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의 이슈 '음란물'

최근 성교육에 있어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음란물’이다. 음란물은 대개 이른바 ‘보통인’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거나 선량한 성도덕 관념과 배치되는 내용의 문서·도서·음반·동영상·영화 등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약간 모호한 측면이 있는 정의이긴 하나 요즘은 야동(야한 동영상), 야사(야한 사진), 야설(야한 소설), 망가나 동인지(야한 만화류) 등을 일컫는 말로 이해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음란물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에 의한 단속과 관련이 깊다. 현행법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이 출연한 음란물을 제작·유포·소지하는 등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수 천만 원의 벌금이나 수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단속에 있어 미성년자의 적발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실례로 며칠 전 있었던 충남경찰의 음란물 단속에서는 단속된 인원 중 약 1/3이 미성년자이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성과학연구소 등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약 70%가 스스로의 의지로 음란물을 찾고 있었고, 이 중 약 20%가량은 준 중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여러 조사에서도 청소년들의 상당수는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인터넷 등을 이용하여 음란물을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음란물을 보는 것을 넘어 직접 제작까지 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경악케 했던 인터넷 음란물 카페를 보라. 이 카페는 수천 명의 회원 수를 자랑하는 곳이었는데, 청소년들이 이른바 ‘몸캠’이란 것을 해서 자신의 알몸을 찍어 보내면 성인 구매자들이 금품이나 선물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 곳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카페의 운영자가 겨우 초등학교 5학년짜리 어린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과 달리 우리나라의 성교육에서는 음란물 중독이나 그 본질에 관한 학습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여전히 형식에 치우친 면이 강하다. 어디 학교뿐이겠는가. 교회에서의 성교육은 사실상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교회 내 성교육이란 담임 목사님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대개의 목사님은 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교육을 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다.

음란물 문제의 심각성

아쉬운 대목이다. 음란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유흥거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음란물은 음란물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그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가 바탕이 된다. 왜곡된 성문화의 단적인 예를 확인할 방법은 아동 관련 음란물 제작과 성폭력의 발생수준인데, 영국의 인터넷 감시재단의 조사를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아동음란물 제작수준은 세계 5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에 업로드 되는 야동의 총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이 중 최소 10% 이상이 아동음란물이다. 또 성범죄 발생률은 세계 2~3위권으로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성문화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 (사) 푸른 아우성 웹툰 21화 '가짜 성, 야동에 속지 마세요'의 한장면
더욱 큰 문제인 것은 음란물의 광범위한 유통의 기저에 물신주의가 깔렸다는 점이다. 음란물 중에서도 이렇게 자극적인 음란물이 광범위하게 생산 및 유통 가능한 것은 이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보호센터가 밝힌 바로는 우리나라의 불법음란물 유통규모는 약 2천억에 육박하는데, 이것을 합법적인 유통구조로 환산하면 약 2조 2천억의 규모가 된다고 한다. 그나마 이것도 통계에 잡힌 것만 하는 이야기이다. 최근의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사례까지 포함하면 그 시장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몸이나 외모도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것은 이미 너무도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돈이면 그 사람의 성(性)마저도 왜곡시킬 수 있고, 특히, 미성년자의 인격이나 인생마저 짓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음란물의 또 다른 문제로는 음란물을 보는 이의 성에 관한 관점을 가학적인 성향으로 변질시키는 데에 있다. 음란물의 구매자들은(주로 남성)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음란물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야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보다 은밀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이에 음란물 제작자 혹은 유통자는 더욱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내용의 음란물을 공급하여 수익의 극대화를 꾀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음란물에는 이른바 ‘강간 통념’이 내재된 것이 증가하게 되었다. 강간 통념의 대표적인 사례는 ‘싫어요’를 ‘좋아요’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대중교통에서 치한이 여성의 몸을 만질 때 이를 싫다고 하던 여성이 더욱 적극적으로 그 남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류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현실에서는 성폭력 범죄로서 처리되는 것이 음란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용인되어 진다.

