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2.04 한국 기독교 '배타성' 버려야 산다 7
  2. 2008.12.10 문제는 수준 낮은 목회자이다. 5
  3. 2007.11.08 창조 이야기-(2)

1.문득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닌 '나만의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일제 치하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기독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 기도, 내 가족 기도 밖에 안 들립니다. 가끔 '우리'가 나올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우리 교회'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썩 편치가 않습니다. 그 내용 중 교회 성장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먼저 성경의 하나님은 특정집단이나 종교, 민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구약 성경의 주요 오해소지 문구 해석과 신약의 주요 강조점을 통해 간략히 밝히고,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후 나름의 결론을 맺으며 글을 진행합니다.  



2.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철저하게 공동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특정지파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생명과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2-1)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 으로 주로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여러 지파와 집단이 존재했는 데요. 이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특정 지파나 집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 이나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식의 표현 또한 볼 수 있는 데요. 이것 역시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들의 신앙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특정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전 공동체적 의미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더 짖게 뿜는다 할 수 있겠습니다.

2-2)신약시대에 이르러는 이것이 더욱 확연해지고, 범위가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핵심인 예수유대인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 유대주의, 독선, 아집 등의 배타성을 철저하게 거부함에 이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에서는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을 높이며 그 뜻을 설파했고, 몹쓸 병에 걸려 배척받던 병자를 치유하였습니다. 또한 차별받던 여성의 역할과 그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막과 휘장이 찢어지며 하나님이 특정 종교나 집단,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잘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을 통해 하나님이 만유 위와 만유 안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전 생명과 우주질서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고백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한국 기독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를 기독교라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기독교'보다 '개독교'라 부르는 걸 더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목사' 는 '먹사 새끼'라고 부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1)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저는 그 원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특별히 한국 기독교인만이 갖고 있는 자기들끼리는 친절에 사랑이 넘치면서 다른 종교나 세상과는 분리된 듯한 또한 다른 종교나 생각을 갖지 않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종교든 그 폐쇄성과 배타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종교만의 고유한 '신앙'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신앙을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고, 이것이 신앙을 갖지 않는 다른 이에게는 '폭력'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선교하는 것 좋습니다. 어떤 종교든 선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걸 끊임없이 강요하나요. 왜 지옥불 얘기를 하며 협박을 하나요. 자신의 선행과 사랑, 변화된 삶을 통해 '아,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변하는 구나. 이런 힘든 상황도 살아가는 구나.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런걸까' 라는 말이 나오도록 선교할 수는 없는걸까요.

3-2)  굳이 선교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필요 이상의 이 폐쇄성과 배타성이 사회적으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을 넘어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일반인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을 넘어섰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 어떤 종교든 그 종교만의 특정 신앙의 영역이 있고,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그걸 신앙이라 하는 거고, 이걸 고백하는 이가 그 종교의 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것에 함몰된 나머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영역은 완전히 배제되어버렸고, 사회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멀쩡한 절에가서 불을 지르고, 학교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 목을 벱니까. 왜 이웃에게 저 사람이 나를 스토킹한다는 말이 나오게 합니까.

3-3) 어떤 분들은 제 가슴속에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시나 돌아보라 하던 데요. 그래서일까요. 저같은 사람은 지하철이나 옆집 앞에서 시끄럽게 확성기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그 시간에 노숙인과 독거노인, 외국인 근로자, 장애우 등을 섬기는 것이. 용산 참사현장을 찾아 함께 연대하고, 싸이코패쓰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라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것더 큰 선교의 효과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옳고, 사회적으로도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정말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4.어제 아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곳을 잠시 들를 일이 있었는 데요. 그 상가 앞을 보니 "세계정복 00제자" 란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내건 광고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세계 전체에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이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선교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지요.

