터 습관적으로 때리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어쩔 때는 깨물기도 하고 말이지요. 이런 건 어릴 적부터 잡아줘야하기에 제가 요즘 집중해서 교육 중 입니다.

"건희, 때찌하지 마세요. 이럴 땐 '아~예쁘다. 사랑해~'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네~사랑해요~"


그런데 딸아이를 지도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주로 "하지말라" 라는 얘기를 듣곤 하지요. 그러니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지 말라는 항목만 딱 지켜내면 됩니다. 그러면 모범학생, 착한 자녀가 되는 거지요.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 할 수록 우리는 "하지말라" 가 아닌 "하라" 또는 "해야한다" 를 듣게 되지요. 어른이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내 인생 속에서 져야할 책임의 분량을 잘 감당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스스로 뭔가 찾아 능동적으로 해내는 교육을 제대로 받은 건 아닌 데, 우리 사회는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로써 요구하는 것이 너무도 많으니 말입니다.

가끔 우리도 '너는 무어니 이렇게 해야만해' 가 아니라 '네가 이런 위치에서 이런 일을 잘 해주니 너무 고맙고, 소중하다' 는 식으로 기대치나 눈높이를 조금은 낮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편이니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가 아니라 '이렇게 수고해주어 고마워요' 라고, '주부이니 당연히 밥을 차려야지'가 아니라 '식사준비를 해주어 고마워요' 라고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높이를 살짝 낮추는 대신 내가 누군가를 돕고, 봉사하는 높이를 살짝 높여주는 삶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쯤은 내 가족과 배우자를 위해 나는 한번 더 봉사하고, 그들에겐 고맙다 인사해보는 건 어떨까요. 뭐든지 처음 하는 게 어렵지, 한번만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쉽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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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떻게 하면 힘차고, 재미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저는 이런 고민을 하며 참 단순한 계기를 통해 해법을 찾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늘 걸어다니며 출퇴근을 하면서였는데요. 단순히 시야만 바꿔도 그 삶이 변한다는 게 제가 터득한 작은 지혜였습니다.

걷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과 성향을 알 수 있지요. 팔을 경쾌하게 저으며 발을 끌지 않고 걷는 사람은 대개 긍정적이고, 밝은 삶의 자세를 갖곤 합니다. 이런 분들의 시야는 정면을 향하고, 대략 15도 정도 앞을 내다보며 걷곤 하더군요.

반대로 고개를 숙이고 발을 끌면서 다니는 사람은 뭔가 조금은 자신감이 없고, 기운 없어 보이곤 합니다. 이런 분들 특징이 항상 아프다는 소리나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구요. 늘 땅만 바라보며 걷곤 합니다. 그리고 꼭 땅만 보고 걸으면서도 먼저 넘어지곤 하더군요. 대화를 해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2.우리가 땅만 바라보고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사람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여유와 가치를 잃어버린채 먹고 사는 것과 물질에 붙잡혀 버린 삶. 기계화되고 합리적 이성만을 절대화 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삶 등으로 받아들입니다.

예, 이거 나쁘다는 거 아니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는 너무 여기에만 치우쳐 사니까 이건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자꾸 그러다보니 삶에 여유가 없어지고,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 이웃은 물론 가족끼리도 핏대를 세우는 삶이 되고 말았지요. 뭔가 이해해주려 하고, 양보하려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맙니다. 심지어는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마저 함부로 이용해버리고 마는 요즘이지요.

때론 한번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삶도 있지요. 크게 숨을 돌이켜보는 삶도 있고,  비논리적인 것 같아도 정이 있고, 사람 냄새가 나는 삶도 있습니다. 모두가 높은 곳에 오르려 할 때 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삶도 있고, 나보다 더 어려운 이와 손을 붙잡고 사는 삶도 있지요. 저는 이런 삶을 하늘바람을 들이마시며 이 땅에서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 여깁니다.


