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절입니다. 아마 만난지 백일쯤 되는 기념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를 다니며 폐지를 주워 생활하시는 어르신을 섬기는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이란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뛰며 공부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날도 날이니 만큼 당시 여자친구이던 지금의 아내가 갑자기 수원역에 있던 M식당을 가자 하였습니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던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갔습니다. 그런데 이런....밥값이 8천원인 것입니다! 8천원은 어르신들이 하루 종일 리어카를 가득 채워 올 때나 받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지요.

저는 경악을 했습니다. 식당에 가서 밥까지 나왔기에 식사를 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이런 밥을 먹을 수 있는가' 라며 제가 매우 강하게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솔직히 "지랄"을 했다는 게 맞습니다). 결국 당시 여자친구이던 제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당시 저는 이것이 전혀 미안하지 않았습니다. 아내 역시 저와 비슷한 공부를 했기에 철저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많이 나이브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참 제가 심했고, 옹졸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치열한 삶을 살던 시기이었기에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아내에게 그런 것은 정말 잘못한 일 같습니다. 그래도 불타는 사랑을 했던 저희 커플은 그 일이 있고도 약 1년 후 쯤 저희 커플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평등결혼식을 한복을 입고 진행했었다.


결혼을 하며 저는 다른 날은 몰라도 결혼 기념일 만큼은 좀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 출산까지 하고 군 복무를 했던터라 가정 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내는 그런 저를 이해해 주었지만 저는 늘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어제는 결혼한지 5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요즘 다음 view와 오 마이 뉴스에 지속적으로 성범죄 시리즈를 연재하다보니 강의가 좀 들어오고 있어 여유가 생겼습니다. 저는 지난 날의 미안한 맘을 달랠 수 있도록 아내에게 이틀 전부터 뭘 먹고 싶은 지 아무거나 다 고르라 하였습니다. 다음 맛집 블로거인 아내는 정말 좋은 동탄 신도시의 맛집을 알아내더군요. 어떤 곳인지 궁금증을 갖고 벼락을 헤치며 달려가보았습니다.

아내가 선택한 식당은 해물뷔페였습니다. 1인당 16000원이었지요. 30년 동안 제가 저를 위해 돈을 내고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비싼 식당이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해물뷔페 가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돌잔치나 장인 어른내외께서 오셨을 때 등 뭔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만을 위해서 가본 적은 없었지요.

가보니 소문처럼 이것저것 괜찮았습니다. 서비스나 분위기 모두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맛도 너무 좋았습니다. 제 옆에 있던 딸아이는 연방 '맛있다' '야호~'를 외쳐댔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원없이 먹었습니다. 식당 서비스나 분위기, 맛도 좋았지만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5년전과 달리 예쁜 두 딸아이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저를 들뜨고, 기쁘게 하였습니다.

두 딸아이는 우리 부부의 사랑이자 자랑이다.


가만보면 행복한 삶을 산다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물질의 양을 상대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며 "상대적 박탈감" 이란 걸 느끼곤 합니다. 이미 절대적으로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고, 가끔 특별하게 비싼 식당을 갈 수도 있는 데 늘 부족하다 느끼지요. 그러나 이를 행복의 척도로 삼게 된다면 늘 답답하고, 쫓기는 마음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많은 지혜자들과 고전은 욕심을 비우고, 감사하며 사는 데에 행복의 비결이 있다고 얘기해 왔던 것일 겝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아이들에게 많은 용돈을 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내와 해물뷔페를 가는 것도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서 수학하는 탓에 물질의 절대적 양도 많이 부족하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어 마음이 풍요롭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적은 용돈을 지혜롭게 쓰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말하며 삶을 긍정하고 싶습니다.

"그래, 너는 행복한 사람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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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잘 꿈도 꾸지 않는 저인데, 악몽을 꾸었습니다. 너무나도 내용이 선명합니다. 새벽녘에는 이게 더 심했지요. 그래서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깨고 나니 마음이 뒤숭숭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몸에 식은 땀이 가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둘째를 낳고, 폭염이 가득했던 올 여름 저는 혼자 자고 있던 터였습니다. 폭염으로
요즘 아내와 두 딸아이는 거실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난감했습니다. 제가 끼어 들어갈 자리가 없던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뒤숭숭해 아이들과 아내 곁에서 자려했는 데, 이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물을 한잔 마셨습니다. 아이들이 깰까 싶어 불도 끄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셨습니다. 그러고보니 괜히 제 자신이 청승맞아 보였습니다. 사실 가족을 위한 배려로 그 동안 계속 이렇게 해왔던 건데, 가족과 함께 잠 잘 자리조차 없다는 생각을 하니 그렇더군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많은 아버지들

아마 이 땅의 많은 아빠들이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빠들은 늘 혼자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서야할지 그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켜내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아이들이 있고, 나 하나만 믿고 살아온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만 이런 저런 얘기도 듣다보면 때론 너무하다 싶은 남자들도 있지요. 요즘 언론보도에 자주 오르내린 인면수심의 아버지 즉, 성매매나 성폭력을 자녀에게 가한 경우를 보면 같은 남자지만 치가 떨립니다. 또 아내의 외로움도 이해가 되지요. 왜 이렇게 우울증에 빠지는 여성이 늘어나고, 처음과 달리 변해버렸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은 자신을 뒤로한채 가족을 위해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려 합니다. 이른바 '노동유연성'이란 허울좋은 미명아래 어느 날 갑자기 명퇴 당할지 모르는 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 날로 더해가는 성범죄로부터 내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렇게 아버지는 오늘도 긴장의 끈을 바짝 잡고 살아갑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성역할에 대한 기대치도 변해야

음, 갑자기 조금 쌩뚱맞아 보이긴 하지만 저는 이렇게 남성에게 짊어지우는 여러 무게가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당연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무게 역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게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과 무게가 그렇다것입니다. 
 