물론 모든 음란물 관람자가 변태(?)가 되거나 잠재적인 성범죄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양한 연구들이 음란물을 즐기거나 이에 중독될 경우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수배 더 강해지게 되고, 배우자와의 원만한 결혼생활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한 사람 특히, 여성을 그 인격 자체로서 보질 못하고, 성적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내가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객체’로 여기게 하는 가장 은밀하고, 자연스러운 학습의 장이 바로 음란물의 세계이다.

성경은 음란물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미디어란 것 자체가 없던 시절에 기록된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음란물이 갖고 있는 속성들은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필자가 언급한 왜곡된 성문화와 물신주의, 한 사람을 인격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시키는 상황 등은 성경이 줄기차게 경계하고, 질타하는 주제들이다.

예컨대, 구약에서는 음란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과 예언자의 질타가 곳곳에서 등장하고, 사도 바울 역시 난잡한 성교 등에 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물질을 선택할 것인지를 물으며 물신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성을 상대를 지배하는 수단이나 내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방적인 성격의 것이 아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은총의 수단으로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음란물에 관한 입장을 쉽사리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구태여 하나님의 창조질서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미 너무도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음란물이기에, 이를 경계하며 그 본질을 분별해야 하는 필요성은 충분하다. 특히, 우리 아이들은 음란물을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간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 우리 아이들이 음란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분별하고,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음란물 관련 교육은 어떻게?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과 교회에서 음란물 관련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까.

우선, 원론적인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의 성은 건강한 스킨십 속에서 나오는 떨림과 기쁨이라는 육체적 측면, 서로의 심리를 치유하고 안정시키는 심리적 측면, 서로의 영혼을 위한 중보자가 되는 신앙적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성이 될 수 있다. 이것을 필자는 사랑의 3요소라고 일컫곤 하는데, 음란물에는 오직 쾌락만이 있을 뿐 서로에 대한 배려나 사랑의 교감, 신앙적 중보 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공유해 나가면 좋겠다.

둘째, 음란물에 관한 접촉은 그 빈도수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보면 계속 보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습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습관을 바꿔주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예컨대, 정부에서 만들어 제공하는 스마트 보안관 앱이나 기타 다양한 유료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웬만한 사이트 접속이나 부적절한 만남 등이 차단되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각 가정에 있는 컴퓨터를 거실로 옮겨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셋째, 무조건 아이들에게 보지 말라고 하기보다는 열린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 예전처럼 윽박지른다고 말을 듣는 아이들이 아니다. 게다가 이메일만 들어가도 각종 음란물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따라서 이럴 때일수록 아이들 한명 한명의 분별력과 절제력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으며, 그 방식은 부모님과 자녀의 열린 대화가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아빠나 엄마가 사춘기 시절 겪었던 경험담을 공유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보도록 하자. 물론 너무 과도한 수준까지 나갈 필요는 없으나 아이의 고민과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는지를 나눠보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에너지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약간의 음식조절을 시키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가령, 바나나와 각 종 견과류는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차분하게 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어 권장할 만하며, 반대로 과한 육류섭취나 설탕 섭취는 줄여나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중요한 회개 그러나 우리는

회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그렇지요. 내 안의 죄성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꿇으며 시작하는 겁니다. 또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수없이 죄에 빠지기에 우리는 회개를 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쉬운 것이 교회에서는 그렇게 울면서 회개한 사람이 밖에 나오면 다시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합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며 변하지 않는 내 자신을 합리화 시켜서는 곤란하겠지요.

성경에는 회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오는데요. 저는 오늘 그 중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다

사도행전 2:37을 보니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탄식과 2:41에 잘못과 회심을 인증하는 세례에의 참여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전에 "말씀" 을 듣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리는 일종의 '가책'을 느꼈던 것이지요.


저는 믿음이 성장하는 데는 여러 요인과 과정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내가 해석을 하려 하지 않고 그냥 말씀을 쭉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맘속에 감동과 변화의 싹이 틀 수 있을 거라 저는 믿습니다. 말씀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은 내가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과 같지요. 또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어 주지요. 저는 우리가 그냥 내 마음속에 찔리는 것을 위안받고자 회개를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이건 회개라기 보다는 내 도덕적, 심정적 위안에 불과하지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써 회개를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改 의 사건이 일어나다!

