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면서 아픔을 겪습니다. 아픔이란 어떤 폭력이 가해져 내가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픔을 겪게 되면 기쁜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 활기찬 감정보다는 우울한 감정, 밝은 감정보다는 어두운 감정, 평온한 감정보다는 짜증나는 감정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것은 생명의 본능 때문입니다. 생명은 뻗어 나가려고 하고, 서로 에너지를 나누려 합니다. 그래서 내 생명을 가로 막거나 침해하는 것에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이것을 이겨나가거나 해결하여서 평온의 감정을 찾아가고 싶어 합니다. 

픔을 겪는 것은 내 잘 못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환경은 대표적인 문제원인 중 하나 입니다. 부모님이 항상 싸우는 가정이 있습니다. 때론 부모님이 너무 화가 나서 나를 많이 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를 때리지 않는다 해도 이런 환경 자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부모님이 함께 살지 않아 내 마음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내 모습 때문에 누가 나를 때리지 않아도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참 힘들지요. 그 어려운 마음을 이해합니다. 너무 힘들면 좀 더 쉬어도 됩니다. 충분히 마음을 추스리고 일어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을지 아니면 다시 일어설지는 스스로의 선택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모든 사람이 아픔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우울해 하거나 다른 사람을 안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심각한 아픔을 겪었음에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프라 윈프리는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가 2주 만에 죽었지만 아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아픔을 이겨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아픔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알차고, 깊이 있게 성숙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삶에서는 상상할 수 없거나 해낼 수 없는 것들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닌 생명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억누르고, 힘들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이 나를 아무리 억누른다 해도 내가 지닌 생명의 기운은 이것보다 더 활력 있고, 생동감이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믿지 못하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념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내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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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살이의 중요성

건강을 유지
하는 가장 큰 비결이 무얼까. 좋은 약을 먹는것. 당연히 아닐 것이다. 강한 육체를 갖기 위해 극한의 훈련을 하는 것. 이것 역시 아니다. 전자는 일시적인 효과에 그치고, 후자는 오히려 신체를 상하게 하기도 한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마음으로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면 이것보다 건강을 유지하는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우리네 조상님들은 이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네 삶을 "살림살이"라 하였다. 삶자체가 서로를 살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의 살림살이는 매우 중요
하다. 서로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살아갈 부부가 서로를 살리는 삶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닌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으로 귀결될 뿐이다. 


가사를 분담하는 것과 전담하는 것의 차이

평소 나는 가사 분담을 40% 이상 하고 있었다 자부하는 편이다. 또 아내 역시 이런 나였기에 아무것도 없는 필자를 선택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한다. 확실히 이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서로 별 부담없이 경제적으로는 힘들지만 재밌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확실히 가사를 전담하게 되니 상황이 달라졌다. 서로를 살리는 행복한 삶이 잘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분명 좀 더 자신을 잃어가고, 힘들어하는 한쪽이 생기고 말았다. 감정조절에 실패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입에서 사랑과 생명이 담긴 말보다 공허한 잔소리와 상처를 주는 말이 더 많이 나오고 말았다. 대화의 창이 점점 닫혀지고, 서로를 이해하며 배려하는 것 역시 줄어
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깨"가 쏟아지는 삶이 짧은 이유

아마도 이것은
필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흔히 결혼은 현실이라 하고, 때론 미친짓이라고까지 하지 않던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엔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삶은 대개 1-2년에 불과한 것 같다. 길면 3-4년이 대부분인 듯 하다. 참으로 아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환상에 젖어 살다 현실에 돌아오니 더 행복하더라' 라는 말이 나오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는걸까.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산과 양육, 가사를 도맡아 하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는 배우자가 있고..또 밖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자신을 이해하고 품어주기를 바라며 이런 모습에 실망하는 배우자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은 미움 또는 짜증이 되고 이것은 언어로 표출되고 마는 현상이 반복된다. 비아냥과 무시의 발언이 쏟아지며 대화의 창이 닫히고
만다. 그러면 누군가는 자녀에게 지나치리만큼 관심 또는 집착을 하게 되고, 또 다른 배우자는 일과 취미에 열중하고 만다.
 

변화를 위해 나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혼" 까지 맺는다는 "결혼"을 하는 걸까. 그것은 서로를 살리기 위한 삶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얗고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와 멋들어진 턱시도를 입으며 그 출발을 아름답게 수놓는 것은 왜 일까. 첫 단추부터 아름답게 시작해보자는 게 아닐까. 그런데 고작 몇 년만에 이렇게 감정이 식어버리며 살게 되는 것이 결혼생활이라면 확실히 이런 건 그다지 권할만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는...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누구의 잘못이란 걸 따지기 전에...나는 이게 불만이다 말하기 전에...내 인생과 이 가정을 위해...과연 나는 내 배우자를 이해하고, 배려해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나
돌아볼 일이다. 서로를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아무런 발전도 없는 소모적인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사회구조나 통념 역시 중요하다. 이것 역시 폐기 또는 변화될 부분은 시대정신에 맞게 흐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부부의 결혼생활에 가장 1차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내 배우자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려는 바로 나 자신의 노력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백여일간 남편전업주부로써의 내가 느끼고, 깨달은 바이다.


