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교회다니는 것'과 '종교생활' 잘 하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을 보면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제자"와 "무리"로 번역된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흔히 제자는 '마데테스' 라고 하고, 무리는 '오클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를 의미하는 마데테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떤 것에 쏟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승과의 관계 속에서 배움에 종사하고 있는 자란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스승과의 내적 교류에 힘쓰는 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클로스는 다릅니다. 이들은 웅성거리며 주변을 떠돌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무리를 보시며 아파하시고, 먹여주셨지만 이들은 선뜻 제자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상처입고, 아파하는 민중이었지만 주님께 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여 구원의 길에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인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게 무엇인가' 로 돌아오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생활이나 교회다니기와는 다릅니다. 그저 출석만 하고, 종교프로그램을 열심히 참여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출석과 프로그램에 "참여"만 하게 되면 "내적성장" 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교류" 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사전적 정의 즉, 신앙을 가지고 종교에 귀의하여 영적 생활을 한다는 것처럼 구체적인 내 "삶" 과 연관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변함으로 내 삶이 변하는 "거듭남" 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주님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가치에 마음을 쏟고, 그 내적교류에 힘쓰며 변화된 삶을 살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남의 일만 쳐다보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주님과의 교류는 커녕 내 자신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늘 돌아보며 날마다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눅 6:41-45 의 말씀을 보며 다시 한번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춰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로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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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징기스칸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읽어 잠깐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유사이래 징기스칸만큼 영토를 확장한 왕이나 용장이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 군대를 이끌고 중국과 페르시아로 쳐들어갔고 많은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그의 용맹스런 행위에 대해 이야기 했고, 세상에 그와 같은 왕은 없었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런 징기스칸이 전쟁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와 있던 어느날 아침입니다. 그는 그날 하루동안 사냥을 즐기려고 숲으로 말을 달렸습니다. 많은 보좌관이 그와 함께 갔습니다. 징기스칸과 그의 사냥꾼들은 하루 종일 숲 속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많은 사냥감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날은 매우 무더운 데, 사냥은 이뤄지지 않고..징기스칸은 매우 힘이 들었고,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냥터를 해매던 중 어떤 바위 가장자리에서 물이 조금씩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징키스칸은 말에서 뛰어내려 물방울을 받으려고 작은 은컵을 바쳐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목이 말라 더 기다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징기스칸이 막 컵을 입에 대고 막 마시려는 순간, 그가 아끼던 매가 갑자기 컵을 쳐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 더 그의 컵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도 아끼던 매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이 마른 징기스칸은 아예 물이 떨어지는 곳을 따라 위로 올라가서 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샘을 찾은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샘속에는 독이 매우 강한 커다란 뱀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징기스칸은 갈증도 잊은 채 자기의 성급한 행동으로 가엾게 죽어버린 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우리네 삶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먹고 사는 것, 옷을 입는 것 등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정치인을 뽑을 때도 그냥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사람을 뽑습니다. 아이들도 성적의 굴레에 얽매여 자신들의 생명을 맘껏 펼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맙니다. 사람이 사는 게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니고 아이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게 성적이 전부가 아닐텐데 우리는 이것을 전부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재물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으며 공부를 잘 하면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즐기는 데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요. 재물이 많다하여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고, 공부를 더 잘한다 하여 반드시 인생을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던 정치인은 오히려 다른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며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무것도 못 배우고, 시장 한켠에서 김밥을 파시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인생의 깊이를 느끼고, 그 분의 기부를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성급함과 욕심을 아예 지워버리거나 버릴 수는 없습니다. 또 이것 없이 세상을 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허나 우리는 내 마음을 다스려가는 노력을 할 수 있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가치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런 노력과 실천이 인생의 행복과 여유를 만들어 주며 내 자신을 더 존귀하게 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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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도 MP3 냐?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9. 2. 25. 10:49 Posted by 바람몰이


오늘은 지난번 총론에 이어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는 첫 시간입니다. 먼저 저는 지난 번 언급했던 이사야의 말을 다시 들어보며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이사야서는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수집되고 정리되었습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눠 보는 데요. 이것은 제 1이사야서 부분입니다. 이 글이 작성되던 시기는 대략 바빌론 포로기 직전이나 초반쯤으로 보는 게 정설입니다. 

즉, 나라가 패망의 기로에 있는 매우 급박하고, 힘든 상황이었다는 얘기인데요.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심지어 직접 찾아오시겠다는 말씀까지 하신다는 점입니다. 아래 구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만군의 주님께서 너를 찾아오시되,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를 일으키시며,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태워 버리는 불길로 찾아오실 것이다.(사29:6) 

상당히 충격적이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오실만큼 당시 이스라엘이 타락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했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이들의 야훼 신앙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을 노예와 나그네 생활하던 것에서 이끌어주시고, 그 어리석고 연약한 이스라엘 민중이 자기초월을 통해 출애굽 후 나라를 세우기까지 이끌어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이 어느 덧 풍요를 쫓고, 허례허식이 가득찬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자기들의 어려운 시절을 잊고 교만에 빠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세상에 이런 모양새가 얼마나 심했으면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 올까요.


마치 굶주린 자가 꿈에 먹기는 하나, 깨어나면 더욱 허기를 느끼듯이, 목마른 자가 꿈에 마시기는 하나, 깨어나면 더욱 지쳐서 갈증을 느끼듯이, 시온 산을 치는 모든 나라의 무리가 그러할 것이다.(사29:8)


자,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기도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담긴 곳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부분을 첫 글부터 강조하는 것은 바로 "진정성"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저 때 당시 이스라엘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요. 끊임없이 더 큰 파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그러나 아무리 파이를 먹어대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갈급하고, 굶주리는 모습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업 잘 되려면 교회다니라는 분이나 교회를 인맥 넓히는 사교장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참 많지 않나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 역시 교회 출석과 새벽기도 참석같은 행위나 눈에 보이는 것에 상당히 신경이 가있지는 않나요? 내가 며칠기도까지는 해봤다..뭐 이러면서..나는 방언기도를 한다..뭐 이러면서 말이지요. 들리는 얘기로는 요즘은 무슨 방언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있다지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들은 말을 흉내낼 뿐이다" 라고 개탄해 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속에 진정성이 있어야 하지요. 기도도 그럴 것입니다. 
 
중언부언 하듯 그저 양만 많이 늘려가는 게 아니라 한마디 기도를 내 뱉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골방에서 주님과 1대1로 만나며 옷이 아니라 마음을, 재가 아니라 눈물을 뿌리는 기도야말로 진정성이 담보된 기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내 곁에 계시던 주님을 만나 그 은혜에 휩싸이게 되면 우리는 이기적인 내 자아를 넘어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며,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또한 내가 가진 것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고 들에 핀 백합화처럼 솔로몬보다 더 영화로움에 감사할 줄 아는.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닦는 "수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분명한 것은 주님을 만난 이들은 그 삶이 변화하였고, 그 핵심에는 바로 늘 진정성이 가득한 기도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 오늘 이 엄청난 교회와 신도수를 자랑하는 이 한국 교회가. 매일 같이 새벽기도를 하고 주님만 따르겠다 하던 우리가. 한번쯤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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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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