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교회다니는 것'과 '종교생활' 잘 하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을 보면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제자"와 "무리"로 번역된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흔히 제자는 '마데테스' 라고 하고, 무리는 '오클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를 의미하는 마데테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떤 것에 쏟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승과의 관계 속에서 배움에 종사하고 있는 자란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스승과의 내적 교류에 힘쓰는 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클로스는 다릅니다. 이들은 웅성거리며 주변을 떠돌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무리를 보시며 아파하시고, 먹여주셨지만 이들은 선뜻 제자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상처입고, 아파하는 민중이었지만 주님께 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여 구원의 길에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인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게 무엇인가' 로 돌아오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생활이나 교회다니기와는 다릅니다. 그저 출석만 하고, 종교프로그램을 열심히 참여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출석과 프로그램에 "참여"만 하게 되면 "내적성장" 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교류" 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사전적 정의 즉, 신앙을 가지고 종교에 귀의하여 영적 생활을 한다는 것처럼 구체적인 내 "삶" 과 연관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변함으로 내 삶이 변하는 "거듭남" 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주님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가치에 마음을 쏟고, 그 내적교류에 힘쓰며 변화된 삶을 살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남의 일만 쳐다보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주님과의 교류는 커녕 내 자신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늘 돌아보며 날마다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눅 6:41-45 의 말씀을 보며 다시 한번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춰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로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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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극단적이면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이나 집단은 대화가 통화지 않는 경우가 많아 멀쩡하던 사람도 멀쩡하지 않게 하고,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건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든 자신만의 '진리' 가 있지요? 그리고 이걸 믿는 '신앙' 이란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타협의 문제가 될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해야할 문제가 됩니다. 그래야 내 종교와 내 신념, 내 신앙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정말 내가 믿는 진리가 유일한 진리이고, 생명이라 생각하여 포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과 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해보자 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반드시 해야만한다'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그 종교는 폭력이 되어 버리고, 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맙니다.



어제 H대 신대원에서 부처님 오신 날 축하 현수막이 찢겼다 다시 걸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가 다녔기도 하고, 다시 다닐 예정이기도 하여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 내용보다 흥미로운 게 그 밑에 달린 댓글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댓글이 달린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예, 신학적 입장과 해석이 다른 그래서 교단이 다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 열정과 헌신적인 삶의 자세를 보며 저는 많은 반성을 하고, 제가 꼭 배워야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자신들의 믿음의 방식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크리스챤이고, 핵심적인 믿음 즉, 십자가나 부활, 성령, 삼위일체론 등은 사실상 같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상대를 정죄하려 하는 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꼭 상대를 무섭게 몰아쳐 구석에 몰아넣을 필요까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부모님 없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생선장사를 하시던 조부모님과 살며 나름 재능있었던 태권도와 주먹을 쓰며 자칫 탈선의 길을 걸을뻔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부터는 허리가 부러질정도로(실제 부러졌지요. 그래서 수술도 했다는..ㅠ.ㅜ;;) 지독하게 살아왔습니다.

너무 힘들었지요. 이건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천만원이 드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고..그러면서 학업을 하고..길을 걷다 졸아서 다쳐보지 않고, 밥을 먹다 지쳐 쓰러져 국을 온 몸에 쏟아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저 바람몰이 이 사람. 지금가지 믿음 하나로 한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 하게도 저희 집에서 크리스챤은 저와 할머니 뿐이었습니다. 저희 큰 고모님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마저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십수년간 살아오는 모습을 보며 '야, 너 사는 거 보니까 나도 교회라는 거 한번 다녀봐야겠다' 라고 하십니다. '너 목사 되면 내가 꼭 너희 교회 나가고 싶다' 라고 하십니다.