정리하며

지난 백여일을 거치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직의 문제와 살림에 치이며 정신적으로 많이 어렵기도 하였다. 하루하루가 아무런 의미없이 흐르는 것만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이 글을 쓰는 오늘 나는 내 자신의 성장을 보며 감사하게 된다. 아내를 더욱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다짐하게 된다. 서로를 살리는 생명살림의 삶을 꿈꾸며 이것이 내 삶의 한복판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읊조리게 된다. 이것은 아내와 나의 "혼" 까지 맺게 한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살려내고, 내 자신의 행복이 실현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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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봅니다. 어둠과 함께 울려대는 크나큰 천둥소리를 듣고 천지를 번뜩이는 벼락을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무서움과 거대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작은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낀다는 건 내게도 생명이 있음이고,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그 분의 생명호흡 안에 있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인간에게 뭇 생명을 맡기고, 역사를 만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한없이 나약하지만 한없이 큰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사람이고, 이 생명을 없애는 것도 사람입니다. 세상의 희망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도 사람입니다.

선택은 사람의 몫입니다. 무엇보다 "나" 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있게 감당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내가 어렵고, 소외된 이들과 얼마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생명의 싹이 트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때로 저는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사는 삶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네 소시민의 삶이란 대부분 이럴 듯 합니다. 이런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이란 생각도 들지는 않습니다. 한번쯤 쉬어가듯 인생의 큰 물결에 나를 맡길수는 있으나 내 온전한 정신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알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였고,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미쳤다 소리를 듣는 병자를 치유하며 너의 인생을 살라 했을 것입니다.

어제 창세기를 읽으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위해 늙은 종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앞에 나와있는 대목 즉, 아브라함에 이어 그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자신의 인생을 정체시키지 않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은..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 사람은...아브라함에 이어 이삭, 야곱, 다윗, 예수에게까지 이어지는 축복이 임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대지를 울리고 적시는 이 천둥과 벼락, 굵은 빗줄기 속에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다듬어 봅니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언제나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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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떻게 하면 힘차고, 재미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저는 이런 고민을 하며 참 단순한 계기를 통해 해법을 찾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늘 걸어다니며 출퇴근을 하면서였는데요. 단순히 시야만 바꿔도 그 삶이 변한다는 게 제가 터득한 작은 지혜였습니다.

걷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과 성향을 알 수 있지요. 팔을 경쾌하게 저으며 발을 끌지 않고 걷는 사람은 대개 긍정적이고, 밝은 삶의 자세를 갖곤 합니다. 이런 분들의 시야는 정면을 향하고, 대략 15도 정도 앞을 내다보며 걷곤 하더군요.

반대로 고개를 숙이고 발을 끌면서 다니는 사람은 뭔가 조금은 자신감이 없고, 기운 없어 보이곤 합니다. 이런 분들 특징이 항상 아프다는 소리나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구요. 늘 땅만 바라보며 걷곤 합니다. 그리고 꼭 땅만 보고 걸으면서도 먼저 넘어지곤 하더군요. 대화를 해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2.우리가 땅만 바라보고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사람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여유와 가치를 잃어버린채 먹고 사는 것과 물질에 붙잡혀 버린 삶. 기계화되고 합리적 이성만을 절대화 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삶 등으로 받아들입니다.

예, 이거 나쁘다는 거 아니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는 너무 여기에만 치우쳐 사니까 이건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자꾸 그러다보니 삶에 여유가 없어지고,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 이웃은 물론 가족끼리도 핏대를 세우는 삶이 되고 말았지요. 뭔가 이해해주려 하고, 양보하려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맙니다. 심지어는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마저 함부로 이용해버리고 마는 요즘이지요.

때론 한번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삶도 있지요. 크게 숨을 돌이켜보는 삶도 있고,  비논리적인 것 같아도 정이 있고, 사람 냄새가 나는 삶도 있습니다. 모두가 높은 곳에 오르려 할 때 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삶도 있고, 나보다 더 어려운 이와 손을 붙잡고 사는 삶도 있지요. 저는 이런 삶을 하늘바람을 들이마시며 이 땅에서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 여깁니다.


3.가만보면 어느 것이든 극단에 치우치면 늘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그 중간에서 어중간..해도 문제가 있더라구요. 결국 자기의 색깔은 있지만 나와 다른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에서 좋은 점을 내가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사람이 참 행복하고, 큰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이성적이려고만도 하지말고..너무 돈만 빠져 살지도 말고..또 그렇다고 세상모르게 '나혼자 행복해요..' 라고 살지도 말고. 내가 내 인생을 더 책임있게 사는 맑은 정신을 갖고, 조금은 큰 마음으로 인생을 받아들이며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예, 사실 말이 쉽지 참 어려운 얘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는 있지요. 저같은 사람은 종교를 갖고, 봉사를 하며 살지요. 또 어떤 분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취미를 갖기도 하구요. 어떤 분은 가족을 더 소중히 여기며 챙기고, 그런만큼 어려운 이웃을 챙기기도 하더군요. 