3.가만보면 어느 것이든 극단에 치우치면 늘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그 중간에서 어중간..해도 문제가 있더라구요. 결국 자기의 색깔은 있지만 나와 다른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에서 좋은 점을 내가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사람이 참 행복하고, 큰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이성적이려고만도 하지말고..너무 돈만 빠져 살지도 말고..또 그렇다고 세상모르게 '나혼자 행복해요..' 라고 살지도 말고. 내가 내 인생을 더 책임있게 사는 맑은 정신을 갖고, 조금은 큰 마음으로 인생을 받아들이며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예, 사실 말이 쉽지 참 어려운 얘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는 있지요. 저같은 사람은 종교를 갖고, 봉사를 하며 살지요. 또 어떤 분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취미를 갖기도 하구요. 어떤 분은 가족을 더 소중히 여기며 챙기고, 그런만큼 어려운 이웃을 챙기기도 하더군요. 

음.. 확실히 그냥 나혼자 삶의 타성에 젖어 사는 것 보다는 좀 나아보이지요? ^-^

행복한 주말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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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출근길에 할머님을 모셔다 드리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 신세인데요. 집근처 한방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당연히 치료도 전부 한방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오전에 침치료를 하고, 물리치료를 합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후 부황을 뜨고, 오후에 침치료를 한번 더하고 있습니다. 침을 참 많이 맞지요? ^.^

제가 을 하도 맞다보니 침에 대해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우선 몸이 긴장해서 힘이 들어가거나 굳어 있으면 침도 잘 안들어가고, 참 아프더군요. 자연스럽게 몸을 풀어주고,  편안하게 맞아야 아프지도 않고 효과도 볼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너무 목에 힘을 주면서 살면 오히려 힘이 더드는 삶이 바로 우리네 인생인 듯 하지요. 또 너무 바쁘게 긴장해서 살면 더 힘든 것 역시 우리네 인생인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삶을 더 바삐 살고, 더 많은 돈을 벌때 능력이 있다하는 것일까요. 왜 더 높은 자리에서 기름기 넘치는 얼굴에 뻣뻣한 목을 한채로 검은 세단을 타고 와야 알아서 모시는 것일까요..

때론 자연스레 힘을 빼고, 자연이나 삶의 흐름을 타는게 얼핏 보기엔 좀 너무 여유를 부리는 듯 보이나 이것이 더 빠를 때도 있는 것 같지요. 너무 목에 힘을 주기보다는 좀 더 낮은 자세로 섬김의 삶을 사는 게 더 높임을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저희 애한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너무 바쁘게 뛰지말고 걸으라는 것입니다. 또 울면서 큰 소리로 떼를 쓰지 말고 천천히 하고 싶은 얘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세살짜리이긴 합니다만 ㅋ 그래도 이 녀석..말을 천천히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서 좀 더 침착해짐을 느끼게 되더군요. 아이의 표현력도 더 좋아지는 것 같구요.

우리도 좀 더 낮은 목소리와 낮은 자세, 좀 더 천천히 여유있게 침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면 저희 애의 표현력이 더 좋아지듯 우리의 삶도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이 시간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제 마음의 여유와 웃음을 보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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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론적 바탕과 경험에도 수익이 없었던 주식투자

제가 요즘 뜻하지 않게 주식투자를 좀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라 공부만 하고 실전경험은 없었더랬습니다. 공부하면서 모의투자만 좀 했었지요. 뭐 그 때 성적은 썩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실전은 좀 다르더군요.


투자 첫 달 제 수익은 0% 였습니다. 그냥 본전치기 했다는 거지요. 이게 지난 4월달 얘기입니다. 주식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시다시피 지난 4월은 상당한 강세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다 30% 이상 수익이 나고, 특정 테마주를 갖고 계신분은 2-300% 씩 수익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당시 0%라 하면 사실은 - 30% 이상이란 것과 같은 말이 되는 거지요.


