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변해야 산다'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21.09.08 성범죄자 목사가 있는 곳에 내 아이를 보낼 순 없다. 2
  2. 2020.08.23 <사과문> 교회가, 크리스천이 잘 못 했습니다
  3. 2020.06.11 기독교 성교육 도서를 구입하며 반성하다
  4. 2020.04.12 코로나 19는 개척교회에 선교의 기회가 될 것인가[세교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
  5. 2020.02.29 코로나 19에 대처하는 교회의 자세-세교 하울교회, 손소독제 나눔
  6. 2020.02.25 코로나 19 분석과 예측-세교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
  7. 2020.02.23 코로나 19에 대처하는 교회의 자세5-세교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
  8. 2020.02.21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교회의 자세4-세교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
  9. 2019.12.29 신학교 성폭력 가해자 교수구속, 당연한 결과이다
  10. 2019.12.20 이른바 '성경적 성교육'을 경계한다.
  11. 2019.10.04 [세교 하울교회] 교회 성폭력 예방과 처리 지침서가 나왔습니다(기장)
  12. 2019.09.24 [세교 하울교회] 기장, 교회 성폭력 지침서를 공유하다
  13. 2019.09.20 [세교 하울교회] 교회 성폭력, 목사부터 변해야 한다
  14. 2018.12.04 제 3기 성교육 강사 수료과정 및 기독교성윤리지도사 자격과정 안내
  15. 2018.11.27 교회성교육 강사 및 기독교성윤리지도사 자격과정 안내
  16. 2018.09.14 [임정혁 목사 칼럼] 목회자 성비위 예방 및 근절, 어떻게 해야 하나
  17. 2018.05.29 교회 성폭력 예방과 근절의지가 있나?
  18. 2018.03.08 교회 미투, 이제 시작이다
  19. 2017.11.25 [임정혁 목사의 개척일기] 하울 성폭력 상담소를 위해 기도합니다
  20. 2013.11.03 음란물을 대하는 교회의 자세는? 2
  21. 2010.05.04 결국 우리 동네도 대형교회가 들어온다 4
  22. 2009.07.13 목회자는 경제에 대해 좀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8
  23. 2009.05.01 그렇게 핏대 세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2
  24. 2009.02.13 한국 교회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 23
  25. 2009.02.09 저 혼자만 구원 받겠다는 한국 기독교 12
  26. 2009.02.06 예수가 '대형교회' 지어달라 한 적 있나? 8
  27. 2009.02.04 한국 기독교 '배타성' 버려야 산다 7
  28. 2009.01.21 종교로 인한 제사 갈등. 이렇게 해결하고 있다 173
  29. 2008.12.10 문제는 수준 낮은 목회자이다. 5
  30. 2008.11.11 가난한 학생을 위한 기도회를 하는 건 어떤가?


학교 교직원 연수를 위한 자료준비를 하다 최근 5년 간 성비위 공무원 양정별 징계현황을 살펴 정리하게 되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작은 성비위도 중징계 이상으로 처리하는 사례 증가, 파면과 해임 등 배제징계의 비율 역시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최근 여러 종류의 성폭력 유형이 추가되었음에도 중징계 비율이 증가한 것은 성비위 처벌의 기준 자체가 한 단계 상향되었다는 것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의문이다.

왜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성범죄 목회자에 대해 제 식구 감싸기를 하는가. 왜 교단과 노회는 성범죄 예방과 피해자 보호에 이렇게 무기력, 무관심한 것인가.

언젠가 중학생인 큰 딸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을 가르치고, 영육을 돌보시는 목사님이 성추행범이면 자신은 신앙을 잃을 것만 같다고...나 역시 내 아이를 성범죄자가 있는 교회에는 보내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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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문>

"교회가, 크리스천이 잘 못 했습니다"

샬롬!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코로나 19 확산세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우리 세교지구에도 확진자가 나오고, 어린이 접촉자까지 발생했습니다.

우리 하울교회는 지난 2월부터 비대면 예배를 드리며 매주 아동을 섬겨 왔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지만 늘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데는 한국 교회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와 교단이 다르다고, 우리는 잘 해왔다고 선을 긋거나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책임을 통감하며 사과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 밴드에는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부모님이 많이 계십니다. 얼마나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큰 실망을 하셨을지 마음이 많이 아프고,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지 못 했습니다.

교회라는 곳이 덕이 되지 못하고, 큰 걱정과 민폐를 끼쳤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의 잘 못을 함께 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건강한 교회로, 아이들을 바르게 길러내는 교회로,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교회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마지막까지 안전에 만전을 기하시길 바라오며 우리 교회 역시 아동의 안전과 영적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 드림.

(2020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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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교회용 성교육 도서 여러권을 구입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몇 권 없었는데, 올해들어 다양한 곳에서 많은 책이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작년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어느 정도 내용이 예상된다. 최근 여러 매체의 보도를 참고해 볼 때, 불안한 마음이 큰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대형교회나 보수적인 회사가 끼어들어 출판을 하기 시작하면, 그 내용과 별개로, 이것이 하나의 주류로 자리 잡고, 표준이 되어 버린다.

솔직히 말해, 내 입장에서 건강한 신앙의 스탠스를 취하는 그룹들은 기독교 성교육 시장에서 보수 또는 대형 기독교 진영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다. 밀려도 많이 밀리고 있다. 뭐 제대로 나온게 거의 없다.

기독교 성교육은 단순히 '성' 자체만을 다루는 분야가 아니다. 여성학, 교육학, 상담학, 범죄학, 의학, 법학, 윤리학, 사회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기초적 수준에서라도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우리 사회 또는 교회의 성문제는 이 모든 것의 모순이 집약되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상호대화를 하며 성경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늘의 현실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과정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 얘기하고, 출판하는 성 또는 성교육 관련 도서는 성경본문에 끼워 맞추기식이거나 너무나도 보수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 일반 성교육의 흐름과도 많이 동떨어져 있고, 세계적인 흐름과도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사실 나도 고민이다. 자본과 성실성이 더해지면 얼마든지 책을 써내겠지만 나도 그렇고 내 주변도 그렇고...둘 중 하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에...

그나마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이 분야를 연구한 축에 속해 첫 단추는 어느 정도 좀 꿰어 놨는데, 이 둘 중 하나가 부족하니 막 뒤로 쳐지고 있다. 괜히 찔리니까 이렇게 불안해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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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교회를 한지도 벌써 3년째로 접어 들었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부활의 달걀을 삶으며 텅빈 교회를 보고 있다. 마음이 복잡하다.

온라인 예배를 드린지 벌써 8주째. 오늘도 삼각대를 세우며 예배 후 일정을 살핀다. 아이들이 보고 싶고, 삶이 염려되어 매주 먹거리와 손소독제, 마스크를 보내고 있다. 모이지는 못해도 섬길 수는 있는 거니까.

Before Covid19-After Covid19

이제 모든 것에 untact문화와 시스템이 깃들 것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기존 질서와 New normal은 공존하겠으나 대규모 감염병이 한 번만 더 돌아도 이는 확연히 역전될 것이다.

이는 기존 교회에 위협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혁신의 기회일 수도 있고, 우리 같은 작은 개척교회에겐 선교의 기회일 수 있다. 재정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을 테니까.

유튜브에서 홀로 찬양을 들으며 눈물 흘리고, 설교를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성령의 역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연히 들었던 설교나 TED강연에 구독을 누르고, 꾸준히 그 강연자를 만난다.

어쩌면 무력감과 복잡함을 넘어 뭔가 해볼 수 있다는..온라인 예배와 목회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어렴풋이 뭔가 보이는게 있다는 희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나도 아직 그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지 않지만 신학과 목회, 기술의 측면에서 그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하늘의 지혜와 자비가 간절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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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아이들과 그 이웃에게 나눌 개인용 손소독제 60개. 2회에 걸친 마스크, 핫팩 나눔에 이어 진행한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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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이럴 때 쓰라고 내는 것이고, 교회는 이럴 때 빛이 되라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19 분석과 예측..간단히 산술적으로 볼 때, 지금 조사하는 신천지 쪽 인원이 만 명 정도이고..이 중 확진자를 최소 10%만 잡아도 1천명.

즉, 이번 주에 확진인원이 확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 냉정히 거칠게 말하자면, 그 인원이 몇 천 명 선에서 정리되느냐의 차이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다행인 건, 현재 감염루트가 신천지, 온천교회, 대남병원 등 구체적으로 잡혔다는 것이고, 관련 명단이 확보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

위기단계 '심각'으로 격상되고, 코로나법 개정과 함께 공권력이 좀 더 들어가면 이 부분은 상당히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앞으로 언론에서 자극하는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충분히 통제되고 있는 것이니까..그저 방역요원들의 건강이 염려될 뿐..)

또 코로나 19 치료제로서 '렘데시비르'가 빠르게 검증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 약은 에볼라 치료제로 개발되다 잘 안 되었는데, 어쩌다 얻어걸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시점의 세계적 경제쇼크는 중국발로 보는 것이 맞고, 치료제 개발과 감염병의 정리, 중국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일시적 또는 제한적 쇼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럴 때 렘데시비르가 임상 2상에서 어느 정도 검증되었고, 길리어드사가 중국과 협의하여 이미 임상시험 중이기에 중국에서는 최대한 신속히 그 결과를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려 할 것이다.