음.. 확실히 그냥 나혼자 삶의 타성에 젖어 사는 것 보다는 좀 나아보이지요? ^-^

행복한 주말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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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호흡을 고르라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9. 3. 13. 14:41 Posted by 바람몰이

호흡의 중요성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볼 때 어디를 보십니까? 흔히 듣는 대답은 제 경우 "눈"이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은 몸매를 보기도 하고, 어떤 분은 손끝을 보신다는 등 참 다양한 사람처럼 대답도 다양합니다.

저는 그 사람의 "호흡"을 봅니다. 그 사람의 기질과 생명력이 바로 "호흡"에 있다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잘 보시면 유난히 성격이 급하고,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가 호흡이 짧고, 거친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너무 여유로운 분들의 경우는 호흡이 가늘고, 여릴 때가 많지요. 호흡이 가늘다보니 힘이 약하거나 부드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네 조상님들도 이걸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숨졌다'라고 하고, 무술수련을 하면 '운기조식'이라 하여 호흡과 몸의 흐름을 조절하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호흡(생명의 바람)

그런데요 참 재밌는 것이 유대인들도 이 호흡을 참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우선 아래 성경 구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5-6)


유명한 에스겔의 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포로기의 암흑과 무덤에 갇혀 있던 유다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은 바로 '생기' 즉, 하나님의 영이자 바람인 "루아흐"가 들어가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하는 호흡과 성경이 말하는 호흡의 다른 점은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 유지에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생명이 결부된 문제라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내 인간적인 호흡에서가 아닌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던가 기억해봅시다. 성경이 뭐라 합니까? 예, 생기를 불어 넣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생기가 바로 하나님의 바람, 생명의 영인 '루아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바로 호흡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얘기입니다.


내 호흡을 쏘아대기만 하는 우리의 기도

여기서 우린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너무 뜨겁게만 하려 합니다. 정신 없이 쏘아대기 바쁘다는 얘기입니다. 호흡을 내뱉는 것에만 너무 익숙합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생명의 바람, 영을 들이마시고 음미하며 내 안에서 고를 시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주님 음성이 들릴리도 없고, 그 뜻을 헤아려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게 아니지요. 예수님도 기도의 정수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대로 하시라 함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영도 내 이기적인 욕심의 영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 화해와 사랑의 영. 정의와 바름, 낮음과 섬김, 헌신이라는 주님의 영과 주님의 호흡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내 호흡이 내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분노와 원초적인 기쁨에 좌지우지되는 어설픈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중심있고, 나를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비우는 호흡처럼 될 수 있도록 즉, 내 영이 주님께서 보내주신 그 거룩한 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그래야 성령님도 임하실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이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어 내 영이 부흥하고, 마른 뼈나 죽은 것 같은 내 영이 다시 사는 데는 주님의 바람, 호흡, 영이 오실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호흡으로 내 이기적 영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약한 자들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과 호흡으로 안아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패와 폭력, 불의와 어둠 앞에서는 성전 가판을 뒤엎는 불길 같은 호흡과 거룩한 분노로 임하셨습니다. 모진 고통을 이겨내는 끝없는 비움과 사랑의 호흡으로 골고다 언덕을 인내하며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 내 호흡을 차분히 고르며 가야 합니다. 너무 바쁜 세상이라고 나도 이에 편승하여 주님의 뜻과 은혜를 다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요. 심지어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이것도 저것도 열심히 한다 자기만족에 취해 있으면서 정작 그 시간은 주님께 내 호흡을 쏘아대기만 바쁘기도 합니다.

이건 좀 아니지요. 신앙생활.. 내 만족을 위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거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 삶이 그 분의 형상대로 달라져야 하고, 내 자신이 먼저 서야 합니다. 바로 그 핵심에 주님의 영, 바람, 생명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서 고르는 호흡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생명호흡이라 하는 거지요.

자, 오늘은 한번 침묵으로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며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생명을 느끼는 기도를 해보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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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장인어른께서는 농사를 지으십니다. 쌀, 고추, 딸기, 방울 토마토 등 여러 가지를 지으시으시는 데요. 이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딸기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희 장인 어른 딸기보다 맛난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간척지 딸기라 얼마나 맛이 좋은지 모릅니다. 지난 주말 저희 부부는 이런 장인 어른 댁에 갔었는 데요.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말 있었던 딸기 수확의 모든 것을 공개해보고자 합니다. 


딸기밭 정경


"딸기밭"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딸기 하우스" 모습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땅에 바로 키웠었는 데요. 올해는 다양한 기술과 재배 방식을 연구하셔서 새로운 도전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우스 내부가 참 깔끔하고, 커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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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꽃 보신 적 있으세요? 아마 딸기꽃이 있는 줄도 모르는 분이 많으실 것 같은 데요. 아니면 있어도 직접 보지는 못했거나 말이죠. 바로 이것이 딸기꽃입니다. 참 예쁘죠? 직접 보면 더욱 예뻐 보입니다.


