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까운 블로그 이웃이신 따뜻한 카리스마님께 자극도 받았고, 그간 너무 공부에 소홀한 듯 해서 말이죠. 지금 보는 건 책보다는 주로 논문인데요. 국제학술 세미나 후 나온 논문을 묶어놓은 신학연구 40호를 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박근원), 미혹하는 우상들(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기독교와 문화들(김경재),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제로서 종교혼합주의(마갈랴잉스), 그리스도교와 문화들 : 혼합주의의 문제(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목회활동과 주술 : 복음, 문화 그리고 혼합주의(J.R.Farris), 한국의 경제위기와 선교신학적 과제(채수일), 세계화된 세계에서 복음 선포와 민족문화(성정모)

이렇게 목록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의깊게 읽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혹하는 우상들> 입니다. 캄프하우젠은 예수가 받은 대표적인 시험사화 즉,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던 세가지 시험을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캄프하우젠의 통찰과 더불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시험 : 소비주의의 미혹

당시는 소위 능력있다 하는 마술사들과 기적행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고, 먹을 것을 보여주며 자신을 메시아인양 치켜 세웠습니다. 어느 시대든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고, 이것을 해결해주는 자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영웅이 되고 맙니다. 지금 악마는 민중의 먹고 사는 문제를 걸고 너의 마술력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 는 민중의 "생존" 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엘리사의 시험은 예언자의 철저한 절망과 공궁한 삶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내려진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생명이나, 절망 등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마술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허나 이것은 예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능력이 그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강하게 논박하며 자신의 가치와 사람의 인생이 무엇에 근거해야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루이제 쇼트로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굶주림과 굶주림의 공포가 지배하지 못한다 ; 왜냐하면 굶주림은 비록 현실이지만. 만유의 지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한 이를 몸으로 준행함에 있다 하였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물질에 종속되며 내 영혼을 내어놓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은 어렵더라도 서로 더불어 사는 삶만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섬기면서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야함을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소비의 사회입니다. 경제도 소비가 되지 않으면 성장이 불가능 합니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소비하고 넘기며 순환을 시켜줘야 합니다. 예, 변하는 거 좋지요. 성장도 좋습니다. 제가 뭔가 변화하는 걸 나쁘다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의 희생이 정당화 되고,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만 들끓게 하는 것은 잘 못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이 파괴되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건 잘 못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이를 앞장서 조장하고, 여러 이적이나 말씀의 왜곡으로 목회자를 높이는 것. 민중의 삶을 외면하며 침묵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소비주의의 미혹.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휩쓰는 이 분위기!! 이거 정말 무섭습니다. 특히, 교회 내부마저 이 흐름에 편승하고, 오히려 앞장서는 듯한 모습. 이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올린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때론 참 저도 헷갈립니다. 제가 성경에서 읽고, 보았던..제 심중 깊은 곳을 울리며 제 온 영혼을 휘어잡아 삶이 변하게 하신 예수가 어디계신건지..제가 교회를 정말 다니고 있는 게 맞는 건지...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는 건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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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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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나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한 수학 강사 생활에 제법 짭짤한 수입을 얻었고,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인기도 있었다. 학원생활을 접고 난 후에도 한동안 내 이름은 살아 있었다. 부천으로 이사한 후에도 안산, 화성, 수원 등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때 아내는 가장 힘들었다는 얘기를 한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돌아오는 나는 늘 여유가 없었다. 집에서는 축 쳐져 있었고, 아내와의 대화는 갈 수록 줄어들며, 겨우 말문이 트여도 늘 짜증으로 마무리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었다. 아이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었다. 물론 당시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아빠 얼굴을 몰라 잠시만 안아도 울어대는 통에 내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이 때 나는 매우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정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물질 충족을 통한 여유"가 가장 중요하다생각을 하였었다. 이걸 놓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고, 내일도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물질적 여유 없이 마음의 여유가 쉽게 허락될리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이 모든 일을 그만 두었다. 물론 허리 수술 부위의 재발이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이런 삶이 계속 되었다간 가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또한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내 영혼을 바라보며 이것은 사람이 사는 삶이 아니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당연히 수입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부족분은 아내의 취직으로 충당하고 있다.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 모습을 보며 미안함에 늘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아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한다. 훨씬 더 여유로워진 내가 좋다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아이를 안아주며,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 내가 더 좋다 한다. 비록 지금은 서로 주말부부로 떨어져 살고 있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한다. 지금 당장은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일에 비젼이 있고, 희망을 볼 수 있다 한다.

나 역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이혼과정을 모두 봐야만 했다. 생선장사와 삯바느질로 날 키우시던 조부모님과 살아오며 찢어질 듯한 가난에 너무 힘들었다. 대학시절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뒤는 물론 옆도 보지 않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물론 지금도 내 결혼식조차 오지 않았던 아버님과의 관계 등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그저 움켜 쥐려고만 하던 을 눈 딱 감고 놓아버리면서부터 찾아온 행복이고, 여유였다.