강세장에서도 수익이 없었던 것은

제가 이렇게 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급등주를 쫓아 고수익을 원하는 마음. 잠시를 참지 못하고 손절해버리면서 손실을 실현해버리는 마음. 마우스 위의 손가락을 잠시도 멈추지 못하는 바로 그 마음!! 즉, 여유를 갖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매매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5월달은 조금 전략을 바꿔보았습니다. 먼저 철저하게 기본적 분석과 기술적 분석을 해보고 하루하루의 주가에 일희일비 하지 않도록 여유최우선으로 "장전" 하였습니다. 총알 즉, 자본금보다 중요한 여유를 장전했다는 거지요. 그리고 한달 투자를 해봤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별로 안좋았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요. 예, 현재 약 25% 이상의 수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종목에 따라서는 70% 이상). 조급한 마음이 들어도 손가락을 묶어두고, 차 한잔 하면서 여유를 가져 보았지요. 때론 모니터를 끄고 하루를 그냥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수익이 생겼던 거지요.

정신없이 뛰지만 여유도 없고, 만족도 못하는 우리네 인생

사실 우리가 인생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너무 숨가쁘고, 바쁘게 사는 우리 이지요. 다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그렇게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지금 내 모습은 어떤가요. 정말 그렇게 일과 삶에 내 정력을 투자한만큼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언젠가 신문을 보니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10억을 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다 생각한다 합니다. 우리 나라 국민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뭐 거의 최하위권 수준이고 말이지요..

무엇이 행복한 삶이고,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가에 대한 고민 없이 무조건 돈만 벌고, 높은 자리에만 올라가면 된다 생각하는 풍조..세태..

참 안타깝고, 아쉬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보면 더욱 그렇구요..



여유로운 삶이 맺는 열매는 투자대비 300% 이다!

여동생의 투자금을 받으면서 이번 투자를 통해 얻은 돈은 아예 '내 돈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라 하였습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여동생 입장에서는 돈을 집어 넣고, 가만히 앉아 벌었으니 불로소득이니 말이지요. 그래서 수익 중 일부를 반드시 좋은 곳에 쓰라는 의미로 얘기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신세만 지던 여동생에게 오랜만에 용돈을 주며 오빠 노릇 한번 하니 기분 좋구요.  여동생은 오빠에게 용돈을 받아 또 기분 좋고 말이죠. 좋은 곳에 기부도 하니 그 곳에서는 그 곳 나름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 더욱 좋고 말입니다. 

하~여유가 만들어주는 삶의 열매는 생각보다 참 큰 거 같지요? 따지고 보니 투자대비 300%가 나옵니다. 

좋습니다!  인생은 없이 산다고 불행한게 아니지요! 때론 산책을 하며 한숨을 돌려보고.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한번 더 생각도 해보고 말이지요. 그렇게 내 삶의 여유는 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바로 이런 삶이야말로 인생을 300% 더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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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일이 어색하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12 Posted by 바람몰이



생일을 맞이하는 내 모습은 늘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해마다 돌아오고, 벌써 27번째인데도..

까닭은 "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려 했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모든 사물(생물 무생물 총칭)은 각 기 태어난 날이 다 있다.

내가 태어난 날 역시 그 중 하나이기에 유독 내가 축하받아야 할 이유가 그렇게 많은 것은 사실 아니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내 존재 자체를 기뻐해주고 아껴주어 챙겨주니까 그런거지..

또한 누군가 이 날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그 많은 생일을 일일히 다 챙기는 것도 상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니까..

생일에 대한 적극적인 개념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생일이란 "내가 태어났던 날"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는 날"인 것이다. 매일같이 깨어지고, 또 깨어지며 거듭나는 사람은 매일이 생일인 것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크리스챤은 인식의 전환이 더욱 요청된다. 내 육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크리스챤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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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적은 짧은 생각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5 Posted by 바람몰이