두번째 사진을 보면 "벌"도 보이지요? 이 벌은 자연스런 딸기번식을 위해 일부러 풀어 놓은 것입니다. 제가 약간 위험해보여 장인 어른께 여쭤봤더니 사람이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절대 쏘지 않는다 하네요. 만약 내 몸에 앉아도 가만 있으면 알아서 날라 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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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진제가 딴 딸기의 모습입니다. 핑계 같지만 제가 가던 자리는 딸기가 얼마 없더라구요. 물론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하도 많이 먹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말이죠. 딸기를 따고 나면 그냥 보낼 수가 없더라구요 ^.^;;


두번째 사진장인 어른께서 따신 딸기 모습인데요. 저와 너무 비교 되네요..ㅠ.ㅜ;;



딸기 생산자에게는 이런 박스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는 건 아니구요. 모두 손으로 접어서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럼 이런 모양이 나오게 되지요. 이제 여기에 수확한 딸기를 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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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진1차 포장을 마친 모습인데요.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집니다. 장모님께서 정성을 다해 너무 예쁘게 포장하시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1개의 박스에 넣은 모습인데요. 모두 특상품으로써 1박스에 2개씩 들어갑니다. 무게는 1.5kg 이상입니다. 세번째 사진은 박스를 쌓아둔 모습이구요. 씨알이 굵은 것만 모아둔 것입니다.

쌓여있는 박스 옆에 보면 씨알이 중간 크기쯤 되는 것이 있습니다. 상당히 크지요? 이걸 개인적으로 팔면 한 상자에 7천원씩 받으신다 합니다. 제가 시중에서 보니 H 더하기 마트에서 1kg 짜리 한팩에 7천원씩 하던데요. 하여튼 중간 도매상 몇 번 거치면 살이 많이 붙습니다. 농민 입장이나 소비자 모두 좀..ㅡ.ㅡ;;


막딸기입니다. 이걸로 딸기잼을 만들곤 하지요. 무지 맛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중간크기 딸기상자를 확대한 모습입니다. 이건 흔히 "막딸기"라 하는 데요. 대개 딸기잼을 만들 때 쓰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걸 더 좋아합니다. 이게 은근히 맛있지 말입니다 ㅋ 손이 계속 가게 됩니다.


하트 모양의 딸기.


참 예쁘지요? 수확하다 나온 하트 모양 딸기입니다. 너무 예뻐서 찍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상품성이 없답니다. 그래서 기냥 바로 제 뱃속에 들어갔습니다~ㅎㅎㅎ


농사처럼 정직한 일이 또 있을까요. 농부의 땀과 정성이 들어간 만큼 수확이 되고, 맛이 나곤 합니다. 아마도 저희 장인 어른께서 기르신 딸기가 맛있는 것은 그 속에 그만큼 장인 어른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그 마음을 받고 온 것이겠지요.

우리가 농민과 농산물을 보는 마음도 조금은 달라졌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단순히 돈 주고 먹거리를 산다는 것보다 생명과 이들의 마음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죠. 

서로가 서로의 마음과 기운을 주고 받을 때 우리의 삶과 사회 모두 한층 더 풍요로워지고, 감사하는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려봅니다.


덧1) 몇 분께서 딸기체험마을을 문의하시어 글을 더합니다. 현재 저희 처가쪽 마을에서도 딸기체험마을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희 장인 어른께서 운영하시는 딸기수확체험을 하시려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1) 장인어른과 전화를 통해 스케쥴을 잡으시구요. 
2)가벼운 마음으로 하우스에 오시면 됩니다. 위치는 충남 보령이구요. 춘장대 IC에서 정말 10분 거리입니다. 
3)어떤 딸기를 따고, 어떻게 따야 하는지 간단히 배워봅니다.
4)1kg 짜리 상자를 받고 재밌게 딸기를 따시면 됩니다. 따면서 그냥 드셔도 됩니다모두 무농약입니다. 23개월 된 저희 애도 그냥 따서 먹습니다.
5)딸기를 모두 딴 후 원하시는 경우 포장하는 것까지 배우실 수 있습니다.
6)체험비용은 1명에 (체험비 + 수확한 딸기)=1만원입니다. 성인, 소인 모두 똑같습니다. 
7)인근에 춘장대 해수욕장(15분거리), 조각공원 + 석탄박물관(20분거리), 성주산 산림욕장 (20분거리), 보령댐(20분거리) 등이 있습니다. 연계하여 관광하시고 돌아가시면 당일 여행코스로 아주 좋을 것입니다. 

장인어른께서는 평생 농사를 지으시고, 현재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입니다. 참 점잖고, 친절하십니다. 말 그대로 그냥 시골 할아버지 같으십니다. 혹시 인연이 닿아 체험을 하시게 된다면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로 남겨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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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제게 충격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최후의 대예언"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연구하는 무슨 단체에선가 발행한 것이었는 데요. 요지는 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모두 맞춰왔었고, 이제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으며, 이건 틀림이 없을 거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허나 이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지금 돌아보면 이들은 노스트라 다무스를 팔아 이슈를 만들어 먹고 사는 뭐 그런 부류에 불과했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좀 다릅니다. 예언으로 먹고 살기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은 한문으로 미리 예자를 씁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 즉, 맡을 예자도 있습니다. 뭔가를 맡아서 얘기하는 거지요.
성경의 예언자는 그렇습니다. 앞날을 미리 얘기하는 데,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받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어느 날 갑자기 영험하다 하는 산에 올라가 도를 닦다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1)일상에서 생활하며 당시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내면의 영혼을 복합적으로 볼 줄 아는 고도의 학식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2)동시에 하나님께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 있는 매우 예민한 영성을 갖춘 자였고, 오직 3)말씀에 따른 정도가 아니면 죽음도 불사하는 곧은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는 당대의 문화, 사회, 국제 역학 관계, 인간 내면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뜻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곧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언은 먼저 주제 선포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흔히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심령의 회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라는 얘기인 거지요.