과거부터 계속해서 규정된 이런 관념이 21세기 우리 사회까지 지배하게 된다면 우리는 멋진 정장에 짚신을 신고 다니는 것과 같은 꼴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가 설자리 역시 갈 수록 좁아지겠지요.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구도와 초단위로 변해가는 시대이니 말입니다. 이런 식이면 늘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외롭고 힘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양성평등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양성에 대한 성역할과 기대치, 그간의 고정관념이 변할 수 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의 개인적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이걸 어떻게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리하며

아내도 제가 혼자 자는 게 내심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왜 혼자 자고 그러냐 그러네요. 오늘부터는 같이 자자고 말이지요. 하하, 하지만 오늘도 저는 아마 혼자 작은 방에서 자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을 위해 제가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이 여기까지 입니다. 그리고 이게 가장 시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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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 생긴 편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썩 좋은 인상도 아닙니다. 확실히 저는 타고난 인상 자체가 강했습니다. 짙은 눈썹과 엄청난 수염..ㅠ.ㅜ;; 어릴 적에는 속눈썹도 길고, 날씬해서 참 예뻤다하는 데,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전설과 같은 얘기이지요.

그러나 타고난 것만이 제 인상을 결정짓는 건 아니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살아온 남들과 조금은 다른 삶의 환경은 제 인상도 다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제 나이 다섯에 제 부모님이 헤어지시는 과정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가보니 허여멀건한 서울놈이 맘에 안드는가 봅니다. 참 무던히도 친구들에게 맞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복수심에 불타 태권도를 했고, 나름 소질이 있던 저는 조부모님 모르게 싸움 좀 하고 살았습니다.

또 인생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보면서,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고, 500원짜리 삯바느질로 저를 키우시기 위해 고생하시던 조부모님을 보는 것, 또 이렇게 '버림'받은 나를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겐 '악'밖에 없었나 봅니다. 공부도 잘 했지만 이것 역시 조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악으로 잘 했던 것이었습니다. 싸움도 잘 했지만 이것역시 지기 싫어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이것 역시 무시당하기 싫어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악'이 제 사춘기를 지배하였습니다.

'악'으로 사는 삶은 대학시절도 계속 되었습니다. 제 나이 19살에 독립을 했습니다.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서 둘다 잘 하고 싶었지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직장에서도 상당히 인정받고, 대학에서도 과수석을 다투는 정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니 제 인상이 장난 아니였습니다. 지금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약 10년전 찍었던 면허증 사진입니다. 이번에 면허갱신을 하면서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스캔으로 받아 두었지요.

어떤가요. 인상이 장난 아니지요? 물론 화질도 좀 떨어지고, 피부색도 좀 검게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사물을 바라보는 눈빛이 기본적으로 약 10도쯤 올라가 있지요. 뭔가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좀 슬퍼보이지요. 금방이라도 울것만 같은 모습입니다. 예, 이 때는 한창 마음속에 적대감과 불만, 우울과 슬픔이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자, 이건 얼마 전 면허갱신을 위해 찍었던 사진입니다. 어떤가요? 저는 제 자신을 보면서 좀 더 부드러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또 보다 편안해 보이고 말이지요.

예, 요즘의 저는 참 편안하고, 부드러워 졌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다보니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상당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인생이 많이 변한 케이스입니다.

제 인생이 변한 계기는 대략 네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아내와의 연애이지요. 수업시간에 하도 비판을 많이 해서 상처만 주던 제가 사랑을 얘기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아내와의 연애는 그 사람의 맘을 헤아려 주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역시 사랑은 위대한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우리 딸 건희의 탄생입니다. 건희를 처음 안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서 녹아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이 작은 녀석을 보며 눈물이 나왔던 그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지요. 그 후 녀석과 함께 즐겁게 놀면서 저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신학공부였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며 제가 깨달은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자아와 욕심을 통해 많은 문제가 비롯되고 있음을 깨달으며 저는 물질을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나니 얼마나 편안하던지요. 저희 부부는 그저 "일용할"만큼의 양식만 취하며 평생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끝으로 네번째는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블로그는 단순히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제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지요.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휴~시간이 어찌나 빠른지요. 시골에서 복수의 칼을 갈던 한 아이가 이렇게 자라 두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남은 인생을 더 어렵고, 가난한 이와 함께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글을 통해 인생을 함께 나누는 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 다가올 10년 후가 기대됩니다. 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런지요. 그 때도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며 한바탕 웃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 여러 분들이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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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몰이
시원한 샘물처럼, 상쾌한 숲 속 바람처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며 세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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