필자는 "국제 유가와 패러다임"(
http://blog.naver.com/kkuks81/30005482669)이라는 글에서 국제유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을 예측한 바 있다. 또한 유가 상승으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의 심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성 및 착취성을 밝히며 "생명"을 향한 선택을 강조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설마..'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둘씩 '진짜 그렇게 되는 것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특별히 유류세 및 정유사 횡포가 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부담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정신사적으로는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들이 주는 장점을 놓치고 단점만이 반복되고 있고,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물질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은혜로 바로 잡아가야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선도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특별히 교회가-물질중심의 삶에서 물질과 고귀한 정신이념-정신사로의 상승지향적 성향 포함-,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 및 실증적인 것과 전일적이고도 포괄적이며 유기체적인 것의 조화를 꾸준히 추구해나가거나 유지해나갔다면 지금의 이런 파국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신령한 지혜 및 성령의 인도하심을 세상에서 유행하는 정신사 및 물질적인 삶과 온전히 구분하여 설파하여 나갔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실제 우리는 절벽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상황이기에-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온 생명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까지 기다려 주시며 은혜를 베푸셨기에 이렇게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네 인간이 가지는 본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비본래적인 상태(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참조)에 있는 즉, 원죄에 빠진 상태인 인간이 지닌 이기성과 욕심, 잔학성, 폐쇄성, 정체성, 보수성 등으로 대변되는 그 본성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필자의 주장이 꼭 다 들어맞거나 모두 공감하지 않는다해도) 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따라서 다양한 주장이 오고가는 것이며 여기에는 당연히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현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좀 더 물질적인 풍요를 중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네 인간의 심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본래적 상태에 머문 본성이었다면-우리는 에덴동산의 낙원과 같은 상태처럼-얼마든지 서로를 비판적으로 돕고 도우며 꾸준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 아니었겠는가.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논리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온 인류의 언어가 흩어지고, 다르게 된 것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알아가고, 타개해가며, 새로운 앞길을 열어 가는 것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며 그 거대한 물줄기를 생명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이다. 정작 문제를 일으키고도 깨닫지 못하고 뻔뻔하게 자기를 죽인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믿고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판단해가야 하는 걸까..

우선 조화를 깨뜨리는 지극한 편향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지극한 편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그 끝에서 하나의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설픈 편향으로 인한 폐쇄성일 것이다. (오늘의 삶이 지극히 물질적인 삶에만 편향된 것은 어쩌면 이것이 어설픈 편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물질적인 땅의 삶에서 고귀한 인간애를 깔고 있는 하늘의-하나님의-삶으로의 반전을 통한 변증법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일적인 삶의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말고..은혜마저 값싸게 팔아버리지 말고..겸손하면서도 열심있는 삶의 추구를 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지향 및 소비지향적 성향을 이겨내고, 지속적인 개발 및 유지가 가능한 생태적이고도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만큼 살아가며 휴머니즘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역사적인 생명으로의 삶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이고도, 전생명적인 삶과 조화가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성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의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인류의 하나됨과 행복의 추구 및 생명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 빈부격차 및 자연, 영혼과 생명의 파괴를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끝으로 우리 한명 한명이 "성인군자(?)"가 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인군자라 하니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며, 온 생명을 볼 줄 아는 시대와 역사, 생명을 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른 '의식화(?), 계몽(?)' 등이 된 성숙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어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며 날마다 거듭나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아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나와 우리가 사는 오늘을 바로 보고, 뒤를 반성하며, 내일을 살아가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기체적이고도 정신지향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삶의 현실속에서 전일적으로 판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워낙 두서없이 쓰다보니 서론이 좀 긴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글이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하려는 말은 알아서 흘리고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분명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다시 건강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책을 필자는 제시한 것이니 이를 통해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나를 돌아보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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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에서 모셔온 글
대한민국은 십자가 공화국인가
[작은공동체 위한 교회건축] 교회 지붕 위 조형물로서의 십자가

이정구 jkl@skhu.ac.kr


   
‘교회’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들 안에는 '지붕 위의 십자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중세유럽 고딕교회부터 현대 도시 상가에 임대한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 지붕 위에는 첨탑 위의 십자가가 사라진 적이 거의 없었다.

네온조명이 없던 시절의 교회 지붕위 십자가는 적어도 해있는 낮 동안만이라도 지표역할을 했지만, 현대교회는 24시간 불야성인데도 그 수많은 붉은 네온의 지붕위 십자가는 헤매는 시민들의 지표역할을 하기는 커녕 이들의 짜증만 돋구고 있다. 어느 외국인은 과거 김포국제 공항가까이 비행기가 하강할 때 지상 위에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고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라서 안보태세를 위한 무슨 장치인줄 알았다고 한다.