즉, 예수는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사람을 신분과 성별 부유함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고, 권력으로 약자를 억누르며, 강자 즉, 기득권 층이 약자 즉,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이로 인해 타락한 영혼과 상처 받고 절망한 심지어 귀신마저 들려버리는 영혼을 보면서 삶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로 천국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 하나님 나라이지요.

왜 우리 나라는 항상 죽은 다음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땅의 삶을 살면서는 천국의 삶을 살려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어야 하고,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그럴 수 있도록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친절하고, 사랑해서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됩니다. 추락할 만큼 추락한 도덕성을 갖고 서는 하나님의 "하"자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언자였던 예수는 크리스챤에게 참으로 힘든 요구 즉, 예언자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냥 편히 교회 출석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맘에 늘 깨어있으라 명을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뭔가 다른 거룩한 삶을 살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곧은 의지를 전하며, 생명의 삶을 살 것을, 평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뒷일을 책임져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은 지금처럼 너무 교인늘리기나 분점 내기에 열중하기보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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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지구 온난하는 논쟁의 여지가 좀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로 에너지 산업에 관련하는 전문가들 중에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지요다. 현재의 기온 상승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기후의 변화일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UN에서 조직한 기후변화 정부간 위원회(IPCC: Inter-governmental Pannel for Climate Change)에서 전 세계 2,500여명의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연구한 결과는 이를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적외선을 흡수하여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기체들인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냉매로 쓰이는 CFC 등이 지난 100년 사이에 갑자기 늘었습니다. 특히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여 65% 정도의 기여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요. 이산화탄소는 산업화 이전에는 대기 중에 250 ppm이던 것이 지금은 360 ppm 이상으로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면 21 세기의 중엽이후에는 500 ppm을 넘을 것으로 예상 된다 하구요.

그래서 다음 세기의 말까지는 더워진 기온으로 인하여 빙하가 녹아 지구의 해수면이 65 cm 이상은 상승하리라고 예측하기도 하는 거지요. 기온이 더워지면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어디보다도 주거지와 농경지가 먼저 바다에 잠겨 인류가 생활의 터전을 잃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홍수, 폭우, 가뭄, 태풍이 세어지고 전염병이 창궐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석탄과 석유를 한꺼번에 다 태운다면 이산화탄소는 지금의 다섯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지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상상하기도 두렵습니다. UN보고서처럼 지금은 기후변화를 인류가 21세기에 공동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보고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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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일이 어색하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12 Posted by 바람몰이



생일을 맞이하는 내 모습은 늘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해마다 돌아오고, 벌써 27번째인데도..

까닭은 "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려 했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모든 사물(생물 무생물 총칭)은 각 기 태어난 날이 다 있다.

내가 태어난 날 역시 그 중 하나이기에 유독 내가 축하받아야 할 이유가 그렇게 많은 것은 사실 아니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내 존재 자체를 기뻐해주고 아껴주어 챙겨주니까 그런거지..

또한 누군가 이 날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그 많은 생일을 일일히 다 챙기는 것도 상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니까..

생일에 대한 적극적인 개념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생일이란 "내가 태어났던 날"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는 날"인 것이다. 매일같이 깨어지고, 또 깨어지며 거듭나는 사람은 매일이 생일인 것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크리스챤은 인식의 전환이 더욱 요청된다. 내 육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크리스챤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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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상실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9 Posted by 바람몰이



균형을 잡는 다 함은 절대 적당한 중간선을 찾는 게 아니다. 진정한 균형은 좌우의 모든 끝을 보고 난 후 내 자신을 온전히 세웠을 때 잡을 수 있다. 내게 잘 해주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잘 보고 내 마음을 다스리며 하늘의 이치에 맞춰 받아들일 줄 알아야 인생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우리네 생명세계나 역사 역시 하늘의 삶과 땅의 삶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한 때 우리의 역사는 땅의 삶을 물리치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추상적인 관념에만 사로잡혀 딴 세상 사람처럼 살 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동서양을 막론하고-학문세계나 정신세계는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힘을 끼치지도 못하고 도리어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의 우리네 삶은 우리네 인간사 속에서 하늘의 뜻과 이치, 그 질서 등을 완전히 배제한채 살아가고 있어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결과 생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되었고, 우리네 정신 역시 그 따뜻함과 깊이, 인간냄새 등이 사라져가고 말초적인 흥분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아주 간단히 도식화하여 정리하여 보았는 데..