사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내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이와 함께 하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내 정신줄을 놓치 않고, 늘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그 속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에 뭔가 자꾸 움켜쥐려고만 하면 문제가 생긴다. 돈을 움켜쥐고, 명예를 움켜쥐고는 도무지 놓으려 하지 않는다. 주먹도 계속 쥐고 있으면 피가 안 통해 하얘지고, 경련이 일어나는 법이다. 인생의 행복이란 게 마치 비누와도 같아서 강하게 움켜쥘수록 자꾸 빠져나가는 것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어제 언론 보도를 보니 일가족 4명이 생활고에 시달려 동반자살을 했다 한다. 또 다른 어떤 기사에는 10억이 있으면 양심은 물론 가족마저 버릴 수 있다 응답한 이가 50%가 넘는 다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더 이상의 물질적 풍요가 아닌 여유와 행복을 채울 수 있는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블로그 메인에 올려놓은 가족사진. 우린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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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육의 현실과 문제점
왜 내 자녀가 공부 잘 하기를 바라는 걸까.
왜 내 자녀가 영어 잘 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이 사회가 학벌, 간판 중심사회이고, 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각 종 고시에 합격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지름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하면 좀 더 선행을 베풀 능력도 많아지고, 또한 이것을 추구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몰입해버린 나머지 학교에서는 전인교육이 안 되고, 아이들은 각 종 학원을 뺑뺑이 돌며 꿈과 낭만, 인간미를 키워갈 수 없다는 것은 문제이다. 꿈과 낭만, 인간미가 성장하지 못 한 개인은 결국 창의성 역시 자라지 못하고,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사회의 주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비판적으로 서양 문화만을 받아들여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얼을 잊어가는 것 역시 문제이다. 그 사회의 정신과 문화의 흐름을 놓친 채 살아간다면 그 사회와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는 경제적으로도 경쟁력의 저하로 이어지고 말것이다.


끝으로 특히, 이렇게 정해진 코스와 스케쥴에 따라 온실에서만 자란 나머지 훗날 인생의 큰 시련을 만났을 때 마치 민들레처럼 그 생명을 유지하며 꽃을 피워낼 생명력이 배양되지 못하고 있음은 더욱 큰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정신을 갖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힘이 없는 개인은 어려움 앞에 쉽게 쓰러지고, 좌절과 우울 등에 노출될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이는 이미 지난 IMF 시절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지금도 문제가 있고, 앞으로도 문제가 계속 될 수 있는 교육. 어떻게든 뭔가 변화든 개혁이든 하긴 해야겠는 데, 여기서 문제는 과연 이것이 교육 한 분야만을 건드려서 해결 될 문제 냐는 데 있다. 사실 이는 단순히 교육 차원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교육이란 그 사회공동체가 지닌 가치가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단연 "물질"이다. 현재 우리는 이 물질적 가치를 너무 추구한 나머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가고,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결과중심 사고 뭇 생명과의 조화 어려운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 정직, 최선 등의 가치에 대해서는 소홀한 측면이 있다. 
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 오늘을 진단한바 있다. 보들리야르는 사회전체가 주식회사가 되어 악마와 계약을 교환하여 이제는 목적의 부재에 괴로워하고 있다 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와 세계 전반을 두고 진단한 것들이었지만 우리 역시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쩌면 너무 빨리 자본을 받아들이며 성장한 나머지 그 부작용이 유난히 크게 나타나고 있다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실은 결국 우리 삶의 체계와 사고방식이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물질과 결과중심"있게 된 다면 지금의 교육과 사회 현실은 아무리 개혁하려 해도 또 다시 제자리 걸음에 머무르는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고 만다.


새롭게 요구되는 인재상
언젠가 세계 제일의 부호 빌 게이츠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말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역설 하였다. 여기서 그는 불평등을 줄이고, 고통받는 이를 의식적으로 돕는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그에 따르면 결국 21세기에 새롭게 요구되는 인재는 과거 끊임 없이 이익을 창출하고, 경쟁에서 앞서가는 창의성과 똑똑함을 보유한 이가 아니라 어려운 이를 돕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자녀 교육의 방향성을 고민해볼 때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 구조 및 가치관은 그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다.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모양새로 세계 질서 재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국 새로운 인재상을 요구하게 되고, 더욱이 불황의 끝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어려운 시기는 기존교육의 변화를 요구한다.