아마도 중국쪽에서는 그간의 경제문제로 고민하던 것에 대한 재정투입, 양적완화 등의 명분이 생겼기에, 치료제의 검증 작업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현재로서는 렘데시비르의 데이터가 중국 밖에 없는 상황이란 것이 포인트. 그렇다면 중국에 마스크를 보내며 거의 유일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우리나라였다는 건 신의 한수라 평가할 수 있다.

잠깐 뇌피셜을 더해, 대통령이 직접 전화했을 때, 양국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 데이터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이 약의 검증, 허가, 투약에 이르는 상당한 시간, 돈, 위험성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것이 된다. 우리로서는 불행 중 만난 호재이다.

요건대, 적어도 현정부에서는 거짓말이나 축소은폐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고, 언듯 혼란스러운 듯 보이는 지금의 상황도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는 것, 치료제에 대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생긴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불안정하다. 글을 계속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

이럴 때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나.

먼저, 현시점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통해 현재의 흐름과 내일을 읽어내야 한다. 이 상황도 거시경제의 패권다툼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이럴 때 교회가 함부로 부화뇌동 하면 안 된다. 특히 정치논리의 앞잡이가 되는 건 최악이다)

둘째, 명확한 팩트체크를 통해 과도한 불안은 제거하고, 나이브한 낙관론은 경계해야 한다.

셋째, 교인과 국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위로하고, 마음을 모아 위기를 이겨내도록 격려, 기도해야 한다.

넷째, 소독제, 마스크 등을 비축한 것이 있다면 주저없이 나눠야 한다. 헌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고, 교회는 이럴 때 빛이 되라고 있는 것이다.

 #세교 코로나 #코로나19 #코로나 교회 #신천지 코로나 #마스크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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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은 확진자 수가 확 증가할 것이다. 일천여명을 찍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병상 1만개 확보, 하루 최대 7500여명을 검사할 수 있을만큼 준비했으니, 당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초중고교 개학 일주일 연기, 위기경보 심각단계 격상 모두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정부에서 대구, 경북에 마스크 우선 공급도 잘 한 결정이다.



이 시국에 우리 교회가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1. 어쩌면 우리 교회도 한 주 더 유튜브로 예배 드려야 할 지 모르겠다. 좀 더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2. 이미 우리 하울교회는 마스크 비축물량의 2/3를 아이들과 이웃에게 전달했다. 오늘 마스크를 추가주문 했는 데, 새로운 전달방식을 기도해 봐야겠다.

3. 소독제 역시 이웃교회와 가진 것의 2/3를 나눴다. 남은 1/3을 이용하여 우리 같은 작은 교회 방역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추가로 장비구입을 해야한다는게 좀 부담이긴 하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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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세교 하울교회 임정혁 목사입니다. 코로나 19 관련 상황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 하여 계속해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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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교회방역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여러번 올린 바 있으니 확인 부탁드리고..오늘은 앞으로의 전망과 실천사항을 올리고자 합니다.

현재 대구 신천지를 시작으로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물론 정부에서 초기에 잡아내려 신천지 대구신자 9천명 전수조사 등의 카드를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코로나 19가 신종플루처럼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고, 장기화 될 수 있다 예상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즉, 앞으로 한동안 감염자 발생은 계속 될 것이고, 이제는 상황발생 예방과 상황발생 시 관리와 피해 최소화까지 고려한 대응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락에서 현시점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짜뉴스 정리..예: 면역력을 높이면 감염을 피할 수 있다, 감염의심자나 확진자에 대한 헛소문, 초기에 중국 봉쇄를 안해서 이렇게 됐다, 코로나19에 뭐가 좋다는 등의 허위정보(양파, 바세린 등)

2. 소독약 충분히 구비
건물은 락스를 희석해서 하시면 되고요. 손은 에탄올 소독약을 이용해도 됩니다.

(저희는 응급처치 교육을 하는 곳이라 이미 에탄올과 락스, 마스크 등을 충분히 구비하여 교인, 이웃과 나누고 있습니다)

3. 식사 제공시 개별 수저와 컵 사용
공용컵과 수저 소독법은 처음에 올려두었으니 확인 바랍니다.

4. 현시점 기준, 앞으로 최소 4주간 신규 예배자 등록은 매우 신중

5. 인원이동이 많은 교회는 열화상 카메라 구입도 고려
교회 출발 때, 예배 때는 미열정도여서 증상을 잘 못 느끼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감염병은 언제든 다시 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는 열화상 카메라 구입도 고려할 만 합니다. 이게 비싼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 폰을 활용하는 저렴한 제품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6. 가능하다면, 교회차량 문을 자동문으로 바꾸거나 한명이 꾸준히 개폐담당-차량 손잡이는 매우 전염력이 높은 위험부위입니다.

7. 교회차량, 냉난방기 필터 철저소독 또는 필터교체
메르스 때 ㄱ병원 호흡기과는 병원 내 냉난방기의 필터에 바이러스가 묻고, 이것이 퍼지며 문제가 되었습니다. 실내 감염병 전파의 핵심경로입니다.

8. 예배 전 후, 교회차, 문손잡이, 화장실, 교회 실내외 철저방역 후 환기진행

9. 온라인 예배 가능한 시스템 구축
유튜부나 페이스북을 이용하면 생각보다 손쉽게 온라인 예배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10. 매주 토요일 전교인 건강체크, 위생교육

몇 가지 수칙만 지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온 교인이 고생하고, 교회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귀찮더라도, 힘들더라도 꼭 실천할 부분은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 #세교하울교회 #임정혁목사 #코로나 바이러스 #교회 코로나 #신천지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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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결과이다.

법률적 개념상 구속이 곧 유죄확정은 아니다. 이는 범죄의 상당성이 소명되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충분히 조사해서 재판으로 갈 내용이 확인된다..는 정도의 의미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구속이 주는 무게감이 있다. 특히 성범죄에 있어 구속은 통상적으로 중한 처벌로 이어지곤 한다. 나는 이 사건 역시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한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나는 2차 가해자들..특히 가해자를 두둔했던 자들과 피해자를 찾아내고, 사생활이나 성향 등을 묻던 자들의 언행을 다시 한번 지적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우리 교단의 매우 소극적인 모습..즉, 피해자와의 연대 및 지원, 가해자에 대한 신속한 조치 미이행, 소극적인 법률제정, 다양한 예방책 미시행 등 여러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몰랐다고 한다 해서 그 책임이 가벼워지거나 가해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를 파면했다 하여 성범죄에 대해 무방비 상태인 신학교가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며, 성폭력 특별법을 연구하게 했다 하여 교단이 바로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성폭력 예방교육 미이행 노회가 수두룩하다. 신학교에 관련 과목개설을 하겠다던 약속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2차 가해자들은 이 시점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교단에는 관련 예산조차 책정되어 있지 않다.

하루 속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목사가 되기 전부터 사회에서 이 일을 해왔고, 지금도 사회 쪽일을 더 많이 하는 내 관점에서는, 지금 우리 모습이, 일반 기업이나 관공서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심각한 상태로 보인다.

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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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교육은 성경을 토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적 성교육을 경계합니다.

언 듯 '성교육'은 '성' 하나만을 다루는 '한' 주제의 교육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교육은 성폭력, 성의학, 성가치관, 성인지 감수성 훈련, 성 관련 법률, 철학과 인간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로 나뉩니다.

성교육 강사는 성인지 관점을 토대로 기존의 이런한 내용을 해체하고, 종합하며 다시 재구성하는 학습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동안 남성 중심적 자본과 권력, 미디어 등에 의해 형성되어 온 성 인식 관점과 체계, 그 문화와 제도 등의 역사를 낯설게 바라보며, 성적 주체 모두를 위한 건강한 성 인식 관점과 체계, 문화 형성을 위한 창의적이면서 도발적이고,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성교육 강사 역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각 세부분야에 대한 철저한 전문적 학습을 거쳐야 합니다. 자신의 인식체계와 한계를 알고, 우리 사회의 자리를 점검하며, 한 개인의 성 또는 조직과 사회의 성 문제라는 것이 단순히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일련의 통전적 과정의 산물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속한 조직, 우리 사회 전반의 측면을 변화시키거나 또는 영감을 주는 공감과 소통, 성장의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성교육은 또다시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는 깊은 신학적 논의와 연구를 통해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비판적 융합이 이뤄지며 진행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과 인도 아래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걸음이고, 한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길인지 끊임없이 묻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걷다 보면 기존에 사회에서 진행하는 성교육의 결과를 받을 수 있는 게 있고, 받을 수 없는 것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지금 한국 교회에서 진행되는 성에 관한 일련의 활동과 교육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간 저는 지난 십수년간 현장에서 일해오며, 여러 활동가로부터 '제발 목사님이 상담소 운영 좀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어 왔습니다. 폭력 피해자에게 인내와 수용을 요구한다거나 자신의 몸 가짐 등을 따지는 2차 가-피해를 유발하는 사례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던 것입니다.