실제 우리네 인생과 우주의 이치란 것은-동서양을 막론하고-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그 기본과 끝이 있다. 특별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성품을 입고 땅에 살게 하였다는 성경의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네 인생들이 당면한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신, 하늘, 추상이 지배하던 역사를 박차고 나와 땅, 물질, 현실이 지배하는 오늘의 역사를 거쳐 이제 변증법적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온 생명세상에 하늘의 생명기운을 다시금 불어넣어 흙에서 사람이 되었던 옛 고백처럼 우리네 인간의 영혼과 세상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조금 엇나가는 얘기이긴 하지만..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세계가 지극히 천한 것 역시 바로 이런 더 큰 세계를 볼 줄 아는 이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바로 눈 앞 밥그릇 채우기와 기싸움만 해댈 줄 아는 이가 득실거리기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하늘의 이치와 성품속에 지극한 땅의 삶을 살며 국민들을 인도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럴싸한 대의명분과 시끄러운 입방정으로 가장 천박한 인생사를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좌우의 끝을 볼 줄 알고, 포용할 줄 아는 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그 중심을 잡고 국민들을 편하면서도 좀 더 고귀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우리의 맥으로 돌아와..아무튼 세상의 교회와 크리스챤들이 이런 큰 신앙의 맥락을 알고 살아나가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각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열매를 맺어가고, 그 가운데 예수님과 같은 사람냄새 나고 하늘 냄새나며 그래서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으로 잘 살아가는 생명의 세상을 일궈갈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이 때에 자신의 자리와 삶에서 최선을 다해가며 주께서 다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죄많고 부족한 나이지만..주님의 그 은혜로 살며 최선을 다했노라..열심으로 살았노라..그렇지만 너무 힘들었노라 이야기하며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당당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 여행의 첫번째 도전에 직면해보자.

지금 나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무얼 알고, 무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내 삶은 바로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오시거나 나를 불러가실 때에 나만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열심있고 책임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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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적은 짧은 생각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5 Posted by 바람몰이


필자는 "국제 유가와 패러다임"(
http://blog.naver.com/kkuks81/30005482669)이라는 글에서 국제유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을 예측한 바 있다. 또한 유가 상승으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의 심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성 및 착취성을 밝히며 "생명"을 향한 선택을 강조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설마..'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둘씩 '진짜 그렇게 되는 것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특별히 유류세 및 정유사 횡포가 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부담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정신사적으로는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들이 주는 장점을 놓치고 단점만이 반복되고 있고,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물질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은혜로 바로 잡아가야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선도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특별히 교회가-물질중심의 삶에서 물질과 고귀한 정신이념-정신사로의 상승지향적 성향 포함-,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 및 실증적인 것과 전일적이고도 포괄적이며 유기체적인 것의 조화를 꾸준히 추구해나가거나 유지해나갔다면 지금의 이런 파국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신령한 지혜 및 성령의 인도하심을 세상에서 유행하는 정신사 및 물질적인 삶과 온전히 구분하여 설파하여 나갔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실제 우리는 절벽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상황이기에-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온 생명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까지 기다려 주시며 은혜를 베푸셨기에 이렇게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네 인간이 가지는 본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비본래적인 상태(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참조)에 있는 즉, 원죄에 빠진 상태인 인간이 지닌 이기성과 욕심, 잔학성, 폐쇄성, 정체성, 보수성 등으로 대변되는 그 본성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필자의 주장이 꼭 다 들어맞거나 모두 공감하지 않는다해도) 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따라서 다양한 주장이 오고가는 것이며 여기에는 당연히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현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좀 더 물질적인 풍요를 중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네 인간의 심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본래적 상태에 머문 본성이었다면-우리는 에덴동산의 낙원과 같은 상태처럼-얼마든지 서로를 비판적으로 돕고 도우며 꾸준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 아니었겠는가.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논리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온 인류의 언어가 흩어지고, 다르게 된 것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알아가고, 타개해가며, 새로운 앞길을 열어 가는 것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며 그 거대한 물줄기를 생명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이다. 정작 문제를 일으키고도 깨닫지 못하고 뻔뻔하게 자기를 죽인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믿고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판단해가야 하는 걸까..

우선 조화를 깨뜨리는 지극한 편향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지극한 편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그 끝에서 하나의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설픈 편향으로 인한 폐쇄성일 것이다. (오늘의 삶이 지극히 물질적인 삶에만 편향된 것은 어쩌면 이것이 어설픈 편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물질적인 땅의 삶에서 고귀한 인간애를 깔고 있는 하늘의-하나님의-삶으로의 반전을 통한 변증법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일적인 삶의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말고..은혜마저 값싸게 팔아버리지 말고..겸손하면서도 열심있는 삶의 추구를 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지향 및 소비지향적 성향을 이겨내고, 지속적인 개발 및 유지가 가능한 생태적이고도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만큼 살아가며 휴머니즘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역사적인 생명으로의 삶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이고도, 전생명적인 삶과 조화가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성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의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인류의 하나됨과 행복의 추구 및 생명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 빈부격차 및 자연, 영혼과 생명의 파괴를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끝으로 우리 한명 한명이 "성인군자(?)"가 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인군자라 하니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며, 온 생명을 볼 줄 아는 시대와 역사, 생명을 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른 '의식화(?), 계몽(?)' 등이 된 성숙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어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며 날마다 거듭나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아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나와 우리가 사는 오늘을 바로 보고, 뒤를 반성하며, 내일을 살아가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기체적이고도 정신지향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삶의 현실속에서 전일적으로 판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워낙 두서없이 쓰다보니 서론이 좀 긴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글이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하려는 말은 알아서 흘리고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분명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다시 건강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책을 필자는 제시한 것이니 이를 통해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나를 돌아보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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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서 저는 가인과 아벨, 노아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그리고 싫어하시고 죄로 여기시어 심판 하셨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이 갖고 있던 바알문화. 즉, 풍요에 모든 걸 “올인”한 물질문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빈부격차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 되었던 것. 종교 간의 혼합을 통해 “성전창녀”와의 성행위로 문화가 난잡해져 갔던 것.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고귀한 가치들.