옛 말에 "우보천리" 라는 말이 있듯 느리더라도 우직하게 내딘 한 걸음이 천리를 갈 수 있는 법이다. 지금 당장은 우리 교육 현실이나 사회 구조, 가치관이 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그러나 지금 해야할 기타 여러 노력과 더불어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고, 새로운 변화 될 세상을 만드는 가장 더디지만 근본적인 길은 역시 "교육"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은 내 자녀 교육이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 있는 좋은 시점이라 얘기다.


뇌 학습 위주에서 물론 자연의 뭇생명과 어려운 이를 배려하며 더불어 살 수 있는 조화와 배려의 감성과 인간미를 기르는 교육.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민들레와 같은 생명력을 키워내는 교육.
 
물질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 정직과 평화 등의 소중한 가치도 내면화 할 수 있는 교육.

맹자의 엄마는 이사를 세번씩이나 했다 하는 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내용을 참조하거나, 보완하는 것 정도는 우리와 아이들이 살아감에 맞춰 모색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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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적은 짧은 생각

[기독교]하늘바람몰이 2007. 11. 12. 10:05 Posted by 바람몰이


필자는 "국제 유가와 패러다임"(
http://blog.naver.com/kkuks81/30005482669)이라는 글에서 국제유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을 예측한 바 있다. 또한 유가 상승으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의 심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성 및 착취성을 밝히며 "생명"을 향한 선택을 강조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설마..'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둘씩 '진짜 그렇게 되는 것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특별히 유류세 및 정유사 횡포가 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부담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정신사적으로는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들이 주는 장점을 놓치고 단점만이 반복되고 있고,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물질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은혜로 바로 잡아가야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선도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특별히 교회가-물질중심의 삶에서 물질과 고귀한 정신이념-정신사로의 상승지향적 성향 포함-, 해체적이고도 지극히 개별적인 것 및 실증적인 것과 전일적이고도 포괄적이며 유기체적인 것의 조화를 꾸준히 추구해나가거나 유지해나갔다면 지금의 이런 파국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신령한 지혜 및 성령의 인도하심을 세상에서 유행하는 정신사 및 물질적인 삶과 온전히 구분하여 설파하여 나갔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실제 우리는 절벽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상황이기에-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온 생명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까지 기다려 주시며 은혜를 베푸셨기에 이렇게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우리네 인간이 가지는 본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비본래적인 상태(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참조)에 있는 즉, 원죄에 빠진 상태인 인간이 지닌 이기성과 욕심, 잔학성, 폐쇄성, 정체성, 보수성 등으로 대변되는 그 본성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필자의 주장이 꼭 다 들어맞거나 모두 공감하지 않는다해도) 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따라서 다양한 주장이 오고가는 것이며 여기에는 당연히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현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좀 더 물질적인 풍요를 중시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네 인간의 심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본래적 상태에 머문 본성이었다면-우리는 에덴동산의 낙원과 같은 상태처럼-얼마든지 서로를 비판적으로 돕고 도우며 꾸준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 아니었겠는가.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논리이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온 인류의 언어가 흩어지고, 다르게 된 것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알아가고, 타개해가며, 새로운 앞길을 열어 가는 것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며 그 거대한 물줄기를 생명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이다. 정작 문제를 일으키고도 깨닫지 못하고 뻔뻔하게 자기를 죽인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믿고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판단해가야 하는 걸까..

우선 조화를 깨뜨리는 지극한 편향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지극한 편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극과 극은 그 끝에서 하나의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설픈 편향으로 인한 폐쇄성일 것이다. (오늘의 삶이 지극히 물질적인 삶에만 편향된 것은 어쩌면 이것이 어설픈 편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물질적인 땅의 삶에서 고귀한 인간애를 깔고 있는 하늘의-하나님의-삶으로의 반전을 통한 변증법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일적인 삶의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말고..은혜마저 값싸게 팔아버리지 말고..겸손하면서도 열심있는 삶의 추구를 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지향 및 소비지향적 성향을 이겨내고, 지속적인 개발 및 유지가 가능한 생태적이고도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만큼 살아가며 휴머니즘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역사적인 생명으로의 삶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이고도, 전생명적인 삶과 조화가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성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의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인류의 하나됨과 행복의 추구 및 생명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 빈부격차 및 자연, 영혼과 생명의 파괴를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끝으로 우리 한명 한명이 "성인군자(?)"가 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인군자라 하니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며, 온 생명을 볼 줄 아는 시대와 역사, 생명을 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른 '의식화(?), 계몽(?)' 등이 된 성숙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어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며 날마다 거듭나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아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나와 우리가 사는 오늘을 바로 보고, 뒤를 반성하며, 내일을 살아가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기체적이고도 정신지향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삶의 현실속에서 전일적으로 판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워낙 두서없이 쓰다보니 서론이 좀 긴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글이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하려는 말은 알아서 흘리고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분명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다시 건강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책을 필자는 제시한 것이니 이를 통해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나를 돌아보고, 어떻게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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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서 저는 가인과 아벨, 노아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그리고 싫어하시고 죄로 여기시어 심판 하셨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이 갖고 있던 바알문화. 즉, 풍요에 모든 걸 “올인”한 물질문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빈부격차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 되었던 것. 종교 간의 혼합을 통해 “성전창녀”와의 성행위로 문화가 난잡해져 갔던 것.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고귀한 가치들.