제가 제 신앙과 제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얻게 되고, 지금까지의 노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좀 쌩뚱맞은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주식투자 해보셨습니까. 주식 격언에 보면 '언제든 갈 종목은 반드시 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락장에 폭락장이라도 결국 좋은 재료가 있고, 모멘텀이 있는 종목은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고, 유일한 진리 즉, 절대성을 담보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절대성은 수많은 상대성 속에 굳이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좀 넓은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이 사회를 사는 구성원이자 내 이웃이고,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그들의 신앙도 가치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하여 내가 믿는 진리가 퇴색하거나 가려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핏대를 세우며 싸우거나, 상대를 지옥불에 던져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어 삶이 변하고, 그 존재가 새로워져 새 삶을 살게 된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에 관심을 갖고, 당신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P.S : 미리 밝혀둡니다만 저는 종교다원주의자 아닙니다. 제가 꼭 이 주제만 다루면 저를 종교 다원주의자라며 몰아세워 저를 정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신앙이 없다니, 예수가 진짜 살아있는지 돌아보라니..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 이 사람 예수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고, 신앙 하나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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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운영을 하며 참 별일을 다 겪습니다. 예전에 제가 <종교로 인한 제사갈등 이렇게 해결하고 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 많은 비판, 격려 등이 공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욕을 하는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오늘 블로그 유입경로에서 이상한 주소를 하나 보았습니다. 싸이 미니홈피에서 유입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하여 클릭 후 확인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어떤 분의 다이어리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가 쓴글이 다음의 글 중간에 링크되어 있었습니다. 아래는 그 글의 전문입니다.
 

나의 하느님 

대한민국 나라사랑하는노래(愛國歌)에 나오는 

보우하실 하느님은 단군 한아버지 박달나무 위 푸른,

원효 스님이 타고다니셨던 소 등짝 위 한가로운,

이순신 장군이 피흘리던 노량 위 절박한,

녹두장군 목떨어지던 위 서글픈,

아우내 장터 위 통쾌한,

1.4후퇴 위 시린,

 

시청 앞 광장의 붉고, 또 뜨거운 심장들의 위

가슴벅찬 하늘님.

 

아, 가슴벅찬 대한민국, 보우하실 하느님.

보우하시되, 이승만도 박정희도 김일성도 김정일도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아닌, 우리를 보우하실, 하느님.

 

시끄러운 개는 애비에미도 없고, 조상도 없고

국가도 없는 좇도 개 쓰레기들은,

종교는 이성적으로 판가름 아니랬다가,

또, 궁지에 몰리면 이성적이란다.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2407035

이녀석처럼.

 

자신은 안 그런양, 그래도 좀,

덜 개새끼인양 아주 지랄 발광을 하는구나.

이쁘건 밉건 똑같은 개자식이로구나.


나의 하느님, 내가 사랑하올 하느님.

나를 사랑하올 하느님.

예수의 하느님, 공자의 하느님, 부처의 하느님.

세종대왕의 하느님, 이름없는 민초의 하느님,

대한민국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일본의 하느님,

이슬람의 하느님, 동양의 하느님, 서양의 하느님,

온 누리의 하느님. 개새끼의 하나님 아닌 거지의 하늘님. 부디.

개새끼들에게도 임하시되, 사람은 보우하사.

평화로운 그대 백성을 돌보소서.

내가 개새끼라고 욕하는

개새끼인 나도 돌보시고, 우리 할머니도 돌보시고, 또

그 개새끼들도 돌보소서.

 

찬송가 울려퍼지는, 썩은 목사가 당신의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 주머니 털어가고, 삥뜯고, 사기치고, 따먹고 또

목에 핏대 세우는 엄숙한 이땅 위에는 임하지 마옵시고,

임금님, 포졸, 농투성이, 사냥꾼, 토끼, 개새끼가

신명나는 농악소리에 어우러지는 시끌시끌한, 그

치열하고도 흥겨운 생존의 우리네 장터 위에 임하소서.

 

그래도.

나는 육신있는 한, 당신백성 이전에 대한민국의 아들이오,

당신아들 이전에 집안의 자손이오, 아버지의 아들이오,

너그러우시니 나를 용서하시고, 육에 충실하도록 하소서.