즉,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 등이 훼손되고 주님의 백성으로써 갖는 순수성이 사라졌던 것 이었습니다
1). 바로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심판하며 지적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목회자가 벤츠를 모는 시대입니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돈이 최고야’의 가치가 팽배합니다. 시대의 양심과 지성의 전당인 대학조차 돈이 되는 것만 하려 하는 시대입니다.

국가 역시 국민 개개인을 하나의 존엄한 사람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인적 자원으로만 여깁니다. 도박이 판을 치고 밤거리는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지역 공동체는 산산히 부서져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조차 모르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저는 이런 현상은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사 속에서 하나님을 삭제해버리거나 자기 중심적 물질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네 크리스챤의 책임이 매우 큼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와 같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나 맘몬을 숭배하는 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이를 방치한 우리네 크리스챤은 더욱 중한 책임을 갖는 것이니 말입니다.


  세계 경제적인 측면은 더 급박합니다. 먼저 중심부 국가(선진국)의 풍요와 부는 주변부 국가(제3세계)의 착취를 통해 이뤄졌음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한 때 경제학계에서는 궁핍화 이론이라는 게 유행했던 시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쉬운 예로 축구공이나 다이아몬드를 봅시다. 보통 월드컵에서 사용하는 축구공은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어린이들이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합니다.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90%이상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강제노역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거래를 통해 나온다 합니다.


  둘째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나얀 찬다라는 학자는 세계화는 인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매우 오랜 역사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요 세계화 자체는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가며 서로 더 이해하고 협력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심한 빈부격차와 국경을 초월한 서민들의 피해를 양산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참고자료로 올려 놓은 제 글을 읽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끝으로 금융 세계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금융 세계화가 문제인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반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융 세계화란 환율, 이자율, 유가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화를 시작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때,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외환 시장, 유로 통화시장 같은 단기 금융시장을 활용하여 현금 플로우를 관리하고 환투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금융 세계화란 것은 투기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또한 각 국의 중앙은행은 재무부로부터 독립하여 고도금융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구요.


    엘빈 토플러 같은 학자는 장미 빛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나 지오반니 아리기 같은 학자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체계란 헤게모니와 축척체계로 구성된다고 하는 데, 헤게모니란 군사-정치적 힘을 뜻하고, 축척체계란 자본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UN이나 IMF가 되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은 미국의 시대이지요. 실제 UN이나 IMF 역시 모두 미국에서 구상한 것들입니다. 대공황이 끝나고 미국의 작은 브레튼 우즈라는 곳에서 만나 처음에 구상한 것이 바로 GATT-WTO 체제 였고, 군사적 측면이 UN체제 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지금은 WTO-UN-IMF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신자유주의나 FTA 같은 것도 모두 미국의 세계지배 원리와 관련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지금은 경제나 군사나 정치 어느 것 하나 미국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 미국 경제는 G7 국가 GDP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하거나 더 큽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나라도 없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 세계화의 특징은 바로 미국의 위기를 의미하고 군사적 물리력 사용의 증가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협을 받고 그 체제가 와해되어가고 있는 심각한 증거라는 겁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하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본주의 최후의‘체계적 카오스’ 또는‘일반적 위기’의 심화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얼마 전 있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만 해도 전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발 경제위기의 맛을 본 것에 불과하지요. 만약 정말 미국발 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면 그 피해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피해는 세계의 힘없는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말겠지요.

그러니 제가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겁니다. 엄연히 그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으니 저희 같은 사람은 그것마저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판단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전해야하니 말이지요.


   아무튼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를 선진국이라 마냥 부러워하며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우리도 이렇게 잘 살게 해달라 기도하지요.


  성도 여러분. 가난은 미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가난을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해서 풍요로워지는 것 역시 바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사람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살생하는 것과 어느 한 곳만 부가 집중되어 다른 한쪽은 고통 받는 것 역시 원치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은총만을 기도하며 겸허히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1) 다른 신이나 종교에 빠진 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당시는 종교와 삶, 사회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인 사회였습니다. 한편, 그 종교가 갖는 경전은 캐논(canon)이라 하여 삶의 지표이자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와 신에 빠진다는 것은 그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과 문화 자체가 변해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뜻을 따르는 종교인 데 바알 문화에 젖어 종교가 혼합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고귀한 가치들이 배격되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그리고 가만히 계실 수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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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야기-(1)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09 Posted by 바람몰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에서 흙을 취해 만들었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온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다스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노동력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사고 파는 “경제생활”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우리네 삶의 모습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님들은 땅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하였지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절은 처음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합니다. 아무런 질서가 없는 “카오스”상태인겁니다. 이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계셨다 하는 데, 구약학자들이 보다 원어 자체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자면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이 그 물을 감싸 안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의 혼돈을 하나님의 영이 감싸 안으며 생명과 질서를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거라는 말이지요.


