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마다 계속되는 제사 갈등>

해마다 명절이 되면 기쁨과 갈등이 공존하지요. 가족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견해차가 존재하여 갈등도 일어납니다. 저는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종교적 신념에 의한 '제사갈등' 이라 봅니다. 하여 오늘은 이 얘기 좀 해볼까 하는 데요.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저희 집 얘기를 좀 하면서 풀어가보고자 합니다.


갈등의 해결 열쇠

저희 집은 3년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특히, 제 아내는 장로에서 목회자가 되신 장인 어른 밑에서 자란 이른바 '모태신앙' 의 소유자입니다. 반면 저희 집안 대부분 구성원은 모두 종교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분들은 상당히 고지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님 제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갈등이 상당했겠지요. 고지식파와 신학전공자, 권사님까지 있는 곳이니 말이죠. 하지만 저희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지금까지 넘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해"와 "유연성"그 핵심이었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게 왜 우상숭배인가?

저는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H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저희 학교는 '학문과 경건' 이라는 구호아래 <진리, 자유, 사랑>을 전하며 사회참여를 매우 강조하고, 상당히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저는 이 곳에서 종교 상호간의 열린 자세에 대한 것을 배웠습니다. 이 때 느낀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칫 종교가 그 열린 자세를 잃을 경우 강력한 칼날이 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상호이해가 -특히, 기독교인-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숭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교만과 배타성입니다. 또한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물질과 풍요의 맹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가리는 이념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가 우상숭배와 등치 되지 않음을 알았고, 집안 내에서라도 함부로 내세워지는 배타적인 자세는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욕보이는 무서운 성격을 지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카톨릭은 지나 62년부터 제사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동양의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현재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특정형식 고집보다 그 핵심정신을 지키는 유연함이 필요

집안 일의 주축이 되시는 작은 아버님의 입장은 이랬습니다. 먼저, 저와 아내, 할머님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저희가 굳이 유교양식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이해해주셨고, 그 양식 역시 기독교의 추도예배라 한들 상관 없다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차피 제사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제사는 오래 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역시 유교 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 후 입니다. 물고기 머리와 과일 색을 맞추는 것 같은 세세한 항목 역시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왜 유교에서 이렇게 제사를 강조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효"의 가치를 통해 나라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그 첫째 목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유교 이념에 따른 것입니다. 두번째로 부모를 잊지 않음이 사람이 가야할 길 중 하나임을 확인함이 있고, 세번째로 전쟁, 기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다시 하나로 모이게 하며,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려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 어른들은 바로 이것을 기억해 주셨던 것이지요. 따라서 제사의 양식이 기독교의 예배이든 아니든 먼저 가족이 모이고, 부모를 기린다는 핵심 정신을 지킴이 중요하다 여겼던 겁니다. 

자, 이렇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제사 본래의 의미를 기억하니 일정부분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자연스레 이 문제로 인한 갈등도 사라질 수 있었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문제 때문에 가족끼리 다투고, 내가 믿는 예수 이름이 욕보이게 되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조절하며 풀어나갈 것인가? (필자의 사례)

그럼 여기서 저희 집은 어떻게 명절 제사를 지내는 지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범은 아니고, 각 집안마다 차이가 있으니 참고만 하시면 좋겠습니다.

1)먼저, 기독신앙이 없는 다른 분들의 마음은 음식을 꼭 차려야 한다 여기십니다. 예, 그러시라고 합니다. 이 음식이 결국 명절 음식이 됩니다. 
2)상을 차리면 제가 주도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제가 설교도 합니다. (일반 크리스챤 가정은 교회요람에 나와있는 양식을 따르면 됩니다)

3)설교가 끝나면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싶어하는 분이 나와 진행합니다.  

4)끝으로 마무리 기도를 하고, 모든 순서를 마친 후 함께 식사를 하지요. 식사를 하며 화목하고, 재미있게 교제를 나누면 됩니다. 
  
정리하며

이번 설은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뒤숭숭 하여 별로 흥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간의 화합과 격려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명절은 서로 싸우려 모인 것이 아니지요. 이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은 절충하고,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큼은 받아주는 게 가족이겠지요.

