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극단적이면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이나 집단은 대화가 통화지 않는 경우가 많아 멀쩡하던 사람도 멀쩡하지 않게 하고,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건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든 자신만의 '진리' 가 있지요? 그리고 이걸 믿는 '신앙' 이란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타협의 문제가 될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해야할 문제가 됩니다. 그래야 내 종교와 내 신념, 내 신앙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정말 내가 믿는 진리가 유일한 진리이고, 생명이라 생각하여 포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과 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해보자 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반드시 해야만한다'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그 종교는 폭력이 되어 버리고, 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맙니다.



어제 H대 신대원에서 부처님 오신 날 축하 현수막이 찢겼다 다시 걸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가 다녔기도 하고, 다시 다닐 예정이기도 하여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 내용보다 흥미로운 게 그 밑에 달린 댓글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댓글이 달린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예, 신학적 입장과 해석이 다른 그래서 교단이 다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 열정과 헌신적인 삶의 자세를 보며 저는 많은 반성을 하고, 제가 꼭 배워야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자신들의 믿음의 방식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크리스챤이고, 핵심적인 믿음 즉, 십자가나 부활, 성령, 삼위일체론 등은 사실상 같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상대를 정죄하려 하는 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꼭 상대를 무섭게 몰아쳐 구석에 몰아넣을 필요까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부모님 없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생선장사를 하시던 조부모님과 살며 나름 재능있었던 태권도와 주먹을 쓰며 자칫 탈선의 길을 걸을뻔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부터는 허리가 부러질정도로(실제 부러졌지요. 그래서 수술도 했다는..ㅠ.ㅜ;;) 지독하게 살아왔습니다.

너무 힘들었지요. 이건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천만원이 드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고..그러면서 학업을 하고..길을 걷다 졸아서 다쳐보지 않고, 밥을 먹다 지쳐 쓰러져 국을 온 몸에 쏟아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저 바람몰이 이 사람. 지금가지 믿음 하나로 한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 하게도 저희 집에서 크리스챤은 저와 할머니 뿐이었습니다. 저희 큰 고모님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마저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십수년간 살아오는 모습을 보며 '야, 너 사는 거 보니까 나도 교회라는 거 한번 다녀봐야겠다' 라고 하십니다. '너 목사 되면 내가 꼭 너희 교회 나가고 싶다' 라고 하십니다.

제가 제 신앙과 제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얻게 되고, 지금까지의 노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좀 쌩뚱맞은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주식투자 해보셨습니까. 주식 격언에 보면 '언제든 갈 종목은 반드시 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락장에 폭락장이라도 결국 좋은 재료가 있고, 모멘텀이 있는 종목은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고, 유일한 진리 즉, 절대성을 담보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절대성은 수많은 상대성 속에 굳이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좀 넓은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이 사회를 사는 구성원이자 내 이웃이고,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그들의 신앙도 가치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하여 내가 믿는 진리가 퇴색하거나 가려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핏대를 세우며 싸우거나, 상대를 지옥불에 던져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어 삶이 변하고, 그 존재가 새로워져 새 삶을 살게 된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에 관심을 갖고, 당신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P.S : 미리 밝혀둡니다만 저는 종교다원주의자 아닙니다. 제가 꼭 이 주제만 다루면 저를 종교 다원주의자라며 몰아세워 저를 정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신앙이 없다니, 예수가 진짜 살아있는지 돌아보라니..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 이 사람 예수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고, 신앙 하나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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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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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득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닌 '나만의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일제 치하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기독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 기도, 내 가족 기도 밖에 안 들립니다. 가끔 '우리'가 나올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우리 교회'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썩 편치가 않습니다. 그 내용 중 교회 성장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먼저 성경의 하나님은 특정집단이나 종교, 민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구약 성경의 주요 오해소지 문구 해석과 신약의 주요 강조점을 통해 간략히 밝히고,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후 나름의 결론을 맺으며 글을 진행합니다.  



2.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철저하게 공동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특정지파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생명과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2-1)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 으로 주로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여러 지파와 집단이 존재했는 데요. 이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특정 지파나 집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 이나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식의 표현 또한 볼 수 있는 데요. 이것 역시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들의 신앙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특정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전 공동체적 의미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더 짖게 뿜는다 할 수 있겠습니다.

2-2)신약시대에 이르러는 이것이 더욱 확연해지고, 범위가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핵심인 예수유대인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 유대주의, 독선, 아집 등의 배타성을 철저하게 거부함에 이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에서는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을 높이며 그 뜻을 설파했고, 몹쓸 병에 걸려 배척받던 병자를 치유하였습니다. 또한 차별받던 여성의 역할과 그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막과 휘장이 찢어지며 하나님이 특정 종교나 집단,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잘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을 통해 하나님이 만유 위와 만유 안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전 생명과 우주질서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고백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한국 기독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를 기독교라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기독교'보다 '개독교'라 부르는 걸 더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목사' 는 '먹사 새끼'라고 부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1)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저는 그 원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특별히 한국 기독교인만이 갖고 있는 자기들끼리는 친절에 사랑이 넘치면서 다른 종교나 세상과는 분리된 듯한 또한 다른 종교나 생각을 갖지 않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종교든 그 폐쇄성과 배타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종교만의 고유한 '신앙'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신앙을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고, 이것이 신앙을 갖지 않는 다른 이에게는 '폭력'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선교하는 것 좋습니다. 어떤 종교든 선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걸 끊임없이 강요하나요. 왜 지옥불 얘기를 하며 협박을 하나요. 자신의 선행과 사랑, 변화된 삶을 통해 '아,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변하는 구나. 이런 힘든 상황도 살아가는 구나.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런걸까' 라는 말이 나오도록 선교할 수는 없는걸까요.

3-2)  굳이 선교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필요 이상의 이 폐쇄성과 배타성이 사회적으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을 넘어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일반인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을 넘어섰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 어떤 종교든 그 종교만의 특정 신앙의 영역이 있고,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그걸 신앙이라 하는 거고, 이걸 고백하는 이가 그 종교의 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것에 함몰된 나머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영역은 완전히 배제되어버렸고, 사회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멀쩡한 절에가서 불을 지르고, 학교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 목을 벱니까. 왜 이웃에게 저 사람이 나를 스토킹한다는 말이 나오게 합니까.

3-3) 어떤 분들은 제 가슴속에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시나 돌아보라 하던 데요. 그래서일까요. 저같은 사람은 지하철이나 옆집 앞에서 시끄럽게 확성기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그 시간에 노숙인과 독거노인, 외국인 근로자, 장애우 등을 섬기는 것이. 용산 참사현장을 찾아 함께 연대하고, 싸이코패쓰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라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것더 큰 선교의 효과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옳고, 사회적으로도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정말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4.어제 아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곳을 잠시 들를 일이 있었는 데요. 그 상가 앞을 보니 "세계정복 00제자" 란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내건 광고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세계 전체에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이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선교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지요.

한국 기독교는 좀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존재라는 철학용어가 있지요. 어떤 인간이든 그 시대와 문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반드시 자신들이 얘기하는 것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비롯된 폐쇄성과 배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신들의 전략적으로도 자충수를 두고 있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공격성과 배타성으로는 이 사회의 화해자가 될 수도 평화의 사도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마당에 그렇게 주장하는 선교가 될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를 존중하고, 말 그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섬김의 삶을 살 때. 이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단호히 저항하고, 끊임없이 팽배하는 물신주의에 제동을 걸며 뭔가 다른 삶을 살 때.

그 때야 비로소 교회는 교회답다 인정받고, 크리스챤은 뭔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며,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하는 기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1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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