나를 먼저 사람되게하시고, 사람답게 효도하고, 충성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손닿지 않는 곳, 불쌍하고 가난한

당신 백성들과, 일부 개새끼들 사람답게 살도록 하라는

당신이 주신 소명 이루게하소서.

 

할렐루야.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도다.

대한민국 만세, 세상 만세.

당신 아들들, 나와 함께하도다.

 

아멘. 아멘. 만세. 아멘.

 

조국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글의 내용으로 볼 때 이 분 역시 크리스챤이신 듯 하나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글 중간에 제 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에서 개00 가(이) 되고 있습니다.(점선 표시부분)

순간 모욕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미 제가 쓰는 기독교 관련글은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습니다만 이렇게 육두문자를 들은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글의 논조에 동의하지 않으면 비판하시면 되는 거지요. 그리고 대화하시면 됩니다. 

아..제가 그렇게까지 꽉 막힌 개독교인이었나요? 이런 욕까지 먹을 정도로 말이죠..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려 노력하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려 노력해왔는 데..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은 용서하라 하셨고, 사랑하셨지만 그 죄까지 사랑하라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여 저는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23일에 다시 방문하여 확인한다 하였고, 그 때까지 사과가 없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하였습니다.

일단은 23일까지 기다려볼 예정입니다. 현재 이 글과 URL을 확보중입니다. 물론 욕하는 거야 본인의 자유겠고, 이렇게 차갑게 사시는 것도 본인의 인생관이시겠으나 구체적으로 링크까지 해가며 저렇게 욕을 할 수 있는건지.. 아무리 개인공간이라도 말이죠..

아, 정말 블로그 운영을 하다보니 별일을 다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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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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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득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닌 '나만의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일제 치하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기독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 기도, 내 가족 기도 밖에 안 들립니다. 가끔 '우리'가 나올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우리 교회'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썩 편치가 않습니다. 그 내용 중 교회 성장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먼저 성경의 하나님은 특정집단이나 종교, 민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구약 성경의 주요 오해소지 문구 해석과 신약의 주요 강조점을 통해 간략히 밝히고,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후 나름의 결론을 맺으며 글을 진행합니다.  



2.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철저하게 공동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특정지파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생명과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2-1)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 으로 주로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여러 지파와 집단이 존재했는 데요. 이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특정 지파나 집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 이나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식의 표현 또한 볼 수 있는 데요. 이것 역시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들의 신앙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특정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전 공동체적 의미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더 짖게 뿜는다 할 수 있겠습니다.

2-2)신약시대에 이르러는 이것이 더욱 확연해지고, 범위가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핵심인 예수유대인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 유대주의, 독선, 아집 등의 배타성을 철저하게 거부함에 이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에서는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을 높이며 그 뜻을 설파했고, 몹쓸 병에 걸려 배척받던 병자를 치유하였습니다. 또한 차별받던 여성의 역할과 그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막과 휘장이 찢어지며 하나님이 특정 종교나 집단,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잘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을 통해 하나님이 만유 위와 만유 안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전 생명과 우주질서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고백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한국 기독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를 기독교라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기독교'보다 '개독교'라 부르는 걸 더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목사' 는 '먹사 새끼'라고 부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1)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저는 그 원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특별히 한국 기독교인만이 갖고 있는 자기들끼리는 친절에 사랑이 넘치면서 다른 종교나 세상과는 분리된 듯한 또한 다른 종교나 생각을 갖지 않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종교든 그 폐쇄성과 배타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종교만의 고유한 '신앙'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신앙을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고, 이것이 신앙을 갖지 않는 다른 이에게는 '폭력'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선교하는 것 좋습니다. 어떤 종교든 선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걸 끊임없이 강요하나요. 왜 지옥불 얘기를 하며 협박을 하나요. 자신의 선행과 사랑, 변화된 삶을 통해 '아,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변하는 구나. 이런 힘든 상황도 살아가는 구나.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런걸까' 라는 말이 나오도록 선교할 수는 없는걸까요.