아마 돌아가신 어른들이나 하나님도 이런 화목한 모습을 더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덧1)익명을 이용 험한 말씀 하시는 분이 좀 계신 듯 하여 댓글권한을 로그인 후 가능으로 바꿉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지혜를 나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덧2) 저는 신학전공을 한 저를 친지 어른들께서 존중해주시고, 배려해주시어 축문 읽는 것을 대신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조해 주시구요. 일반 가정에서는 가족이 돌아가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누거나 서로를 위해 덕담하는 시간으로 가져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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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서 저는 가인과 아벨, 노아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그리고 싫어하시고 죄로 여기시어 심판 하셨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이 갖고 있던 바알문화. 즉, 풍요에 모든 걸 “올인”한 물질문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빈부격차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 되었던 것. 종교 간의 혼합을 통해 “성전창녀”와의 성행위로 문화가 난잡해져 갔던 것.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고귀한 가치들.

즉,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 등이 훼손되고 주님의 백성으로써 갖는 순수성이 사라졌던 것 이었습니다
1). 바로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심판하며 지적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목회자가 벤츠를 모는 시대입니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돈이 최고야’의 가치가 팽배합니다. 시대의 양심과 지성의 전당인 대학조차 돈이 되는 것만 하려 하는 시대입니다.

국가 역시 국민 개개인을 하나의 존엄한 사람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인적 자원으로만 여깁니다. 도박이 판을 치고 밤거리는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지역 공동체는 산산히 부서져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조차 모르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저는 이런 현상은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사 속에서 하나님을 삭제해버리거나 자기 중심적 물질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네 크리스챤의 책임이 매우 큼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와 같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나 맘몬을 숭배하는 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이를 방치한 우리네 크리스챤은 더욱 중한 책임을 갖는 것이니 말입니다.


  세계 경제적인 측면은 더 급박합니다. 먼저 중심부 국가(선진국)의 풍요와 부는 주변부 국가(제3세계)의 착취를 통해 이뤄졌음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한 때 경제학계에서는 궁핍화 이론이라는 게 유행했던 시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쉬운 예로 축구공이나 다이아몬드를 봅시다. 보통 월드컵에서 사용하는 축구공은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어린이들이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합니다.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90%이상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강제노역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거래를 통해 나온다 합니다.


  둘째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나얀 찬다라는 학자는 세계화는 인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매우 오랜 역사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요 세계화 자체는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가며 서로 더 이해하고 협력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심한 빈부격차와 국경을 초월한 서민들의 피해를 양산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참고자료로 올려 놓은 제 글을 읽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끝으로 금융 세계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금융 세계화가 문제인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반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융 세계화란 환율, 이자율, 유가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화를 시작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때,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외환 시장, 유로 통화시장 같은 단기 금융시장을 활용하여 현금 플로우를 관리하고 환투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금융 세계화란 것은 투기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또한 각 국의 중앙은행은 재무부로부터 독립하여 고도금융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구요.


    엘빈 토플러 같은 학자는 장미 빛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나 지오반니 아리기 같은 학자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체계란 헤게모니와 축척체계로 구성된다고 하는 데, 헤게모니란 군사-정치적 힘을 뜻하고, 축척체계란 자본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UN이나 IMF가 되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은 미국의 시대이지요. 실제 UN이나 IMF 역시 모두 미국에서 구상한 것들입니다. 대공황이 끝나고 미국의 작은 브레튼 우즈라는 곳에서 만나 처음에 구상한 것이 바로 GATT-WTO 체제 였고, 군사적 측면이 UN체제 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지금은 WTO-UN-IMF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신자유주의나 FTA 같은 것도 모두 미국의 세계지배 원리와 관련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지금은 경제나 군사나 정치 어느 것 하나 미국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 미국 경제는 G7 국가 GDP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하거나 더 큽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나라도 없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 세계화의 특징은 바로 미국의 위기를 의미하고 군사적 물리력 사용의 증가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협을 받고 그 체제가 와해되어가고 있는 심각한 증거라는 겁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하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본주의 최후의‘체계적 카오스’ 또는‘일반적 위기’의 심화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얼마 전 있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만 해도 전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발 경제위기의 맛을 본 것에 불과하지요. 만약 정말 미국발 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면 그 피해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피해는 세계의 힘없는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말겠지요.

그러니 제가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겁니다. 엄연히 그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으니 저희 같은 사람은 그것마저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판단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전해야하니 말이지요.


   아무튼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를 선진국이라 마냥 부러워하며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우리도 이렇게 잘 살게 해달라 기도하지요.


