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사람은 역사적 존재(하이데거)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 인식의 한계성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정신과 의지를 통해 한계의 범위를 확장하고,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도모할 수는 있다. 명확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판단, 노력은 우리 삶의 진보를 가져오는 힘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만이 희망인 이유이다. 또한 이 글은 필자의 이와 같은 신념위에 쓰여질 것이다.

두번째로 이 글에서 필자는 성폭력의 원인을 나름의 시각으로 고찰하고,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사회변혁과 제도 개선도 필요하나 성폭력 문제는 제도의 확립만으로 예방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회과학적 접근보다 철학적 접근을 그 방법론으로 택하게 될 것이다.


성폭력 원인에 대한 다양한 접근

2.성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어떤 여성운동가는 "습관" 이라 얘기하기도 한다. 성구매를 하는 습관, 접대문화속에 여성을 부르는 습관 같은 성매매 습관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습관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기껏해야 2등 시민이란 인식을 갖게 한다 이야기 한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성폭력은 양성간의 문제 뿐 아니라 아동과 동성간에도 이뤄지는 것이기에 이는 한계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의 연구는 일탈행동을 얘기하기도 하고, 문화를 얘기하기도 한다. 갈등주의적 접근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현상에 대한 연구로써는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이면에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이면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작금의 물신주의와 힘과 권력에 의지한채 객체화 된 사람의 성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라 하겠다. 


물신주의와 지배욕에 대한 구체적 접근

3.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 사회전반의 풍토에 만연해 있는 물신주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게 한다. 즉, 인격과 그 존엄성을 보지 못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보게 한다는 것이다. 객체로 전락해버린 인간의 몸과 성은 더 이상 존중받을 대상이 아니게 된다. 하나의 물건처럼 사고 팔며 성적 욕구의 만족을 위한 "도구"되어 버리게 된다.

또한 지배와 통제의 욕구라는 인간의 본성은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힘과 권력의 차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불평등한 위치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집단의 문화에 결탁하며 내 자신을 은폐하고, 반복 지속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강자 앞에서는 숨기다 약자 앞에서 야수적 본성으로 표출하며 피해자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게 된다.

자, 이제 이런 관점으로 성폭력을 다시 보도록 하자. 우선 성희롱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희롱에 대한 법령이 형법이 아닌 남녀고용평등법에 제시된 것부터 생각할 수 있다. 남녀간의 사회적 위치와 힘의 차이가 바로 성희롱을 일으키는 원인이라 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성 상사가 남자 부하직원을 성희롱 하는 것도 이해되고, 심리적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자 상사를 반권력적 성희롱 모델에 따라 성희롱 하는 것도 이해되게 된다. 이들에게 성희롱 대상자는 더 이상 인격체가 아니고 내 위치와 힘을 이용해 성적 유희를 즐기거나 희롱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두번째로 성폭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부는 여성의 야한 옷이 성충동을 일으켜 우발적으로 범행이 일어나게 한다 하지만 실제 성폭행 사건은 70% 이상 계획된 범죄이다. 또한 동성간에도 성폭행이 일어나고, 아동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범죄를 보면 어떠한가. 이를 보며 필자는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굽신거리다 조금이라도 약한 자에게는 그 태도가 돌변하는 노예근성 같은 지배욕과 동물적 본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마음이 필자 개인만의 것이라 쉽게 치부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시대를 탓하기 전에 내 자신부터!

4.린다 레드레이는 "성폭력은 성적만족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격앙되고 과격한 욕구의 표현" "성폭력의 기저는 폭력, 분노와 지배욕"이라는 말을 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그녀의 견해가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성적 불평등이 시작된 이래 양성간에 가해진 성폭력은 물론 최근 이슈가 되는 동성간, 아동 성폭력 역시 이 모든 것에 그대로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악마와 계약을 교환하고 풍부함을 대가로 초월성과 목적성을 팔아 넘겼기 때문에, 이제는 목적의 부재에 괴로워하고 있다"라고 하였던 보드리야르나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 하는 병든 현상"이라 진단한 소로스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이는 비단 경제와 문화 뿐 아니라 성폭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조차 나를 알 수 없게 하는 이 정신 없는 시대는 성폭력의 수위와 양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어떤 정신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또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의 변화가 사회가 변하게 하는 밀알임을 상기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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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까운 블로그 이웃이신 따뜻한 카리스마님께 자극도 받았고, 그간 너무 공부에 소홀한 듯 해서 말이죠. 지금 보는 건 책보다는 주로 논문인데요. 국제학술 세미나 후 나온 논문을 묶어놓은 신학연구 40호를 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박근원), 미혹하는 우상들(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기독교와 문화들(김경재),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제로서 종교혼합주의(마갈랴잉스), 그리스도교와 문화들 : 혼합주의의 문제(에르하르트 캄프하우젠), 목회활동과 주술 : 복음, 문화 그리고 혼합주의(J.R.Farris), 한국의 경제위기와 선교신학적 과제(채수일), 세계화된 세계에서 복음 선포와 민족문화(성정모)