3-2)  굳이 선교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필요 이상의 이 폐쇄성과 배타성이 사회적으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을 넘어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일반인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을 넘어섰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 어떤 종교든 그 종교만의 특정 신앙의 영역이 있고,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그걸 신앙이라 하는 거고, 이걸 고백하는 이가 그 종교의 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것에 함몰된 나머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영역은 완전히 배제되어버렸고, 사회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멀쩡한 절에가서 불을 지르고, 학교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 목을 벱니까. 왜 이웃에게 저 사람이 나를 스토킹한다는 말이 나오게 합니까.

3-3) 어떤 분들은 제 가슴속에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시나 돌아보라 하던 데요. 그래서일까요. 저같은 사람은 지하철이나 옆집 앞에서 시끄럽게 확성기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그 시간에 노숙인과 독거노인, 외국인 근로자, 장애우 등을 섬기는 것이. 용산 참사현장을 찾아 함께 연대하고, 싸이코패쓰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라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것더 큰 선교의 효과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옳고, 사회적으로도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정말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4.어제 아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곳을 잠시 들를 일이 있었는 데요. 그 상가 앞을 보니 "세계정복 00제자" 란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내건 광고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세계 전체에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이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선교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지요.

한국 기독교는 좀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존재라는 철학용어가 있지요. 어떤 인간이든 그 시대와 문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반드시 자신들이 얘기하는 것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비롯된 폐쇄성과 배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신들의 전략적으로도 자충수를 두고 있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공격성과 배타성으로는 이 사회의 화해자가 될 수도 평화의 사도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마당에 그렇게 주장하는 선교가 될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를 존중하고, 말 그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섬김의 삶을 살 때. 이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단호히 저항하고, 끊임없이 팽배하는 물신주의에 제동을 걸며 뭔가 다른 삶을 살 때.

그 때야 비로소 교회는 교회답다 인정받고, 크리스챤은 뭔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며,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하는 기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1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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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마다 계속되는 제사 갈등>

해마다 명절이 되면 기쁨과 갈등이 공존하지요. 가족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견해차가 존재하여 갈등도 일어납니다. 저는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종교적 신념에 의한 '제사갈등' 이라 봅니다. 하여 오늘은 이 얘기 좀 해볼까 하는 데요.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저희 집 얘기를 좀 하면서 풀어가보고자 합니다.


갈등의 해결 열쇠

저희 집은 3년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특히, 제 아내는 장로에서 목회자가 되신 장인 어른 밑에서 자란 이른바 '모태신앙' 의 소유자입니다. 반면 저희 집안 대부분 구성원은 모두 종교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분들은 상당히 고지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님 제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갈등이 상당했겠지요. 고지식파와 신학전공자, 권사님까지 있는 곳이니 말이죠. 하지만 저희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지금까지 넘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해"와 "유연성"그 핵심이었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게 왜 우상숭배인가?

저는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H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저희 학교는 '학문과 경건' 이라는 구호아래 <진리, 자유, 사랑>을 전하며 사회참여를 매우 강조하고, 상당히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저는 이 곳에서 종교 상호간의 열린 자세에 대한 것을 배웠습니다. 이 때 느낀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칫 종교가 그 열린 자세를 잃을 경우 강력한 칼날이 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상호이해가 -특히, 기독교인-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숭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교만과 배타성입니다. 또한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물질과 풍요의 맹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가리는 이념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가 우상숭배와 등치 되지 않음을 알았고, 집안 내에서라도 함부로 내세워지는 배타적인 자세는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욕보이는 무서운 성격을 지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카톨릭은 지나 62년부터 제사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동양의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현재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특정형식 고집보다 그 핵심정신을 지키는 유연함이 필요

집안 일의 주축이 되시는 작은 아버님의 입장은 이랬습니다. 먼저, 저와 아내, 할머님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저희가 굳이 유교양식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이해해주셨고, 그 양식 역시 기독교의 추도예배라 한들 상관 없다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차피 제사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제사는 오래 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역시 유교 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 후 입니다. 물고기 머리와 과일 색을 맞추는 것 같은 세세한 항목 역시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왜 유교에서 이렇게 제사를 강조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효"의 가치를 통해 나라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그 첫째 목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유교 이념에 따른 것입니다. 두번째로 부모를 잊지 않음이 사람이 가야할 길 중 하나임을 확인함이 있고, 세번째로 전쟁, 기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다시 하나로 모이게 하며,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려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 어른들은 바로 이것을 기억해 주셨던 것이지요. 따라서 제사의 양식이 기독교의 예배이든 아니든 먼저 가족이 모이고, 부모를 기린다는 핵심 정신을 지킴이 중요하다 여겼던 겁니다. 