  성도 여러분. 가난은 미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가난을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해서 풍요로워지는 것 역시 바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사람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살생하는 것과 어느 한 곳만 부가 집중되어 다른 한쪽은 고통 받는 것 역시 원치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은총만을 기도하며 겸허히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1) 다른 신이나 종교에 빠진 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당시는 종교와 삶, 사회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인 사회였습니다. 한편, 그 종교가 갖는 경전은 캐논(canon)이라 하여 삶의 지표이자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와 신에 빠진다는 것은 그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과 문화 자체가 변해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뜻을 따르는 종교인 데 바알 문화에 젖어 종교가 혼합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고귀한 가치들이 배격되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그리고 가만히 계실 수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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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8. 10:17 Posted by 바람몰이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아이를 얻습니다. 첫째가 가인이고 둘째 녀석이 아벨입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고 아벨을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세월이 지난 뒤 각 기 얻은 소출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반기셨는 데 가인의 것은 반기지를 않으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화를 내고 얼굴빛이 달라졌냐 물으십니다. 또한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기에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하니 그 죄를 잘 다스리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결국 동생을 불러다 들판에 가서 쳐 죽이고 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있는지 물으십니다. 가인은 모른다고 하며 자기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 따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 하시며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이 형벌이 너무 무겁고, 자신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는다 하시며 표를 주십니다. 그 유명한 가인의 표이지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마지막 결론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무튼 저는 그렇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질러 극형에 처해도 시원치 않을 가인에게 오히려 표를 주시어 보호해 주시니 말입니다. 

   

먼저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잡아 봅니다. 4장 1절에 있는 하와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와는 자신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것을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라고 번역합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두 번째로 7절에서 언급한 죄를 포인트로 잡아봅니다.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인간 스스로의 힘만을 의지하는 교만의 상태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주님께서 죄가 가인의 문 앞에 도사리고,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가인이 곧 하나님을 떠나 그 말씀과 가치를 버리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교만한 자기행동을 하려 한다는 것을 경고하시며 그걸 잘 다스리라 당부하시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9절에서 가인이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며 하나님께 질문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저는 세상과 인간은 서로 하나 되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이치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강제로 분리하여 분열된 “남남의 삶”을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인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핑계를 대며 각 기 다른 삶인 것처럼 분열을 꾀하며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벨과 자신을 구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도 자신이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분리된 삶을 사는 죄의 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죄 그 자체는 나쁜 것이기에 용납하지 않지만 그 죄 이전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히 여기신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아무리 당부를 해도 죄에 빠져 허우적 대는 인간마저도(!) 당신께서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 낳으신 자신의 자식들이라는 그 사랑을 보이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 바로 하나님의 끝없는 모성애적 사랑의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표현한 것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인 것이지요
1).


   이러한 맥락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세계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는지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끝까지 인간을 버릴 수 없고,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인적 삶과 이 생명세상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바로 그 이유를 말이지요.


  아울러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살펴봅시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이유를 그가 첫 소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해는 매우 편협한 것이기에 별로 신뢰할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큰 성경의 고백과 이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서 창세기 1장이 2장보다 4세기정도 늦게 쓰여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창세기를 쓴 기자가 여럿이라는 말이 됩니다. 실제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록하며 하나님을 증언한 기자는 B.C8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사회가 갖게 된 혼란을 충분히 경험했을 시기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의 기자는 이러한 가나안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지요
2). 정착 이전에 갖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문화. 즉, 유목생활과 떠돌이 생활의 고됨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동행하던 삶이었기에 당연히 이것이 옳은 신앙의 길임을 선포하였구요.


  여기서 우린 왜 하필 아벨의 제물만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생각해보면 농사를 지어 곡식을 드리는 것은 추수 감사절의 모양새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지어서 바치는 데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결국 성경이 말하는 가인의 농사는 가나안의 농경문화를 의미하고 이것은 바알이나 맘몬 같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문제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바로 이러한 우상숭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받지 않으셨던 겁니다
3).

  우리의 고백은 풍요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이자 그 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신이 되어 우리 인간의 정신을 지배해서는 당연히 아니 됩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고귀한 하늘의 삶과 가치만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게 크리스챤의 삶의 방식이자 성경의 증언인 것입니다.
 


1) 아담과 하와에게도 나뭇잎이 아닌 가죽옷을 입혀 내보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이지요.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죽옷을 입혀 보내신 것입니다.


2) 모두 아시다시피 이 때 가나안은 농경문화와 이에 따른 풍요의 문화 즉, 바알이나 맘몬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3) 첫 제물을 안 바쳤기에 그렇다는 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문제와 어려움, 하나님 유일신 신앙, 창세기의 저작시기 등을 아무것도 모르고 매우 단순히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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