또한 현재 교회에서 진행되는 성교육을 보면, 앞서 기술했던 매우 복잡하고, 엄밀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사회 성교육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반대로 그저 성경에서 '성'에 대해 뭐라 하더라...는 식의 성교육을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성교육의 방향성도 없고, 뼈대도 없는 것이기에 공감과 소통을 일으키지 못하고, 새로운 영감을 주며 한국 교회 전반의 변화를 유도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때론 거센 반발과 저항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한 목회자가 설교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서주석과 해석, 개인의 삶과 사회에 대한 인식, 자신의 자리에 대한 성찰 등 매우 깊고, 복잡한 과정을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씀의 빛 가운데 진행하는 매우 은혜롭지만 무섭고, 책임 있는 그러나 설레는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십 수년간 교회 성교육을 연구 및 진행하면서, 이를 설교 자체에 등치시켜 비교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매우 철저하고 책임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라 느꼈습니다. 성 이란 것이 우리 사회나 개인의 삶에 있어 모든 것은 아니지만 매우 핵심적인 요소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교육은 분명 성경을 토대로 진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뼈대와 방향성 없이,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학문적 탐구, 성령의 조명 없이 성경 구절 몇 개로 진행해서는 안 됩니다. 또 사회에서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시 교회 성교육은 성경을 토대로 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매우 깊은 고도의 연구와 영적인 탐구의 과정이 성교육과 온전히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건강한 성경적 성문화와 가치관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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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장 성폭력 지침서를 받았습니다. 책자를 보니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깔끔하게 나왔습니다.

제 삶과 연구의 성과를 핵심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현시점에서는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매뉴얼입니다.

(물론 저 혼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전문가의 참여와 양평위의 추진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꼭 한 권씩 비치하시어 교회 내 성폭력을 예방하고, 사건 발생 시 온전히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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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보시면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매뉴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저 진짜 신경 많이 썼습니다. 제 모든 연구와 경험을 녹여 만든 자료입니다.

심지어 저는 양성평등 위원회 소속도 아니고, 저자 및 감수자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적 소명을 안고,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만으로도..

이 매뉴얼을 통해 조금이나마 피해자와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기장2] 양성평등위원회, '교회 성폭력 지침서' 배포
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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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단(기장)의 성폭력 예방 및 대처 매뉴얼 원천자료 제공과 자문 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

저는 이미 총회교육원 목회자 계속 교육과정에서, 몇 시간에 걸쳐, 교회 성폭력에 대한 분석, 대처 및 예방법, 성폭력 특별법의 구성과 내용, 대응매뉴얼 등을 상세히 밝히며 발표한바 있습니다.

이 후 양성평등 위원회의 요청이 있어 이 자료를 아무런 조건과 대가 없이 모두 제공하였고, 얼마 전 위원장님으로부터 초안 검토 요청이 오게 되었습니다.

단어 하나, 문구 한 줄, 전체적인 맥락과 시대의 변화까지 고려하며 신경써서 보았습니다. 일부는 수정을, 일부는 삭제를, 일부는 내용보강이 필요함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최종적으로 제 마지막 의견을 보내드렸습니다.

이제 이 내용은 책자로 인쇄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나올지 저도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걱정도 큽니다.

그간 저는 다양한 조직에서 수많은 매뉴얼이 오독 되거나 조용히 묻히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특히 성폭력은 수시로 내용이 변하고, 일정수준 이상의 법률 이해나 성인지 감수성이 없으면 매뉴얼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올 한 해 여러 노회와 교회를 다녀본 결과, 저는 우리의 성인지 감수성이나 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노동, 통일, 인권, 복지 등에 대한 이해보다 높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매뉴얼 또는 책자가, 첫 발행이라 당연히 부족하겠지만, 그럼에도 실질적인 효용성을 갖기 위해서는 노회별로 책임있는 분들이 관련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난 총회에서 결의된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 미이행 노회는 총회의 결의를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제게 연락이 오는 교회..전국적으로 골고루 있습니다. 미리미리 예방주사를 맞아두는 것이 피해자, 교회 그리고 목회자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교회 성폭력은 관련 법률과 시스템 못 지 않게 구성원 모두의, 특히 목회자의 강한 의지가 있어야 근절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부 목회자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공감하고, 함께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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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기 (교회) 성교육 강사 및 기독교성윤리지도사 자격과정 안내입니다.

자세한 일정은 아래 그림카드를 참조해 주세요.

선착순 10명에게는 교재비와 자격발급비 무료혜택이 주어집니다~

#성교육강사, #교회성교육, #교회성폭력예방, #한신교육연구소
#성교육 강사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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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한신교육연구소 임정혁 목사입니다.

저희 연구소에서 개설예정인 <교회성교육 강사 및 기독교성윤리지도사 자격과정> 안내를 드립니다.

이 교육은 1년에 단 한 번, 오직 저희 연구소에서만 개설하는 과정으로서, CBS방송국 전체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기록한 강의안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자신있게 권해 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해주시고, 많은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

1. 교육명: 교회성교육 강사 및 기독교성윤리지도사 자격과정

※ 정식 국가등록 민간자격증(2017-002995)

2. 교육일시: 1월 14, 21, 28일(온라인학습 8시간, 오프라인 22시간 총 30시간)

※ 오프라인 교육시간
오전9:30-17:30(점심 1시간)

3. 교육장소: 본 연구소(오산대역 5분 거리)

4. 교육비용: 30만원(카드결제 가능)

5. 특전: 자격응시료 및 교재, 자격증 무료(선착순 10명)

6. 주요학습내용: 생애주기별 성교육/기초성의학/성희롱, 성폭력, 범죄 관련 법률연구/성범죄 유형 및 대응과 상담/성경속 주요 본문과 성교육/강의의 이해와 실제 등
 
7. 문의: 010 4652 7640,  hansined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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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성비위 발생을 예방하고, 이를 처리하려면 어떤 요령이 있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즉각적이고, 납득이 될 만한 선명한 조치가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학교 교사의 경우 성비위가 발생하면 일단 3배제 원칙 즉, 직위해제, 담임 배제, 수업배제가 적용됩니다. 그 후 성희롱도 정직이상의 중징계가 나오도록 권장되곤 하는데요. 당연히 추행 등이 확정되어 벌금형 이상이 나오면 교단에 서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잡힙니다. 이 뿐 아니지요. 성범죄로 처벌이 되면 각 종 취업제한 등의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경우 이러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단별로 권징조항이 있거나 새로이 제시되고 있지만 좀 두루뭉술 한 느낌이 강합니다. 구체성이 부족하거나 징계조치가 약하기 때문에 오는 느낌입니다. 앞서 언급한 교사 징계수위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이에 저는 목회자의 성비위 예방 및 처리도 사회적인 인식수준에 준하는 위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1.성비위의 개념을 정확하게 세분화 할 것
성희롱도 다같은 성희롱이 아닙니다. 신체접촉이 있었다고 모두 성추행이 아닙니다. 성비위의 개념을 무엇을 근거로 할 것인지 정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명확치 않으면 훗날 많은 분쟁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2. 성비위로 기소 또는 기소의견 송치 시 즉각 시무정지, 모든 시찰회나 노회 등에서의 직무금지 -일부 목회자의 경우 민주화 운동 등의 전력으로 벌금 또는 징역의 경력이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분을 더하며, 성비위로 경찰이 검찰에 기소의견 사건송치 또는 기소가 된 경우 즉각적인 직무금지를 시행해야 합니다.

3. 벌금형 이상 확정시 면직 및 교회내 직원등록 불가

성범죄라고 해서 모두 징역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성의 화장실 등에 몰래 들어간 행위 등은 주로 벌금형이 나오곤 합니다. 따라서 금고나 징역 뿐 아니라 벌금형까지도 포함되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성범죄 경력이 쌓인 자가 교회내 직원으로 등록할 경우 수많은 학부모들의 걱정이나 불안이 가중될 것입니다. 만약 직간접적인 피해자라면 2차 가해를 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4. 담임 및 부교역자 청빙시 성범죄 조회확인

-불쾌하게 들릴 수 있으나 현재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든 공무원 뿐 아니라 저같은 전문인력이 학교방문을 할 경우 매번 성범죄 조회서 동의서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년에 수백회 조회를 하고요. 모든 강사는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전향적인 인식전환이 필요할 것입니다.

5. 권징위원회 구성 시 성별비율을 최소 7:3이상에 외부 전문인력 추가할 것

-어떤 위원회이든지 특정 성별비율이 30프로가 나와야 여론형성이 되고, 의견반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당연히 가해자와 상관 없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6. 성폭력 피해자 트라우마 센터 또는 심리상담 및 회복지원 센터 설립

-지금 모든게 가해자 처벌로만 얘기가 나오고, 피해자 치유와 회복에 관한 내용이 없습니다.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신앙을 잃고, 피해경험에 따른 상처에 머물지 않도록 저는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7. 모든 목회자 및 신학생의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의무화

-외국의 경우 목회자 성윤리 교육을 충분히 이수하지 않으면 목사자격유지가 안 되는 곳도 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가장 좋겠지만 최소한 일반 직장인 수준 즉, 일정인원 이상인 사업체나 조직은 반드시 일년에 한 시간 이상의 성희롱 예방교육이 법정 의무교육으로 지정한 수준 정도는 맞춰야 할 것입니다. 