이렇게 목록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의깊게 읽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혹하는 우상들> 입니다. 캄프하우젠은 예수가 받은 대표적인 시험사화 즉,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던 세가지 시험을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캄프하우젠의 통찰과 더불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시험 : 소비주의의 미혹

당시는 소위 능력있다 하는 마술사들과 기적행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고, 먹을 것을 보여주며 자신을 메시아인양 치켜 세웠습니다. 어느 시대든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고, 이것을 해결해주는 자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영웅이 되고 맙니다. 지금 악마는 민중의 먹고 사는 문제를 걸고 너의 마술력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 는 민중의 "생존" 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엘리사의 시험은 예언자의 철저한 절망과 공궁한 삶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내려진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생명이나, 절망 등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마술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허나 이것은 예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능력이 그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강하게 논박하며 자신의 가치와 사람의 인생이 무엇에 근거해야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루이제 쇼트로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굶주림과 굶주림의 공포가 지배하지 못한다 ; 왜냐하면 굶주림은 비록 현실이지만. 만유의 지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한 이를 몸으로 준행함에 있다 하였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물질에 종속되며 내 영혼을 내어놓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은 어렵더라도 서로 더불어 사는 삶만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섬기면서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야함을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소비의 사회입니다. 경제도 소비가 되지 않으면 성장이 불가능 합니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소비하고 넘기며 순환을 시켜줘야 합니다. 예, 변하는 거 좋지요. 성장도 좋습니다. 제가 뭔가 변화하는 걸 나쁘다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의 희생이 정당화 되고,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만 들끓게 하는 것은 잘 못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이 파괴되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건 잘 못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이를 앞장서 조장하고, 여러 이적이나 말씀의 왜곡으로 목회자를 높이는 것. 민중의 삶을 외면하며 침묵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소비주의의 미혹.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휩쓰는 이 분위기!! 이거 정말 무섭습니다. 특히, 교회 내부마저 이 흐름에 편승하고, 오히려 앞장서는 듯한 모습. 이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올린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때론 참 저도 헷갈립니다. 제가 성경에서 읽고, 보았던..제 심중 깊은 곳을 울리며 제 온 영혼을 휘어잡아 삶이 변하게 하신 예수가 어디계신건지..제가 교회를 정말 다니고 있는 게 맞는 건지...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는 건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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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회는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 세상적인 것 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세상의 가치나 관념이 들어설 수 없는 거룩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구별되지 않기도 합니다. 교회 역시 세상의 한 구성원이고, 크리스챤의 삶의 무대 역시 세상입니다. 또한 먹고 사는 문제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경제와 신학을 혼동할 우려를 지적합니다(구티에레즈). 그러나 신학과 교회가 경제문제를 외면한다면 이는 먼 세상의 구름 잡는 듯한 힘없는 이야기만 하게 될 뿐입니다. 본래 신학의 성격 자체가 종합학문이상 또한 이 세상의 작은 조화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신 의지가 미쳐야하는 이상 신학과 교회는 경제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의 물신숭배적 성격이나 공산주의의 한계 등을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개혁, 크리스챤의 삶 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격동의 우리 사회 속에서 크리스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균형잡힌 시각으로 그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예컨대 이런 경우를 봅니다.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쌍용차 근로자의 해고였습니다. 물론 시장의 요구대로 근로자 해고의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회생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경영진의 무능력과 수익창출실패의 책임을 힘없는. 십수년씩 일한 근로자만이 모두 져야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경제와 회사사정이 어려워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노동시간이나 정년을 낮추면서라도, 봉급을 낮춰서라도 함께 일자리는 나눠 회생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2000cc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계획이 있다 해봅니다. 그러면 총 구입금액과 한달 유지비 등의 견적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이 때 2000cc가 아닌 한단계 낮은 차량을 구입해 구입금액의 차액과 한달 유지비 차액만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것입니다.