두번째는 이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는 대목입니다. 생활양식의 변화가 온 것이지요. 말하자면 첫번째 경우는 "회" 사건이 있었던 것이고, 이제는 "개"의 사건이 지속된 것입니다. 


그 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눔의 삶을 사는 데 있었습니다. 즉, 나 혼자만의 삶, 자폐적인 삶, 이기적인 삶에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 삶으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회"와 "개"가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찔리는 행위에 용서를 구했다 알리바이를 삼고, 내 자신을 위안하며 나아가지요. 심하면 이것이 습관 또는 체질화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을 겁니다. 애절한 '뉘우침'과 여기에 근본적인 '삶의 방향'이 전환되고, 생활의 '구조적인 변혁' 을 포함하는 "개"의 요소가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회개를 의미하는 원어 메타노이아 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냥 마음만을 돌린다는 게아닙니다. 내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 바꿔 반대 방향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죄에 대한 단상(짧게 봅니다)

끝으로 제가 앞서 죄 얘기를 잠깐 했는데요. 잠깐 죄에 대해 살펴볼까요(말 그대로 잠깐). 죄악을 의미하는 원어 '오페일레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이걸 좀 알아보니까요. 이건 도덕적, 심정적 죄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회경제적 삶의 구조 안에서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각 종 채무의 관계를 의미하였습니다.


왜 성경에 보면 빚을 탕감해주는 농장 주인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걸 생각하면 쉽지요. 이건 결국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회와 사회에서 뒤틀린 관계를 서로 용서하고, 감싸안는 삶의로의 변화 즉, 구체적인 삶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요한이 얘기하는 것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의 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시어요. 그는 세리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는 변했지요.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정하게 거둔 것을 네배로 갚는다 하였습니다. 바로 이거지요. 회개는 말씀을 통해 깨닫고, 애절한 '뉘우침'을 하며, 내 삶의 방향과 구조가 완전히 변해야 합니다.

 
개인만이 아닌 연대의 회개가 필요

개인적으로 요즘처럼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없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끼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모습을 일부의 얘기라 치부하고, 우리는 괜찮다 하는 모습입니다.

왜 함께 연대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 걸까요. 저는 그들의 죄를 그들만의 죄로 여기면 안된다 생각합니다. 함께 아파하며 기도해야 하지요.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 역시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悔와 改의 균형을 이루며 "소" 처럼 걸어가봅시다!

이것은 "회" 와 "개" 가 함께 있는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회"에만 빠져 있습니다.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지요.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애절한 뉘우침과 지속적인 고쳐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주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맺어가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는 힘들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내 옆에는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함께 손잡고, 조금은 더디더라도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 보아요. 우보천리란 말처럼 우직하게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천리를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가져보자구요. 주님께서 손을 내밀고 계시니 말입니다!




,

노아 이야기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9 Posted by 바람몰이

 

노아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맥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신 하나님의 분노와 의인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홍수를 통한 쓸어버림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는 희망의 약속 무지개가 나오며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렇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세상이 어떤 “죄”를 지었길래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실 정도가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방주에는 정결한 것뿐 아니라 부정한 것까지 들이라 하셨는 데 도대체 왜 그러셨던 걸까요? 만약 그냥 전부 쓸어 버리실거면 기왕에 부정한 것은 모두 없애버리시어 완전히 깨끗한 것만 남기시지 말입니다.

또한 중간에 보면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거인족은 성경을 통틀어 여기서만 딱 한번 나오는 데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생뚱맞게 등장한 것일까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너무 궁금하던데..

   

이야기의 실마리는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존재 즉, ‘네피림’에 있습니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난 거인족이라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연구해보니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된 사람의 딸들이 성적인 결합을 하는 다시 말하자면 “종교 혼합”의 타락에서 비롯된 존재들이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앞서 저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인간의 교만을 의지하며 혼자서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었지요. 기억나시죠?