8. 교회 내 성비위 상담 및 처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인력 양성 및 인건비 지원

-성비위 처리라는것이 마음처럼 진행 되는 일이 아닙니다. 법이나 상담, 행정절차에 대한 매우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면 가-피해자 모두에게 비난 소송을 받기도 합니다. 현장 노하우를 온전히 전수해줄 수 있도록 철저한 인력양성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대부분 일년도 안 되어 사직하곤 합니다. 결국 생계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인데요. 교단에서 이들의 인건비를 실비수준으로 지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성폭력 중 목회자 성비위는 더 적극적이고, 민감한 기준을 적용하여 선명한 조치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해자도 만족하고, 교회도 지킬 수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수백번의 사례로 볼 때, 어설픈 중재나 징계는 모두의 반발을 불러오게 될 것이고, 이러면 교회나 피해자가 더 힘들어 질 것 입니다. 지금처럼 사회나 교계 모두 여론이 집중되었을 때 제대로 기초를 닦아놔야지 이를 놓치면 앞으로 계속 어려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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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목사의 성폭력 문제로 전화가 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나도 추접하다. 피해자는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온 가족이 느끼는 절망감도 대단하다.

한 학교 선생님에게 상담요청이 왔다. 남성 관리자가 남성 교사의 성기를 만졌단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된 피해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무려 2년이 지났다.

사실 요즘은 거의 매일 상담요청이 온다. 교회나 학교, 기업 등을 가리지 않고 연락이 온다. 상황도 매우 안 좋은 경우가 많다. '언제쯤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기 이를데 없다.

때론 심리상담과 치료를 진행하기도한다. 나와 만난 가-피해자가 건강과 안정을 찾아 새로운 삶을 찾는걸 보면 내가 더 행복함을 느끼기도 한다. 내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한계를 느낄 때가 더 많다. 성폭력은 가해자가 처벌되고,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온전한 치유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사법처리를 진행해야 하는데, 현장에서 보면 우리나라 법체계가 피해자 중심으로 이뤄진다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교회나 교단에서는 처리의지 자체가 없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면 결국 피해자가 교회를 떠나게 되거나 심지어 피해자에게 마귀처럼 욕을 할때도 있다. 이럴 때 교회나 교단은 피해자와 교회를 지키는 방식을 택해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다보면 갈등이나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발생가능성 자체와 사건 예방 및 처리 의지는 별개이다. 그 공동체가 어떤 관점과 입장에서, 어느 정도의 의지로 사건을 예방 및 처리하느냐가 중요하다.

적어도 성폭력 피해자를 두번 울리거나 사건을 축소,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건 예방과 처리에 관한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성역을 가리지 않고 적용 실천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뤄진게 없다는 점에서 깊은 회개부터 선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범죄에 대해 이렇게 무감각한 것 자체가 죄이고, 교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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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미투, 이제 시작이다

[기독교]변해야 산다 2018. 3. 8. 10:36 Posted by 바람몰이

우리 사회 전분야에서 목소리가 뿜어져 나온다. 학교, 교회라고 예외일까..아니 가장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곳이 아니겠나..

그러나 마음 속 아픔이 올라오는 분은 많은데, 찔리는 분은 없는 것이 현실. 가해자는 늘 자기는 아니라 생각한다.

특히, 좋은 일, 훌륭한 일, 귀한 얘기를 많이 하는 분일 수록 자신도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곤 한다. 그렇게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한채 남의 티끌을 지적한다.

한신과 기장도 예외라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럴 수록 더 대차게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

학교 교육이나 수련활동, 교단, 노회, 교회 내 기관, 가정 모두에서 필요하다. 당장 논의하여 준비, 시행해야 한다. 이미 늦었다.

내 눈에는 고소 당할 만한 언동이 너무 많이 보인다. 연세 있는 선배님들만 그런 것 같나? 후배님들 중에도 위험한 분이 아주 많이 보인다. 젠더폭력은 나이와 상관없이 발생한다.

그나마 한신이나 기장이 타교단보다 좀 나은건 위안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적으로 볼 부분이 아니다. 단 한 건도 있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 가치가 필요한 부분이다.

애초에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예방적 구조를 세팅하고, 혹여 사건이 발생하면 철저하게 처리할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신과 기장의 그것은, 적어도 내 기준에는, 너무나도 허술하고 미약하며, 나이브하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교회 역시 me too, with you운동 전 후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될 것이다. 이미 늦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논의와 정비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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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원..잠시 잊고 있었던 영화가 TV에 나온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만 흘리면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며 보고 말았다.

하울성폭력상담소..내 목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매일같이 학교, 교회 성폭력으로 상처입은 소원이를 만나고 있는데, 이 친구들을 큰 틀에서 안아 주려는 곳이다.

아내는 이곳이 꼭 개소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이 상담소를 통해 여러 소원이를 돕고, 이런 상황자체를 근절시켜가고 싶다.

지난 주에 시청을 다녀왔고, 서류보완 이야기를 들었다. 일련의 모든 과정이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이곳을 통해 건강한 열매가 맺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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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의 이슈 '음란물'

최근 성교육에 있어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음란물’이다. 음란물은 대개 이른바 ‘보통인’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거나 선량한 성도덕 관념과 배치되는 내용의 문서·도서·음반·동영상·영화 등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약간 모호한 측면이 있는 정의이긴 하나 요즘은 야동(야한 동영상), 야사(야한 사진), 야설(야한 소설), 망가나 동인지(야한 만화류) 등을 일컫는 말로 이해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음란물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에 의한 단속과 관련이 깊다. 현행법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이 출연한 음란물을 제작·유포·소지하는 등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수 천만 원의 벌금이나 수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단속에 있어 미성년자의 적발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실례로 며칠 전 있었던 충남경찰의 음란물 단속에서는 단속된 인원 중 약 1/3이 미성년자이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성과학연구소 등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약 70%가 스스로의 의지로 음란물을 찾고 있었고, 이 중 약 20%가량은 준 중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여러 조사에서도 청소년들의 상당수는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인터넷 등을 이용하여 음란물을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음란물을 보는 것을 넘어 직접 제작까지 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경악케 했던 인터넷 음란물 카페를 보라. 이 카페는 수천 명의 회원 수를 자랑하는 곳이었는데, 청소년들이 이른바 ‘몸캠’이란 것을 해서 자신의 알몸을 찍어 보내면 성인 구매자들이 금품이나 선물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 곳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카페의 운영자가 겨우 초등학교 5학년짜리 어린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과 달리 우리나라의 성교육에서는 음란물 중독이나 그 본질에 관한 학습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여전히 형식에 치우친 면이 강하다. 어디 학교뿐이겠는가. 교회에서의 성교육은 사실상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교회 내 성교육이란 담임 목사님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대개의 목사님은 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교육을 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다.

음란물 문제의 심각성

아쉬운 대목이다. 음란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유흥거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음란물은 음란물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그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가 바탕이 된다. 왜곡된 성문화의 단적인 예를 확인할 방법은 아동 관련 음란물 제작과 성폭력의 발생수준인데, 영국의 인터넷 감시재단의 조사를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아동음란물 제작수준은 세계 5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에 업로드 되는 야동의 총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이 중 최소 10% 이상이 아동음란물이다. 또 성범죄 발생률은 세계 2~3위권으로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성문화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 (사) 푸른 아우성 웹툰 21화 '가짜 성, 야동에 속지 마세요'의 한장면
더욱 큰 문제인 것은 음란물의 광범위한 유통의 기저에 물신주의가 깔렸다는 점이다. 음란물 중에서도 이렇게 자극적인 음란물이 광범위하게 생산 및 유통 가능한 것은 이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보호센터가 밝힌 바로는 우리나라의 불법음란물 유통규모는 약 2천억에 육박하는데, 이것을 합법적인 유통구조로 환산하면 약 2조 2천억의 규모가 된다고 한다. 그나마 이것도 통계에 잡힌 것만 하는 이야기이다. 최근의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사례까지 포함하면 그 시장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몸이나 외모도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것은 이미 너무도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돈이면 그 사람의 성(性)마저도 왜곡시킬 수 있고, 특히, 미성년자의 인격이나 인생마저 짓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음란물의 또 다른 문제로는 음란물을 보는 이의 성에 관한 관점을 가학적인 성향으로 변질시키는 데에 있다. 음란물의 구매자들은(주로 남성)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음란물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야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보다 은밀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이에 음란물 제작자 혹은 유통자는 더욱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내용의 음란물을 공급하여 수익의 극대화를 꾀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음란물에는 이른바 ‘강간 통념’이 내재된 것이 증가하게 되었다. 강간 통념의 대표적인 사례는 ‘싫어요’를 ‘좋아요’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대중교통에서 치한이 여성의 몸을 만질 때 이를 싫다고 하던 여성이 더욱 적극적으로 그 남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류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현실에서는 성폭력 범죄로서 처리되는 것이 음란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용인되어 진다.

물론 모든 음란물 관람자가 변태(?)가 되거나 잠재적인 성범죄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양한 연구들이 음란물을 즐기거나 이에 중독될 경우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수배 더 강해지게 되고, 배우자와의 원만한 결혼생활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한 사람 특히, 여성을 그 인격 자체로서 보질 못하고, 성적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내가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객체’로 여기게 하는 가장 은밀하고, 자연스러운 학습의 장이 바로 음란물의 세계이다.

성경은 음란물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미디어란 것 자체가 없던 시절에 기록된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음란물이 갖고 있는 속성들은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필자가 언급한 왜곡된 성문화와 물신주의, 한 사람을 인격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시키는 상황 등은 성경이 줄기차게 경계하고, 질타하는 주제들이다.