즉,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 등이 훼손되고 주님의 백성으로써 갖는 순수성이 사라졌던 것 이었습니다
1). 바로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심판하며 지적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목회자가 벤츠를 모는 시대입니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돈이 최고야’의 가치가 팽배합니다. 시대의 양심과 지성의 전당인 대학조차 돈이 되는 것만 하려 하는 시대입니다.

국가 역시 국민 개개인을 하나의 존엄한 사람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인적 자원으로만 여깁니다. 도박이 판을 치고 밤거리는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지역 공동체는 산산히 부서져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조차 모르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저는 이런 현상은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사 속에서 하나님을 삭제해버리거나 자기 중심적 물질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네 크리스챤의 책임이 매우 큼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와 같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나 맘몬을 숭배하는 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이를 방치한 우리네 크리스챤은 더욱 중한 책임을 갖는 것이니 말입니다.


  세계 경제적인 측면은 더 급박합니다. 먼저 중심부 국가(선진국)의 풍요와 부는 주변부 국가(제3세계)의 착취를 통해 이뤄졌음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한 때 경제학계에서는 궁핍화 이론이라는 게 유행했던 시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쉬운 예로 축구공이나 다이아몬드를 봅시다. 보통 월드컵에서 사용하는 축구공은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어린이들이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합니다.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90%이상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강제노역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거래를 통해 나온다 합니다.


  둘째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나얀 찬다라는 학자는 세계화는 인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매우 오랜 역사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요 세계화 자체는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가며 서로 더 이해하고 협력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심한 빈부격차와 국경을 초월한 서민들의 피해를 양산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참고자료로 올려 놓은 제 글을 읽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끝으로 금융 세계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금융 세계화가 문제인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반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융 세계화란 환율, 이자율, 유가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화를 시작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때,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외환 시장, 유로 통화시장 같은 단기 금융시장을 활용하여 현금 플로우를 관리하고 환투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금융 세계화란 것은 투기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또한 각 국의 중앙은행은 재무부로부터 독립하여 고도금융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구요.


    엘빈 토플러 같은 학자는 장미 빛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나 지오반니 아리기 같은 학자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체계란 헤게모니와 축척체계로 구성된다고 하는 데, 헤게모니란 군사-정치적 힘을 뜻하고, 축척체계란 자본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UN이나 IMF가 되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은 미국의 시대이지요. 실제 UN이나 IMF 역시 모두 미국에서 구상한 것들입니다. 대공황이 끝나고 미국의 작은 브레튼 우즈라는 곳에서 만나 처음에 구상한 것이 바로 GATT-WTO 체제 였고, 군사적 측면이 UN체제 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지금은 WTO-UN-IMF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신자유주의나 FTA 같은 것도 모두 미국의 세계지배 원리와 관련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지금은 경제나 군사나 정치 어느 것 하나 미국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 미국 경제는 G7 국가 GDP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하거나 더 큽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나라도 없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 세계화의 특징은 바로 미국의 위기를 의미하고 군사적 물리력 사용의 증가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협을 받고 그 체제가 와해되어가고 있는 심각한 증거라는 겁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하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본주의 최후의‘체계적 카오스’ 또는‘일반적 위기’의 심화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얼마 전 있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만 해도 전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발 경제위기의 맛을 본 것에 불과하지요. 만약 정말 미국발 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면 그 피해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피해는 세계의 힘없는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말겠지요.

그러니 제가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겁니다. 엄연히 그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으니 저희 같은 사람은 그것마저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판단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전해야하니 말이지요.


   아무튼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를 선진국이라 마냥 부러워하며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우리도 이렇게 잘 살게 해달라 기도하지요.


  성도 여러분. 가난은 미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가난을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해서 풍요로워지는 것 역시 바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사람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살생하는 것과 어느 한 곳만 부가 집중되어 다른 한쪽은 고통 받는 것 역시 원치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은총만을 기도하며 겸허히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1) 다른 신이나 종교에 빠진 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당시는 종교와 삶, 사회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인 사회였습니다. 한편, 그 종교가 갖는 경전은 캐논(canon)이라 하여 삶의 지표이자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와 신에 빠진다는 것은 그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과 문화 자체가 변해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뜻을 따르는 종교인 데 바알 문화에 젖어 종교가 혼합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고귀한 가치들이 배격되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그리고 가만히 계실 수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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