'나뉘어진 밥은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나뉘어진 고난은 모든 사람을 단결시킨다' 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과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출발은 먹을 것을 함께 나누는 데서(유월절) 시작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성경적으로 풀어가며 뭔가 세상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3.저는 신학을 전공했지만 국제경제학 역시 부전공하며 공부하였습니다. 투자까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며 주식상담을 해주기도 합니다. 석박사급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경제공부를 하며 느낀 것은 두가지 입니다. 먹을 것으로는 사람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목회자는 반드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즉, 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양떼를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한국 교회와 목회자가 성장과 소비만을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치우치기도 했고, 나눔이 없는 성장과 생명이 없는 소비는 파멸만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무조건적인 금욕과 절제나 교회의 성장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기왕에 성장할거면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위해 성장하는 것이 좀 더 성경적이지 않냐는 것입니다. 소비를 할거면 기름값이 비싸서 자가용을 안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위해 기쁨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소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균형잡히고, 높아진 소양이 경제위기를 경험하는 우리의 정신없는 이 세상과 성도의 삶을 살리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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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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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가진 게 죄예요?!

[시사]세상살이 2009. 2. 2. 16:11 Posted by 바람몰이

최근 강호순의 충격적인 살인 관련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그의 현장검증 모습과 범행수법을 보면 남자인 나조차 치가 떨린다. 하물며 여성의 입장에서는 오죽하랴. 여기저기 무섭다는 말이 나오고, 호신용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한번은 스치듯 '딸 자식 가진 게 죄'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딸 간수 잘하라' 하기도 하고, '딸자식 교육 잘 시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해가 된다. 가까운 이를 걱정해주는 마음일 것이니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뭔가 뒤끝이 좋지 않다. 일단 '그래야겠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맞장구 치지만 그리 편치가 않다.
형식논리로 따져 범죄자가 주로 남자이니 '아들 간수 잘해야한다'거나 '아들 교육 제대로 시켜라'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잔혹한 범죄 앞에서 우리 사회가 그 속에 담긴 그 무엇. 예컨대 이런 범죄자가 양산되는 구조와 또한 이에 대한 해결점 등에 대한 고민 없이, 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성고정관념에 얽매여 '딸자식 관리 잘하라' 쉽게 말해버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그렇다.

사실 유전자나 정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범죄 전에 찾아가 붙잡을 수도 없고, '당신 유전자 검사 한번 해봅시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경우는 문제가 생긴 후 사후 처벌 및 관리가 철저한 것이 최선이다.

진짜 문제는 멀쩡하게 잘 살다가도 어느 순간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이 사회구조이다. 꾸벅꾸벅 졸게나 만드는 틀에 박힌 성교육,  인성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교육체계, 나같이 조용히 살려해도 저절로 분노가 쌓이는 사회구조, 내면에 가득한 분노를 적절히 풀어낼 수 없는 문화,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가족마저 돈 때문에 살해하는 끝없는 물신주의의 팽배!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 수많은 아킬레스 건은 강호순이 싸이코패스라며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할 때에 이미 어딘가에서 또 다른 강력 범죄자를 양산하는 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듯하니, 이런 일이 생길때마다 무슨 죄인이라도 된 거마냥 긴장해야하는 딸자식 가진 부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처럼 먹고 사는 데만 올인하는 사회 풍조에서는 어떤 대책을 세워도 이런 일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상처부위를 도려내는 수술도 필요하지만 체질을 바꿔야 진짜로 질병이 낫지 않겠냐는 얘기다. 

요즘 아이들 덩치만 컸지 체력도 체질도 약하다하는 데, 이게 사회의 성장과도 똑같다. 버스를 기다리다 비명횡사해야 하는 이런 사회에서 국민소득 몇 만불이 되고, 세계 몇 대 경제강국이란 타이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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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몰이
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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