예컨대, 구약에서는 음란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과 예언자의 질타가 곳곳에서 등장하고, 사도 바울 역시 난잡한 성교 등에 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물질을 선택할 것인지를 물으며 물신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성을 상대를 지배하는 수단이나 내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방적인 성격의 것이 아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은총의 수단으로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음란물에 관한 입장을 쉽사리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구태여 하나님의 창조질서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미 너무도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음란물이기에, 이를 경계하며 그 본질을 분별해야 하는 필요성은 충분하다. 특히, 우리 아이들은 음란물을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간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 우리 아이들이 음란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분별하고,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음란물 관련 교육은 어떻게?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과 교회에서 음란물 관련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까.

우선, 원론적인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의 성은 건강한 스킨십 속에서 나오는 떨림과 기쁨이라는 육체적 측면, 서로의 심리를 치유하고 안정시키는 심리적 측면, 서로의 영혼을 위한 중보자가 되는 신앙적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성이 될 수 있다. 이것을 필자는 사랑의 3요소라고 일컫곤 하는데, 음란물에는 오직 쾌락만이 있을 뿐 서로에 대한 배려나 사랑의 교감, 신앙적 중보 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공유해 나가면 좋겠다.

둘째, 음란물에 관한 접촉은 그 빈도수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보면 계속 보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습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습관을 바꿔주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예컨대, 정부에서 만들어 제공하는 스마트 보안관 앱이나 기타 다양한 유료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웬만한 사이트 접속이나 부적절한 만남 등이 차단되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각 가정에 있는 컴퓨터를 거실로 옮겨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셋째, 무조건 아이들에게 보지 말라고 하기보다는 열린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 예전처럼 윽박지른다고 말을 듣는 아이들이 아니다. 게다가 이메일만 들어가도 각종 음란물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따라서 이럴 때일수록 아이들 한명 한명의 분별력과 절제력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으며, 그 방식은 부모님과 자녀의 열린 대화가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아빠나 엄마가 사춘기 시절 겪었던 경험담을 공유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보도록 하자. 물론 너무 과도한 수준까지 나갈 필요는 없으나 아이의 고민과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는지를 나눠보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에너지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약간의 음식조절을 시키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가령, 바나나와 각 종 견과류는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차분하게 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어 권장할 만하며, 반대로 과한 육류섭취나 설탕 섭취는 줄여나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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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로 조성되고, 진행중인 신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중교통도 불편하고, 아직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입니다. 아직 초창기라는 거지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새로 입주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상가에 입주하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전철역 바로 옆이자 공원 바로 옆에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처음 저는 무슨 상가가 올라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도 커서 말이지요. 그러나 알고보니 모 지역에서 굉장히 유명한 대형교회가 저희 동네에 건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자기가 이사하는 게 아니였습니다. 이곳에 이른바 '지성전'이라고 하는 '지부'를 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걸 문제삼고자 하는 건 이게 거의 깡패 논리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깡패 논리라 하면 힘이고, 물량이지요. 이 대형교회들은 참으로 대단한 힘과 물량으로 승부합니다. 처음 교회를 열면 엄청난 선물과 음식을 돌립니다. 또 잘 갖춰진 교회 시설로 사람들을 모읍니다. 동네 구석구석 차량 운행이 안되는 곳이 없습니다.

점입가경인 것은 건축의 위치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딱 다른 교회 옆에 건축을 하는지요. 물론 저희 동네에 올라가고 있다는 이 교회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만 그 역시 겨우 500m내외입니다. 저희 집 주변 반경 1km이내에 제가 본 것만도 2개의 입주한 상가교회가 있고, 2개가 추가로 입주할 예정인데 바로 여기에 건물을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대형마트 덕에 동네 슈퍼가 전부 문 닫는 것처럼 동네 교회들은 대형 교회앞에서 힘을 못쓰게 될 것만 같은 형국입니다.

사실 이는 제가 사는 동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 옆 동네는 상당히 각광받는 D신도시입니다. 이곳은 더욱 심한 형편입니다. "00유명교회" 시리즈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유명교회라는 건 서울에 있는 그 유명한 교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 지 신도시 기독교 연합에서 지성전 추방운동까지 벌이는 실정입니다.

저는 교단이 정책적으로 성전건축 또는 관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를 개인 사업장처럼 생각하니 사업확장하듯 자꾸 건물을 올리는 것입니다. 교구별로 한두개 정도 지어서 그 지역에 있는 크리스챤은 모두 그 쪽으로 가게 하자는 거지요.(카톨릭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밀한 활동은 여러 지회를 만들어 그들이 작은 사무실을 통해 일하면 되고 말입니다.

어디든 자본이 힘인 시대임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대형으로 물량으로 몰아치면 끝나는 그런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를 비판하고, 건강한 지역운동을 해야할 교회가 이를 앞장서는 듯하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얘기하는 생명구원의 사업을 위한 확장이라면 더욱 본인들께서 안 나서셔도 됩니다. 내가 아니면 안되는 다는 것처럼 교만한게 없습니다. 그 지역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으시면 그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를 도우시어 지역을 위해 열심으로 섬기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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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회는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 세상적인 것 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세상의 가치나 관념이 들어설 수 없는 거룩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구별되지 않기도 합니다. 교회 역시 세상의 한 구성원이고, 크리스챤의 삶의 무대 역시 세상입니다. 또한 먹고 사는 문제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경제와 신학을 혼동할 우려를 지적합니다(구티에레즈). 그러나 신학과 교회가 경제문제를 외면한다면 이는 먼 세상의 구름 잡는 듯한 힘없는 이야기만 하게 될 뿐입니다. 본래 신학의 성격 자체가 종합학문이상 또한 이 세상의 작은 조화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신 의지가 미쳐야하는 이상 신학과 교회는 경제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의 물신숭배적 성격이나 공산주의의 한계 등을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개혁, 크리스챤의 삶 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격동의 우리 사회 속에서 크리스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균형잡힌 시각으로 그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예컨대 이런 경우를 봅니다.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쌍용차 근로자의 해고였습니다. 물론 시장의 요구대로 근로자 해고의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회생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경영진의 무능력과 수익창출실패의 책임을 힘없는. 십수년씩 일한 근로자만이 모두 져야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경제와 회사사정이 어려워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노동시간이나 정년을 낮추면서라도, 봉급을 낮춰서라도 함께 일자리는 나눠 회생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2000cc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계획이 있다 해봅니다. 그러면 총 구입금액과 한달 유지비 등의 견적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이 때 2000cc가 아닌 한단계 낮은 차량을 구입해 구입금액의 차액과 한달 유지비 차액만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것입니다.

'나뉘어진 밥은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나뉘어진 고난은 모든 사람을 단결시킨다' 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과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출발은 먹을 것을 함께 나누는 데서(유월절) 시작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성경적으로 풀어가며 뭔가 세상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3.저는 신학을 전공했지만 국제경제학 역시 부전공하며 공부하였습니다. 투자까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며 주식상담을 해주기도 합니다. 석박사급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경제공부를 하며 느낀 것은 두가지 입니다. 먹을 것으로는 사람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목회자는 반드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즉, 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양떼를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한국 교회와 목회자가 성장과 소비만을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치우치기도 했고, 나눔이 없는 성장과 생명이 없는 소비는 파멸만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무조건적인 금욕과 절제나 교회의 성장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기왕에 성장할거면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위해 성장하는 것이 좀 더 성경적이지 않냐는 것입니다. 소비를 할거면 기름값이 비싸서 자가용을 안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위해 기쁨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소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균형잡히고, 높아진 소양이 경제위기를 경험하는 우리의 정신없는 이 세상과 성도의 삶을 살리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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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극단적이면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이나 집단은 대화가 통화지 않는 경우가 많아 멀쩡하던 사람도 멀쩡하지 않게 하고,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건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든 자신만의 '진리' 가 있지요? 그리고 이걸 믿는 '신앙' 이란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타협의 문제가 될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해야할 문제가 됩니다. 그래야 내 종교와 내 신념, 내 신앙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정말 내가 믿는 진리가 유일한 진리이고, 생명이라 생각하여 포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과 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해보자 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반드시 해야만한다'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그 종교는 폭력이 되어 버리고, 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맙니다.



어제 H대 신대원에서 부처님 오신 날 축하 현수막이 찢겼다 다시 걸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가 다녔기도 하고, 다시 다닐 예정이기도 하여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 내용보다 흥미로운 게 그 밑에 달린 댓글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댓글이 달린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예, 신학적 입장과 해석이 다른 그래서 교단이 다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 열정과 헌신적인 삶의 자세를 보며 저는 많은 반성을 하고, 제가 꼭 배워야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자신들의 믿음의 방식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크리스챤이고, 핵심적인 믿음 즉, 십자가나 부활, 성령, 삼위일체론 등은 사실상 같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상대를 정죄하려 하는 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꼭 상대를 무섭게 몰아쳐 구석에 몰아넣을 필요까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부모님 없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생선장사를 하시던 조부모님과 살며 나름 재능있었던 태권도와 주먹을 쓰며 자칫 탈선의 길을 걸을뻔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부터는 허리가 부러질정도로(실제 부러졌지요. 그래서 수술도 했다는..ㅠ.ㅜ;;) 지독하게 살아왔습니다.