   
예수 보혈을 상징해서 십자가를 붉은 네온으로 장식을 한다. 그렇다면 푸른 십자가와 노란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여기에는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네온 십자가가 너무 많아 식상해서거나, 너무 많은 붉은 십자가를 보는 시민들의 불평과 비웃음을 피하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두려고 푸른 네온이나 노란 네온으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교회를 표시하는 십자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음은 당연하며 이것은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한 교회 지붕 위에 몇 개씩 매달려 있는 작고 크고 울긋불긋한 다양한 십자가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십자가들이 적절한 곳에 설치된다면 그 십자가가 황금으로 치장되었든 십 수척 크기의 네온 십자가든 그것이 대수가 아니다.

유럽의 돌 성당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많아야 두개, 첨탑은 높아도 십자가 크기는 보일 듯 말듯하다. 교회건물의 모양세 자체가 교회임을 말해주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굳이 크고 많게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또 십자가가 적당히 작음으로써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유독 왜 대한민국 교회들만이 교회건물의 크기나 조화와 관계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울긋불긋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일까. 가히 기독교 국가 아니 십자가 국가라고 할만하다. 거기에 심오한 신학적, 교리적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무조건 드러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이다.

같은 하나의 상가건물에 교회 세 개가 입주해 있는 경우 그 상가 지붕은 참으로 처참할 수밖에 없다. 세 교회가 공동으로 첨탑과 십자가를 설치하면 경비도 절약되고 주민으로 부터의 비난도 덜 하고 상가 건물도 정리되어 좋을 텐데 그런 교회를 아직 본적이 없다. 첨탑의 높이와 십자가의 크기마저 경쟁이 된다. 천사가 한 건물 위에 있는 많은 십자가들 중에서 어느 십자가 위에 임재 할런지 감히 추정할 수 없지만 십자가 위에 앉기보다는 건물에 하나 달랑 보일듯 말듯한 십자형 피뢰침 위에 앉아 그 안의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할 것 같다.

건축가들이 교회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고심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 탑이다. 건축가마다 나름대로 십자가 탑에 대한 컨셉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설계한 다양한 형태의 교회건물에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십자가 탑을 맞춤형처럼 설치한다. 십자가 탑 모양을 보면 누가 설계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건축도 넓은 의미에서 환경조형물이지만 특히 십자가 탑은 그런 조형물 위에 또 설치되는 조형물이다. 단순히 십자가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건축주는 주변 타교회와 차별성있는 특이한 십자가 탑을 요구하고, 건축가는 심히 고심하며 만들어 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십자가 탑을 다시 변형하여 재창출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건축가는 건축가이지 전문 조각가가 아니다. 간혹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주변의 조경까지 담보하려는 욕심도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전문 조경가의 몫이다.

건물 지붕 위에 부착된 십자가탑 자체가 또 하나의 환경조각품으로써 건물 본체와 독립된 또 다른 미디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 탑도 조각가에게 과감하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붕위의 십자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재질도 다양하지만 본 건물과 어색하지 않으며 주변 스카이라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주민들에게 위화감만 주지 않는다면 십자가 개수가 문제겠는가.

   
이 정구 (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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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7. 11. 10. 09:52 Posted by 바람몰이
이런 자세로 목회함이...

1. 인기를 위한 목회가 아닌, 인격적인 목회를! (롬12:10-20)

2. 직업적인 목회가 아닌, 소명감에 불타는 목회를! (겔34:1-16)

3. 최고, 최대를 위한 목회가 아닌, 최선의 목회를! (살전2:1-12)

4. 경쟁적인 목회가 아닌, 성실한 목회를! (마25:14-30)

5. 자랑을 위한 목회가 아닌, 겸손한 목회를! (눅17:10)

6. 수와 양에 치중하는 목회보다는, 알곡을 키우는 질적인 목회를! (요10:9,16)

7. 자아 중심의 목회가 아닌, 주님 중심의 목회를! (빌1:20)

8. 명예를 위한 목회가 아닌, 영혼을 위한 목회를! (고전9:19-23)

9. 인간의 칭찬을 받기 위한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목회를! (마6:16-18)