자, 이렇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제사 본래의 의미를 기억하니 일정부분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자연스레 이 문제로 인한 갈등도 사라질 수 있었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문제 때문에 가족끼리 다투고, 내가 믿는 예수 이름이 욕보이게 되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조절하며 풀어나갈 것인가? (필자의 사례)

그럼 여기서 저희 집은 어떻게 명절 제사를 지내는 지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범은 아니고, 각 집안마다 차이가 있으니 참고만 하시면 좋겠습니다.

1)먼저, 기독신앙이 없는 다른 분들의 마음은 음식을 꼭 차려야 한다 여기십니다. 예, 그러시라고 합니다. 이 음식이 결국 명절 음식이 됩니다. 
2)상을 차리면 제가 주도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제가 설교도 합니다. (일반 크리스챤 가정은 교회요람에 나와있는 양식을 따르면 됩니다)

3)설교가 끝나면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싶어하는 분이 나와 진행합니다.  

4)끝으로 마무리 기도를 하고, 모든 순서를 마친 후 함께 식사를 하지요. 식사를 하며 화목하고, 재미있게 교제를 나누면 됩니다. 
  
정리하며

이번 설은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뒤숭숭 하여 별로 흥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간의 화합과 격려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명절은 서로 싸우려 모인 것이 아니지요. 이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은 절충하고,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큼은 받아주는 게 가족이겠지요.

아마 돌아가신 어른들이나 하나님도 이런 화목한 모습을 더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덧1)익명을 이용 험한 말씀 하시는 분이 좀 계신 듯 하여 댓글권한을 로그인 후 가능으로 바꿉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지혜를 나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덧2) 저는 신학전공을 한 저를 친지 어른들께서 존중해주시고, 배려해주시어 축문 읽는 것을 대신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조해 주시구요. 일반 가정에서는 가족이 돌아가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누거나 서로를 위해 덕담하는 시간으로 가져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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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은 옳지 않다. 또한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하려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전자의 경우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정치와 군사, 경제 등은 자신이 맡을 테니 교회는 국민들의 영혼 문제에 전념을 기울여달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전쟁에 교회가 동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후자의 경우는 마치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중세는 기독교에 있어서는 가장 전성기였지만 세상은 중세를 "암흑시기"라고 부른다.

결국 이 같은 역사적 교훈에서 볼 때
종교를 정치와 완전히 분리시키거나 합일하려는 것은 모두 과거를 답습하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필자는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에게서 그 교훈을 찾는다. 그는 젊은 나이에 목사가 되어 99%의 독일 교회가 찬성하던 히틀러를 저항하고 그의 암살을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운전자가 버스를 몰고 절벽을 향해 승객을 태우고 갈 때는 그 운전자를 깨워내거나 버스를 멈출 수 있도록 해야한다 하였다.

암살계획을 통해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정의와 평화의 뜻을 구현하려 적극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를 정치가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교분리주의자라 평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즉, 그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참여하지 않은 좁고 오묘한 긴장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종교와 정치는 이런 것이다. 종교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정치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나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늘 끊임없이 정치를 비판하고 비판하며 바른 길을 가도록 조언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잘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바로 종교의 몫인 것이다.



장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보수교회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장로 대통령을 통해
이 나라와 민족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다. 파쇼적 발상의 극치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도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장로이건 불교 신자이건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 사랑, 생명의 가치를 구현해 내느냐의 여부이다. 그의 정책에서 가난하고 약한 서민을 아끼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정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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