너무 힘들었지요. 이건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천만원이 드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고..그러면서 학업을 하고..길을 걷다 졸아서 다쳐보지 않고, 밥을 먹다 지쳐 쓰러져 국을 온 몸에 쏟아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저 바람몰이 이 사람. 지금가지 믿음 하나로 한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 하게도 저희 집에서 크리스챤은 저와 할머니 뿐이었습니다. 저희 큰 고모님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마저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십수년간 살아오는 모습을 보며 '야, 너 사는 거 보니까 나도 교회라는 거 한번 다녀봐야겠다' 라고 하십니다. '너 목사 되면 내가 꼭 너희 교회 나가고 싶다' 라고 하십니다.

제가 제 신앙과 제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얻게 되고, 지금까지의 노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좀 쌩뚱맞은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주식투자 해보셨습니까. 주식 격언에 보면 '언제든 갈 종목은 반드시 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락장에 폭락장이라도 결국 좋은 재료가 있고, 모멘텀이 있는 종목은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고, 유일한 진리 즉, 절대성을 담보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절대성은 수많은 상대성 속에 굳이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좀 넓은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이 사회를 사는 구성원이자 내 이웃이고,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그들의 신앙도 가치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하여 내가 믿는 진리가 퇴색하거나 가려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핏대를 세우며 싸우거나, 상대를 지옥불에 던져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어 삶이 변하고, 그 존재가 새로워져 새 삶을 살게 된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에 관심을 갖고, 당신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P.S : 미리 밝혀둡니다만 저는 종교다원주의자 아닙니다. 제가 꼭 이 주제만 다루면 저를 종교 다원주의자라며 몰아세워 저를 정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신앙이 없다니, 예수가 진짜 살아있는지 돌아보라니..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 이 사람 예수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고, 신앙 하나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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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

저는 개신교인이지만 카톨릭의 성인들이 지닌 삶의 자세와 신앙을 존중합니다. 그 중에는 성 발렌티노도 있는 데요. 성 발렌티노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보던 성자라 불리던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를 기념하며 나눔을 실천하게 되었는 데, 그것이 바로 발렌타인 데이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초컬릿 회사의 상술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말 성 발렌티노가 알면 가슴을 칠일입니다.

저는 교회도 그렇다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질이라 함은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던 바로 그 정신을 얘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 글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비교하며 정치, 경제적 측면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가판을 뒤엎었는가

예수는 자신이 직접 교회를 세운 적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철저히 저항하고, 거부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그 고유한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1.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 물자, 돈, 권력이 집중된 곳이었는 데요. 먼저 예를 들어 희생제물용 짐승 판매를 보면요. 이것은 성전 광장에서 활발히 이뤄지곤 했었는 데요,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이러한 가축 판매는 대제사장 가문의 소유였었습니다또한 성전세를 보면요. 모든 유대인은 반드시 지불해야할 것이 바로 성전세인데요. 매년 반세겔 이상을 내야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것 역시 고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하여 관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자금은 바로 제사장 귀족과 그 후손들로 임명된 이들에 의해 관리되는 데요. 이는 결국 제사장 귀족들의 정규적인 수입 및 독점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남아 도는 돈으로 오늘날의 은행 같은 역할까지 수행하게에 이르렀습니다. 

한번 돈 맛을 보니까 끊임없이 세를 강요하고, 이것은 결국 자기 가문끼리 나눠먹고 말이죠..


2.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정결과 부정,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 수호자와 죄인 사이의 차별을 야기시키고, 이러한 차별합법화 시켜준 종교적 토대였습니다. 또한 성전체제 지배자들의 정치 권력의 지지기반이었구요.

이 때,
 영악했던 로마는 바로 이 체제와 권위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위시한 제사장 귀족들을 통하여 팔레스틴 내에서 로마 제국의 식민체제를 한결 수월하게 굳히는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가난하고, 억압받는 유대백성의 자리가 아닌 국가권력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왔다는 것입니다.

3.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믿는다 하여 같은 민족끼리도 싸우고, 잡고, 죽이고..

자, 상황이 이러하니 예수는 성전을
비판하고, 뒤엎을 수 밖에 없었지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물신을 섬기는 것에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때문에 수많은 가난한 유대 민중들이 억압과 착취를 당했기에 예수에게는 매우 중차대 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곳은 기도하는 곳이라 일갈하였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비판 받는 몇 가지 사례

오늘날 교회가 비판 받는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과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해보기 위해서입니다.

1.먼저, 돈과 교회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일단 딱 떠오르는 것이 "헌금강요"이지요. 물론 교회에서는 "강요"란 표현을 싫어합니다만 설교 시간 내내 헌금얘기를 하니 강요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특히, 그 항목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요..


여기서 잠깐 기복신앙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대개 헌금 기도할 때 보면 물질로 더 채워달라 합니다. 십일조 더 많이 내게 해달라 하지요. 그리고는 물질을 많이 내놓으면 이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건지 풍요의 신 맘몬을 믿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되지요. 하나님이 거지인가요.

2.두번째로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때론 국민과 국가가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중재자가 되어야지요. 때로 권력이 자신을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면(독재시절과 같이) 교회는 국민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 때 사탄의 무리 운운한 것이 누구였나요. 지금 용산참사를 보며 발목 잡는다 하는 건 또 누구인가요. 예, 다 기독교인지요. 

관련글을 옆에 링크해두오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

3.그 밖에교회가 사교판이 되고, 부자가 교회세습 하는 것, 교회 사고팔기나 신도 갈취 문제, 끊임 없는 싸움과 분열 등도 있지만 너무 길어질 듯 하니 더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보고, 일부의 문제를 다수일반화 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예,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가 말하는 것은 분명 존재했던 "FACT" 이고, 현재 한국 교회는 이것때문에 매우 많이 그것도 아주 심하게 비판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며

오늘날 한국 교회와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별로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교회에 돈이 모이고, 권력과 결탁해가는 것, 사교판이 되며 끊임 없이 싸우고 분열해가는 것 등까지 너무도 비슷해 보입니다.

이래서는 안되지요. 한국 교회 변해야 합니다. 신도 늘리기, 큰 교회 건물 올리기, 국민에게 사탄 운운하기, 타 종교와 갈등일으키기, 자기들끼리 싸우다 분열하기 등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가 목터지게 외치던 그 거룩한 곳은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내 몸을 치장하기보다 더 어려운 곳에 거하며 나눠주기를 즐겨하고, 이 나라와 민족 세상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곳.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 아무도 쓴소리 하지 못할때 분연히 나설 수 있는 그 곳.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따르는 그 곳. 뭐 이런 게 좀 더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가까운 모습..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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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니는 건 사후 보험 드는 것?

혹시 '보험' 들어놓으셨습니까? 인생을 살다 뜻하지 않은 큰 문제를 대비해 드는 게 바로 보험이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도 보험으로 들고 있다는 얘기 혹시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그러더군요. 한국 교회는 신도를 ‘내세 보장보험’ 소비자로 취급하는 "기업" 이라 말이지요.


많은 크리스챤은 불편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 하지요. 진짜 본향은 따로 있고, 이 세상은 잠깐 스쳐지나가는 곳이라 합니다. 대개 구원이란 것도 내 영혼이 죽은 다음 구원받는 얘기로 설명하곤 하지요. 내세 지향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김경재 목사님(한신대 교수)은 이를 보고 '소승적 기독교'의 전형적 특징이라 설명 하는 데요. 이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회들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과 천국에서의 영생복락이라는 타계신앙이 중심을 이루면서 현세의 공동체가 자유 정의 평화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면서 안타까움을 담아 한국 교회에 쓴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세상과 담을 쌓는 한국 교회

한국 교회가 욕 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나 부정부패 등과 담을 쌓는 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칭찬 받겠지요. 그만큼 참여도 적고, 참여한다 해도 봉사활동 정도일 뿐 사회정의를 세우거나 민주주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과의 연대는 참 보기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요. 분명 목사님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신다는 거지요. 그런데 철거민들과 함께 연대하며 시위라도 하면 배후세력이니 뭐니 하며 비판을 합니다정의를 말씀하시긴 하는 데요. 그런데 
과거 전00 같은 군사독재 정권에 축도를 해주었지요.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한 여러 가치를 얘기하긴 하는 데,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 당하며 죽어 나갈 때 침묵했고, 우상을 경계하라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 살상무기를 핑계로 엄청난 살상을 자행한 미국을 '신이 축복한 나라' 라며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 찬양합니다.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사죄하지를 않지요.

최근에는 우병 파동으로 시끄러운 이 나라에 화해를 중재하기는 커녕 사탄의 무리라 하며 갈등을 조장하고,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 정권의 발목을 잡는다 하며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질을 하였습니다.

이러니 그렇게 욕을 먹는 겁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지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면서 정작 이 사회의 주요 현안에는 등을 돌립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다하며 실제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역사 속 한국 교회의 신앙

제가 너무 안좋은 면만 보고 있어 그런 걸까요? 제 눈이 너무 편향되어 있나요? 아니요. 사실 이 얘기는 인터넷 검색만 한번 해봐도 쫙~나오는 얘기들입니다. 그동안 보기 싫다 안 보고, 듣기 싫다 안 들어왔을 뿐입니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처
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애국, 애족의 종교였고,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이 후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1888년 12월 윤치호의 글을 한번 볼까요.
 