  결국 창세기의 기자는 막연하게 죄가 가득했다 하기가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네피림
1)을 등장시키며 우리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심판하셨던 구체적인 대상을 가르쳐 주려 하였던 것이지요. 바로 주님을 멀리하고 가나안의 바알주의라는 종교혼합에 빠진 이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고귀한 가치와 문화를 버리고 저급한 물질문명에 젖어 버린 이들의 행동. 끝으로 주님을 떠나버린 그 마음이 싫으셨던 겁니다2).  


   그러면 왜 노아가 의인이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노아는 이런 종교혼합이나 종교의 개종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했던 “흠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 들었던 거지요.


  또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멸절시켜 버리신 대상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라는 불특정 다수나 생명체가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고 낳으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냥 아무런 감정도 없이 쓸어버린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멸하시는 것은 바로 가나안의 바알주의와 맘몬주의-구약성경이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것-인 것이지요.


  실제 6-7장에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생명체를 보면 더욱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지적해드렸듯이 창세기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이나 공중의 새는 수컷과 암컷으로 각 일곱 쌍 씩 들이되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들이라 하였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나 생명체를 멸절시키는 무자비함을 보이시려면 애초에 방주를 만들라고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더욱이 부정한 짐승(!)은 아예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모두 함께 하겠금 하신다는 것이지요.


  또한 9장에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몸을 드러냈고 이를 본 함이 셈과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가나안 문화에 빠져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함이 아버지의 치부를 감싸주지 않았기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이해인거지요. 실제 성경을 잘 살펴보면 주님은 함에게 저주를 내리시지 않고(!)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셈이나 야벳을 축복하는 것이라 알아왔던 이야기는 문맥을 다시 잘 짚어볼 때 이들에 대한 축복보다 오히려 가나안이 이들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대상이 분명히 가나안의 바알주의나 맘몬주의 같은 것이고 이들과의 성적결합을 통해 종교혼합을 하거나 개종을 하는 이들임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고, 이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구체적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당시 중동 지방에는 노아 이야기와 비슷한 홍수 이야기가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기자는 이런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되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의 관점에서 그 분의 뜻을 극적으로 증언하였던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였던 것이구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더욱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며 주님을 저버리거나 멀리하며 동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노아 이야기를 통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저는 이러한 주님의 뜻이 여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곁에 있는 현대판 바알주의를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가나안 문화를 말입니다. 혹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면을 쓴 바알이라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1) 네피림에 대한 성경의 보도는 창세기 6장과 민수기 13장 딱 두 번만 나옵니다. 


2) 그래서 쉬운 성경은 5절의 죄악을 “악한 행동”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이야기  (0) 2007.11.08
심판 받은 가나안 문화와 우리  (0) 2007.11.08
가인과 아벨  (0) 2007.11.08
창세기에 대하여-성경일반  (0) 2007.11.08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  (0) 2007.11.08

,
BLOG main image
하늘바람몰이
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by 바람몰이

카테고리

큰 머리 제목 (1160)
[성교육] 학교 교육용 영상 (0)
[LIFE]이 남자의 인생 (193)
[LIFE]몸짱 프로젝트 (21)
[LIFE]여유와 지혜의 장 (63)
[LIFE]육아 이야기 (3)
[교육]자녀교육 한마당 (73)
[안전] 안전교육 (49)
[안전] 응급처치 (18)
[성교육]생생 강의현장 (37)
[성교육]성교육 이야기 (177)
[성교육]낯설게 바라보기 (79)
[문화]방송,영화,격투기 (102)
[문화]신바람 자동차 (78)
[문화]블로그 인생 (24)
[기독교]하늘바람몰이 (87)
[기독교]변해야 산다 (35)
[경제]주식투자종목분석 (23)
[시사]세상살이 (82)
리뷰 아르바이트 (7)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NM Media textcube get rss
바람몰이's Blog is powered by Tistory.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