한국 기독교는 좀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존재라는 철학용어가 있지요. 어떤 인간이든 그 시대와 문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반드시 자신들이 얘기하는 것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비롯된 폐쇄성과 배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신들의 전략적으로도 자충수를 두고 있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공격성과 배타성으로는 이 사회의 화해자가 될 수도 평화의 사도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마당에 그렇게 주장하는 선교가 될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를 존중하고, 말 그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섬김의 삶을 살 때. 이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단호히 저항하고, 끊임없이 팽배하는 물신주의에 제동을 걸며 뭔가 다른 삶을 살 때.

그 때야 비로소 교회는 교회답다 인정받고, 크리스챤은 뭔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며,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하는 기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1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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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수준 낮은 목회자이다.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8. 12. 10. 00:37 Posted by 바람몰이


긴급출동 SOS 를 보니 신도를 때리는 집사가 나온다. 아..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무튼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지 이래서는 곤란하다.(귀신 축출에 대해서는 추후 시간 날 때 한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도에게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1)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2)더 근본적으로 이것이 한국 교회 목회자의 낮은 수준에 기인한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은 것은 성경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문자 그대로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삶의 푯대와 같다. 수많은 선지자와 사도가 영감을 받아 쓴 것도 맞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인간 프린터가 되어 입력된 것을 그대로 출력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성경은 특별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저자가 신적영감을 받고, 그가 살던 상황과 인간의 한계 안에서 쓰여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면 성경 본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히려 해치는 경우가 생겨 이는 결코 바람직하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 마저 그대로 믿게 되는 꼴이니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너무 믿는 경향이 강하다. 도대체가 그 역사적 배경과 문맥, 비슷한 글 양식, 사회적 의미 등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목회자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가르칠 때 보면 문자 그대로 믿으라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교인의 신앙만 인도할 뿐 그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도록 신학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니 여기서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목회자 자신이 별로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실 우리 나라 목회자는 참으로 허술한 양성체계를 갖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주요 교단의 정식 코스는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나라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학교에 가고, 일년에 책 몇 권 읽고 레포트를 내면 목회자 안수를 주거나,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신학원에서 겨우 몇 달 출석하고 목사 안수를 주는 경우 역시 존재하고 있다.

수년에 걸쳐 다양한 분야를 수도해야 할 학문을 이렇게 단기간에 이수하고 끝내니, 여기를 나온 목회자에게- 물론 믿음 하나는 존경스러울 만큼 신실한 경우가 많지만-수준 높은 사회 인식과 성경 이해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늘의 은총을 맛보기 위함이고, 세상을 섬기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 교인을 예수의 모범따라 성숙한 경지에 오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예수를 욕보이고, 교인 한명 한명을 맹목적인 신앙에 빠지게 해버린다면 이미 그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목회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학식과 균형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수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해를 얘기하고, 평화와 정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교인의 믿음 뿐 아니라 삶까지 연결되는 전반적인 일상의 신앙을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를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나오고,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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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2)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1 Posted by 바람몰이

  앞 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와 그 이치에 대해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과 하늘의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삶의 방향성을 찾고 구원 받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인간답고, 땅은 더욱 땅 다우며, 하늘은 더욱 하늘답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제 눈에는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심지어 크리스챤마저도 물질적인 생활에 종속되어 이것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기도할 때 물질의 축복을 더해 달라 하지요.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물질적으로 비대해져 이제는 각 은행이 대형교회를 알아서 VIP로 모신다 하지요. 목사님들은 고급 대형 승용차를 몰고 다니시구요. 마치 말로는 주님을 섬긴다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더 섬기는 것 같아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시장의 논리에 휩쓸려 살고 있으면 이제는 “시장이 하나님이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교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이제 세상은 아무도 교회를 신성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세계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수탈하며 부를 누리는 일종의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요.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여전히 불균형한 상태이구요
1). 우리네 정신세계는 전 세계에 몰아닥친 왜곡된 해체주의적 물결에 휩쓸려 이제는 허무주의만이 가득하고 오히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눈에 확실한 것을 보여주며 대중을 선도하는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것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2차 대전이나 황우석 사건 같은 것은 그런 대표적인 예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인간답게 사는 법을 공부하던 철학을 비롯한 각 종 인문학이 사라질 지경입니다. 그리고 실용성만을 추구하며 오로지 먹고 사는 데만 유용한 것을 학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2).