내팔자 임의 됴선사람되여 한심하여도 쓸대 읍고 탄식 통곡하여도 무익하매 아무주록 상뎨의 도우심을 입어 내 평생을 아국 조흔 일의 진심갈녁하여 비록 내생전의넌 내 나라이 나뮈 나라 갓치 번승하넌 것을 못볼지라도 내 마음것 내 나라를 섬기넌 것이 내 직분이라. 상뎨난 나의 약한 것을 도와 주새 내 일생이 야소성국과 내나라의 유용하게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민경배 교수
는 이 글을 보며 "하늘에 올라가 영복을 누리며 기리 살 것을 바라는 종교 본연의 신앙이 여기 있었지만, 결국은 내 나라를 위해 헌신하되 이 신앙이 나라와 겨례에 유용하게 씌어지도록 하겠노라는 다짐이 굳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와볼까요. 1960년 4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하나 발송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 한국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개화 운동, 3.1운동 그리고  일제 항거 운동의 선봉에서 과감히 싸웠던 찬란한 자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간의 집권 정부가 강압 정치를 하고 있는 동안 국민의 진정한 자유와 사회 정의의 엄정한 수호를 위하여 교회로서 하여야 할 마땅한  예명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자책하여 마지아니 한다.


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책도 하고, 결의도 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지요.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상당히 달라 보이지요?

예, 분명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기여한 측면이 있습니다. 허나 그러면 무엇합니까.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일뿐 지금의 것이 아니지요. 지금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개독교"라 불리울 뿐 전혀 이런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좀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

저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좀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왜 자기 혼자서 구원받고, 죄 용서 받으려 합니까. 또 왜 영혼만 구원 받아 죽어서만 천국 가려고 하나요.
 
이럴 거면 굳이 예수가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으며, 성전을 뒤 엎을 까닭이 없지요. 제자들을 세워 파송하고, 성령을 약속할 이유도 없으며, 고통스럽게 뭇 생명을 위해 십자가를 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같이 저 세상 가자하면 될 테니 말이지요. 

부분적이거나 개인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내세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과 고난에서의 구원도 중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강한 자와 약한 자-진보와 보수, 남과 북, 종교간 갈등을 화해하는 중재자로써, 이 사회의 낮고, 어두운 곳에 거하며 정의를 세우고, 전쟁과 폭력에 단호히 저항하는 평화의 사도로써, 물신주의를 거슬러 내세뿐 아니라 현실과 내세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기꺼이 인간의 죄를 지고, 뭇 생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던 고난의 십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에 좀 더 합당한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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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


1.소로스는 "인간 고유의 가치들을 화폐적 가치들이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며 지금의 시대를 위기로 진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제나 월러스틴은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종말적 파국에 이르게 되는 인간, 사회, 역사체제의 변증법적 마비상태를 초래한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장일조 교수(한신대 철학과)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을 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가 이런 어려운 말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 물신주의의 팽배에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음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우린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2.예수는 물질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분명 양식이 필요하고,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물(物)"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은 구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모두가 너희 하나님의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독점하거나 마치 자기의 것인양 해서는 안 된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명하였고, 곳간에 많은 것을 보관해 안심하고, 먹고 마시려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가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생의 깊은 성찰물(物)을 절대화 하지도 말고, 혼자서만 먹으려 하지도 말라는 준엄한 성경의 전통 위에 서있는 예수의 확언입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물질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는 심판이 임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신앙의 교훈은 물론 물질에 얽매여 절대화 해서는 안됨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한국 교회


3.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전통이 사라지는 듯해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자리 잡은 물질, 물신주의거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지친 자들에게 위로나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여기에 편승하며 앞장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그 가격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형교회를 보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크리스챤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화려한 고급 승용차를 들 수도 있겠지요. 저는 "말" 이 아닌 "나귀" 를 타거나 직접 걸어다녔던 예수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은 경차나 준중형 차를 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건지 어떤건지..

교회가 은행의 VIP가 되어서는 무얼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VIP가 되려면 섬김의 VIP,나눔의 VIP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전문적인 신학 얘기를 안 해도 이게 좀 더 교회다운 모습 아닌가요.

예수는 이런 대형교회를 원한다 한 적도 없지요. 크리스챤은 낮은 곳에 거하라 했지 고급 승용차를 타며 VIP 대우나 받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축복을 물질로 받으려 하는 것은 풍요의 신 맘몬이나 바알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들사람처럼 산다하여 영화롭지 못 한 것도, 행복하지 못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움의 영성"이 아닐까


4.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또 있었을까요.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이 물질때문에 힘들어하고, 삶의 위기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여전히 눈 앞에 있는 이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 다른 가치와 이 삶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곳은 종교의 영역 밖에 없습니다. 허나 또 다시 안타깝게도 이 종교마저도 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별히 오늘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에 앞장서는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한국의 기독교 변해야 삽니다. 그래야 비기독교인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지탄이 되고 물의를 빚어서는 기독교도 살 수 없고, 비기독교인도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나 못삽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형교회의 건물 올리기나 신도 채우기가 아닌 "비움의 영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2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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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득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닌 '나만의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일제 치하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기독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 기도, 내 가족 기도 밖에 안 들립니다. 가끔 '우리'가 나올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우리 교회'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썩 편치가 않습니다. 그 내용 중 교회 성장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먼저 성경의 하나님은 특정집단이나 종교, 민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구약 성경의 주요 오해소지 문구 해석과 신약의 주요 강조점을 통해 간략히 밝히고,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후 나름의 결론을 맺으며 글을 진행합니다.  



2.구약이든 신약 시대이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철저하게 공동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특정지파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생명과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2-1)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 으로 주로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여러 지파와 집단이 존재했는 데요. 이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특정 지파나 집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 이나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식의 표현 또한 볼 수 있는 데요. 이것 역시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들의 신앙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특정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전 공동체적 의미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더 짖게 뿜는다 할 수 있겠습니다.

2-2)신약시대에 이르러는 이것이 더욱 확연해지고, 범위가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핵심인 예수유대인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 유대주의, 독선, 아집 등의 배타성을 철저하게 거부함에 이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에서는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을 높이며 그 뜻을 설파했고, 몹쓸 병에 걸려 배척받던 병자를 치유하였습니다. 또한 차별받던 여성의 역할과 그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막과 휘장이 찢어지며 하나님이 특정 종교나 집단,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잘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레오바고에서의 연설을 통해 하나님이 만유 위와 만유 안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전 생명과 우주질서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고백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한국 기독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를 기독교라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기독교'보다 '개독교'라 부르는 걸 더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목사' 는 '먹사 새끼'라고 부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1)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저는 그 원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특별히 한국 기독교인만이 갖고 있는 자기들끼리는 친절에 사랑이 넘치면서 다른 종교나 세상과는 분리된 듯한 또한 다른 종교나 생각을 갖지 않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 폐쇄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종교든 그 폐쇄성과 배타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종교만의 고유한 '신앙'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신앙을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고, 이것이 신앙을 갖지 않는 다른 이에게는 '폭력'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선교하는 것 좋습니다. 어떤 종교든 선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걸 끊임없이 강요하나요. 왜 지옥불 얘기를 하며 협박을 하나요. 자신의 선행과 사랑, 변화된 삶을 통해 '아,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변하는 구나. 이런 힘든 상황도 살아가는 구나.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런걸까' 라는 말이 나오도록 선교할 수는 없는걸까요.

3-2)  굳이 선교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필요 이상의 이 폐쇄성과 배타성이 사회적으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을 넘어선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일반인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을 넘어섰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 어떤 종교든 그 종교만의 특정 신앙의 영역이 있고,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그걸 신앙이라 하는 거고, 이걸 고백하는 이가 그 종교의 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것에 함몰된 나머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영역은 완전히 배제되어버렸고, 사회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멀쩡한 절에가서 불을 지르고, 학교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 목을 벱니까. 왜 이웃에게 저 사람이 나를 스토킹한다는 말이 나오게 합니까.

3-3) 어떤 분들은 제 가슴속에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시나 돌아보라 하던 데요. 그래서일까요. 저같은 사람은 지하철이나 옆집 앞에서 시끄럽게 확성기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그 시간에 노숙인과 독거노인, 외국인 근로자, 장애우 등을 섬기는 것이. 용산 참사현장을 찾아 함께 연대하고, 싸이코패쓰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라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것더 큰 선교의 효과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옳고, 사회적으로도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정말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4.어제 아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곳을 잠시 들를 일이 있었는 데요. 그 상가 앞을 보니 "세계정복 00제자" 란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내건 광고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세계 전체에 교회를 세우고, 모든 이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선교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지요.

한국 기독교는 좀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존재라는 철학용어가 있지요. 어떤 인간이든 그 시대와 문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반드시 자신들이 얘기하는 것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비롯된 폐쇄성과 배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신들의 전략적으로도 자충수를 두고 있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공격성과 배타성으로는 이 사회의 화해자가 될 수도 평화의 사도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마당에 그렇게 주장하는 선교가 될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를 존중하고, 말 그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섬김의 삶을 살 때. 이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단호히 저항하고, 끊임없이 팽배하는 물신주의에 제동을 걸며 뭔가 다른 삶을 살 때.

그 때야 비로소 교회는 교회답다 인정받고, 크리스챤은 뭔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며,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하는 기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1.이 글은 제가 가져왔던 나름의 생각을 총 3회 기획하여 연재할 글의 1편입니다. 앞으로 3회 동안 저는 모두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전문신학영역까지 들어가지 않고,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며 글을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2.가끔 오해하는 분이 계시는 데요, 저는 특정교단 등 집단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위인도 못 됩니다.