10. 과장된 위선의 목회가 아닌, 양심적인 정직한 목회를! (마23:1-36)

11. 내 힘으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목회를! (행1:8)

12. 받기 위한 이기주의적인 목회가 아닌, 생명까지도 주는 희생적인 목회를! (행20:24)

13. 의무감으로 하는 타율적인 목회가 아닌, 사랑 때문에 하는 목회를! (살전2:8)

14. 정죄하는 목회가 아닌, 이해와 관용의 목회를! (마26:41)

15. 책망의 목회가 아닌, 권면과 위로와 칭찬의 목회를! (살전1:2-8)

16. 명령과 지시만 하는 권위의 목회가 아닌, 본을 보이는 실천의 목회를! (벧전5:3-4)

17. 발로 뛰기만 하는 목회가 아닌,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회를! (눅2:39-46)

18. 십자가를 타고 가는 교만의 목회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종의 목회를! (16:24)

19. 인간의 지혜로 하는 목회가 아닌, 성경말씀 중심의 생명있는 목회를! (딤후3:15-17)

20. 교인을 외모로 보는 계산적인 목회가 아닌,
의롭고 괴로운 자의 편에 서는 진실된 목회를! (약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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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22 Posted by 바람몰이

 

기왕에 말이 나온김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도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더욱 성경이 계시해주는 하나님은 물론 내 자신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의 가장 모범이신 예수님을 보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거나 어떤 결정을 하실 때도 항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시되 정확하고 똑바르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의 끝에서 내 뜻을 이루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뤄 달라 기도하며 주의 뜻을 들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일단 말이 많습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 지 침이 튀어 바닥을 적실 정도입니다. 또 쉬지도 않고 몇 시간씩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어 목소리가 쉰 상태로 정서가 순화됨을 느끼고 만족함을 느끼며 기도를 마치고 일어납니다. 도대체 언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만 해대는 게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고 위안을 얻는 것이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내가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언을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방언은 믿음이 좋다 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님들을 합니다. 그래서 은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어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통변”이라고 해서 방언을 해석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이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성경 사도행전까지 말하는 방언은 한마디로 “외국어”입니다. 각 지방과 나라의 언어란 말입니다. 언어가 통하는 게 방언이고 이것은 구약시대 바벨탑 사건에서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모이는 사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속에 인간의 사고가 있고, 인간의 사고는 언어활동과 함께 이뤄진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신 것은 만남과 하나 됨의 인간관계 속에 있는 영혼의 교류를 흩으신 게 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하게 하신 것은 다시금 그 교류의 통로를 열어주신 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고린도 전서 14장은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혼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방언만 해대다 교회가 분열되기 보다는 모두 똑바로 알아듣는 예언이 더 낫다는 후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방언 만마디 보다는 알아듣는 기도 다섯마디가 낫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도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방언을 아무리 해대도 교회가 하나 되거나 우리 사회가 변하는 역사가 없습니다. 심지어 방언을 잘 하는 분일 수록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방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방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4장을 정독해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방언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하더군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 다구요..

  기도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되게 해달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잘되게 해달라 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 합니다. 물질생활에 부족함 없이 축복해 달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문제인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온 몸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치셨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구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이나 내가 잘 됨과 동시에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이가 잘 되게 해달라 해야 하며 셋째로 머리가 되어도 교만치 않도록 도와달라 하거나 남들이 싫어하는 꼬리가 되어 더욱 섬길 수 있게 해달라 해야 합니다. 끝으로 물질생활에 부족함이 없게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을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방법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수많은 위인들은 모두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이 말씀에 의해 깨지고, 쪼개지며 변화했고 눈물로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중요한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일종의 경고 표시인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고운 님이여!!

  지금 이 순간 잠시 책을 덮으시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깨닫고, 주님의 뜻을 발견했다면 이 책을 안보고 버리셔도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주의 뜻을 전할 뿐인 종에 불과하구요.


  만약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찾아와 감동을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 순간 주님 앞에 불려 간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작은 열매를 맺으셨고, 저는 그 사명을 감당한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희망을 갖고 아름다운 씨앗을 또한 뿌리고 키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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