문화는 어떻습니까. 문화란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며 그 사회의 수준을 끊임없이 살아있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란 것은 돈의 논리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일반인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동원해 많이 팔리거나 전문가라는 사람이 방송에 나와 소개해주면 고급문화가 되고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을 지불해야만 누릴 수 있는 그런 형국입니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통해 인간의 말초적인 신경만을 자극하는 포르노 산업만이 꾸준히 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류의 문화가 얼마나 추락하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3).


1)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홀로 짝이 없이 있는 것을 보고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잠들게 하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대목은 가부장제나 남존여비 사상 정당화에 많이 동원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자나 남자는 한몸에서 나와 만들어졌고, 하나가 되어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우리 속담처럼-“일심동체”의 신앙적 증언인 것입니다.


2) 어째서 이런 것만이 쓸모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모르는 돼지에게 진주를 안겨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매우 비싼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면서도 저질스런 운전매너를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이치 아닌가요?


3) 심지어 인간의 영혼과 사랑의 교류가 없는 무분별한 성행위마저도 인간의 본능이라 가르치는 포르노 산업과 이에 이용되는 각 종 미디어는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본래 섹스란 것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동물적 본능. 즉, 생득적 능력입니다. 여기에 정신적 동물인 인간은 그 속에서 고차원적인 사랑과 영혼의 교류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창조과정과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그 어떤 동물이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는 말입니까. 오로지 인간만이 합니다. 이것이 각 종 포르노를 중심으로 한 성산업의 발달과 맞닿으며 아무런 감정교류가 없는 특히, 남성의 판타지 충족만을 위한 성행위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인생을 사는 게 고달픈 겝니다. 주님의 뜻이라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곳이니까요. 에덴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양새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교회에 가 평안을 찾으며 본향을 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또 여러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족과 재산, 인간관계까지 모두 잃어 갑니다. 그저 죽어서 천국가는 게 구원이라 여기는 거지요.


  사실 구원이란 그렇게 단순한 얘기는 아닙니다. 세계의 신학이 설명하는 구원만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모두 지적하는 분명한 것 하나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구원받은 기쁨의 삶이 되지 못하고 죽은 후에야 구원받는 것은 진정한 구원이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지요. 죽었던 나사로의 삶을 바꾸셨고, 우물가의 여인의 삶을 바꾸셨으며 모두에게 돌팔매질 당하던 여인의 삶 또한 구원받은 삶으로 바꾸셨던 겁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그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로 충만하여 자기가 거짓되게 거둔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까지 하였지요.


  결국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이 땅에서의 내 삶 또한 구원받은 에덴의 삶이 되게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말입니다. 세상을 두개로 구분하여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등으로 단정 지어 보지 말고 말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세상은 땅과 하늘, 영혼과 육체, 이상과 현실 등으로 구분(이원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의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속에 있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전일적 세계체계”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것은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어떻게 육체 없는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영혼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약해지는 것이고, 반대로 강한 정신을 갖고 있으면 약한 육체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요. 바울 역시 부활은 영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육체의 부활이 있다하였고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첫 열매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제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읽는 고운님이여. 우리는 죽어서만(!) 본향1)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 역시(!) 본향처럼 살아 갈 수 있어야 하지요. 더욱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추종하는 물질적 가치는 멀리하고 아둔해지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둘로 보지 말고 하나로 온전히 통전시켜 나갈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히브리 사람들은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고, 신성화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떨어져버린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냥 잠자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것도 지하세계. 즉, 스올에 내려가서 말이지요. 스올이란 하나님의 영이 비취지 않는 곳 이구요. 하지만 주님의 사람들은 훗날 부활할 때 신령한 몸으로 모두 일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증언이구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옥에 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 거지요. 사실 지옥이란 말 자체가 불교 용어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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