3.상대에게 험한 말을 하는 등의 악플은 사전공지 없이 삭제처리 하고자 하오니 양해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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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마다 계속되는 제사 갈등>

해마다 명절이 되면 기쁨과 갈등이 공존하지요. 가족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견해차가 존재하여 갈등도 일어납니다. 저는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종교적 신념에 의한 '제사갈등' 이라 봅니다. 하여 오늘은 이 얘기 좀 해볼까 하는 데요.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저희 집 얘기를 좀 하면서 풀어가보고자 합니다.


갈등의 해결 열쇠

저희 집은 3년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특히, 제 아내는 장로에서 목회자가 되신 장인 어른 밑에서 자란 이른바 '모태신앙' 의 소유자입니다. 반면 저희 집안 대부분 구성원은 모두 종교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분들은 상당히 고지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님 제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갈등이 상당했겠지요. 고지식파와 신학전공자, 권사님까지 있는 곳이니 말이죠. 하지만 저희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지금까지 넘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해"와 "유연성"그 핵심이었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게 왜 우상숭배인가?

저는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H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저희 학교는 '학문과 경건' 이라는 구호아래 <진리, 자유, 사랑>을 전하며 사회참여를 매우 강조하고, 상당히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저는 이 곳에서 종교 상호간의 열린 자세에 대한 것을 배웠습니다. 이 때 느낀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칫 종교가 그 열린 자세를 잃을 경우 강력한 칼날이 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상호이해가 -특히, 기독교인-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숭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우상이란 단순히 타종교나 조형물이 아닌 내 자신에 스며든 교만과 배타성입니다. 또한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물질과 풍요의 맹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가리는 이념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가 우상숭배와 등치 되지 않음을 알았고, 집안 내에서라도 함부로 내세워지는 배타적인 자세는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욕보이는 무서운 성격을 지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카톨릭은 지나 62년부터 제사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동양의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현재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특정형식 고집보다 그 핵심정신을 지키는 유연함이 필요

집안 일의 주축이 되시는 작은 아버님의 입장은 이랬습니다. 먼저, 저와 아내, 할머님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저희가 굳이 유교양식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이해해주셨고, 그 양식 역시 기독교의 추도예배라 한들 상관 없다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차피 제사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제사는 오래 전 무속신앙 시절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역시 유교 이념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이 후 입니다. 물고기 머리와 과일 색을 맞추는 것 같은 세세한 항목 역시 유교의 우주론에 입각해 설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왜 유교에서 이렇게 제사를 강조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효"의 가치를 통해 나라의 근간인 가정을 바로 세움에 그 첫째 목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유교 이념에 따른 것입니다. 두번째로 부모를 잊지 않음이 사람이 가야할 길 중 하나임을 확인함이 있고, 세번째로 전쟁, 기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다시 하나로 모이게 하며,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려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 어른들은 바로 이것을 기억해 주셨던 것이지요. 따라서 제사의 양식이 기독교의 예배이든 아니든 먼저 가족이 모이고, 부모를 기린다는 핵심 정신을 지킴이 중요하다 여겼던 겁니다. 

자, 이렇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제사 본래의 의미를 기억하니 일정부분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자연스레 이 문제로 인한 갈등도 사라질 수 있었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내 부모를 기리는 문제 때문에 가족끼리 다투고, 내가 믿는 예수 이름이 욕보이게 되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조절하며 풀어나갈 것인가? (필자의 사례)

그럼 여기서 저희 집은 어떻게 명절 제사를 지내는 지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범은 아니고, 각 집안마다 차이가 있으니 참고만 하시면 좋겠습니다.

1)먼저, 기독신앙이 없는 다른 분들의 마음은 음식을 꼭 차려야 한다 여기십니다. 예, 그러시라고 합니다. 이 음식이 결국 명절 음식이 됩니다. 
2)상을 차리면 제가 주도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제가 설교도 합니다. (일반 크리스챤 가정은 교회요람에 나와있는 양식을 따르면 됩니다)

3)설교가 끝나면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싶어하는 분이 나와 진행합니다.  

4)끝으로 마무리 기도를 하고, 모든 순서를 마친 후 함께 식사를 하지요. 식사를 하며 화목하고, 재미있게 교제를 나누면 됩니다. 
  
정리하며

이번 설은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뒤숭숭 하여 별로 흥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간의 화합과 격려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명절은 서로 싸우려 모인 것이 아니지요. 이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은 절충하고,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큼은 받아주는 게 가족이겠지요.

아마 돌아가신 어른들이나 하나님도 이런 화목한 모습을 더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덧1)익명을 이용 험한 말씀 하시는 분이 좀 계신 듯 하여 댓글권한을 로그인 후 가능으로 바꿉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지혜를 나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덧2) 저는 신학전공을 한 저를 친지 어른들께서 존중해주시고, 배려해주시어 축문 읽는 것을 대신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조해 주시구요. 일반 가정에서는 가족이 돌아가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누거나 서로를 위해 덕담하는 시간으로 가져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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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수준 낮은 목회자이다.

[기독교]변해야 산다 2008. 12. 10. 00:37 Posted by 바람몰이


긴급출동 SOS 를 보니 신도를 때리는 집사가 나온다. 아..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무튼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지 이래서는 곤란하다.(귀신 축출에 대해서는 추후 시간 날 때 한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도에게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1)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2)더 근본적으로 이것이 한국 교회 목회자의 낮은 수준에 기인한다는 데 있다.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은 것은 성경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문자 그대로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삶의 푯대와 같다. 수많은 선지자와 사도가 영감을 받아 쓴 것도 맞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인간 프린터가 되어 입력된 것을 그대로 출력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성경은 특별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저자가 신적영감을 받고, 그가 살던 상황과 인간의 한계 안에서 쓰여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면 성경 본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히려 해치는 경우가 생겨 이는 결코 바람직하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 마저 그대로 믿게 되는 꼴이니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너무 믿는 경향이 강하다. 도대체가 그 역사적 배경과 문맥, 비슷한 글 양식, 사회적 의미 등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목회자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가르칠 때 보면 문자 그대로 믿으라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교인의 신앙만 인도할 뿐 그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도록 신학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니 여기서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목회자 자신이 별로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실 우리 나라 목회자는 참으로 허술한 양성체계를 갖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주요 교단의 정식 코스는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나라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학교에 가고, 일년에 책 몇 권 읽고 레포트를 내면 목회자 안수를 주거나,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신학원에서 겨우 몇 달 출석하고 목사 안수를 주는 경우 역시 존재하고 있다.

수년에 걸쳐 다양한 분야를 수도해야 할 학문을 이렇게 단기간에 이수하고 끝내니, 여기를 나온 목회자에게- 물론 믿음 하나는 존경스러울 만큼 신실한 경우가 많지만-수준 높은 사회 인식과 성경 이해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늘의 은총을 맛보기 위함이고, 세상을 섬기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 교인을 예수의 모범따라 성숙한 경지에 오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나 들으며 예수를 욕보이고, 교인 한명 한명을 맹목적인 신앙에 빠지게 해버린다면 이미 그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목회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학식과 균형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수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해를 얘기하고, 평화와 정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교인의 믿음 뿐 아니라 삶까지 연결되는 전반적인 일상의 신앙을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를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나오고,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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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나 부처님이 대학 합격 시켜주는 게 아니다. 부모님이 100일 새벽기도를 한다해도. 삼천번 절을 한다 해도. 기준점에 미달이면 불합격이고, 이상이면 합격하는 게 맞다. 대학 합격 기도회 등을 주최하는 종교시설을 보면 참으로 기가찰 노릇이다.

 필자는 지금 중3, 고3 수험생을 둔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마음을 이용해 먹으려는 그 종교 지도자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자식의 합격만을 위해 기도하는 이기적인 신앙을 가르친 것은 그 부모의 문제라기 보다 지도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교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주고, 개인 내면의 수련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다. 때론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거슬러 그 뜻을 전하기도 하여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제시하는 종교만이 할 수 있는 영역과 책임이 있다. 특별히 소위 말하는 고등종교는 두말 할 것도 없거니와 그 흐름을 주도하는 지도자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자녀가 시험을 잘 치뤘으면 하는 부모 맘을 헤아렸듯이 기도조차 해줄 이가 없는 학생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수험생이 입시지옥에 힘들어 하는 걸 알면 이 나라의 입시제도를 위해서도 기도하게 해야 하지 않는가. 정직하게 땀흘린 후 나온 결과를 겸허히 인정하고, 승복할 줄 아는 겸손함을 달라 기도하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번 기회에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해마다 지금쯤 되면 수능이 끝나고, 면접과 논술이 남은 수능 직전 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시기가 된다. 그러니 아예 이 시기는 가난해서 대학진학을 포기한 학생을 위한 특별 기도회 기간으로 잡아보는 게 어떻겠는가? 대학합격 감사헌금을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합격하고도 꿈을 접어야만 하는 학생을 위한 특별헌금으로 전환해 보는 건 어떻겠는가?

 평소 각 종교가 가르치던 섬김, 나눔, 중생 등의 가치와도 잘 맞고, 개인 자신도 보람이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훈훈한 미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 역시 평소 강론하는 본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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