인간을 만드신 후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루아흐”인데, 이것은 숨, 바람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하늘에서 부는 것이지요. 이 하늘이란 것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땅과는 또 다른 곳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둡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공을 만드시고 나서 땅과 바다가 구분되었다 합니다. 즉, 질서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하시고 하늘에서는 인간이 살아갈 방향이자 그 근본 질서를 부여해 주신 것이라는 게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안에 계시며 그 영으로 품으시며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신 것이구요. 


여기서 잠깐 사람을 만들 때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을 두셨으니 말이지요. 먼저 앞 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땅을 취해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말입니다. 여기서 “땅”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땅”이란 말의 의미가 “먼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먼지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며 생명체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지요. 아무리 먼지가 많이 싸여도 거기서 씨앗의 새싹이 트지는 않구요. 즉,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게 바로 먼지란 얘기입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신앙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도 그렇다는 거지요. 우리네 사람이 아무리 잘난 것 같아 보여도 그 속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인간이란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는 나약한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라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 즉, 숨을 거두게 되면 인간은 죽게 되는 것이고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거지요.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이란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릴 살게 하시고 모든 것을 먹을 거리로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더해주신 겁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통해 혼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영으로 함께 하시며 말입니다.
  

 

그런데요 성도여러분. 여기서 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위의 구절들은 과거 서구 사회에서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정당화 하는 데 자주 동원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정복이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양 여겨 왔지요.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그 후손인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당연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도로 악화된 생태계의 현실 속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환경 친화적 개발이니 지속 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움직임도 사회 전체적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아직까지 매우 미미한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지금의 현실
1)인 것이지요.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래 주님께서 의미하신 바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지요.


잠깐 생각해봅시다. 자연에 있는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하루의 먹거리만 먹는 다 합니다. 일단 먹이를 먹으면 자신의 눈앞에 먹이가 지나가도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만 취하는 원리입니다. 한편, 생육이란 말은 낳고 기른다는 것으로서 그 종족이 번식해 나간다는 거지요.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다스리는 자의 뜻이 땅에 펼쳐지는 것으로 이것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겁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와봅시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겠습니까. 왜 땅의 먼지 같은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는 죄 많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라는 명령이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은 작은 미물 하나마저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뜻으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어우러져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들을 먹거리로 주심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서로를 살리는 생명나눔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과소비하지도 많은 재물만을 탐하지도 말고 일용할 만큼 취하며 내가 죽으면 내 자신을 자연에 돌려 다시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는 바로 그 이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안고 살아가며 널리 번성하여 더욱 이 세상이 주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라는 정의와 사랑, 평화, 생명의 그 이치.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무분별한 살생을 하지 않는 바로 그 이치 말입니다. 

   

이제 첫 번째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인간이란 땅에서 흙을 취해 그것을 통해 만들어졌고 땅 위라는 구체적 터전위에서 물질생활을 통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기운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땅에 속해 땅에서 살며 땅을 가꿔가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인생이지만 여기에만 종속되지 않고 땅이 주는 물질적 가치들을 넘어 하늘의 삶과 하나님의 가치를 보고 그 방향성을 견지하며 하나로 통전시켜 살아가는 기본적인 인생사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네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은혜받기 합당한 공의, 평화, 사랑, 생명 등의 소중한 가치들로 충만케 하여 땅이 더욱 땅이 되고, 하늘이 더욱 하늘 될 수 있게 하여야합니다. 바로 이런 귀한 직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살 수 있는 근거이고, 우리가 사는 방향이며 모두가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며 살 수 있는 에덴. 즉, 구원 받은 하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유대땅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에 가장 낮고 더러운 자리라는 터전을 택해 오시었습니다. 인간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는 땅의 물질적 가치 속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시험당하셨고 이를 위대하게 이겨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라져버린 하늘의 가치 즉, 인간의 고귀함과 생명의 존엄성, 정의와 평화, 사랑을 되살리며 죽음의 거대한 물길을 십자가라는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 물꼬를 하나님의 방향으로 돌려 세우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고 우리에게는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이라는 그 물꼬를 끝까지 잘 지키고 깨끗하게 보전하라며 이를 세상끝까지 전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이 그 최후에서 어찌할 수 없어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닌 “죽음” 마저도 부활로써 이겨내시며 진정한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끝까지 희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모든 걸 완성하여 상을 차려주는 슈퍼맨이나 물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떠먹여주는 어리석은 주인이 아닌 진정한 메시아이신 우리 예수님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실제 영국의 가디언지는 미국의 극비보고문서를 소개하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갈 수록 계속되는 이상기후 현상이 2007년 이 후 더욱 가속화되며 증가할 것이라 본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식량”이 거대한 무기가 될 것이라 본다는 거지요. 이런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이들이 왜 자꾸 전 세계의 식량 시장을 개방하라 압력을 가하는 지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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